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70)화 (272/319)

혹시 나를 데리러 온 건가. 

람과 함께, 나를.

“순심아!”

이예주는 저도 모르는 사이 리즈 남매를 지나쳐 온실 끝까지 정신없이 달려갔다. 

풀밭에 앉아 있는 아이들과 다채로운 식물들을 본채만 채 지나쳐 바깥으로 가는 통로에 들어섰다. 

역시나 유리로 되어 있는 미닫이문을 벌컥 열자, 얼굴 가죽을 찢을 듯한 칼바람이 불어 닥쳤다. 

순식간에 몰아닥치는 한파는 순록에게 가야한다는 것도 잠시 잊게 만들었다. 

남쪽 대륙의 시린 공기에 벌벌 떨던 이예주는 어렵사리 눈 위로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사박- 눈을 밟는 소리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던 순록이 쫑긋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심아. 너 여기 어떻게…….”

반가운 마음에 이예주가 저벅저벅 순록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푸르르- 까만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짐승이 별안간 몸을 돌려 달아났다. 

겅중 겅중 뛰어 그다지 넓지 않은 뒷마당을 빠르게 가로지른 순록은 끄트머리에 막혀 있는 쇠창살 울타리를  뿔로 들이 받았다. 

끼이익- 쇠창살 사이에 균열이 생기며 순록 한 마리가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틈새가 생겼다. 

그저 막아두기 위한 울타리로 보였던 그것은 창살로 이뤄진 문이었던 것이다. 

그 뒤는 지긋지긋하게 보아왔던 침엽수가 빽빽하게 자라있는 숲이었다.

“수, 순심아! 어디가!”

이예주는 눈 깜짝할 새 도망친 순록을 따라 허겁지겁 열린 문 쪽으로 뛰어갔다. 

숲과 뒷마당을 쇠창살로 나눈 경계를 막 지나치려던 찰나였다. 

“가면 안 돼!”

커다란 목소리가 이예주의 발걸음을 막아섰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어느 사이 그녀를 쫓아 나온 리즈가 온실 앞에 서서 애타게 손짓하고 있었다. 

돌아오란 소린가. 따듯한 온풍이 부는 온실 안에 비해 밖은 욕 나올 정도로 추웠다. 

자신은 로브라도 걸치고 있기 망정이지, 가운 같은 하얀 옷 하나 달랑 걸쳐 입은 아이는 열린 문사이로 몰아치는 칼바람에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고 있었다.

“추워. 들어가.”

이예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리즈에게 마주 손짓했다. 

그만 안으로 들어가라는 소리였는데 아이가 마구 고개를 휘저었다.

“언니, 거기 가면 안 돼! 거기 가면 대사제님한테 혼나.”

“괜찮아.”

네놈들이 가둬두지 않았지 않느냐고 적반하장으로 따지고 들면 되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예주는 서둘러 온실에서 등을 돌렸다. 

이러다 순록을 완전히 놓치기 전에 빨리 쫓아가야 했다.

“언니!”

뒤에서 리즈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불렀지만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착한 것. 오빠와는 달리 심성이 곱구나. 

이예주는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모른다며 잘랐던 리즈 오빠의 노란 싹수를 떠올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나다니는 곳인 듯 숲길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돌아올 때 길 잃을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예주는 벌써 사라져 버린 순록의 발자국을 따라 다리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거기는, 거기는…….”

사라지는 낯선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자 아이가 울상을 하고 중얼거렸다. 

“귀신 나오는 곳인데…….”

“신경 쓰지 마, 리즈.”

“오빠.”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베니가 리즈의 어깨를 돌려 세웠다. 

리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오라비를 보며 물었다.

“하지만 알리자린 언니를 알고 있는 사람인걸? 브레든이 돌아왔다는 걸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리즈. 브레든이 돌아왔다는 건 비밀이라고 했잖아.”

베니가 리즈의 어깨를 잡은 손에 강하게 힘을 주며 작은 목소리로 신신 당부했다. 

풀밭에 앉아 있는 아이들로부터 꽤 떨어진 상태였지만, 베니는 불안한 눈으로 연신 곁눈질 하며 빠르게 속삭였다.

“숲에서 온 사람이면 검은 파편과 관련된 사람이야. 가까이 하지 마.”

“구원자님?”

리즈의 눈이 반짝 빛났다. 

9살 난 베니의 어린 동생은 얼마 전 신전을 방문한 다리족의 말을 엿들은 후부터 구원자란 허울 좋은 환상을 꿈꿨다. 

전에 없던 들뜬 기색으로 리즈는 베니에게 확답을 요구했다.

“오빠, 저 언니가 구원자님일까?”

“대사제님이 구원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어.”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오빠의 모습에 리즈의 얼굴은 금방 풀이 죽었다. 

안쓰러운 여동생의 모습에 베니가 무어라 변명을 덧붙이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리즈, 베니. 추워. 그만 문 닫으면 안 돼?”

뒤쪽에서 아이들의 원성이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리즈의 입술이 추위로 인해 보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베니는 황급히 온실 안쪽으로 리즈를 끌어당겼다. 

활짝 열린 미닫이문을 닫으며 그는 검은 로브를 걸친 여자가 사라진 창살 사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여자는 아무런 내색도 안했지만, 베니는 분명 보았다. 

리즈에게서 ‘축복’이란 소리를 듣고 저희들을 다시 돌아본 그녀의 얼굴이 짧은 순간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것을.

내일 밤, 온실 안에 있는 아이들은 장벽 밖으로 쫓겨난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하아. 하아…….”

이예주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는 걸 멈췄다.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콧속과 목구멍이 찢어질 듯 아팠다. 

따뜻한 곳에 있다가 갑자기 추운 곳으로 나와 더 그런 것 같았다. 

“이놈의 순록이 어딜 간 거야.”

겅중겅중 뛰어 사라진 순록은 꽁무니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건 눈이 내리지 않아 설원 위에 짐승의 발자국이 고스란히 찍혀 있다는 점이었다. 

이예주는 잠시 고민했다. 

자신을 보고 이렇게 도망치는 것을 보면 순심이가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하긴, 람이 돌아온 게 아닌 이상 순심이가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이 멍청아.”

자신의 생각 없음을 돌아보며 이예주는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냥 다시 돌아갈까. 하지만 뒤를 돌아보자 빠져나온 철창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신전의 뒷마당이 있는 곳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것 같았다. 

“에휴, 내 팔자야…….”

그저 신전 구경이나 좀 해볼까 했더니 왜 이렇게 매번 사서 고생을 하게 되는 걸까. 

차갑게 굳은 손으로 잠시 머리를 짚고 한탄하던 이예주는 이내 선명하게 남겨져 있는 순록의 발자취를 따라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길도 잘 닦여 있고, 인간들이 있는 곳에 순록이 잘 나다니는 걸 보니 이 길의 끝도 어딘가로 이어져 있을지 모른다. 

신전 구경의 일환이라고 생각하지, 뭐.

긍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이예주는 애써 쳐지는 몸에 힘을 주었다. 

혹시 동굴에서 얼어붙은 강으로 갈 때와 같이 끝도 없이 계속 걸어야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길이 하나라 잃어버릴 일은 없었지만 그렇게까지 억척스럽게 순록의 뒤를 쫓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천만 다행스럽게도 우려하던 숲길 행은 금방 끝이 났다. 

얼마 걷지 않아 좁은 길이 확 트이더니, 새로운 건물이 나타난 것이다.

“어…….”

이예주는 우뚝 멈춰 섰다. 

눈앞에 있는 것은 건물은 맞았지만, 건물이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폐허. 쓰러지고 부서진 기둥과 벽돌의 잔해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그것은 그저 건물이 있던 터라고 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남쪽 대륙의 칼바람과 차가운 눈에 치식 되고 풍화되어 형체만 간신히 남은 건물의 터는 꼭 교과서에서나 볼법한 고대 유적지 같았다.

“……신전?”

이예주는 잔해만 남은 건물의 원래 형태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보았다.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돌덩이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교한 조각자국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방금 전에 제가 있다 왔던 곳과 비슷한 양식이었으니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신전이 왜 또 있지? 건물이 오래 돼서 부시고 앞쪽에 새 걸로 다시 지은건가? 

생소한 기분으로 신전이었던 건물 잔해 쪽을 향해 걸어가던 이예주는 문득 신전의 터 옆쪽에 미처 보지 못한 또 다른 건물을 발견했다. 

무슨 보호색처럼, 빛이 잘 들지 않는 숲 속과 같은 어두운 회색 벽돌로 지어져있어 금방 알아보지 못했다. 

사라진 신전이 옆에는 비교적 멀쩡한 형태로 유지 되어 있는 탑 하나가 솟아 있었다. 

원래의 높이가 어디까진지는 모르겠으나 꼭대기의 첨탑부터 탑 허리가 뚝 부러진 채 사라진 것으로 보아 멀쩡한 건물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았지만. 

“꼭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데…….”

이예주는 신전보단 멀쩡하지만 마찬가지로 다 쓰러질 듯 구멍이 숭숭 뚫려진 첨탑을 보며 중얼거렸다. 

무성히 우거진 나무와 눈에 덮이다시피 가려져 있어 외딴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 만큼 음침한 모습이었다. 

폐허, 귀신, 빙의와 같은 오컬트적인 단어들을 떠올리자 뒷목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뭔가를 탐사한답시고 다 쓰러져 가는 신전 터에 굳이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가 숲의 끝인 것 같기도 하고. 

슬슬 하늘에 노을이 내려앉는 것을 보니 그만 돌아가서 방에 처박혀 있는 것이 더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이예주가 다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바스락- 

그 순간 뒤쪽에서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기척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던 이예주는 깜짝 놀랐다.

“순심…… 아니, 순심이 짝퉁!”

필사적으로 뒤를 쫓았지만, 눈 깜짝할 새 사라졌던 순록이 다 무너진 신전의 터에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예주는 다시 돌아가겠다는 결론도 까먹고 부랴부랴 순록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눈앞에 있는 순록과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순심이와 다르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멀찍이서 봤을 땐 순심이와 같이 눈처럼 새하얗다고 생각했던 털은 자세히 보니 흰색이 아니라 밝은 회색이었다. 

게다가 덩치도 뿔도 한참 작았다. 

어떻게 순심이랑 착각을 하고 여기까지 쫓아왔나 의문이 들 만큼. 

그 정도로 친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벌써 정이 들어버린 걸까. 

울퉁불퉁한 건물 잔해들이 험악하게 널브러져 있는 신전의 터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예주는 걸음의 속도를 차차 줄였다. 

순록이 또 도망갈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쫓을 힘도 없었다. 

회색 순록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한 채 주춤주춤 발걸음을 옮기던 이예주는 불현듯 그 뒤로 두 마리의 순록이 더 있는 것을 발견했다. 

쓰러진 기둥 때문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한가로이 무너진 벽돌 사이를 거닐고 있는 순록들은 평범한 갈색이었다.

“너네…… 순심이 가족이지?”

여러 마리의 순록을 보자니 문득 잊고 있었던 펭양의 말이 떠올랐다. 

펭귄들로 인해 남쪽 대륙 숲을 침입하게 된 눈족 인간들. 그리고 쓰임새가 다양하여 가장 많이 잡혀간 순록들. 

뜻밖의 깨달음에 순록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너네도 말 알아들어?”

혹시나 해서 물어본 질문에 순록들은 이예주를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울 뿐 순심이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리가 없지. 동물들에게 자연스레 말을 건넨 제 모습이 불쑥 민망해져 이예주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가까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순록들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이예주는 순록에게서 눈을 뗐다. 

이왕 이곳에 발을 들이민 김에 대충 둘러볼 요량이었다. 

고개를 이곳저곳으로 휘휘 돌리자 무너진 신전의 터는 바깥에서 볼 때보다 훨씬 더 을씨년스러웠다. 

위험한 철골들이 부러지고 부서진 바위틈에서 삐쭉빼쭉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었다. 

근처에서 자칫 발이라도 잘못디디면 필시 끔찍한 몰골로 저세상으로 갈 것이다. 

으. 눈살을 찌푸리며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 걷던 이예주는 어느덧 순록들의 바로 옆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인간에게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그녀에게서 자신들을 헤칠 의사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순록들은 이예주가 무너진 건물 잔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방관했다. 

여유롭게 눈과 건물 틈에 난 풀뿌리 따위나 뜯어먹는 순록들을 잠시 멈춰 서서 관찰하던 그녀는 이내 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둥 바깥쪽으로 무너져 반쯤 남은 천장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 안쪽은 해가 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무너진 옛 신전의 끄트머리는 특이하게도 신의 조각이 아닌 높다란 계단으로 이뤄져 있었다. 

비록 한쪽 끝이 무너지고 층마다 돌덩이가 굴러다니는 모양새였지만 오르기엔 무리 없었다. 

계단 앞에는 숲 앞쪽의 새 신전 건물 안에서도 보았던 제단이 놓였다. 

무너진 건물 잔해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 치곤 제법 멀쩡하고 깔끔했다.

거대한 계단으로 끝이 막혀 있으니 더 이상 구경할 것도 없었다. 

이예주는 짧게 고민했다. 

다시 돌아가느냐, 위험천만해 보이는 계단을 굳이 올라 그 너머까지 확인하느냐. 

하지만 결단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계단 쪽으로 마음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죽을상을 하고 다리를 옮겼다. 음침한 폐허 안의 계단 따위 구경할게 뭐 있냐 싶지만 실은 확인 할 것이 있었다. 

다리족의 비행선과 마찬가지의 일환이었다. 

이예주는 어디든 항상 탈출로를 확보해놓아야 했다. 

‘문’이 언제 열릴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능력을 믿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혼자라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잡혀 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가로이 거닐고 있는 순심이의 가족들을 본 이상…….

“에휴…….”

이예주는 고개를 돌려 사박사박 걸어 눈 덮인 대리석 바닥을 거니는 순록들을 흘긋 확인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본 걸 못 본 척 할 수도 없고, 저 세 마리 더 많은 순록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눈족들이 썰매를 끌고 다닐 때 이용하는 순록들도 전부 순심이의 가족일지도. 

람이 오면 같이 데려가 달라고 해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음침한 곳에 위치한 개구멍 하나쯤은 알아두는 게 좋을 것이다.

이예주는 오로지 상황이 여의치 않을 시 줄행랑을 칠 개구멍 하나를 위해 무너져 가는 계단을 올랐다. 

흰 칠이 거의 다 벗겨져 콘크리트가 고스란히 드러난 계단은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초등학교 운동장의 스탠드처럼 계단은 턱이 높은 대신 층이 적었다. 

그 탓에 끄트머리에 거의 도달했을 때 이예주의 입에선 다시금 가쁜 날숨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두 층을 앞두고 잠시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마지막 남은 체력을 쥐어 짜내 남은 층들을 마구 올라 마침내 계단을 정복한 순간이었다.

“……헉!”

희열을 만끽하기도 전에 이예주는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뒷걸음질 쳤다. 

계단 너머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개구멍은커녕, 하다못해 건물의 잔해나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길도, 무엇도. 

“이, 이게…….”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계단을 오를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면 손 쓸 틈도 없이 추락했을 것이다. 

컴컴한 구덩이가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이예주를 맞이했다. 

현대에 살적에 종종 보고 들었던 싱크홀(sinkhole)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지반이 밑도 끝도 없이 무너진. 다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흘끔 아래를 내려다보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상한 점이 하나있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나락의 구덩이는 지진, 싱크홀과 같은 자연재해로 무너진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원형 모양과 구덩이의 벽이 판판하고 정교했다. 

마치.

“……터널?”

거인이 수직으로 파놓은 터널처럼.

“터널. 그도 옳은 말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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