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78)화 (280/319)

비행선에서 탈출하려던 이예주를 막기 위해 여준 대신 전두지휘하던 남자. 

히카톤으로 인해 죽었을 줄 알았는데 용케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다리족들이 왜 눈족의 신전에 와 있는가. 이예주는 심각해진 표정으로 남자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무표정한 얼굴로 철문 사이를 빠져나온 그들은 양손 가득 허름한 자루들을 들고 있었다. 

안에 든 것이 무거운 건지 자루가 눈 바닥을 거의 질질 끌다시피 늘어졌다. 

예전처럼 거침없는 손길로 그것을 마구 끌어대며 뒷마당을 벗어나던 철수의 힘에 못 이겨 기어이 자루 한 쪽이 찢어졌다. 

그 사이로 검은색의 무언가가 튕겨져 나온 무언가가 언 땅과 맞부딪히며 두 동강이 났다.

그로인해 그들은 가던 걸음을 멈췄다. 철수는 찢어진 자루와 두 동강이 난 물건을 바라보며 험악한 표정으로 뭐라 중얼거리며 부서진 물건을 아예 발로 짓밟았다. 

검은색의 무언가는 유리처럼 쉽게 산산조각 났다. 

이예주는 커다랗게 확장된 눈으로 찢어진 자루에서 튀어 나와, 부서진 물건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깨진 사기 조각처럼 흩어진 그것은 쟈니아가 이예주에게 줬던 것과 같은 검은 칼이었다. 

“저걸 왜 저 사람들이…….”

남자가 거친 손길로 벌어진 자루 주둥이를 여몄다. 

그 틈새로 보인 자루 안이 온통 시커맸다. 

튀어나온 칼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 한가득 담겨 있는 것이다. 

자루를 갈무리한 남자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신전 외벽을 돌아 앞마당으로 가려는 모양이었다. 

미처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주변을 둘러볼 만큼의 경황이 없는 건지 그들은 온실을 빠르게 지나쳤다. 

어째서 쇳조각이 인간의 발길질 한 번에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는지 이상하게 여길 틈도 없이. 이예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 누나?”

“자, 잠깐만……!”

“누, 누나, 어디가! 누나!”

그녀는 온실 문으로 정신없이 뛰어갔다. 

기묘한 불안감이 몸을 잠식했다. 람을 찌르라며 줬던 칼이다. 

왜 저것을 놈들이 눈족에게서 받아가는 건지,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명성 높은 다리족답게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그녀가 막 온실 문을 박차고 나왔을 때 뒷마당에는 남자들의 발자국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예주는 그것을 따라 미친 듯이 뛰어갔다. 간신히 그들의 뒤꽁무니를 따라잡았던 건 신전을 반 바퀴 돌아 앞마당에 이르러서였다. 

“잠깐, 저기……! 저기요!”

계단을 막 내려서려던 그들을 본 이예주는 남은 힘을 쥐어 짜내 다리에 쏟아 부었다. 

“저기요, 철수 씨! 철수 상병!”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애타게 소리쳤다. 

이름은 몰라도 ‘상병’ 소리는 알아들은 건지 남자의 몸이 멈칫했다. 

그녀는 한달음에 남자들의 앞까지 뛰어갔다. 

그리고 또 놓칠 세라 덥석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헉, 헉…… 저, 저기요. 저 알죠?”

“당신이 왜 여기…….”

의외의 만남은 남자들 쪽에서도 마찬 가지인 것인지 그들의 얼굴이 일순 당황스러움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낯익은 남자가 거칠게 이예주가 붙든 팔을 뿌리치며 어마어마한 적대감을 내보였다.

“하. 이번엔 눈족이 목적인 겁니까?”

“…….”

“구원 해 준답시고 거짓 정보를 흘려 눈족들을 교란시키고 종국에는 붕괴 시키려고 남쪽 대륙까지 온 거냔 말입니다!”

남자가 검은색 눈썹을 마구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가파른 숨을 고르느라 무릎을 짚고 상체를 숙이고 있던 이예주가 화들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 무슨 소리에요? 뭘 교란을…….” 

“당신 때문에 일이 얼마나 틀어졌는지 압니까? 당신의 새치 혀를 믿고 산 중턱으로 간 족장님과 붉은 개 요원들이 전멸했고, 다리족은 지금 붕괴 직전이……!”

“주, 중사님!”

거의 한 대 칠 기세로 다가서던 철수를 옆에 있던 군인이 막아섰다. 

이예주를 때리는 것을 막으려는 것보단 감정이 격해져 기밀을 발설하려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 같았다. 

진정되어가던 그녀의 심장이 다시 벌렁 거리기 시작했다. 

살벌하게 자신을 노려보며 씩씩대는 덩치를 보니 괜히 부른 건가 후회가 들었다.

“됐습니다. 당신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봤자, 우리의 정보만 유출될 뿐이죠. 당신 때문에 족장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다리족은, 아니. 연합군 전체는 당신을 인류의 적으로 간주하기로 했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서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다는 듯 철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그만 가자.”

그리고는 몸을 휙 돌려 계단에 내려섰다. 

덩치 큰 남자에게서 받는 선명한 적의에 이예주는 더럭 겁이 났다. 

하지만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왜 그걸. 왜 그렇게 많이 가져가는 건지…….

이예주는 다급히 다시 한 번 철수의 옷자락을 잡았다. 

“자, 잠깐만요! 이것만 대답해주고 가요. 여기 왜 왔어요? 그거, 왜 가지고 가는 거예요?”

“더 이상 당신에게 설명할 의무는 없습니다.”

놈이 또 한 번 아플 만큼 세게 쳐냈다. 손가락이 부러질 듯 아파왔지만 이예주는  

“말 해 줘요! 그거 칼인 거 다 봤어요. 왜 무기를…….”

“전시 중이니 무기 보급은 필수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검은 파편의 더러운 하수인 노릇을 하며 우리의 정보를 유출하는 동안 우리도 손가락만 빨고 있던 것만은 아닙니다.”

철수 상병. 아니 이젠 진급한 철수 중사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원하는 것에 대한 답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되물을 새도 없이 남자가 불쑥 손을 뻗었다.

“그게 무슨…… 윽!”

“궁금해 하는 것 같으니 이것만은 똑똑히 알아두십시오.”

이예주는 눈 깜짝할 새에 우악스럽게 멱살이 틀어 잡혔다. 

숨이 막혔다.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철수는 살기 어린 목소리로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우리는 언제나 답을 찾았습니다. RTBD의 개발도 히카톤의 조종도,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지만 결국 해냈지요.”

“……이, 이거 놔요! 으윽!”

“지금 당장 당신을 죽여 버리고 싶지만…… 검은 파편의 파멸이후 인류의 배신자인 당신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형에 처하는 꼴을 볼 때까지 조금만 더 참지요. 당신 때문에 붉은 개에게 사지가 갈가리 찢겨 죽은 우리 족장님과 동료들!”

핏발 선 눈으로 남자가 한자 한자 짓씹듯 내뱉었다.

“목숨 값까지 톡톡히 받아 낼 겁니다!”

그는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잡고 있던 이예주의 멱살을 거칠게 내팽개쳤다. 

힘없이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그녀는 숨넘어갈 듯 기침을 토해냈다. 

목을 추스르기도 전에 다리족 인간들은 엄청난 속도로 신전에서 멀어졌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간신히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씨발 새끼.”

시큰하게 아파오는 목을 부여잡고 이예주는 욕을 했다. 

내가 왜 이런 저 씨발놈한테 이런 폭언을 들어야 하는 거지? 

목도 아프고, 억울하고, 무섭고 두려워서 갑작스레 눈두덩이가 후끈해졌다. 

순식간에 울음이 목 끝까지 치솟아 오르고 눈앞이 뿌예졌다. 

“람…….”

하지만 이예주는 람을 목 놓아 부르며 마음 놓고 울 수도 없었다. 

생각을 해야 했다. 철수 새끼의 말에 담긴 위화감과 ‘무기 보급’의 의미를. 쇠창살 사이를 빠져나오는 놈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껴지던 불안감이 기도를 마구 죄어드는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유추할 수 없었다. 놈들이 왜 눈족까지 와서 그 검은 칼을 한 아름씩 들고 가는 건지. 쟈니아는 그것이 눈족의 성물이라고 했다. 

무기든, 성물이든, 그게 뭐든 어차피 그것으로 람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을 그 여자도 알고 있었다. 실패물이라고 하면서 칼을 까마득한 구덩이 속으로 집어 던졌으니까……. 그리고 실패했다고. 

“그런데 원래 성물이라는 것이 그렇게 많은 건가?”

근데 다리족 놈들은 왜 무기 보급이랍시고 한가득 가지고 간 것이지? 검은 파편에겐 소용없지만 신인류와의 싸움에서는 유리한 것인가? 그런데…….

“……무슨 답을 찾았다는 건데?”

그 답이 검은 파편의 파멸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거란 말인가. 

그녀는 다리족 놈들이 떠나간 자리에 혼자 남아 하염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몸이 얼어 붙은 종국에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계속, 계속.

하지만 턱 밑에서 들끓는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       *       *

“누나, 아는 사람이었어?”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사시나무 떨 듯 와들와들 떨며 뒷마당으로 돌아온 이예주를 베니가 맞이했다. 

심각한 얼굴로 산산조각 난 쇳조각들을 내려다보느라 이예주는 그의 궁금증을 해소해줄 수 없었다.

“이게 뭘까…….”

유리도 아니고 뭔데 이렇게 쇠가 이렇게 부서져 버리는 거지. 

쇳조각의 단면이 날카로워서 차마 건들지는 못하고 이예주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 옆으로 베니가 주춤주춤 다가서며 말했다.

“실패한 무기일 거야.”

“실패한 무기?”

의외로 베니에게서 쉽게 답이 튀어나왔다. 

이예주는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까마득한 구덩이로 칼을 던지며 쟈니아가 말했다. 

어차피 실패물이었다고.

“응. 아버지가 가끔 중얼거리시는 것을 들었어. 사람들은 계속 죽어나가는데 자꾸 실패만 해서 큰일이라고.”

“대장장이들이 그럼 이런 걸 만드는 거야?”

“무기라고 정확히 들은 적은 없어. 근데 이걸 보면 그렇지 않을까?”

“왜 눈족에서 무기를…….”

다리족도 아니고? 

이예주는 머릿속에 있는 눈족에 관한 온갖 정보를 긁어모아봤지만 소용없었다. 

무기를 만드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람을 상대하려면 이런 무른 쇠로는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데. 

그런데 다리족은 이런 것들을 한가득 들고 갔단 말이지. 

대체 무슨 용도로 쓰이는 걸까.

“누나, 그만 들어가자. 이러다가 열병에 걸리겠어.”

다시 본 날붙이의 모습에 괜히 가슴이 수런거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지자 베니가 그만 이예주의 손을 끌었다. 

얼어붙은 막대기라고 해도 믿을 만큼 손가락이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온실 문으로 걸어갔다. 

온풍이 부는 따뜻한 내부에는 어느덧 리즈와 감시꾼 토마스가 돌아와 있었다.

*       *       *

브레든을 찾는 것은 아무런 진전이 없었고, 눈족들은 여전히 쥐죽은 듯 조용했다. 

아무 일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폭풍 전야 같은 기묘한 느낌에 이예주는 며칠간 잠에 잘 들지 못했다. 

뒤척이다 간신히 수면에 성공해도 꿈자리가 사나웠다. 

악몽인지, 그냥 개꿈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위라도 눌린 사람처럼 내내 허우적거리다 깨면, 미친 듯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무색하게 꿈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오늘도 느지막이 잠에 들어 까마득한 수렁 속을 하염없이 헤매고 다니던 이예주는 이른 새벽,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악몽에서 퍼뜩 깼다. 

똑, 똑, 똑. 

깊은 잠에 빠졌더라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노크였다. 

“……누구세요?”

이예주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방문으로 다가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평소라면 경계해 마땅했지만 잠을 못자 몽롱한 머리가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의심 없이 벌컥 문을 열었다.

“누나.”

초조함을 한껏 담은 채 하얗게 들떠있는 베니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이예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야?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토마스는 어쩌고?”

베니 남매를 감시하는 토마스 때문에 그들의 만남은 암묵적으로 이예주가 먼저 찾아 가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예주의 말에 베니가 얕게 헐떡이며 뜸을 들이다 말했다.

“토마스가 사라졌어.”

“뭐?”

반쯤 감겨 있던 이예주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일단 안으로 들어와.”

몽롱했던 정신이 한순간에 맑아지면서 정신이 들었다. 

이예주는 불이 꺼져 음산한 복도에서 서둘러 베니를 방 안으로 이끌었다. 

곧 눈족이 돌아다니며 신전의 불을 밝힐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어젯밤에도 족장님의 방으로 보고 하러 가는 것 같았는데, 그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어.”

그녀의 손에 잡힌 베니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밤새 돌아오지 않은 토마스를 기다린 것 같았다.

“족장이 자기 방에서 재운 거 아니야?”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베니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게다가 어제 낮에 리즈한테 곧 제사를 지내는데 제물이 필요하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했었대.”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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