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74)화 (276/319)

“……뭐?”

“뒤늦게 능력이 발현되는 경우엔 신전에 남을 수 있다며?”

뜬금없는 여자의 기행에 베니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하, 하지만…… 미래를 어떻게 보는지도 모르는데? 족장이 분명 꼬치꼬치 물어 볼 거야. 매개도 없이 미래를 어떻게 봤는지, 어떤 미래였는지…….”

“날 만난 후에 꿈에서 봤다고 해. 곧 검은 파편이 와서 신전 입구에 기둥을 3개 정도…… 아, 아니다. 4개 부신다고 그래.”

이예주는 확신했다. 

눈족들은 절대로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진 아이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과거를 보는 아이도 남겨두는 마당에 그보다 더 희귀한 미래를 보는 인재를 버릴 리 없을 것이다. 

비록 그 남겨두는 이유가 썩 좋은 느낌이 들지 않았지만. 

“난 네가 필요해. 족장 방까지 들키지 않게 무사히 들어갈 수 있게 해줘.”

이예주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계획이라 그런지 베니는 희게 질린 얼굴로 연신 입을 뻐끔거렸다.

“너무…… 엄청난 거짓말인데? 들통 나면 나도 누나도 죽을 거야.”

“걱정 마. 뒷일은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게.”

아무렴, 자신이 사라졌는데 그 남자가 이곳에 한 번도 안 와보기야 할까? 

이렇게 답 없이 내지른 것을 알면 베니가 기절할 것 같아 이예주는 여기까진 말을 해주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네 동생 곁에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알았어. 일단 시키는 대로 할게.”

영 망설이던 베니는 동생 얘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베니가 불안해 떠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위험한 일이었다. 

족장이 과연 속아 줄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지금 자신이나 베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언제 올지 모를 람을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족장에게서 시간을 번 후 그 안에 빵인지 브레든인지도 찾고 탈출로도 확보해야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이예주는 아까와는 달리 결연한 얼굴로 베니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내리 쳐. 힘껏.”

영문 모를 얼굴로 베니가 어색하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이예주는 씨익 웃었다.

“좋아. 거래 완료.”

*       *       *

많은 사람들이 건물 안에 잔뜩 몰려 있었다. 

새하얗고, 고풍스러운 조각상과 기둥들이 즐비하게 늘여선 곳. 

이예주는 이곳을 알고 있었다. 

신전이었다. 

그러자 미처 보지 못한 거대한 여신상이 보였다. 

한 손에는 끝이 모여있는 삼지창과, 다른 한 손에는 검은 파편을 들고 있는 여신상. 

사람들은 여신상이 있는 제단 앞에 몰려 있었다. 

그쪽에서 우걱, 우걱. 무언가를 씹어먹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이예주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문득 머리끝이 쭈뼛 섰다. 

온 몸을 타고 흐르는 불길함에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인간들이 제단 앞에 앉아 알 수 없는 것을 미친 듯이 먹고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선 인간들 틈바구니 사이로 구름처럼 시커먼 뭉텅이들이 보였다. 

우걱, 우걱. 인간들은 자리에 주저 앉은 채 저마다 환장하고 그것을 뜯어먹고 있었다. 

그 구름 같고 안개 같은 검정색의 희뿌연 물체들은 인간들보다 더 위쪽에서 계단과 제단을 타고 꾸물꾸물 흘러내렸다.

이예주는 그것들이 흘러나오는 방향을 거슬러 고개를 들었다. 

여신상의 앞에 놓여 진 황금색 의자, 그 위에 남자가 권태로운 자세로 앉아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검은 안개를 뜯어먹는 인간들의 모습이 퍽 지루한지 남자가 짐짓 나른한 얼굴로 턱을 괬다. 

하지만 시뻘건 눈에는 소름이 끼칠 만큼 아무런 감흥도 담기지 않았다.

그의 발밑에서 검은 안개들이 마치 생명수처럼 끝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멍하니 그녀가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기괴한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끼긱, 기기기긱― 

이예주는 소리를 따라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의 얼굴보다도 더 한참 위로 고개를 들어서야 소리가 나는 근원지를 볼 수 있었다. 

여신이 들고 있는 삼지창이 움직이면서 나는 소리였다. 

끼긱, 끼기기긱. 

꼭 사막 괴물이 내는 소리와 같은 칠판 긁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사선으로 들렸던 창이 기어이 수직이 됐다. 

이예주는 날카롭게 벼려진 창 아래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의자 등받이에 눕듯 젖혀 있는 남자의 가슴에 창이 수직으로 내리 꽂혔다. 

퍽― 사방으로 피가 튀었고, 남자는.

아니, 람은…….

“흐읍.”

이예주는 깊은 숨을 들이 마시며 눈을 떴다. 

물고문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꺽꺽 막혔던 호흡이 터져 나왔다. 

쿵쾅쿵쾅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쳤다. 

연신 헐떡이던 그녀는 부릅 뜬 눈으로 중얼거렸다. 

“예지몽인가?”

아니야. 그러기에 꿈이 너무 현실감이 없었다. 

게다가 예지몽을 꿨을 때처럼 잔상이 생생하게 남지 못했다. 

벌써부터 아스라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꿈의 잔상을 좇으며 이예주는 시린 손끝을 연신 주물렀다. 

열심히 꿈 자락을 붙잡아 보았지만 뜨문뜨문 기억나는 것은 여신상, 삼지창, 그리고 창에 가슴이 뚫린 람 뿐이었다.

“하…… 온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개꿈을…….”

여전히 온기가 돌지 않은 손으로 마구 마른세수를 한 이예주는 사라지는 꿈과 함께 점점 잦아드는 가슴을 느끼며 손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베니를 보내고 방 안에 있는 욕실에서 씻은 후 기절하듯 잠든 것이 기억났다. 

아직 이른 새벽인 듯 커튼이 쳐진 테라스 창에서 희끄무레한 푸른빛이 새어 들어왔다. 

몸이 축축 늘어지는 기분에 다시 누울까 하던 이예주는 침대의 유혹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부터 그녀는 무척 바쁠 예정이었다. 

베니가 족장에게 성공적으로 거짓말을 쳤는지 확인해야했고, 그렇다면 알리자린의 동생을 찾으러 갈 것이다. 

근데 만약 베니가 구라를 못치는 성격이라 족장 놈에게 안 통하면 어떡하지…….

“아 몰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지 뭐.”

씻기 위해 욕실로 향하면서 이예주는 애써 불안함을 떨쳐냈다.

*       *       *

아침은 회색 로브를 뒤집어 쓴 사제가 방으로 가져다준 스프와 빵으로 간단히 때웠다. 

그에게 슬쩍 일정을 물어보니 아이들은 준비 되는대로 이른 아침 신전을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거 나쁜 새끼들. 아침부터 내쫓다니 너무하네.”

좀 더 따뜻한 방 안에서 미적거리고 싶었던 이예주는 그 소리에 서둘러 식사를 해치우고 1층으로 내려갔다. 

너무 서두른 탓일까. 막상 내려선 홀은 텅 비어 있었다. 

뚜벅뚜벅.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지 유독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만 제단에 다다를 때까지 쥐새끼 우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어제까지 별 생각 없이 오고갔었는데, 간밤에 괜한 꿈을 꿔서 그런 건가. 이예주는 여신의 발 앞에 황금 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꿈속에서 람은 왜 여기 앉아 있었던 걸까. 

분명 앞에 더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황금 의자에서 수직으로 시선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워낙 크기가 거대해서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들었다. 

아니, 사실은 무의식중에도 확인하기가 겁이 났다. 

꿈과 같이 여신이 들고 있던 삼지창이 아래를 향해 수직으로 세워져 있을까봐. 

그래서 간밤에 꾼 기억도 잘 안 나는 개꿈이 예지몽이라도 될까봐.

“……하.”

하지만 우습게도 용기를 내 확인한 여신의 손은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창끝은 반대편 손에 들린 검은 파편에게 겨눠진 듯, 아닌 듯 애매한 허공을 향해 있었다. 

허탈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역시 아니었다. 그럴 리 없지. 예지몽을 잘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더더군다나 람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롱기누스의 창을 아시나요?”

“헉!”

그때 누군가 소리 소문이 다가와 옆에 섰다. 

이예주는 어깨를 퍼덕거리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휙 몸을 돌리니 이곳에 와서 지긋지긋하게 본 회색 로브였다. 

아침나절부터 음침하게 뒤집어쓴 후드 사이로 금발이 삐쭉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인기척 좀 내고 다녀요! 간 떨어질 뻔 했네.”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건가. 

방금 전 까지 아무도 없었던 제단 앞에 홀연히 나타난 인물을 노려보며 이예주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슴이 진정되자 이번에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또 너냐. 가뜩이나 꿈에 나온 여신상의 기괴한 행태에 기분도 찜찜한데 그 여신과 같은 얼굴의 여자와 또 신경전을 해야할 생각에 벌써부터 진저리가 났다.

모든 시간족들이 그러긴 했지만, 쟈니아와 하는 대화는 특히나 더 이질감이 느껴졌다. 

같은 주제로 이야길 나누는 것 같아도 서로 완전 다른 말만 하는 느낌. 

이예주는 이미 첫만남부터 여자의 말을 이해 못해 반쯤 흘려듣고 있었다. 

여자의 찝찝한 화법으로 인해 팔족 땅에서 본 동화책 속 시간의 여신에 대한 이미지도 많이 변했다. 

“운명의 창이라고도 합니다. 용암 폭발이 일어나던 시기보다 훨씬 이전부터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믿어온 종교의 신을 찌른 창이죠. 혹시 예수를 아십니까?”

그게 무슨 도를 아십니까 같은 질문이야. 

과거에서 온 인간인 이예주는 예수가 언제 태어났는지, 태어난 날이 언젠지도 아주 잘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몰라요.”

“종교를 믿는 인간들은 수세기 전부터 무형의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존재하길 원했지요. 현신화한 존재가 바로 예수에요.”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쟈니아는 나긋나긋하게 설명했다.

“전설에 따르면, 예수를 창으로 찔렀던 병사는 시력이 아주 나빴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을 창으로 찔러서 흐르게 된 피와 체액이 그의 눈에 튀자 시력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고 하지요.”

“…….”

“하지만 병사가 신을 찌르게 된 경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신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란 말도 있는데…… 저는 알아요.”

“……뭘요?”

“그 병사가 신을 잡아먹기 위해 창으로 찌른 것을. 피와 살을 씹어 먹고 그 힘을 취하려 그랬던 것입니다. 그를 먹으면 신이 되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허.”

완전히 제멋대로인 해석에 이예주는 기가 막혀 실소했다. 

어디서 들어본 듯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긴 했다. 

성경의 내용이야 워낙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졌으니까…… 

그러나 이예주가 아는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 그 어디에도 예수를 잡아먹으려 들었던 사람들은 없었다.

“왜 해석이 그렇게 돼요? 신을 잡아먹느니, 신이 되려느니…… 모든 종교가 다 당신네들 같은 건 아니에요.”

그녀는 여신상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비소했다. 

시간족의 전설을 담은 동화책에서 인간들은 시간의 여신에게 축복을 내려 받아 각각의 힘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영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시간족들은 다른 이의 힘을 뺏기 위해 힘이 담긴 부위를 산채로 식인 하는 것인가? 

축복으로 시작했으니 힘의 전이도 축복으로 이어져야지. 

게다가 눈족 놈들은 검은 파편의 검은 안개까지 게걸스럽게 뜯어먹었다. 

이예주는 잊지 않았다. 

그것은 과거 영상에서 내핵에 들어서자마자 미친 듯이 검은 안개를 씹어 먹으며 검은 파편에게 다가서던 천 년 전의 눈족 여족장을. 

고개를 돌리자 바라보자 천 년 전의 여족장과 똑 닮은 외양의 여자가 보였다. 

현 족장의 딸. 

뭔진 모르겠지만 신전의 대사제에 여신과 똑같은 얼굴.

2017년에 풍선 터지듯 배가 터져 처참한 몰골로 죽은 눈족 여족장을 이미 보았는데, 쟈니아를 바라보자 갑자기 참을 수 없이 불쾌함이 턱밑을 맴돌았다. 

“인간들은 초월적인 존재의 유무를 확신하기 위해 항상 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하곤 하지요. 예수는 대표적인 신의 현신입니다.”

“정말…… 듣도 보도 못한 논린데요.”

예수는 하나님 아들이 아닌가? 

이예주는 쟈니아의 새로운 헛소리에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했다. 

여자는 개의치 않고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위를 가리켰다.

“우리들이 모시는 신에게도 이와 비슷한 성창이 있지요.”

이예주는 여자의 손가락질을 따라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끝에 여신의 손에 쥐어진 창이라기보단 작살에 가까운 괴상한 모양새의 삼지창이 여신의 손에 쥐어 있었다. 

여태껏 저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거창하게 늘여놓았단 말인가. 

“아직 창의 이름이 지어지지 않았어요. 어떤 이름이 어울릴 것 같은가요?”

여자가 답지 않게 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게 뭔가. 창의 모양새는 보통의 삼지창과는 거리가 멀어서 창보단 작살이라 부르는 것이 옳았다. 

이예주는 그런 속내는 애써 감춘 채 “난 무교라 그런 거 잘 몰라요.”하고 성의 없이 대꾸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검은 파편과 싸울 무기치고는 조악해 보인다는 건 알겠네요.”

“오, 저것은 그를 공격하려기 위한 용도가 전혀 아닙니다.”

“그러시겠죠.”

놀란 듯 쟈니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예주 그러기엔 창의 각도가 애매한 것 아닌가 싶어 냉소했다.

“당신은 믿을 수 없겠지만, 우리는 꽤 오래전부터 검은 파편에 대한 대항을 포기했습니다.”

여자가 진중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음이 비비꼬인 상태라 또 다시 비꽈주고 싶었지만 분하게도 그 말은 이예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말이 맞았다. 

검은 파편의 눈속임을 할 약을 개발한 다리족은 그것을 전 세계에 배포하여 그와 정면승부를 하려는 엄청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눈족들은 딱히 다리족처럼 정체를 드러내놓고 나서는 행동을 한 적은 없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이예주는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연신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힘겹게 굴렸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의중을 파악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왜 이런 소리를 자신한테 늘여 놓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신과 눈족이 이른 아침부터 태평하게 종교에 관한 담소를 나눌만한 사이도 아니고. 

쟈니아와의 대화는 대체적으로 잘 이해하기도 힘들고 종잡을 수도 없었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찜찜하고, 그렇다고 깊게 파고들기에 딱히 걸리는 단어가 있는 것은 아닌데.

“우린 인간들을 핍박하는 그조차 우리의 신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

“여신의 현신인 그분께 어떻게 대항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여자가 지금 하는 말은, 의중을 파악하지 못해도 상관없을 만큼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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