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긴긴 복도를 가로질러 제단이 있는 중앙 홀까지 빠르게 걸었다.
분명 아까 낮잠도 잤던 것 같은데, 꼴도 보기 싫은 부녀에게 번갈아가며 시달리다보니 남아 있던 진도 다 빠져나간 것처럼 몸이 축 가라앉았다.
이젠 봐도 흥미가 일지 않는 거대한 여신상을 지나쳐 계단에 올랐다. 4층에 다 오르니 저도 모르는 사이 호흡이 거칠어져 씩씩대고 있었다.
망할. 엘리베이터라도 좀 설치해두지.
이예주는 여신의 오른쪽 어깨선과 이어진 복도, 가장 끝에 위치한 제 방 쪽으로 걸었다.
계단까지 너무 전투적으로 올라와서인지, 방으로 향한 걸음걸이에 힘이 빠졌다.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그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인간들은 모두 1층에서 밥을 먹고 있을 테니 당연했다.
긴장이 풀리니 아까는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전은 다리족의 비행선에 비하면 공간 활용이 굉장히 실용적이지 못했다.
비행선의 B구역과 맞먹는 넓이였지만, 방도 몇 개 없었다.
방문과 방문 사이의 넓은 벽 사이에는 석고로 만들어진 알 수 없는 조각상들이 존재했다.
자칫 호화롭기까지 한 그 모습에 이예주는 조금 허탈하게 웃었다.
하긴 방이 많을 필요가 없을지도.
매년 사람들을 버려서 그런가.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화장실과 누울 자리 밖에 없었던 다리족의 좁은 객실과는 또 다른 눈족들의 주거지는 참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같은 시간족이라도 이렇게 성향이 다르구나.
멀거니 크고 작은 조각상들을 구경하며 걷던 이예주가 마침내 제 방문 근처에 도착했다.
마지막인 그녀의 방문 옆 복도 끝에는 미술책에서나 볼법한 목과 양 팔이 없는 전신조각상이 있었다.
“밤에 나왔다가 잘못 보면 기절하겠네…….”
원래 교회같이 종교 관련된 곳에 더 귀신이 들끓는다 했다.
어차피 못 돌아다니게 막는 것도 아니니 신전 탐색과 탈출로 확보는 웬만하면 훤한 대낮에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문고리를 잡아 돌렸을 때였다.
“악!”
분명 팔이 없던 조각상에서 불쑥 팔이 튀어나와 이예주의 옷자락을 억세게 부여잡았다.
방금 전까지 귀신 생각을 하던 터라 그녀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친! 뭐……!”
꽥 괴성을 지르려던 이예주의 입을 막는 듯 조각상 옆에 쭈그려 앉아 있던 누군가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차 할 새 없이 방문을 열어 그녀를 마구 끌고 들어갔다.
자신보다 키가 한참 작은데도 옷자락을 끌어당기는 힘이 어찌나 센지, 이예주는 반항도 못하고 그저 어버버 제 방으로 끌려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예주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뭐,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해가 져 어두컴컴한 방 안, 그녀를 마구잡이로 끌고 들어온 인영이 두 눈을 성성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즈가 선택받은 아이가 됐어.”
앳된 얼굴의 남자 애가 속삭이듯 웅얼거렸다.
온실에서 유일하게 이예주를 살갑게 맞이해준 여자 아이의 오빠였다.
“하, 얘야. 인기척이라도 좀 내지, 조각상에는 왜 숨어있고 그…….”
“당신 때문에 리즈가 남게 됐어!”
제 말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베니가 좀 더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이예주는 뜬금없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왜 하나 같이 가만히 있던 내 머리채를 못 잡아 안달인 거지.
짜증이 났지만 그 심경을 고스란히 내보이기에 남자 아이의 얼굴이 너무나도 절박해보였다.
에휴. 이예주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결국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데.”
“당신의 과거를 엿 본걸 토미한테 들켰어. 걔가 대사제님께 리즈가 과거를 본 것을 일러버렸어.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에 관한 과거라서. 그래서 리즈는 남게 되었는데 그게 괜찮은 건지 물어 볼 사람이 없어. 아버지도 안계시고, 장벽 밖으로 한 번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데 다시 돌아온 건 브레든 밖에 없었으니까!”
“…….”
“아버지가 선택받은 아이가 되는 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고 했어. 아버지가 집에 3일 이상 돌아오지 않으면 리즈를 데리고 어떻게든 장벽 밖으로 나가라고 했는데, 그럴 틈도 없이 끌려왔어. 내가 나이가 가장 많았거든. 근데 리즈가 남게 되고 나만 장벽 밖으로……!”
베니는 자신도 무슨 말을 내뱉는 건지 모른 채 속사포처럼 두서없이 쏟아졌다.
그는 문득 제 어깨에 와 닿는 손길 덕분에 말을 멈출 수 있었다.
“진정해.”
“…….”
“베니라고 했지? 알았으니까 진정해, 베니. 진정하고 천천히 얘기해. 들어줄 테니까.”
제 이름을 불러주는 다감한 목소리에 넘어가기 직전이었던 호흡이 거짓말처럼 잦아들기 시작했다.
신전 사람들은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어차피 버려지고 잊혀질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베니는 꽉 쥔 주먹을 풀고 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원래 이러려던 것이 전혀 아니었다.
원하는 것만 간결하게 주고받은 후 바로 자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녁 시간 내내 초조한 마음을 억누른 채 숨어 있다가 여자를 마주하니 불안함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자신은 당장 내일 장벽 밖으로 쫓겨나는데, 혹시 여자가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무표정한 얼굴로 복도를 걸어오는 그녀를 보자 어떻게 서든 제 상황을 설명해서 동정심을 불러일으켜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수가 먹힌 건지 알 수 없으나, 여자는 방금 전 보다 좀 더 심각한 눈으로 베니를 내려보았다.
“선택받은 아이가 뭐야?”
“……쓸모없는 눈족 아이들이 매년 버려지는 건 알고 있……죠?”
베니가 뒤늦게 존댓말을 쓰며 눈치를 봤다.
다 해놓고 이제 와서. 이예주는 비죽 웃으며 선심 쓰듯 툭 말했다.
“신경 안 쓰니까 하던 데로 해.”
그러자 베니는 크게 안도하며 곧 바로 하던 데로 했다.
“매년 버려지는 아이들 중에서도 뒤늦게 능력이 발현되는 경우가 있어. 그런 애들은 굳이 버려지지 않고 신전에 남을 수 있댔어.”
“그러니까…… 네 동생이 이번에 그런 경우가 됐다는 거지?”
이예주의 물음에 베니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당신과 거래를 하려고 찾아왔어. 나와 거래해줘.”
“거래? 무슨 거래?”
“검은 파편은 조건을 걸고 거래를 하잖아. 당신, 검은 파편의 가까운 부하라며?”
“부…… 부하? 어떤 새끼가 그런 망발을 해!”
부하 소리에 이예주가 눈을 번뜩 부라렸다.
흉흉한 눈초리에 베니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 그냥 소문이요…….”
결국 아이의 입에서 다시 존댓말이 튀어나오고 나서야 이예주는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거래가 아니라 계약을 하는 거야.”
“거, 거래든 계약이든! 뭐든, 나랑 원하는 것을 교환해줘.”
베니는 무척이나 절박해 보였다.
얼마나 급한지, 어느 틈에 자신의 로브자락 까지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이예주는 문득 알리자린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체념했을 때 나타난 ‘구원자’란 존재에 울분을 퍼붓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 구원자 아니야.”
이예주는 제 옷자락을 잡은 베니의 손을 슬며시 떼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회피와 동시에 정확한 현실이었다.
제게 거래를 원해봤자 그녀는 아무것도 줄 게 없었다.
하지만 암묵적인 그녀의 거절까지 예측했던 걸까.
베니는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브레든이 어디 있는지 궁금하다며?”
“걔가 누군데?”
“알리자린 누나의 동생.”
베니에게 차갑게 현실을 일깨워주려던 이예주는 되레 제가 된통 당하는 기분이었다.
일순 머리가 얼얼해졌다.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 굳이 붙잡혀 체류 하는 이유.
동생을 두고 도저히 끔찍한 다리족에서 벗어나지 못하겠다던 알리자린.
그런 그녀를 외면하고 끝내 혼자 살아남은 자신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그녀의 동생을 외면할 수 없었다.
비록 그것이 이예주를 수렁으로 빠트릴 눈족의 간악한 흉수라 해도.
“그 애가…… 그 애가 살아있어?”
“살아있어. 얼마 전에 신전에 실려 온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어린애 주제에 진중한 얼굴로 베니가 확언했다.
이예주의 얼굴이 환희인지 절망인지 모를 감정으로 일그러졌다.
“내 부탁을 들어주면 브레든이 어디있는지 알려줄게.”
“네가 원하는 건 뭔데?”
“나는 내일 장벽 밖으로 가야해. 리즈는 신전에 혼자 남을 거야. 그니까 당신이 리즈를 보호해줘.”
이예주는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욕 나올 만큼 혐오스러운 인간들이지만, 베니 남매에게는 태어난 고향이자, 일족이 아닌가?
염병할만큼 추운 허허벌판으로 쫓겨나는 것보단 차라리 악착같이 남아 있는 것이 나았다.
“네 동생이 여기 남는 게 더 좋은 거 아니야? 밖에는 아무것도 없어. 진짜 눈뿐이야. 잔뜩 껴입고 나가도 하루도 못 견디고 얼어 죽을 거야.”
이예주의 말에 베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베니를 포함한 모든 눈족 아이들은 태어나서 쫓겨나기 전까지 한 번도 장벽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추위는 장벽 밖이나 안이나 매한가지였다.
굳이 여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얼마나 혹한의 환경일지 어림짐작이 됐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말했어. 선택받은 아이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장벽 밖으로 쫓겨나는 편이 낫다고.”
“왜?”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 말을 할 때 아버지의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더 물어 볼 수 없었어.”
궁금했지만 당사자도 모른다니 별 수 없었다.
그녀가 아직 거래를 하겠다고 수락한 것도 아니건만 베니는 침울한 얼굴로 순순히 알고있는 것을 불었다.
“브레든은 족장님의 방에 있을 거야. 혼절한 채 실려 와서 족장님의 방으로 옮겨지는 것을 훔쳐봤거든.”
“…….”
“리즈를 부탁해. 당신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어.”
나를 뭘 믿고?
불쑥 그 말이 치밀어 올랐지만, 안 그래도 불안함에 떨고 있는 아이를 더 몰아 붙일 생각은 없었다.
이예주는 덩달아 기분이 저조해지는 것을 여실히 느끼며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럼 너는?”
베니는 피날 만큼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직 여물지 못한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이예주의 눈에도 잘 보였다.
아버지란 사람에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거겠지. 굳이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장 리즈를 데리고 도망가고 싶지만…….”
“…….”
“일단은 장벽 밖으로 나간 다음에 어떻게 해서든 다시 되돌아올 거야. 그래서 리즈를 데리고 여기서 나갈 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리즈를 보호해줘.”
꼭 지켜줘야 돼. 여러 번 신신당부하는 말에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베니 또한 아직 어린 나이였다. 기껏 많아봤자 초등학생 고학년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제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든 동생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하지만 정말로 슬프게도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알리자린의 동생만으로도 너무 벅찼다.
그 애를 만나면 바로 데리고 탈출할 계획이었는데, 그 와중에 리즈를 제대로 보호해줄 수 있을지 조차 의문이었다.
구원자로 깎듯이 대우받았던 다리족과는 달리 여기서 이예주는 인질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참 대책에 없네. 암담한 현실에 한숨이 솟아올랐지만 가까스로 그것을 눌러 내렸다.
지금 가장 힘들고 불안한 것은 자신이 아닌, 어린 동생을 떼어놓고 가야 할 베니였기에.
“……족장의 방은 어디 있어?”
“맞은 편 복도에서 이 방과 마주보고 있는 끝 방이 족장님의 방이야. 하지만 조심해야 돼. 족장님은 모든 과거를 보시기 때문에 문고리를 만지면 누가 방 안을 들어가려 했다는 것을 금방 알 거야.”
“모든 과거?”
“응. 가끔 미래도. 예언도 하시니까.”
잊고 있었던 기억하나가 떠올랐다.
현 눈족 족장이 이례적으로 과거와 미래도 다 볼 수 있는 대현자라 했던가?
그럼 그 딸인 쟈니아의 포지션은 뭘까.
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한숨을 내쉬며 이예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표정을 곡해한건지 베니가 고개를 수그렸다.
“미안해. 내가 남았다면 어떻게 서든 도와줬을 텐데. 몰래 들어가는 방법은 리즈한테 일러두도록 할게.”
베니가 사과를 해야 할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그냥 현실이 참담하고 이 어린애들을 버리려는 눈족들이 좆같은 것인데.
그런데도 베니는 이예주보다도 더 의연하게 상황을 대처해 나가고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해서.
사과를 끝으로 베니는 더 이상의 말없이 방을 나서려 들었다.
어느새 방 안이 완전히 깜깜해져 있었다.
저보다 작은 인영이 곁을 스쳐지나 문을 향할 동안 이예주는 그저 입술만 잘근 잘근 씹고 있었다.
마침내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내일 아침에 족장을 만나서 미래를 봤다고 해.”
이예주는 벼락처럼 달려들어 베니의 옷자락을 잡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