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핑핑 돌았다.
신? 그러니까, 람을?
이예주가 멍하니 여자의 말을 되새길 적이었다.
여자가 불현듯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저는 오늘 떠날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러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여신의 축복이 있기를.”
“아. 저기…….”
람이 왜 너희들이 모시는 여신의 현신이냐 따져 물으려 했지만 등장했을 때처럼 잡을 새도 없이 여신상 뒤편으로 쌩 사라졌다.
“뭐야. 지 말만 하고…….”
이예주는 바닥에 질질 끌릴만큼 길고 펑퍼짐한 회색 로브가 사라지는 꼴을 멍하니 바라보며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축지법이라도 하는 듯 엄청난 속도로 사라진 여자의 신영에 그녀는 ‘칫’ 하고 짧게 혀를 찼다.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기분 나쁜 여자였다.
여자가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색 로브를 뒤집어 쓴 눈족 족장이 우루루 아이들을 끌고 나타났다.
제단 앞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던 이예주를 보고 족장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했다.
이예주는 그것을 받는 둥 마는 둥하며 아이들 쪽을 살폈다.
리즈와 베니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채 아이들의 얼굴들을 헤아리기도 전에 족장이 시야를 가로막으며 옆에 다가와 섰다.
그리고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순록의 신선한 피가 담겨 있는 유리병이었다.
“성수를 찍어 아이들의 이마 정중앙에 묻히기만 하면 됩니다. 오래 살라는 덕담도 해주시면 아이들도 좋아할 것이고요.”
의외로 간단한 성수 뿌리기 방법을 알려주며 족장은 제단 위에 있는 황금색 항아리 안에 유리병에 담긴 피를 부었다.
티끌하나 없는 깨끗한 물 위로 오염되듯 시뻘건 피가 퍼져나갔다.
유리병을 다시 품안에 집어넣은 족장은 소매를 걷고 꽤 경건한 몸짓으로 항아리 안을 휘저었다.
로브 속에 감춰져 있던 팔목은 고목처럼 바싹 마르고 피부색도 시체처럼 창백했다.
노인이라 그런 것인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건강한 족장들과는 다른 눈족 족장의 행색에 내심 놀라고 있을 무렵 족장이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을 항아리에서 꺼냈다.
그리고 다소 급하게 소매를 내려 손목을 감췄다.
“구원자님의 앞에 차례대로 서거라.”
아이들에게 짧게 명령한 족장이 이예주에게도 명했다.
“행하시지요.”
“하…… 그냥 물 묻힌 김에 직접 하시죠.”
“저는 오늘 새벽 들짐승의 피를 보아 손이 더럽혀졌습니다. 이 손으로 아이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면 부정을 탈겁니다. 당신은 아직 구원자의 신분이니 아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죠.”
누가 누구한테 자비를 요구하는가.
애초에 니네가 아이들을 안 버리면 되는 일인데 왜 자신이.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내뱉는다면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설전을 벌여야 했다.
이미 방금 전 족장 놈의 딸로 인해 반쯤 진이 빠진 이예주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틀었다.
“이거 다 나한테 빚지는 거예요. 람 오면 이자까지 다 받아낼 거예요.”
엄포를 늘여놓았지만 별로 통하진 않은지 족장은 간지럽다는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엄숙함을 지키려는 표정이 웃기지도 않았다.
이예주는 시키는 대로 손에 물을 묻히기 위해 항아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다시 들어 올린 손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은 다행히도 여전히 투명했다. 물에 비해 피를 소량 집어넣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영 찝찝했다.
그녀는 맨 앞에선 아이들부터 차례대로 이마에 엄지를 찍어주었다.
“감사합니다, 구원자님.”
그녀의 손에 이마가 닿은 아이들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기계적으로 인사했다.
엊저녁 식당에서의 리즈처럼 ‘구원자’라는 존재에 눈을 빛내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구원자가 있으나 마나 자신들이 오늘, 일족에게 내쫓김 당하는 것은 변함없으니.
다시 본 아이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어둡고 음울했다.
제 앞에 선 줄이 짧아질수록 이예주의 마음도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열 댓 명의 아이들의 얼굴에 성수를 찍어주는 일은 금방 끝났다.
딱딱하게 경직된 이예주의 표정은 마지막 아이의 이마에 물 묻은 엄지를 찍어주고 나서야 조금 풀렸다.
리즈와 베니가 없었다.
혹시 몰라 다시 한 번 아이들 무리를 살폈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다.
“찾으시는 아이라도 있습니까?”
아이들 무리를 연신 흘끔거리는 이예주를 눈치 챈 건지 족장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이예주는 어색하게 웃으며 솔직히 털어 놓았다.
“어제 저녁 식사 때 제 옆에 앉았던 여자아이는 안보여서요.”
노인의 주름진 눈이 단번에 가느다래졌다.
“그 아이는 간밤에 크게 앓아누워 오늘 합류 할 수 없었습니다. 병이 낳을 때까지 당분간 신전에서 보살필 예정입니다. 아픈 아이까지 모질게 보낼 수야 없지요.”
“그래요? 그…… 남매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하나뿐인 혈육을 차마 떼어낼 수 없어 같이 남겼습니다.”
어쩜 이렇게 거짓말을 입술에 침하나 바르지 않고 할까.
혹한의 땅에 보호자도 없이 아이들을 모질게도 내쫓으면서 아픈 아이를 보낼 수 없었다는 족장의 이중성에 이예주는 치가 떨렸다.
하마터면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 했지만 곧 바로 그녀를 떠보는 족장 때문에 간신히 참았다.
“얼마 전에 아비를 잃은 딱한 아이들이지요. 그 아이들과 그새 정이 드셨나봅니다.”
“정이요? 처음 본 애들이랑 무슨 정이 있겠어요.”
사실인지라 떨지 않고 매끄럽게 말 할 수 있었다.
족장의 뒤편에 서 있던 아이들 중 몇몇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이예주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여기 와서 그 여자애만 유일하게 말을 걸어줘서 기억했어요. 없길래 혹시 무슨 일 있나 해서요.”
눈을 마주한 채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이자 가느다랬던 노인의 눈이 펴졌다.
의구심을 거둬들인 모양이다.
“그랬군요. 시간이 많이 지체돼서 이만 출발해야겠습니다.”
족장이 먼저 눈을 돌리며 주위를 환기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딘가에서 부터 회색 로브를 입은 인간들이 스르륵 튀어나왔다.
놀랄 새도 없이 빠르게 다가온 그들은 일정 간격을 둔 채 아이들을 둘러쌌다.
그 모양새가 이예주가 처음 신전으로 끌려 올 때와 같았다.
어디로든 도망칠 수 없도록.
아이들의 얼굴에 소리 없이 절망이 내려앉았다.
“가자.”
짧게 목례한 족장이 그녀를 스쳐지나가 무리의 선두에 섰다.
한 무리의 눈족 사람들이 신전을 나섰다.
이예주는 마지막 아이의 뒷모습이 신전 바깥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제단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음이 착잡하고 한없이 무기력한 기분이었다.
문득 공범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을 줄이기 위해 아이들을 가차 없이 버리는 눈족 인간들과.
“내가 여기서 뭐하는 거지…….”
이예주는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왜 이곳에서 이런 꼴을 보고 있어야 하는 건가.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입구의 기둥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칼바람에 몸이 딱딱하게 얼어붙었을 무렵, 여신상 뒤편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왔다.
“누나.”
“베니!”
아는 얼굴이 제게로 다가오자 이예주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했다.
제 앞의 베니도 방금 전 족장이 데리고 간 아이들 별 다를 바 없는 내쫓길 처지였는데.
통성명을 하고 안면 좀 텄다고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반가움과 안도감이 밀려왔다.
“별 일 없었지?”
“응. 누나가 하라는 대로 족장님께 그대로 말했어. 엄청 좋아하시면서 리즈와 나한테 방까지 내주셨어.”
“좋아…… 했다고?”
베니가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 같은 건 안 했어?”
“응. 아직 인재가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러던데?”
이예주는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미래를 보는 눈족이 있다는 것이 족장이 좋아할 일인가?
물론 좋아할만한 일이긴 했다.
미래를 보는 눈족은 아주 드문 빈도로 태어난다고 했으니.
하지만 족장이 의심도 없이, 되레 엄청 좋아하며 베니의 말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왜지? 왜 능력의 유무지? 군식구를 줄이기 위해 멀쩡히 태어난 애들도 갖다 버리는 마당에, 능력의 유무가 왜 중요한거지?
“누나, 빨리 가자. 지금밖에 시간 없어. 족장님이 다시 돌아오시기 전에 얼른 들어갔다 나와야 돼.”
“아. 어, 응. 미안.”
제 옷자락을 잡고 흔드는 베니의 손짓에 그녀는 퍼뜩 깊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이의 말마따나 족장이 돌아오기 전에 빨리 브레든 먼저 확인해야했다.
“그래. 얼른 가자.”
* * *
그들은 족장과 이예주의 방이 있는 4층까지 다시 올랐다.
베니는 이예주의 방과 광활한 허공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족장의 방을 향해 가지 않았다.
“왜 여기로 가?”
제 방으로 가는 복도로 들어서는 베니를 보며 그녀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다른 방은 문이 잠겨 있어서 누나 방으로 가야 돼.”
“왜?”
“들키지 않고 들어가려면 그 수밖에 없어.”
사실 모르는 거 아닌가, 한순간 의심이 들었지만 이예주는 잠자코 뒤따랐다.
이윽고 그녀의 방에 도착한 베니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예주는 여전히 그의 행동이 이해가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마저 방 안에 들어오자 베니는 서둘러 방문을 닫은 후 벽난로 쪽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온기를 재듯 손을 가져다 대었다.
“뭐하는 거야?”밤새 넣어둔 장작을 모두 태운 벽난로는 차갑게 식어 있은 지 오래였다.
다시 불을 지피려면 사람을 물러야 했다.
하지만 난로에 불을 지피려는 목적은 아닌지 온도를 확인한 베니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누나 로브 안에 뭐 입었어?”
“나? 그냥 옷.”
“무슨 색인데? 보여 줘봐.”
뜬금없이 옷 색은 왜 물어보는지 모르겠으나, 이예주는 순순히 단추 두어 개를 풀어서 안에 입은 내의를 보여줬다.
“바지도 같은 검은색이야.”
답을 들은 베니가 별안간 주섬주섬 제가 입고 있는 로브의 단추를 풀며 말했다.
“잘됐다. 누나 로브 벗어서 나 줘.”
“왜?”
“내 로브는 회색이잖아. 더러운 게 묻으면 티가 많이 날거야.”
“대체 어딜 가는데 더러운 게 묻어? 우리 족장 방에 가는 거 아니었어?”
“맞아.”
단추를 다 푼 베니가 제 로브를 벗어서 침대 옆의 옷장 안에 쑤셔 넣었다.
로브 안에 입고 있던 것은 눈처럼 새하얀 일체형 옷이었다.
품이 넓은지 옷자락이 치마처럼 펄럭거렸다.
로브를 넣은 대신 베니는 옷장 안에서 무채색의 담요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벽난로 안쪽의 굴뚝을 가리키며 드디어 계획을 알려줬다.
“우린 이곳으로 올라 갈 거야.”
“뭐?!”
이예주는 당연히 대경실색했다.
“장난치지 마. 거길 어떻게 들어가?”
“천장이 각방 굴뚝이랑 다 연결되어 있어. 족장님의 방 벽난로 굴뚝으로 가면 아무도 모를 거야.”
“허. 장난 아니야?”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숙여 벽난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커먼 재가 더덕더덕 붙어 있는 굴뚝은 사람이 오가기에 매우 비좁고 더러웠다.
다시 허리를 피며 이예주는 베니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진짜로? 진심으로?”
“아, 누나 빨리 벗어서 줘. 시간 없다니까?”
미적지근한 이예주의 반응에 베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왈칵 성을 내었다.
이예주는 진저리를 쳤다.
비행선에서 화장실 환풍구를 기어 다니는 것도 모자라 이제 굴뚝까지 섭렵해야 한다고? 이런 염병할!
“여, 여길 어떻게 들어가! 이렇게 비좁은데…… 헐 대박 더러워.”
“들키지 않고 가려면 어쩔 수 없어. 그래도 신전의 지붕은 세모꼴이라 굴뚝만 지나면 천장 위 공간은 넓을 거야.”
방법이 그것뿐이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예주는 굴뚝을 거꾸로 올라야 하는 현실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제 로브 단추를 주섬주섬 풀었다.
로브를 벗어 베니에게 건네주자 그가 교환하듯 담요를 건넸다.
“추우니까 이거 덮어 누나.”
“하…….”
이예주는 결국 체념하며 현실을 받아들였다.
로브를 벗자마자 서늘한 몸 위로 담요를 단단히 두르는 동안 베니도 그녀의 로브를 입었다.
발목까지 오는 옷을 그녀보다 작은 베니가 입자 바닥에 질질 끌렸다.
로브가 더러워질게 걸렸지만, 그가 입은 내의는 티 하나 없는 새하얀 색이라 끌리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내가 밟는 거 보고 잘 따라와, 누나.”
채비를 모두 마친 후 베니가 먼저 벽난로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그는 여러 번 해본 일인 듯 쉽게 굴뚝 속으로 쑥 올라갔다.
“누나, 얼른 와.”
사라지는 베니의 종아리를 한참을 바라보던 이예주는 그의 재촉에 마지못해 벽난로 속으로 몸을 쑤셔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