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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매드 (272)화 (274/319)

굳이 경고하지 않아도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예주는 쟈니아의 경고가 별로 와 닿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비단 족장뿐만 아니라 쟈니아를 포함한 모든 눈족 인간들을 경계할 예정이었다. 

하여간 이상한 놈들이야. 거대한 신전을 세울 만큼 강한 신앙심이 혈연과 살인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다니. 

그녀가 현대에서 주워듣던 종교와는 전혀 달랐다. 

곰곰이 쟈니아의 말을 되새기고 있자, 여자가 이예주보다 먼저 등을 돌렸다.

“그와 별개로 순록 구경은 해도 괜찮아요. 단 환한 낮에 만이요.”

“…….”

“깜깜한 밤에는 누군가 순록을 흉내 내 당신을 계단으로 오르게 할 수도 있답니다.”

작별 인사와 같은 말을 내뱉고는 여자가 총총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자의 말에 반사적으로 누군가 어둠 속에서 짐승 흉내를 내며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상상이 떠올라 소름이 확 끼쳤다. 

왜 저년은 만날 때마다 재수 없는 소리만 지껄이고 떠나가는 거람. 

점점 아래로 더 멀어지는 회색 로브를 노려보다가 이예주가 소리쳤다.

“난 이곳에서 언제 나갈 수 있어요?”

여자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흘끔 뒤를 돌아보며 답했다.

“글쎄요.”

“…….”

“당신이 구원자가 아닌 것이 완전히 밝혀졌을 때가 아닐까 싶네요.” 

람이 오면, 이라 했던 눈족 족장과는 전혀 다른 답이었다.

이예주는 쟈니아가 먼저 계단을 내려간 뒤에도 남아서 한참 동안 여자의 말을 되새겨보았다. 

하지만 참 기묘하게도 꽤 오래간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남는 게 별로 없었다. 

여자의 입을 통해 들은 눈족에 관한 정보도 이미 모두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여신상과 똑 닮은 여자와의 대화를 나눈 후부터 기분 나쁘고 질척한 것들이 몸에 달라붙은 기분이 들었다. 

애써 그것들을 털어내듯 고개를 젓던 이예주는 아찔한 구덩이를 등지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쪽 대륙은 해가 빨리 졌다. 

어느새 가무룩한 어둠이 내려앉은 텅 빈 공간은 옛 신전 터가 아닌 무덤 같아 보였다. 

스산한 기운이 감돌자 오싹한 이예주는 이내 꽁지가 빠지게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다시 철창을 지나 온실로 돌아갔을 때 아이들은 없었다. 

대신 이예주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눈족 인간 한 명이 그녀를 맞이했다. 

“만찬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를 식당까지 안내했다. 

자신이 뭔 사제라고 소개 했던 것 같은데 흘려들어서 기억에 남지 않았다. 

어차피 후드를 너무 깊게 뒤집어 써 얼굴을 볼 수도 없으니 기억할 필요 없겠지.

이예주가 온실까지 가는 길에 지나쳤던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아이들은 엄청나게 긴 식탁에 마주보고 가지런히 앉아 조용히 침만 삼키고 있다가 이예주가 들어오자마자 눈을 미친 듯이 빛냈다. 

기다린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그녀는 왜 애들과 같이 먹어야 하는 건지 생각하기도 전에 그 눈빛에 못 이겨 서둘러 식탁 가까이 다가가다가 멈칫했다. 

상석이 비어 있었다. 

그 옆에 꼴도 보기 싫은 눈족 족장이 아이들과 같이 나란히 앉아 이예주를 맞이했다.

“드디어 오셨군요. 아이들이 꽤 많이 기다렸습니다.”

밥상머리 앞에서도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은 절로 짜증을 자아내게 했다. 

그냥 안 먹는다고 하고 올라갈까. 

비어 있는 상석이 꼭 자신의 자리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원래 이런 자린 족장이 앉는 게 아닌가? 게다가 능글맞은 족장 놈과 같이 겸상할 만큼 제가 비위가 좋은 것도 아닌데. 

잠시간 고민하던 이예주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며 초롱초롱 빛내는 느껴져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온실에서 가장 먼저 제게 달려와 밝게 인사하던 리즈라는 여자 아이가 족장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빨리 앉으라고 애원하는 것 같은 눈동자에 못 이겨 이예주는 어쩔 수 없이 착석했다. 

모든 이의 시선이 제게 쏠렸다. 

여간 껄끄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로브를 뒤집어 쓴 사제들이 트레이에 음식을 가져와 날랐다. 

식탁 위에 올라오는 접시들이 꽤나 호화롭고 풍성했다. 

스테이크부터 시작해 많은 양의 고기가 다양한 방법으로 조리 되어 있었다. 

다 같이 굶어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이들을 내버린다는 풍속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들지요.”

눈족 족장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가만히 앉아 있던 아이들이 음식에 달려들었다. 

식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하나같이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손으로 마구 음식을 퍼먹었다. 

굶은 사람처럼, 이 아니라 실제로 굶었겠지. 

이예주는 제 오른쪽에 앉아 맨 손으로 고기를 마구 쥐어뜯어 먹는 리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불현듯 아이의 옆에 아이를 보호하던 오빠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입맛에 맞지 않습니까?”

숟가락조차 들지 않는 이예주를 보며 눈족 족장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이예주는 리즈에게서 시선을 옮겨 왼편에 앉아 있는 족장을 바라보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방탱이 눈이 마주치자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밥 안 먹어요?”

“내일이면 먼 길을 떠날 아이들만을 위한 만찬이니 다른 이들은 탐하지 않는 것이 옳지요. 그리고 여신을 모시는 자들은 고기를 먹지 않으니 걱정 놓으셔도 됩니다.”

그러면서 본인은 칼과 포크를 들어 제 앞에 놓여 진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족장은 그렇다면 여신을 모시는 자가 아니란 말인가. 

작게 잘린 고기를 입에 넣고 씹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예주는 예의상이나마 포크를 들었다.

“애들이 다 먹기엔 고기가 많은 것 같은데요.”

“오랜만에 순록을 잡았습니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순록을 잡아왔지요.”

안 그래도 없던 입맛이 싹 달아났다. 

이예주는 들었던 포크를 다시 내려놨다. 

그때 사제 둘이 눈족 족장과 이예주의 옆에 은색의 포도주 잔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술병대신 이상한모양의 가죽 포대를 들고 잔에 쏟았는데 와인 향이 아닌 비릿한 냄새가 훅 풍겼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냄새였다. 

있는 대로 인상을 쓴 이예주에게 족장이 잔을 들어보였다.

“순록의 신선한 피는 무한한 생명을 준다고 합니다. 드시겠습니까?”

“됐어요.”

혐오 서린 눈빛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눈족 족장은 술을 들이키듯 뻔뻔스레 순록의 피를 들이켰다. 

쟈니아 계집이 누굴 닮아 상대방의 말이나 표정 따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최소한 이예주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하던 다른 시간족과는 상이한 태도였다.

순록의 피를 모조리 마신 족장이 잔을 내려놓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시뻘건 피가 더덕더덕 묻어 있는 늙은이의 잇몸이 역겨웠다.

“내일은 대사제를 대신 해 이 순록 피가 희석된 물로 떠날 아이들에게 세례를 해주셔야 합니다.”

“제가 왜요?”

이예주는 노인의 뜬금없는 말에 눈을 희게 뜨며 되물었다.

“신전에 있는 순록들은 희미하게나마 흰 순록과 피가 이어져 있지요. 세례를 통해 영생을 산다는 흰 순록의 가호가 홀로 서는 아이들에게 함께 할 것입니다.”

“그니까 제가 왜요. 인질이라면서요? 인질이 어떻게 세례를 해요.”

“아직까지는 구원자님이 아니십니까?”

이런 미친놈을 봤나. 허. 이예주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버리는 마당에 세례니 영생이니. 

사람 가죽을 뒤집어쓰고 어떻게 이렇게 낯짝이 뻔뻔할 수가 있을까.

“구원자에게는 불안해하는 인간들을 달래줄 의무가 마땅히 있기 마련이지요.”

이예주는 답 하지 않고 무시했다. 

모락모락 익어 김이 나던 고깃덩이는 이제 거의 식은 모양인지 더 이상 김이 나지 않았다. 

달그락, 달그락. 여전히 아이들은 음식을 입에 쑤셔 넣기 바빠 식당 안은 전체적으로 어수선 하기 그지 없었다.

미친 눈족 족장의 헛소리를 듣고 있자니 문득 제가 여기 앉아 뭘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구원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제가 내렸습니다.”

“…….”

“미래를 봤지요.”

무시하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멍이나 때릴 요량이었던 이예주는 자신 또한 아는 얘기야 어쩔 수 없이 다시 고갤 돌려 늙은 족장을 바라보았다. 

이런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가 시간족 내부에선 예언을 내리는 대현자라고 불리다니.

불손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도 노인은 이예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따위 대우를 해놓고, 내가 검은 파편을 죽이고 당신들을 지옥 불에서 구해줄 것 같아요?”

“오. 당신께 그런 것을 바란 적은 없습니다.”

“…….”

“내가 내린 예언은 당신을 염두 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갑자기 나타난 당신은 방해꾼에 가깝지요.”

족장은 그녀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과장된 손 사레까지 저었다. 

말투 하나, 행동 하나가 꼭 자신을 물어뜯기 위해 안달이 난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그럼 누구를 염두에 뒀는데요?”

“검은 파편을 해할 수 있는 자, 이미 동화책과 다리족을 통해서 보지 않았습니까?”

“몰라요. 누군데요.”

“여신의 환생만이 가능한 일이지요.”

관심이 없어 성의 없이 물은 말에 으레 당연하다는 듯 진지한 어투의 답이 돌아왔다. 

이예주는 눈족 족장의 대꾸에 그냥 어이가 없어 웃었다. 검은 파편을 해할 수 있는 자라면 맞았다. 

동화책에서 여신에게 힘을 받은 눈족의 우두머리가 끝까지 검은 파편을 물어뜯었고, 다리족에서 본 과거 영상에서도 눈족 여 족장이 검은 파편을 삼켰지. 

그리고 배가 터져 처참하게 죽었다.

그러고 보니 검은 파편을 직접적으로 어찌한 것은 다 눈족 놈들이잖아? 

여준이 말했다. 

눈족들은 검은 파편을 소유하는데 엄청난 집착을 한다고.

하지만 이예주는 놈들의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람이 오면 끽 소리도 못하고 쓸릴 것들이기도 하고…… 

또 람이 그랬다. 

눈족 놈들 중에서 살아 있는 기척이 느껴지는 놈들은 거의 없다고. 

일족의 수도 적고, 스스로 만든 장벽에 갇혀서 자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시간을 멈춘 땅에서 벗어 날 수 없는 팔족들 처럼.

“그럼 그 여신의 환생은 쟈니아고요?” 

생각에서 깨어난 이예주는 족장을 흘겨보며 한껏 빈정거렸다. 

우습게도 그 말에 족장의 입이 꾹 닫혔다. 

여신과 똑 닮은 얼굴의 쟈니아가 여신의 환생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건지, 아니면 제 딸을 신격화 하여 구원자로 만들려는 속셈이 있는 건지는 알 바 아니었다.

이래서 신경을 쓰지 않는 다는 거야. 

눈족들과의 대화는 그냥 말장난 같았다. 

이미 아는 얘기를 돌려, 돌려 서로의 의중을 캐묻는 것 같은 말장난. 

환생은 무슨. 뼛속까지 무신론자인 이예주는 그따위 것 믿지 않았다.

눈족 족장이 입을 다물자 그녀는 미련 없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로인해 본의 아니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눈동자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구원자님이에요?

언제부터 족장과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건가. 

우걱우걱 밥을 먹기 바쁜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여자 아이는 양념이 뚝뚝 흘리는 손을 멈춘 채 눈을 빛내며 이예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족장과의 설전과는 달리 이예주는 크게 당황했다. 

족장을 곁눈질 했지만 노인은 깊은 생각에 잠긴 건지 리즈가 말을 건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응?”

대답을 재촉하는 목소리에 이예주는 하는 수 없이 말을 돌렸다.

“오빠는 어디 갔어?”

“베니 오빠는 배가 아파서 저녁 먹기 싫댔는데…… 근데 정말 언니가 우리를 구원해 주려고 신전에 온 거야?”

족장의 눈치를 보던 것은 비단 이예주 뿐만이 아니었는지 리즈가 조심스럽게 속삭이며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을 낮췄다. 

다행히 시끄러운 그릇 부딪히는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이예주는 온전히 자신에게 향해 있는 리즈의 파란색 눈동자를 보며 문득 자신이 비행선에 두고 온 여자애 한 명을 떠올렸다. 

그땐 몰랐지만, 이제 이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현실에 절망하고 체념했음에도 혹시나 모를 구원을 향한 희망, 기대, 바람. 

왠지 목이 막혔다. 

자신은 그 모든 것을 이뤄줄 수가 없는데. 

알리자린의 동생이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면 람이 올 때 그 애만 데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갈 건데. 

“……아니야.”

목소리를 내는 게 힘들지 언정 부정의 말을 내뱉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천진한 얼굴에 어린 아이 답지 않은 실망이 천천히 퍼져 나갔다. 리즈가 되물었다.

“아니야?”

“응. 아니야.”

끼익- 그 말을 끝으로 이예주는 불편한 자리를 피해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끌리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듯 족장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더 드시지 않구요.”

“난 순록 안 먹어요.”

그러니 너나 많이 처먹어라. 

차갑게 일갈한 이예주는 그대로 식당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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