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69)화 (27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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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진의 한가운데여서 그런가. 축축 늘어지는 몸과 달리 이예주는 푹 잠에 들지 못해 괴로웠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선잠에서 일어난 후에도 날은 저물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일찍 끌고 온 거야. 개새끼들. 

비몽사몽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누워 있어봤자 더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럴 만큼 속 편한 위치도 아니었고. 

“나가볼까?”

그녀는 침대에서 완전히 일어난 채 방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눈족 족장이 람이 올 때 까지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그저 기다리라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람이 올 때 까진 그녀를 살려 두겠다는 말이지 않을까. 

사실 그녀 또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에 동의했다. 

상식적으로 제가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당장 놈들을 때려죽일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 뿐인 ‘문’은 죽기 직전에나 발동될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방 안에 가만히 퍼질러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동쪽 대륙에 있는 람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데다가 놈들이 이 넓은 신전 안에 알리자린 동생을 어디다 처박아뒀는지도 알아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 일단 걔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부터 하는 거야.”

그녀는 우선순위를 탈출보다 알리자린 동생의 생사확인에 두기로 했다. 

여기까지 반항 없이 끌려 온 이유의 8할이 그 때문이지 않나. 

눈족 족장놈의 사실이 맞는지부터 빠르게 확인한 후 탈출 계획을 세워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 안에 람이 와서 여길 다 때려 부수면 더 좋을 테고……·.

모처럼 팽팽 돌아가는 자신의 머리에 뿌듯함을 느끼며 이예주는 방 문고리를 잡았다. 

자물쇠로 잠그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혹시 잠겨 있으면 어떡하지? 

기우와는 달리 힘껏 돌린 문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열렸다. 

낡은 경첩소리 없이 조용히 열리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다. 

이예주는 망설임 없이 텅 빈 복도로 나섰다.

뭔 놈의 신전이 이렇게 사람이 없을까. 

3층, 2층의 복도를 기웃거리며 천천히 1층에 도달 할 때까지 그녀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누군가를 만나면 성문이 어느 시간에 열리는지 부터 대뜸 물어볼 작정이었던 이예주는 텅 빈 신전의 모습에 그저 허탈했다. 

이렇게 감시가 허술하면 자신이야 좋은 일이지만……. 

눈족 놈들은 또 무슨 꿍꿍이를 숨겨뒀을지 몰라 영 불안했다. 

4층 높이의 거대한 여신상 앞까지 수월하게 도착한 이예주는 할 일이 없어져 그저 멀거니 주변을 바라보았다. 

적막에 휩싸인 신전은 묵직한 사향 냄새가 감돌았다. 

여신상을 뒤로한 채 서서 이예주는 고민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할 일이 많아 서둘러 밖으로 나왔긴 한데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감시하는 사람도 없다. 

그냥 이대로 신전 밖으로 확 나가버려? 

멀찍이 숭숭 뚫려 있는 신전 입구 쪽 기둥을 바라보던 그 순간이었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희미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응?”

이예주가 퍼뜩 고개를 내리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광활한 신전 안은 여전히 텅 비어있었다. 

입구의 기둥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만이 공허한 제단을 맴돌 뿐이었다. 

“바람 소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려던 그 순간. 

다시 한 번 꺄르륵,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사람 하나 나다니지 않던 삭막한 곳에 웃음소리라니. 

어째 좀 으스스한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예주는 홀린 듯이 그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여신상의 뒤편쪽이었다. 

역시나 텅 빈 넓직한 복도와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은은한 등불이 매달려 있는 복도 안으로 진입했다. 

조명이 다소 어두운데다 복도 길이가 꽤 길어 끝에 뭐가 존재하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는 길에 볼거리가 많아 심심하지 않았다. 

이예주는 교회의 예배당을 연상케 하는 장의자들이 정렬되어 있는 커다란 홀 여러 개와 엄청나게 긴 식탁이 존재하는 식당을 구경했다. 

온갖 더러운 짓을 다하면서도 신전이랍시고 신성함을 갖춘 듯한 눈족들의 중앙건물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관찰하다 보니 어느덧 복도 끄트머리에 도달해 있었다. 

넓은 너비의 복도답게 끝은 양문으로 막혀 있었다. 

마치 그녀가 열어주길 기다리듯,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웃음소리가 아까보다 더 커다랗게 새어나왔다.

이예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내 힘을 줘 그것을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고― 

따스한 온기와 함께 싱그러운 풀내음이 안면 위를 훅 덮쳤다. 

“여긴…….”

그녀는 휘둥그레 눈을 치떴다. 

눈 부스러기 대신 꽃가루 같은 하얀 먼지가 햇빛에 반사 되어 반짝반짝 허공을 부유했다. 

그녀의 앞에 펼쳐진 것은 춥고 삭막했던 신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유리 온실이었다. 

남쪽 대륙으로 와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각양각색의 꽃과 푸른 식물들이 잔뜩 자라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의 온실 안은 저물어 가는 노을빛이 흘러들어와 무척이나 아늑하고 포근해보였다. 

따스한 온풍이 다시 한 번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 바람에 문 앞에 축 늘어진 채 시야를 가리고 있는 커다랗고 푸른 나뭇잎이 그 바람에 살랑살랑 움직였다. 

꺄르륵, 깔깔. 

그 너머로 그녀가 쫓아온 웃음소리의 근원이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이예주는 앞을 가로막은 나뭇잎을 손으로 헤치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걷지도 않아 그녀는 한 무리의 천사들을 마주 할 수 있었다. 

“여기, 여기! 손수건!”

“거기서, 리즈!”

열댓 명의 크고 작은 아이들이 온실의 풀밭 위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있었다. 

두 어 명의 아이들이 숨넘어갈 듯 깔깔 웃으며 앉아 있는 아이들 주위를 빙빙 돌았다. 놀이 중인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이예주의 입에서 야트막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제가 다른 세계에 온 것인가 착각이 들만큼 평화롭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이곳 신전까지 걸어 올라오는 동안 족장 일행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한 텅 빈 마을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 아이들이…….

“어?”

그때였다. 

입은 옷과 같이 흰 손수건을 들고 마구 뛰어다니던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귀엽게 땋아 묶은 여자 아이 하나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낯선 이를 발견한 두 눈이 토끼처럼 동그랗게 뜨였다. 

이예주는 난처함을 숨길 수 없었다. 

뜬금없이 나타난 아이들을 관찰하느라 우두커니 서 있는 몸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리즈, 왜 그래?”

설상가상으로 갑작스레 웃음이 끊긴 여자 아이에게 의아함을 느낀 다른 아이들 또한 곧 바로 이예주를 발견했다. 

수십 쌍의 시선들이 한순간에 제게로 휙 쏠렸다. 

아이들의 눈이 양 갈래 여자아이처럼 놀라움으로 커졌다가 금방 경계심으로 뒤덮였다. 

날카로워진 눈초리들에 이예주는 2차적으로 난처해졌다. 

그때 무리의 선두에 서 있던 양 갈래 머리가 주춤주춤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언니, 누구야?”

“어? 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제게 꽂힌 수십 쌍의 눈초리에 이예주는 동공을 하염없이 흔들며 깊은 고뇌에 빠졌다. 

무슨 답이 적당할까. 너희들의 족장이 끌고 온 포로? 인질? 구원자? 

하지만 미처 답을 찾기도 전에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언니도 예배드리러 왔구나?”

“응? ……어어. 응.”

전혀 아니었지만 일단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언니는 왜 검은색 옷을 입고 있어? 대사제님이 여신님께 인사드릴 때 흰색 옷을 입고 있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했는데…….”

“대사제?”

족장 말고 그런 직책이 또 따로 있는 건가? 

마치 진짜 신을 모시는 신도들이라도 되는 듯한 눈족들의 흉내에 이예주는 슬쩍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아이가 푸른 눈을 말똥말똥 빛내며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어서 금방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근데 너희는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대사제님이 신전에 초대해주셔서 축복을 받기 전에 우리끼리 놀고 있는 거야.”

“축복을 내려 준다고?”

별 우습지도 않는 짓거리...... 빈정거림. 

“응! 밖으로 나가도 쉽게 죽지 않는 축복인데 대사제님이 선택받은 아이들만 받는 거랬어.”

처음 보는 사람이 낯설지도 않은지 여자 아이는 귀엽게도 재잘거렸다. 

별 생각 없이 질문을 하고 들려오는 재잘거림을 흘려듣던 멈칫했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시 한 번 온실 안의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여자 아이와 대화 하는 그녀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훔쳐보던 아이들이, 이예주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고래를 돌렸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은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양갈래 머리의 여자 아이와 같이 어린 나이 때뿐이었다. 

“너네…….”

왜 진작 눈치 채지 못했을까. 

그러고 보니 하나같이 어린 아이들만 모여 있었다. 

흰 눈으로 이쪽을 돌아보고 있는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남자 아이가 그나마 가장 나이가 많아 보였다. 

나머지는 하나같이 해맑은 초등학생 저학년들. 그나마 머리가 굵어 보이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밝지 못했다.

이예주는 벼락같이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곧 눈족들에게 버려질 아이들이란 것을.

“언니, 언니! 언니도 같이 놀래? 우리 지금 재밌는 거 하고 있는데! 언니도 같이 놀자! 응?”

심각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멀거니 바라보던 이예주는 문득 제 손을 잡아채어 마구 흔드는 아이 때문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 난…….”

“같이 놀자아- 응? 언니도 심심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저기 같이…… 헉!”

난감한 얼굴로 손 사레를 치는 행동해도 굴하지 않고 마구 조르던 여자아이가 별안간 흠칫 몸을 떨었다. 

커다랗게 홉뜬 눈으로 멍하니 이예주의 손을 잡고 있던 아이가 곧 바로 파앗-! 손을 떨쳐냈다. 

“왜, 왜 그래?”

이예주는 뜬금없이 두려운 눈으로 제게서 뒷걸음질 치는 여자 아이 때문에 당황했다. 

혹시 저도 모르는 해를 끼친 걸까 싶어 영문 모를 얼굴로 아이에게 손을 펼쳐보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맨 손이었다. 

잠시 그 손과 이예주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여자 아이가 해쓱해진 얼굴로 속삭였다.

“언니…… 숲에서 온 사람이구나?”

“…….”

“숲에서…… 펭귄이랑, 족장님이랑…….”

아이의 중얼거림에 숨 막힐 듯 고요했던 뒤편의 무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숲’에서 왔다는 것이 대단히 충격적인 일인 것 같았다. 

다시 제게 모여지는 경계어린 시선들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예주는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할 만큼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얘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아이의 한 마디에 내심 깜짝 놀랐다. 

그녀는 오늘 아침 숲에 쳐들어 온 족장에 의해 이곳까지 막 끌려온 참이었다. 

끌려오는 도중 아이는 물론이고 사람 그림자 하나 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처음 본 아이가 어떻게……. 

잠시 혼비백산 하던 그녀는 곧 바로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 눈족은 과거를 볼 수 있다고 했던가. 

그럼 이 애도 오늘 아침의 과거를 본 건가?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여자 아이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던 이예주가 무언가를 묻기 위해 아이에게 한 걸음 다가섰을 때였다.

“저기, 혹시…….”

“리즈!”

불현듯 앉아 있던 아이들 중 남자 아이 한 명이 벌떡 일어나 이예주 쪽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앉은키가 커서 시선을 끌었던, 중학생 정도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이였다. 

그 애는 이예주 앞에 서 있던 여자 아이의 팔뚝을 거칠게 잡아 당겨 제 뒤로 숨겼다

“오, 오빠.”

잡힌 팔뚝이 아픈지 여자 아이가 작게 신음했지만, 남자 아이는 요지부동이었다. 

리즈보다 한 뼘이나 더 큰 키, 똑 닮은 갈색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가 그 둘이 친남매임을 쉬이 짐작케 했다. 

동생을 보호하듯 갑자기 등장한 낯선 이를 바라보는 두 눈에 적대감이 가득했다. 

“신전의 손님께 버릇없이 굴면 안 돼, 리즈.”

동생을 타이르는 말투였지만 날카로운 기류가 흐르는 시선은 이예주를 향한 상태였다. 

가시처럼 뾰족한 시선은 언제나 이예주를 억울함의 나락 끝자락까지 내몰았다. 

하지만 한 번 알리자린을 겪은 상태였기 때문일까. 

남자 아이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의 적의 서린 눈초리에도 그녀는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이예주는 어느새 무덤덤해진 얼굴로 리즈라는 아의의 오빠를 잠시 마주 보았다. 

살갑게 말을 걸어준 리즈, 리즈의 오빠,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열댓 명의 아이들 모두 딱했다. 

곧 일족에게 버려질 아이들이었다. 어떻게 딱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러나 이들이 당장 오늘 밤에 버려진다 하더라도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득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우스웠다. 누굴 동정한단 말인가. 

제 몸도 건사 하지 못한 채 람을 부를 인질로 잡혀 있는 주제에. 

이대로 몸을 돌려 나가는 것이 가장 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나가듯 물었다.

“혹시, 알리자린이라고 알아?”

“몰라요.”

이런 싸가지.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칼 답을 하는 리즈의 오빠 때문에 이마에 불뚝 힘줄이 솟았지만 이예주는 애써 웃었다.

“그래. 그럼 나는 가보도록 할게.” 

“…….”

“방해해서 미안. 마저 재밌게 놀려무…….”

그녀는 리즈에게 한 걸음 다가섰던 몸을 다시 한 걸음 물렸다. 

비록 대답은 없겠지만, 나름 상냥한 인사를 건네며 들어왔던 문 쪽으로 빙글 몸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생물체가 자석처럼 그녀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 아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아이들 뒤편의 유리벽 너머를.

“……순심이?”

흰색 순록이 온실 밖 설원을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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