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80)화 (282/319)

*       *       *

“누나!”

초조한 얼굴로 온실 입구를 배회하던 베니가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예주를 보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재 가루를 씻어내느라 아직 덜 마른 머리끝을 부여잡으며 그녀는 대뜸 물었다. 

“혹시 쟈니아 봤어?”

“대사제님? 아니.”

길이 엇갈린 건지, 아니면 아직도 족장의 방에 있는 건지 다행히 이예주는 온실까지 오는 동안 쟈니아와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베니의 답으로 그녀가 아직 족장의 방에서 내려오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에 족장의 방에서 느꼈던 기묘한 적막을 떠올리던 이예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천장 위에서 엿듣던 것을 놈들이 눈치 챘을까 싶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온실 문을 닫은 베니가 안쪽으로 그녀를 서둘러 이끌었다. 

토마스의 소식을 한시 빨리 듣고 싶은 듯했다.

“언니!”

매번 토마스와 함께했던 작은 다기들을 홀로 만지작거리고 있던 리즈가 이예주를 환히 반겼다. 

마주 인사를 해주며 이예주는 제법 익숙하게 그 앞에 앉았다. 

베니가 따라 앉으며 다급히 물었다. 

“확인 해봤어, 누나?”

이예주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족장이랑 쟈니아가 있어서 직접 확인은 못했어.”

“토마스 오빠는, 죽었어?”

아직 어려서 그런지 이예주와 제 오빠가 대화할 때는 웬만해선 끼어들지 않던 리즈가 불쑥 울먹이는 소리를 내었다. 

“아니면, 아니면 이제 쓸모가 없어져서 장벽 밖으로 쫓겨난 거야?”

“아니야. 안 죽었어. 족장이 잠깐 심부름 보냈대.”

이예주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는 리즈를 얼른 달랬다. 

과연 베니의 말처럼 매일 같이 싸우면서도 리즈는 토마스와 정이 많이 든 것 같았다. 

하긴. 다 쫓겨나고 남은 세명인데 정이 들지 않을 리가. 

리즈는 가지고 놀던 찻잔을 내버리고 아기처럼 꼼지럭거리며 이예주의 품을 파고들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이예주는 잘 먹지 못해 원래 나이 때 보다 현저히 작은 아이를 기꺼이 안아주었다. 

토마스가 없어 불안해하는 리즈의 등을 다독이며 그녀는 다시 베니에게 물었다. 

“근데 여기 혹시 지하로 가는 길이 있어?”

“지하? 아니…… 신전은 지상에 지어졌어.”

그 말에 이예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베니의 말은 틀림없었다. 

계단은 위로 올라가는 것뿐이었고, 브레든을 찾는답시고 신전을 며칠간 구석구석 뒤졌지만 지하로 진입할 수 있는 듯한 곳은 없었다.

“왜 그래, 누나?”

“지하가 있는 것 같아. 어쩌면 그곳에 토마스가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하 같은 건…….”

심각한 얼굴로 고민 하던 베니가 문득 멈칫했다. 

“짐작 가는 곳 있어?”

“지하는 없지만, 지하까지 깊이 구덩이가 파진 곳은 있어.”

“어디?”

“잊혀 진 신전이라고, 누나도 저번에 순록 따라 갔던 곳…….”

“아.”

다 무너져서 터만 남은 곳.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장소가 떠올렸다. 

그곳은 까마득한 천 년 전 인간들이 검은 파편의 실존을 확인하기 위해 내핵까지 파헤친 구덩이가 있었다. 

모든 일의 근원지. 

멸망의 시작.

“땅이 파져 있는 곳은 거기뿐이니까, 그쪽이랑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베니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의 추측처럼 지금으로써는 거기 밖에 딱히 지하를 연상할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곳은 어딘가의 지하의 장소와 이어져 있다기보다는 빠지면 그대로 까마득한 무저갱으로 떨어져 뼈도 못 추리고 죽을 만큼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그 근처에 구덩이 말고 또 뭐가 있었지? 

심각한 얼굴로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던 중 불쑥 며칠 전의 기억이 그녀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철수와 다리족 인간이 눈족들이 만든 검은 무기들을 한가득 들고 그 무너진 신전으로 가는 숲길에서 걸어 나왔었다. 

게다가 신전 안에는 무기를 만드는 험한 일을 할 만한 공간이 존재 하지 않았다.

그녀는 확신했다. 

대장간이든, 지하든. 그곳에 뭔가 있다고. 

“너희 아버지는 대장장이 일을 하실 때 신전 어디에서 일하셨어?”

“그런 건 알려주지 않으셨어.”

베니가 시무룩하게 답했다.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아 희망에 부풀어 있던 이예주의 얼굴도 덩달아 울적해졌다. 

온실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하나를 찾으면 하나가, 또 하나를 찾으면 다시 또 다른 문제가 튀어나와 해답을 방해하는 것 같았다. 

미궁 속에 갇힌 것 같았다. 

답은 람이 자신을 찾아오기를 손 놓고 기다리는 것뿐인가. 

하지만 이예주는 그의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눈족들 중에 살아 있는 인간들은 거의 없다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로 인해 람이 눈족을 몰살 시킬 수 없는 것만은 분명 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한없이 가라앉은 기분으로 땅만 파던 이예주에게 베니가 불쑥 말했다. 

“신전 뒷숲은 원래 다들 얼씬도 하지 않는 곳으로 유명해. 그리고 항상 철문이 잠겨 있었어. 제사가 가까워질 때마다 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돌아서 가는 길을 철문으로 폐쇄했다고 그랬거든, 아버지가.”

“귀신이 나온댔어!”

이예주의 품에서 쏙 고개를 뺀 리즈가 두 손을 ‘어흥!’하고 치켜들었다. 

그녀는 귀여운 리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피식 웃었다.

“귀신?”

“응. 신전에 온 아이들은 그래서 그쪽으로 얼씬도 하지 않았어. 그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 온실에 있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애들이 있었는걸. 정말로 밤마다 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그런데 누나는…….”

베니는 이예주가 처음 신전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간밤 새 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었다. 베니와 리즈 또한 똑독히 들었다. 

거센 바람결에 실려 왔던 소리를. 

그것은 종소리 같기도 하고, 유리를 망치로 깨부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내 잠겨 있던 철문이 열려 있었다. 

곧 쫓겨날 생각에 암울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아이들은 열린 철문을 보고 단숨에 겁에 질렸다. 

식사 시간 때에 밥을 주던 사제를 붙잡고 몇몇 아이들이 온실에 있기 무섭다고 호소 했지만 그들의 처지가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신전에 끌려 온 후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낸 적 없던 아이들은 모처럼 뭉쳐 앉아 어색하게나마 놀이를 했다. 

최대한 그쪽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나타난 낯선 여자가 말릴 새도 없이 당당히 숲으로 가버리는 것을 보고 얼마나 황당했던가. 

그녀가 떠난 후 아이들은 너도나도 그녀가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오들오들 떨며 떠들어댔다. 

그러나 느지막이 그녀가 되돌아왔을 때, 베니는 그 누구보다 안심 할 수 있었다. 

잊혀진 신전에 가서도 그녀는 죽지 않고 돌아왔고, 귀신을 본 사람 같지도 않았다. 결국 그쪽에 귀신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알려줬던 탈출로가…… 그 쪽에 있어.”

베니는 결국 마지막까지 숨겨왔던 남매의 보루를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과거를 보는 능력이 발현한 리즈를 항상 걱정했다. 

언제나 베니에게 리즈의 능력을 숨겨야 한다고 당부했고, 혹시라도 자신이 잘못되어 남매가 신전으로 끌려오면 뒷숲을 통해 탈출하라고 일찍이 언질 해 두었다.

베니는 아버지가 왜 능력의 발현을 숨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능력이 있으면, 그것도 뛰어난 능력이면 좋은 것이 아닌가? 

잘하면 리즈는 커서 장로가 되어 굶을 걱정 없이 떵떵거리며 살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니는 아버지가 우려했던 상황에 직면하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능력이 있는 남매가 남게 된 이유. 

그리고 제사 때나 일을 하러 신전에 갔던 대장장이인 아버지가 잠겨 있는 뒷숲을 어떻게 드나든 건지. 

“그리고, 어쩌면 잊혀진 신전에 대장간이 있을지도 몰라.”

“다시 확인해 봐야겠네.”

이예주는 가벼운 리즈를 들어 조심스럽게 풀밭 위에 내려 놓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니의 말을 들으니 새삼 잊고 있었던 무너진 신전 터의 모습이 떠올랐다. 

으스스한 터의 구석, 그녀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건물이 하나 남아 있었다. 

“같이 가.”

베니가 그녀를 따라 벌떡 일어났다. 

이예주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살짝 눌렀다.

“리즈랑 여기 있어.”

“어차피 한 번쯤은 가봐야 돼, 누나. 나도 아버지에게 말만 들었던 거라…….”

베니는 완강했다. 멀쩡히 돌아온 이예주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실은 그동안 겁이 나서 차마 탈출로를 확인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라면 들어갈 만 할 것 같았다. 

그의 설득이 먹힌 건지 이예주는 리즈를 돌아보며 말했다.

“방에 들어가서 놀고 있어, 리즈.”

“빨리 와야 돼. 토마스도 없어서 리즈 무서워, 언니.”

아침에 제 오빠가 예쁘게 땋아준 노란색 양 갈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이예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리즈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총총총 온실 입구 쪽으로 뛰어갔다. 

남은 베니와 이예주는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온실을 나오자 눈가루가 섞인 칼바람이 얼굴을 덮쳤다. 

묵묵히 로브 앞섶을 추스르며 그들은 철문을 향했다. 

열려 있던 첫날과는 달리, 철문은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어떡하지, 누나? 의자라도 가져 올까?”

살벌하게 날이 선 쇠창살 울타리 끝을 흘끗 올려다보며 이예주는 고개를 저었다. 

의자를 가져오면 넘을 수 있을지 언정, 자칫 발이라도 미끄러진다면 그대로 꼬챙이에 꿰인 고기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커다랗고 투박한 모양새의 자물쇠를 유심히 살펴보던 그녀는 로브 안주머니 손을 집어넣었다. 

낡은 가죽 조각과 차가운 쇳조각이 손 끝에 닿았다. 

이예주는 아무렇게나 엉겨있는 끈들을 피해 그것을 주머니 안에서 끄집어냈다. 

비행선에서 환풍구를 땄을 때 이후로 오래간만에 보는 만능열쇠였다. 

“웬 열쇠?”

이예주의 시커머튀튀한 열쇠를 보며 베니가 물었다. 

그녀는 말로 궁금증을 풀어주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철컥- 헤드보다 훨씬 헐렁한 열쇠 구멍에 열쇠를 끼워 넣자마자 거짓말처럼 자물쇠가 풀렸다. 

베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그거 뭐야, 누나?”

“내 보루. 이거 아무한테나 안보여주는 거야.”

“최고다.”

잠금이 풀린 자물쇠를 고리에서 빼내며 이예주는 너스레를 떨었다. 

베니가 아이답게 환호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녀는 저보다 한참 어린 아이에게 뽐내듯 열쇠고리를 잡고 한참을 짤깍짤깍 열쇠를 흔들어 보였다. 

쇼가 끝나고, 끼익- 철문이 열렸다.

“가자.”

그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귀신 나오는 숲길에 첫발을 내디뎠다. 

*       *       *

그 시각 눈족 신전 앞. 남자가 신전 앞마당에 올라섰다. 

족장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가 당도했음에도 신전은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싸늘한 칼바람이 그와 신전 사이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손님을 맞이하는 태도가 형편없군.”

텅 빈 신전을 피처럼 붉은 눈동자로 훑으며 람이 중얼거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이곳에서 생생히 느껴지는 생명의 기척은 몇 안 되었다.

그의 작은 연인과 몇몇 어린 인간들뿐. 

이예주가 신전에 있지 않음을 확인한 그는 눈을 뜨고 진득하게 웃었다. 

모처럼 다행이었다. 

이제 걱정하지 않고 감히 그의 것을 훔쳐간 것들을 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순 그의 검붉은 눈동자에가 번뜩였다. 

그리고 그 순간. 

쿠룽, 쿠우우웅―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신전은 약한 진동에도 석고 조각들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쿵. 

꽤 큼지막한 조각들이 벽에서 떨어져 나와 신전 바닥을 부셨다.

그럼에도 기어 나오는 인간들이 없자 람의 눈이 더욱 차갑게 침잠했다. 

그에 따라 진동의 강도 또한 더욱 거세졌다. 

숫제 거대한 신전 건물이 양 옆으로 힘 없이 흔들흔들 거리기까지 했다.

쩌적- 

석고로 이루어진 벽과 기둥에 쉽게 금이 갔다. 

이미 한참 전에 금이 가 있던 몇몇 낙후된 기둥 몇 개가 기어이 버티지 못하고 웅장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신전의 입구 기둥 또한 마찬가지였다. 

공교롭게도 이예주가 장난처럼 내뱉었던 4개의 기둥이 와르르 넘어졌다. 

8개의 기둥 중 4개가 사라지자 입구가 휑해졌다. 

신전 내부가 훤히 보였다. 

부서진 기둥과 벽의 잔해들로 인해 신전 안은 짧은 사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그 지경에 이르러서야 신전 안에 있던 눈족 인간들이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왔다.

람은 인간 무리를 헤치고 눈족 족장이 선두에 섰을 무렵 가까스로 몸체를 뒤척이는 것을 멈췄다.

“거, 검은 파편님.”

눈족 족장이 헐레벌떡 람의 앞에 당도했다. 

깊은 잠에 빠져있다 깨어난 듯 그의 눈이 주름 사이에서도 한 눈에 보일만큼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족장이 람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 꼴을 보며 람이 차게 조소했다.

“쥐새끼처럼 숲으로 기어들어가서 잘도 내걸 훔쳐갔던데.”

“동쪽 대륙이 붕괴 된 후 여러 번 대사제를 보내 대면 요청을 했지만 아무런 응답을 해주시지 않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조금 과격한 방법이었지만 검은 파편님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모셔 올 수밖에 없었지요.”

“…….”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신전을 찾아주시지 않으셨을 거 아닙니까.”

당연한 소리였다. 

대꾸할 가치조차 없어 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눈족 족장은 개의치 않고 돌아서며 그를 안내했다.

“누추하지만 안으로 드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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