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76)화 (278/319)

굴뚝 안은 불에 그슬리고 재가 묻어 시커머튀튀했다. 

벽돌로 만들었기 때문인지 다행히도 잡고 밟을만한 틈이 존재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일부러 그렇게 설계한 것이 아닌지라 매우 불규칙해 가끔은 양 발과 양 팔을 쩍 벌려 몸을 지탱해야했다. 

이미 그렇게 버티고 있는 베니가 위에서 친절하게 조언했다.

“거기 오른쪽 팔위에 있는 거부터 잡고 올라와.”

“알았어.”

이예주는 음울한 얼굴로 더러운 벽돌 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안쪽에 튀어 나와 있는 벽돌을 밟고 위로 올라섰다. 

그녀보다 작은 체구 덕에 벽에 많이 닿지 않고 쏙쏙 잘 타고 오르는 베니와는 달리, 그녀는 입구서부터 어깨를 비집어 넣어야 했다. 

두른 담요에 시커먼 재가 묻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잔뜩 몸을 옹송그리고 탄내 나는 굴뚝을 오르는 것은 두 번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굴뚝이 좁아 등으로도 몸을 지탱할 수 있어 생각보다 오르는 것이 수월했다. 

게다가 천만 다행이도 비행선 환풍구보다 훨씬 짧았다. 

“아이고, 죽겠다.”

먼저 천장에 오른 베니의 도움을 받아 굴뚝을 빠져나온 이예주는 앓는 소리를 내며 철퍽 엎어졌다. 

왜일까. 남쪽 대륙에 와서 클라이밍만 미친 듯이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에휴, 내 팔자야. 

“여기서부턴 걸어갈 수 있어, 누나. 가로질러서 가는 거라 복도로 가는 것보다 빠를 거야.”

베니가 말했다. 

그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지붕이 세모꼴이어서 그 아래 천장과 거리가 상당했다. 

불쌍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행보에 눈물짓던 이예주는 숨 돌릴 새 없이 곧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어떻게 신전 구조에 대해서 잘 알아? 여기 와봤어?”

베니를 따라 족장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녀는 불쑥 물었다. 

아직 나이도 어린데 신전 구조를 잘 알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게다가 말을 들어보니 아이들은 신전에서 사는 게 아니라 바깥에 있는 마을에서 살다 쫓겨날 때가 되면 신전에 며칠 머무르는 것 같았다.

“아니. 나도 신전의 굴뚝을 오르는 건 처음이야.”

“폼이 여러 번 해본 사람 같은데.”

이예주의 말에 베니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몰래 집 밖으로 나갈 때 굴뚝으로 갔거든…….”

“아~ 가출?”

“아니거든!” 

발끈.

“아버지는 신전의 대장장이셨어.”

“대장장이? 

“응. 대장장이들은 평소에 일이 없을 때 신전 건물 관리를 했거든. 오래돼서 부서진 곳이나 눈이 새는 곳들을 고치고, 뭐…… 여기는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잠잠해질 때까지 숨어 있으라고 아버지가 알려주신 곳이야.”

“대장장이? 그 무기 만드는 사람?”

베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예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전과 맞지 않았다. 

다리족도 아니고. 무기라곤 여신상이 들고 있는 석고 창뿐인 이곳에서, 웬 대장간이 있단 말인가? 

아, 물론 쟈니아가 준 시커먼 색의 괴상한 칼이 있긴 하지만. 

“그래서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셔?”

그나마 베니 남매에게 보호자가 있다니 다행이었다. 

튀어나온 지지대를 피해 고개를 숙이며 그녀가 물었다. 

베니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열흘 전부터 돌아오시지 않으셨어. ……나랑 리즈가 신전으로 끌려온 것을 보면, 아마 돌아가셨겠지.”

“뭐?”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단정적인 그의 대답에 이예주는 가슴이 철렁해졌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대장장이는 목숨이 오갈만큼 위험한 일이라 다들 하려고 하지 않아. 대신 대장장이의 자식들은 능력이 없어도 내쫓길 처지에서 제외돼. 식량도 배식해주고……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었는데 열흘째 소식이 없었어. 게다가 신전에서 우릴 내쫓기로 결정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신 거겠지.”

“…….”

차마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서 이예주는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베니는 침울한 얼굴일지 언정 덤덤한 어투로 되레 그녀를 위로했다.

“괜찮아. 대장장이 일 하시면서 아버지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을 항상 당부해 오셨는걸.”

“……부모가 원하지도 않는데 아이들을 쫓아내고 있는 거란 말이야?”

이예주는 도무지 눈족을 알 수 없었다. 

다리족 족장은 인명 하나, 하나가 아까운 위급 상황이라고 말했다. 

있던 인간들도 멸종해 나가는 마당에 왜 멀쩡히 태어난 아이들을 사지로 내쫓는단 말인가? 

아무리 식량이 부족하다고 해도. 부모도 원치 않는 일을 왜 이 미친놈의 신전에서는…….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베니를 돌아보았다.

“그럼 대체 여긴 어떻게 운영되는데? 젊은 사람들 없이 노인네들만 남아서 꾸려나갈 순 없잖아.”

“리즈처럼 능력이 뚜렷하면 남을 수 있어. 그런 애들 몇 명이 남아서 그나마 이어 가는 거야.” 

“대체…….”

“아버지는 나나 리즈에게 과거를 보더라도 능력을 숨겨야 한다고 하셨어.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신전에 능력이 있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그러나 리즈는 물론이고 베니마저 없는 능력을 만들어 내 엄청난 구라를 쳐 놓은 상태였다. 

이예주는 불현듯 마음 한 편이 서늘해졌다. 

그저 눈앞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제 머리에서 나온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순식간에 불어나 묵직한 불안감으로 탈바꿈했다.

“신전은 좀 이상해 누나.”

드디어 넓은 신전 부지 위를 가로질러 정반대편에 도달했다. 

족장의 방으로 추정되는 굴뚝 옆에 우뚝 멈춰선 베니가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이예주를 돌아보았다. 

“누나도 있는 동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굴뚝을 타고 내려가는 것은 올라가는 것보단 쉬웠다. 

잿가루가 날리지 않게 최대한 구석 쪽으로 가볍게 착지한 베니의 도움으로 이예주도 큰 사고 없이 잘 내려왔다. 

막상 힘겹게 내려와 보니 난로 안에 타고 남은 장작이 거의 없어 황당했더랬다. 

그 양반은 이 엄동설한에 불도 안 떼고 사는 건가?

“난로 안에 신발 벗고 나가자, 누나. 내려가선 아무것도 만지지마. 족장님이 과거를 읽을 수도 있으니까. 알았지?” 

참으로 대단한 노인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베니가 신신당부했다. 

눈족이 어떤 식으로 과거를 읽는지 잘 몰랐지만 이예주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에게도 재차 다짐했다.

과연 베니의 안내를 받길 잘했다. 

자신 혼자였다면 족장의 방에 몰래 들어왔다는 것을 제 발로 대놓고 알려줬을 것이다. 

두 사람은 양말 바람으로 좁아터진 벽난로 속에서 점프하듯 뛰쳐나왔다. 

족장의 방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이예주의 방과 비슷한 구조였으나 벽난로와 마주보는 공간에 책이 빽빽하게 꽂혀있는 커다란 책장과 책상이 추가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곧장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그러나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임에도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침대 위도 텅 비어 있었다. 

“없잖아.”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덩달아 주위를 휙휙 둘러보던 베니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테라스 문까지 열어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사람 머리털도 보이지 않았다. 

이예주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지자 베니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분명 봤어! 들것 위에 실려서 사제들이 들고 계단을 오르는 것을 똑똑히 봤다고.” 

“…….”

“거짓말 아니야, 누나.”

“하…….”

이예주는 짐짓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필사적으로 항변하는 베니가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빈말이라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재와 기름 떼가 머리에 엉겨 붙어 나는 냄새가 역겨웠다. 

팔자에도 없는 굴뚝까지 기어오르며 여기까지 왔는데. 그 개고생을 해서 찾아왔는데 찾는 사람은 털 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에 체류하는 기간이 더 길어지게 생겼다.

이예주는 막막함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람이 보고 싶었다. 그가 여기 와서 당장이라도 자신과 브레든을 찾아 데리고 나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목젖까지 솟아올랐다.

“……브레든이 온 걸 언제 봤어?”

이예주가 음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베니가 눈치를 보며 더듬더듬 답했다. 

“누, 누나 오기 며칠 전이었어. 아버지 실종되고 나서 나랑 리즈가 신전에 끌려온 날이었던 것 같은데…….”

“살아는 있었어?”

“응. 그치만 좀 상태가 이상해 보였어. 가슴이 너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 거렸고, 피부색이도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거든. 머리도 빡빡 밀려 있고…….”

다리족의 실험실에서 보았던 아이를 떠올리며 이예주는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와 상태가 똑같았다. 

적어도 눈족 족장이 죽은 애를 가지고 흥정을 하려 든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비록 이곳엔 없지만…… 

그래도 아직 살아있다면 기회가 남은 것이 아닌가. 

그의 누이처럼 무책임하게 죽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이예주는 애써 긍정적으로 사고했다.

“어디로 옮겼는지 짐작 가는 곳은 없어?”

그녀의 희망적인 물음에 베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족장님의 방이 아니면 신전에서 달리 잠가두는 곳도 없는데, 대체 어디로 옮긴 건지 모르겠어.”

상노답이구만……. 이예주는 암담한 현실에 욕설을 씹어 삼켰다. 

베니가 다시 눈치를 보며 “그, 그 사이에 죽은 건 아니겠지?” 하고 입을 열다가 그녀의 흉포한 기세에 곧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런 성과가 없음에도 족장을 마주칠까 두려워 서둘러 굴뚝을 타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심각한 얼굴로 족장의 방을 돌아보던 그녀는 곧 축 어깨를 늘어뜨리고 몸을 돌리던 차였다. 

문득 그녀에 낯설지 않은 물건이 스쳤다.

그녀는 벽난로 쪽으로 돌리던 몸을 다시 반대편으로 휙 틀어 성큼성큼 책장과 책상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이건…….”

책상 위에는 여러 개의 포장된 주사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역시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이예주는 그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이게 뭐야?”

“……RTBD야.”

“그게 뭔데?”

뭐라 정의해야 할까. 람에게서 기척을 숨겨주는 약? 아니면, 검은 안개와 반응해 눈족들의 괴물화를 늦춰주는 것?

어느 쪽이든 불길하기 짝이 없는 약물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반갑기 그지없는 주사기였다. 

비행선에서 히카톤 실험으로 쓰이는 눈족 아이들은 이 주사를 맞는다고 하였다. 

때문에 이것이 족장의 방에 존재함으로써 브레든의 생사는 확실해진 것이다.

사용한지 얼마 안 된 듯 아직 약물이 남아있는 주사기가 포장지 밖으로 튀어나와있었다.

“다행이다.”

이예주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아직 기회가 있는 것이다. 

“누나, 이제 그만 가야돼. 아무 것도 만지지마.”

주사기가 뭔지 질문했으나 딱히 궁금 한건 아니었던 듯 제드가 더 묻지 않고 채근했다. 

이예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으로 족장의 책상 위를 훑었다. 

뭔가 또 다른 단서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책상 위엔 주사기와 엎어져 있는 액자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왜 엎어져 있지? 

보통 유족의 사진이나 보기 싫은 사진을 그렇게 해놓는 것으로 알지만, 족장의 액자이니 괜히 그마저 의심스러웠다. 

이예주는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누나, 조심……!”

뒤늦게 그 모습을 본 베니가 황급히 막아서려 들었지만 이미 액자에 손이 닿은 후였다.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들키면 어떡하게!”

베니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벌컥 화를 냈다. 

이예주는 지뢰를 밟은 것처럼 액자에서 손도 떼지 못하고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손에 닿는 거실거실한 촉감을 느끼곤 애써 합리화했다.

“너, 너무 걱정 마. 먼지가 엄청 많이 쌓였는걸. 족장이 손댄지 오래 됐을 거야.”

“그걸 말이라고…….”

베니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별 수 없었다. 

뽀얗게 먼지가 쌓일 때까지 액자를 방치해놓은 것처럼 족장이 부디 앞으로도 그렇게 놔두길 빌 수 밖에. 

이왕 잡은 거, 이예주는 손에 힘을 줘 액자를 세웠다. 

드러난 사진은 생각보다 별 거 없었다.

“족장님이랑 대사제님이네?”

아닌척 했으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는지 옆에 붙어 같이 보던 베니가 말했다. 

사진 속에는 눈족 족장과 쟈니아가 사이좋게 껴안고 있었다. 

그 인간 같지 않던 부녀에게도 이런 시절도 있다니.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옛날 사진인 가봐. 족장님 얼굴에 주름이 하나도 없어, 누나.”

베니 또한 신기한건 마찬가지인 듯 자세히 사진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이예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수긍했다. 

꽤 오래 전에 찍은 것인 듯 사진 속 족장은 지금의 자글자글한 노인네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무척 젊어보였다. 40대 중후반 정도.

반면에 쟈니아 쪽은 지금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냉동인간인가. 젊었던 시절마저 지금 얼굴과 똑 닮은 모습이었다. 

“얘는 태어났을 때도 이 얼굴로 태어났을 거야.”

하여간에 징그러운 년. 

인상을 북북 쓰며 중얼거리자 베니가 키들거렸다. 

꼴 보기 싫은 두 인간의 과거 모습에 기분이 나빠진 이예주는 들었던 액자를 탁 소리 나게 다시 엎었다. 

“그만 가자, 베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