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해보았다고, 이예주는 처음 굴뚝을 기어올랐을 때보다 훨씬 수월하게 족장의 방을 빠져나왔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천장을 가로지를 때 베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누나?”
이예주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그녀 또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족장의 방에서 얻은 것은 브레든이 살아있다는 추측뿐 솔직히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 베니에게 이런 속내를 털어놓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그녀는 결국 표정을 가다듬고 덤덤하게 말했다.
“다시 뒤져봐야지.”
이예주를 올려다보던 베니의 표정이 일순 이상해졌다.
“누나는 왜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브레든을 찾는 거야?”
“…….”
“이상해. 누나가 나쁜 사람이 아닌 건 이제 알겠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브레든을 데리고 나가려는 건지 모르겠어. 누나에게 여긴 위험하잖아.”
베니의 추궁은 타당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예주도 그와 같이 생각 했을 것이다.
모두를 돕고 싶지만 제게 힘도 없고 제 코도 석자이니 어쩔 수 없는 없다고.
제가 브레든 하나로도 벅차 베니 남매까지 이 이상 어떻게 해 줄 수 없다고 결정했던 것처럼.
하지만 사방이 덫이었던 다리족에서 유나는 해냈다.
아무런 관련도 없던 자신을 구해주고, 결국 탈출에 성공시켰다.
그런데 자신은,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그녀의 하나뿐인 동생마저 빼앗겼다.
침묵이 한참 길어져 그들 사이에 어색함이 내려앉았을 무렵 이예주는 어렵사리 답했다.
“……걔네 누나한테 빚진 게 있어서.”
“알리자린 누나? 알리자린 누나도 살아 있는 거야? 브, 브레든은 다리족에 끌려갔었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그럼 알리자린 누나는…….”
“목숨을 빚졌어.”
베니는 입을 다물었다.
어리지만 눈치가 빨라서 이예주의 말이 뜻하는 바를 곧 바로 알아들은 듯 했다.
“그래서 두고 갈 수가 없어.”
그 말과 동시에 그들은 다시 이예주의 방 천장 위에 도착했다.
시커먼 굴뚝 구멍을 내려다보자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제 마지막이니까. 늘어지는 몸에 억지로 힘을 불어 넣으며 그녀는 이번엔 베니보다 먼저 굴뚝 속에 발을 들였다.
그대로 나머지 발을 밀어 넣을 무렵 베니가 불현 듯 와락 이예주의 옷자락을 잡았다.
“나도 도울게.”
“…….”
“누나가 브레든 찾아서 여기서 나갈 수 있도록 도울게. 같이 탈출해.”
누군가를 떠오르게 만드는 올망졸망한 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썩 좋지 않았던 첫인상과는 달리 베니는 그 사이 제게 마음을 연 것 같았다.
기특한 것. 암울한 이 상황에 한줄기 빛처럼 위로와 힘이 되었다.
무척 고마웠지만 이예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 도울 생각 말고 네 동생이랑 너만 생각해.”
* * *
그들은 들키지 않고 이예주의 방으로 돌아왔다.
원래의 제 로브로 갈아입은 베니가 리즈와 머무는 방에 도착함과 동시에 신전이 소란스러워졌다.
장벽 밖으로 아이들을 내버리러 갔던 족장 일행이 간발의 차이로 돌아온 것이었다.
혹시나 베니가 1층까지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들킬까 난간에 달라붙어 있던 이예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허겁지겁 제 방으로 돌아와 엉망진창이 된 담요를 숨기고 욕실로 들어갔다.
재투성이 몸을 씻으며 이예주는 회심에 가득 차 완전 범죄를 중얼거렸다.
아이들을 버리고 온 날 이후로 번갈아 가며 이예주를 괴롭히던 족장과 쟈니아는 신전 안에서 자취를 감춘 것처럼 잠잠했다.
덕분에 베니와 함께 신전 이곳저곳을 몰래 뒤지고 다녔지만 여전히 브레든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언니! 오빠!”
풀밭위에 앉아 티타임 놀이를 하던 리즈가 이예주와 베니를 보고 벌떡 일어나 살갑게 맞았다.
온실 안으로 들어서는 이예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거대한 크기의 세 번째 예배당을 막 뒤지고 돌아온 참이었다.
익랑(翼廊)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역시나 브레든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 쳐 숨겨놓은 걸까.
“잘 놀고 있었어?”
불안감에 신경이 칼같이 날카로워져 있음에도 이예주는 애써 입꼬리를 당경 웃어보였다.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 불안에 떠는 것은 비단 그녀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응. 토마스랑 귀족 놀이 하고 있었어. 나는 귀부인이야. 토마스는 하인.”
“뭐? 내가 왜 네 하인이야! 방금까진 귀족이라고 했잖아!”
“하지만 고자질쟁이는 귀족이 될 수 없는걸?‘
“이게……!”
“싸우지 마.”
베니가 벌떡 일어난 까까머리 남자 애 앞을 막아섰다.
토마스는 리즈가 과거를 본다고 고자질을 한 장본인이었다.
베니 남매 외에 신전에 남은 유일한 아이였다.
고자질한 일로 앙금이 남은 건지 리즈와 토마스는 곧잘 싸웠다.
몇 살 더 먹은 베니가 매번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치고 박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언니, 언니. 이젠 나랑 놀자. 베니 오빠랑만 숨바꼭질 하지 말고 나랑도 놀아줘. 나 이제 토마스랑 안 놀래.”
“어, 어…….”
제 팔을 마구 끌어당기는 리즈에 못 이겨 부드러운 잔디 위에 앉았다.
옆에서 토마스가 ‘쳇!’ 하고 크게 심통 난 소리를 냈다.
“누가 너랑 놀고 싶대? 나도 너랑 놀기 싫어. 네가 매번 놀아달라고 조르는 거 아냐.”
“나도 너랑 놀기 싫거든?”
“이게! 오빠라고 안 불러!”
“야, 야! 그만 해!”
베니는 지친건지 풀밭에 발라당 누운 채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두 사람의 싸움을 방관했다.
그 대신 말리며 이예주는 곧바로 후회했다.
방으로 바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너네는 몇 살 먹었는데 맨날 싸움질이냐.”
“9살!”
리즈가 양 손으로 손가락 네 개를 펼쳐들었다.
타박하는 말이었는데 자랑스러워해서 말문이 막혔다.
이예주가 헛웃음을 짓자 리즈가 “토마스는 11살이야.” 하고 속삭였다.
의외였다. 리즈가 나이에 비해 키가 큰 편이라 동갑인줄 알았는데, 매번 오빠라고 부르라며 윽박 지르는게 사실이었다.
리즈와 앉은키가 똑같은 앳된 토마스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이예주가 물었다.
“그럼 베니는 몇 살이야?”
“베니 오빠는 15살.”
기껏해야 초등학생일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네.
의외의 눈으로 베니와 리즈를 번갈아 보며 이예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빠 밥을 다 뺏어 먹었나 보구나.”
“아, 아니야!”
리즈의 귀여운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오, 오빠가 더 먹으라고 준 거야…….”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에 이예주는 불안함을 내려놓고 웃어버렸다.
리즈는 미워할 수 없는 아이였다.
이런 태평한 대화나 나누고 있으면 안되는데. 밀어 내야 한다고,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마음을 놓았다.
리즈의 사랑스러운 웃음을 보면 전날 밤의 미칠 듯한 불안감이 가라앉으면서 가만있어도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베니의 확신에 찬 말과 행동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이 삭막한 신전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언니는 그럼 몇 살인데?”
“스읍. 어른 나이는 물어 보는 게 아니야.”
띠 동갑도 넘는 나이였네. 이쯤 되니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기도 좀 민망했다.
하지만 이예주는 시치미를 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다른 쪽에서 얄밉기 그지없는 소리가 들렸다.
“늙은이. 족장님이랑 같은 나이대지?”
“이게 미쳤나!”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들어보이자 토마스가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도망쳤다.
순식간에 멀어진 까까머리를 보고 이예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리즈를 고자질한 토마스가 남겨진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능력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닌 군식구를 족장이 왜 남겨 놓았을까.
족장의 방에 들어갔다 온 다음 날 조심스럽게 베니에게 말을 붙여 본 결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토마스는 리즈와 베니의 감시자 역할이었다.
두 사람이 과거나 미래를 보거나, 혹은 이예주와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눠도 그 애는 쪼르르 달려가 고해바칠 것이다.
토마스는 고자질을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만큼 영악했다.
이예주는 그래서 처음엔 영 껄끄럽고 꺼려져서 말도 잘 안 붙였다.
그런데 베니 남매와만 인사를 하자 분에 못 이겨 엉엉 우는 것이 아닌가.
심보가 못되긴 했지만 결국 어린 애였다.
이제는 그저 고작 11살 난 어린 아이를 졸렬한 짓에 이용해먹기 위해 내쫓지 않은 눈족이 진저리가 났다.
“토마스 숨바꼭질 하는 거야? 같이 하자!”
“싫어! 내가 왜? 너 저 아줌마랑 논다며!”
“기다려, 오빠! 내가 술래야! 10, 9, 8…….”
“자, 잠깐!”
리즈가 숫자를 세자 토마스 놈은 입으론 싫다 면서도 주변을 휙휙 돌아보며 부랴부랴 숨을 곳을 찾았다. 새끼, 귀엽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하던가.
신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베니는 생각보다 훨씬 더 똑똑했다.
그는 토마스의 어린 나이를 십분 이용했다.
리즈에게 토마스를 꿰어 같이 놀란 말만으로도 이예주와 베니의 비밀스러운 접선은 해결됐다.
시끄러운 두 아이가 온실 가장자리 쪽으로 멀어지자 베니가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어제 오늘 신전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 누나.”
“왜? 어떤데?”
“낯선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 같아.”
베니의 말에 이예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며칠간 브레든을 찾아다니느라 정신을 빼놓고 있어 눈치 채지 못했지만 최근 신전은 존재하는 사람이라곤 이예주와 아이들뿐이라 해도 손색없을 만큼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통 조용하긴 한 것 같네. 족장도 그 딸 쪽도 잠잠해.”
“장로님들도 거의 보지 못했어. 아직 제사 지낼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제사? 그런 것도 지내?”
“응. 족장님이랑 장로님들 다 모여서 몇날 며칠 제사만 지낼 때가 있어.”
베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하다는 듯 덧붙였다.
“이상하네. 대장장이 아저씨들도 안 보이는데.”
“대장장이는 왜?”
“아버지도 제사 때마다 무지 바쁘셔서 몇 날 며칠 집에 안 오셨거든. 그래서 제사 때만 되면 대장장이 아저씨들이 신전 안에서 죽치고 사는 줄 알았어.”
생소한 소리였다.
제사랑 대장장이랑 대관절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의아한 일이었지만 베니도 그것까지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이예주가 가지는 의문 자체를 가지는 눈치가 아니었다.
제사 때마다 대장장이들은 신전에서 일하느라 바쁘다.
그것이 눈족인 베니에겐 당연한 일인 것 같았다.
“아버지가 있으면 브레든을 좀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텐데…….”
베니가 허공을 향해 한숨을 내뱉으며 공허히 말했다.
이예주는 차마 무사 하실 것이다, 와 같은 말은 하지 못했다.
“걜 찾는 건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넌 이미 충분히 도와주고 있어.”
오히려 베니는 처음 했던 거래 이상으로 이예주를 도와주고 있었다.
알리자린보다도 한참 덜 자란 이 어린 것들을, 그녀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토마스를 잘 구슬려 봐야겠어. 토마스는 매일 밤 족장님 방에 가서 오늘 하루 우리가 뭘 했는지 고해바치고 오거든. 요즘 신전 안에서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물어보도록 시킬게.”
혼란스러운 이예주를 위로해주듯 베니는 금세 씩씩함을 되찾고 방법을 찾았다.
온통 저와 관련된 이야기뿐이라 그녀는 되레 더럭 걱정이 들었다.
“탈출 계획은 잘 세우고 있지?”
누운 베니에게로 바싹 다가앉으며 이예주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가 한 번도 꺼낸 적 없던 주제였기에 베니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브레든 찾는 건 됐으니까, 때가 오면 리즈 데리고 바로 나가. 그리고 어떻게서든 침엽수 숲으로 가. 거기로 가야 얼어 죽지 않으니까.”
“치, 침엽수 숲?”
“응. 그리고 가서 최대한 펭귄 신인류나 흰 순록을 찾아. 내가 보냈다고 하면 너희를 도와줄 거야.”
장벽 밖으로 나갈 탈출로는 찾아내었으나 막상 리즈를 데리고 나가려니 막막하던 차였다.
베니는 장벽 밖으로 한 번도 나가 본 적 없지만 그곳이 얼마나 척박한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지평선의 끝까지 눈만 쌓여 있는 허허벌판이었다.
남자인 자신은 몰라도 리즈처럼 어린 여자 아이는 하룻밤만 그 추위에 노출되더라도 금방 얼어 죽을 것이었다.
게다가 살아남기 위해 저들끼리 무리를 지어 새로 내쫓기는 아이들을 노리고 잡아먹는 야만인들 도 있었다.
먹을 것 하나 없이 살아남거나 걸어서 남쪽 대륙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와중 외부에서 온 여자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누나는? 누나도 우리랑 같이 나가면 안 돼?”
외부인인 그녀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예주가 그렇듯, 베니가 마음을 내려놓고 의지할 사람이 그녀 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베니는 이예주의 옷자락까지 붙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브레든을 찾기 전엔 안 돼.”
우리도 제발 신경 써줘. 우리도 제발 브레든처럼 도와줘! 목구멍까지 비명이 치솟아 올랐다.
베니는 그녀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애원하고 싶었다.
“난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네 동생만…….”
하지만 그런 그의 심경을 모른 채 다시 선을 긋듯이 주절거리던 이예주가 고개를 돌리다 흠칫 몸을 굳혔다.
베니의 눈을 피해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던 그녀의 눈이 신전 뒷마당을 비추는 온실 유리창에 향했을 무렵이었다.
구 신전으로 향하는 길목인 쇠창살 사이에서 사람 두 명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중 한 명을 본 이예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누나, 왜 그래?”
“저 남자가 왜 여기에…….”
낯익은 덩치와 얼굴은 다리족에서 봤던 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