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79)화 (281/319)

그냥 들어도 수상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베니 남매와는 다르게 토마스란 애랑 딱히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던 것도 아니었다. 

베니 남매도 지금 어떻게 정을 떼야 하나 골치가 아픈데. 

게다가 아직 브레든의 털 끝 하나 보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예주는 관심 끄고 싶은 생각이 컸다. 

그러나 베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누나, 그래서 말인데. 나 저번처럼 다시 족장님의 방에 갔다 올 테니까 리즈좀 봐주면 안 돼?”

“왜?”

“……응?”

“중요한 애 아니잖아.”

이예주는 잠을 제대로 못 자 벌겋게 충혈 된 눈을 비비며 피곤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족장한테 리즈 이야기 팔아먹고 남게 된 앤데…… 게다가 계속 너희 감시했잖아.” 

매번 리즈도 괴롭히고. 못된 애잖아.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못돼먹은 것을 알았지만……. 

베니는 이예주의 말에 충격을 먹은 듯 눈을 크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치만…… 토마스는 족장님께 우리를 고자질 하지 않았어, 누나.”

“……뭐?”

“족장님한테 리즈 얘기를 한 건 맞지만. 그래도 그 이후로는 곧이곧대로 고자질 한 적 없어. 고자질을 했다면 우리가 브레든을 찾느라 신전을 뒤지고 다니는 것을 족장님이 벌써 알았을 거야.” 

듣고 보니 베니의 말이 맞았다. 

토마스가 일찍이 고자질했다면 족장이든 쟈니아든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도 못 찾을 것을 확신해서 내버려 두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하지만 며칠 전 여신상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눈족 족장은 이예주가 베니와 함께 신전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을 알고 있는 기색이 전혀 아니었다.

“토마스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애야. 장난이 심하긴 해도 그렇게 그렇게까지 못되지 않았고, 매번 나대신 리즈를 챙겨주기도 했고…….”

“…….”

“그리고 그렇게라도 같이 살아남았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건데, 누나.”

베니가 이예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남을 팔아먹어서라도, 살아남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그러고 보면 베니는 리즈의 능력이 알려지고 난 후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뿐 딱히 토마스를 멀리하거나 경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 대신 리즈를 보살피도록 붙여 주면 붙여두었지.

이예주는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내려가. 내가 확인하고 올게.”

“어? 누, 누나가? 아니야, 내가 할 수…….”

“곧 밥 먹어야 하잖아.”

애석하게도 베니 남매의 감시인은 토마스뿐이 아니었다. 

신전 내에서 마주치는 모든 눈족들이 이예주와 그들을 예의주시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식사 때나 신전 관리를 하는 때 등 마주치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밥 먹고 리즈 잘 챙기고 있어. 어쩌면 곧 여기서 나가야 할지도 몰라.”

이예주는 망설이는 베니에게 굳은 얼굴로 신신당부했다.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남매를 감시할 쓰임새로 남겨둔 아이를 폐기한다면, 그 이유가 뭐겠는가.

“아, 알았어.” 

탈출을 암시하는 그녀의 말에 베니가 덩달아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다녀와, 누나.”

걱정이 한가득 담긴 인사와 함께 베니는 방을 나갔다. 

방문을 꼭 닫은 후 이예주는 서둘러 옷장으로 다가섰다. 저번 굴뚝 탐방 이후 잔뜩 더러워져 방 밖을 나갈 때를 제외하곤 항상 처박아 두는 제 까만 로브와 여분의 베개를 들추자 그 밑에 숨겨둔 더러워진 담요가 드러났다. 

이걸 다시 둘러매리라곤 생각도 안했는데.

이예주는 서둘러 담요를 둘러메 턱밑에 묶었다.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방지하고 추위로부터 조금이라도 방어하기 위해서였지만 더러운 담요를 묶어 쓴 제 모양새는 거렁뱅이가 따로 없었다.

밤새 불을 피워둔 탓에 벽난로 안은 아직 후끈 했다. 

시커먼 재 사이로 꺼지지 않은 불씨가 아직도 굴뚝 안으로 매케한 연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팔자에도 없는 짓거리야, 제기랄.”

많이 뜨거운지 확인하기 위해 굴뚝 안쪽에 손을 쑥 집어넣어 더듬던 이예주는 곧 재투성이가 될 제 신세를 떠올리며 상스러운 욕설을 지껄였다. 

망할 놈의 오지랖. 

잘 알지도 못하는 애가 있나 확인하려고 이런 개고생을 사서 하는 자신이 욕 나올 만큼 한심했다.

“난 분명 오지랖 때문에 뒤질 거야…….”

하지만 어른인 저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훨씬 깊은 마음을 가진 베니의 두 눈동자를 마주하자니 모른 척하자고 마음먹었던 자신이 그렇게 부끄럽게 느껴질 수 없었다. 

어차피 구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족장의 방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것뿐이니까…….

아궁이에서 가까운 곳을 제외하곤 그럭저럭 손을 짚을 수 있을 만큼의 온도란 것을 확인한 이예주는,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장작을 피해 최대한 가장자리를 밟으며 벽난로 안에 몸을 쑤셔 넣었다. 

벌써 해가 뜨려는 듯 커튼이 쳐진 테라스 창밖으로 희끄무레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서둘러 다녀와야겠다고 다짐하며 이예주는 튀어나온 벽돌 틈에 첫 발을 올렸다.

“헉, 허억…….”

한 번 해 보았다고, 굴뚝을 오르는 속도가 전에 일전에 비해 훨씬 빨랐다. 

하지만 먼저 시범을 보이며 잡을 곳을 알려주던 베니가 없어서일까. 

엄한 곳을 잡느라 몸에 훨씬 많은 힘이 들었다. 

갖은 용을 쓰며 이예주는 마침내 천장 위에 올랐다. 

뚫려 있는 틈새로 서늘한 바람이 숭숭 들어와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를 차갑게 식혔다. 

고지에 올랐다는 생각이 들자 잔뜩 힘이 들어갔던 다리부터 풀썩 풀렸다. 당장이라도 자빠져 쉬고 싶었지만 이예주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고지는커녕 족장의 방이 있는 정 반대편에 다다르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기 때문이다.

천장을 떠받치는 구조물을 피해 그녀는 빠르게 천장을 가로질렀다. 

베니와 함께 갔을 때는 잘 몰랐는데 부식된 석고 위에 얼기설기 덧댄 조악한 나무판자들을 피해 걷는 것은 꽤나 번거로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가로지르고 있는 천장 바로 아래는 1층까지 뻥 뚫려 있는 허공이었다. 

설마 부서지지는 않겠지. 바닥에 나 있는 실금들과 굴러다니는 석고 조각들을 보자니 괜한 걱정이 치밀어 올랐다. 

이예주는 쓸모없는 애써 밀어내며 마침내 드넓은 모두 가로질렀다.

족장의 방과 연결 되어 있는 굴뚝 입구에 다가선 그녀는 제 방 굴뚝을 오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행동에 조심을 가했다. 

족장이 방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천장 위를 오른 상태였다. 

이대로 내려갔다가 그 늙은이가 시퍼렇게 눈뜨고 있으면 어떡할지, 상상만 해도 눈앞이 깜깜해졌다.

“하…….”

경황이 없어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에 부딪힌 이예주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대뽀 같은 년.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봤어야 하는데. 기껏 굴뚝을 기어 오른 것이 수포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어떡하지.”

오르는 것보다야 내려가는 것이 훨씬 빠르겠지만, 아무 소리 없이 쥐새끼처럼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족장이 방에 있다, 없다 로 확률은 반반이겠지만 해가 막 뜬 이른 아침이니 방에 있는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전에 아이들을 내쫓던 날 꼭두새벽부터 일어난 족장을 생각하면 없을 수도 있지만. 본디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잠이 없어진다고 하지 않은가…….

“하…….”

확률이고 뭐고, 한 마디로 도박인 것이다. 

토마슨지 토마톤지 모를 놈이 있는지 확인은 해야 하는데. 

하지만 족장이 아래 떡하니 있으면 그것만큼 낭패도 없을 텐데. 

차라리 베니였다면 소리 없이 내려가는 것이 가능 했을지 모른다. 

무슨 객기로 제가 올라와서. 그렇게 울적한 얼굴로 시커먼 굴뚝을 내려다보며 고뇌할 적이었다.

“그…… 했…….”

굴뚝 속에서 작은 소음들이 올라왔다. 

“어…….”

이예주는 어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부리나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벽난로에서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지 소리가 선명하지 않고 드문드문 끊겨서 들렸다. 

그녀는 굴뚝의 입구를 잡고 아예 고꾸라질 듯 그 안에 상체를 쑤셔 넣었다. 

“……족들이 생각보다 주의를 잘 이끌고 있다더군.”

거리가 가까워지자 확실히 소리가 뚜렷해졌다. 

족장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운 좋게도 때마침 족장이 벽난로 쪽 가까이 다가온 듯 했다. 

떨어지지 않도록 상체를 지탱하느라 어깨가 금방 뻐근해졌다. 

하지만 이예주는 혹시라도 제 기척이 들릴까 싶어 고통을 참고 있는 대로 숨을 죽였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온 감각을 귀에 집중시켰다. 

“새로운 무기 때문에 동요하고 있는 모양이야.”

“실패물이지만 요긴하게 쓰이는 모양이군요. 하지만 동쪽 대륙이 거의 복구 되었습니다. 그가 곧 돌아올 거예요.”

또 다른 인물이 족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날이 선 늙은이와는 달리 나른함과 여유가 감도는 목소리였다. 

이예주는 바로 누구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족장의 딸, 쟈니아였다. 

그들은 이어 대화했다. 그 다음부터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온 언어는 놀랍게도 영어였다.

「재료는 어떻게 되었지요?」

「지하에 재워두었지. 어느 순간부터 거짓말을 하는 것 같더군.」

족장이 혀를 차며 뭐라 더 지껄였다. 

뭉개지는 발음이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원어민이라고 해도 믿길 만큼 빠른 발음이었다. 

아니, 눈족들은 대부분 서양인이니 원어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학창시절부터 대학교 토익까지 영어라면 지긋지긋하게 배워왔기에 기본적인 회화는 가능했지만, 워낙에 억양이 세고 말이 빨라 이예주가 알아들은 단어는 몇 개 되지 않았다. 

재료? 지하에 재워두었다고? 도통 이해 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지하’를 머릿속에 새겼다. 

신전 외의 지하 공간이 따로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3장로와 7장로의 반발이 큰 편이에요.」

뭉개져서 들리던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어느 순간 다시 선명해졌다. 

이번에는 쟈니아가 벽난로 근처에 선 듯 여자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냥 서서 대화할 것이지, 왜 자리를 옮겨 다니는 거지. 

안 그래도 영어라 알아듣기 힘든 마당에 소리마저 작아지자, 이예주는 속으로 끊임없이 불만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곧 한참이나 더 작아진 족장의 목소리가 들려 어쩔 수 없이 번역에 온 집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듣고 있었지. 욕심 많은 것들. 희생 없이는 영생도 없는 법이야. 누구 덕에 그 버러지 같은 목숨들을 여태껏 유지해왔는데. 죽으라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시간도, 실험도 많이 부족한 상태이지요. 답을 찾기까지 너무 많은 목숨들이 희생되어 왔어요.」

「이제 장로들이 몇 명 남았지?」

「여섯.」

잠시간의 틈을 두고 쟈니아가 물었다.

「인질은 잘 지내나요?」

「잠잠한 것 같더군. 재료에게 들은 것 뿐 아니라, 틈틈이 사제들을 통해 확인하고 있네. 검은 파편 없이 제깟 게 뭘 하겠어.」

「그래도 잘 감시하는 편이 좋아요. 다리족에서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자였으니.」

그들의 입에서 연달아 나오는 ‘hostage’란 단어에 이예주는 흠칫 몸을 굳혔다. 

제 이야기였다. 

족장은 역시나 그녀가 브레든을 찾느라 신전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을 전혀 모르는 듯 했다. 

토마스가 모든 것을 고자질 하지 않았다는 베니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름 좋은 마음을 먹고 그 애가 있는지 확인하러 온 것이지만, 이예주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당신 대신 며칠 내내 눈을 뜨고 있어 몹시 피로해요. 그만 잠에 들어야겠어요.”

때마침 다시 들려오는 익숙한 언어에 그녀는 애써 상념을 떨치고 집중했다. 

다시 한국어를 구사한 것은 쟈니아였는데, 의식적으로 그러는 것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언어를 섞어 쓰는 것 같았다. 

그 방증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족장이 피곤함을 호소하는 여자를 격려했다.

“고생했군.”

“오늘의 재료는 3장로와 7장로에게 주도록 해요.”

“7장로가 좋아하겠군. 어린 것의 눈알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이니 말이야.”

이제는 굳은 머리를 억지로 굴려 외국어를 해석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뜻 모를 말들을내 내뱉었다. 

하, 망할 놈들. 재료가 뭔데. 장로가 뭐 어쨌다는 거야. 

엿듣는 주제에 이예주는 알아듣지 못할 말들만 지껄이는 부녀에게 욕을 퍼부었다.

“밤까지는 당신도 휴식을 취하는게 좋겠어요. 괴사가 진행됐어요.”

“그래…… 먹이가 왔으니 당분간은 안심이야.”

“곧 해방될 거예요. 그만 쉬어요.”

쟈니아를 마지막으로 그들의 대화는 끝이 났다.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이예주는 여전히 한껏 상체를 굴뚝 속에 쑤셔 박은 불편한 자세를 유지했다. 

조금 위화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분명 잠에 들어야 한다고, 쉬라며 족장에게 인사의 말을 한 쟈니아가 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족장의 방에 계속 볼 일이 있는 것인가? 

하지만 ‘쉬어요.’를 끝으로 족장의 방은 소름끼칠 만큼 고요해졌다. 

물론 굴뚝의 길이가 있으니 소리가 잘 안 들릴 수 있다고 하지만…… 

이토록 인기척이 없을 수 있나?

잠시 갸웃거리며 벽난로 속에서 귀를 기울이던 이예주는 굴뚝 입구를 잡고 버티던 팔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아려오자 조심스럽게 상체를 들어올렸다. 

직접 눈으로 확인 한 것은 아니지만 느낌상 족장의 방에 토마스는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지하’ 라는 새로운 공간과 그 외에 제가 미처 해석하지 못한 몇몇 단어들을 되새기느라 이예주의 머리는 과부하가 걸리기 직전이었다.

일단 얼른 베니에게 가서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 좋겠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그녀의 발이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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