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왜일까.
람이 사라진 후, 계속 잠자리가 뒤숭숭하고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였을까.
이예주는 얼마 전에 보았던 쟈니아와 같이 어두운 회색 로브를 잔뜩 뒤집어 쓴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문득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온 이상 동굴이 있는 곳까지 기어들어 오진 않을 것이란 람의 말이 떠올랐다.
아니에요, 람. 이 미친 인간들은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심하다고. 동굴 입구까지 찾아온 그들은 간뿐만 아니라 오장육부가 모조리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것만큼 당당하고 뻔뻔했다고.
그녀는 람의 말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벌어진 입 사이로 부정의 말 대신 야트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예주를 발견한 새끼 여우가 그 쪽으로 가기 위해 작은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틀어잡힌 꼬리 때문에 여의치 않자 다시 한 번 캥캥거리며 울었다.
그녀는 엉거주춤 쳐들고 있던 신을 신지 않은 발을 내렸다.
그리고 그쪽을 향해 남은 내리막길을 저벅저벅 걸어갔다.
방금 전 차가워서 제자리에서 펄쩍 뛴 것이 무색하게 맨 발에서는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놔줘요.”
여우를 쥐고 서 있는 인간은 그녀보다 키가 한 뼘 정도 더 큰 늙은 노인이었다.
자글자글하게 잡힌 주름이 세월의 풍파를 알려줬다.
얼핏 보면 인자한 마을 할아버지 같은 얼굴이었으나, 새끼 여우의 꼬리를 쥔 손이 우악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예주는 미동 없는 노인에게 한 번 더 차갑게 내뱉었다.
“놔주라고요.”
“버릇없는 짐승을 두고 보는 건 좋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주인도 몰라보고 이를 드러내기 마련이지요.”
노인이 그녀에게 눈이 잔뜩 묻어 있는 것을 건넸다.
새끼 여우가 가지고 놀았을 이예주의 한 쪽 신발이었다.
그녀는 눈도 털지 않은 채 쭈그려 앉아 그대로 그것을 발에 끼워 넣었다.
실은 눈을 털 정신조차 없다는 게 정확했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잔뜩 굳은 얼굴로 제 앞의 한 무리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앞에 선 노인네를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상태라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보인다 하더라도 외우지 못할 것이다.
얼핏 봐도 열 댓 명이 넘는 수였다.
망할 놈들. 람이 없는 것을 알고도 많이도 기어 온 것이다.
쭉 눈족 인간들을 훑은 그녀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시 새끼 여우를 잡고 있는 노인에게 시선을 고정해 두었을 때였다.
노인이 기다렸다는 듯 꽉 쥐고 있던 꼬리를 놓았다.
새끼 여우가 힘없이 눈 위에 처박혔다.
“뭐하는 거예요!”
이예주가 허겁지겁 제자리에 주저앉아 새끼 여우의 몸을 눈 위에서 들어 올렸다.
그리곤 다시 벌떡 일어나 날카롭게 소리쳤다.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예주님께 처음 인사드리는군요. 저는 눈족들을 이끌고 있는 눈족 족장입니다.”
“무슨 짓을 한거냐고요!”
평소와 같았으면 높은 곳에서 떨어졌어도 금방 균형을 잡고 폴짝 튀어 오를 여우였다.
그러나 눈 위에 힘없이 늘어지는 작은 몸뚱이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일주일 전의 끔찍한 악몽이 되풀이 되는 것만 같았다.
새끼 여우를 안은 채로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이예주를 노인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쟈니아와 비슷한, 초점 없는 아득한 시선이었다.
한참을 말이 없던 눈족 족장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저 잠시 잠을 재운 것뿐입니다.”
“잠?”
“들짐승들을 재우는 수면향이죠.”
이예주는 그제야 숲을 가득 메운 뿌연 안개가 단순한 안개가 아님을 깨달았다.
제 품에 늘어진 여우뿐만 아니라 먼나무 사이로 알 수 없는 형체들이 바닥에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필시 근처를 지나가는 작은 동물들이 틀림없었다.
람이 없는 틈을 타 철저하게도 계획한 일들에,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눈족 족장은 지체하지 않고 곧 바로 하나뿐일 목적을 밝혔다.
“모시러 왔습니다, 구원자님. 저희와 함께 가시죠.”
“……내가 왜요?”
이예주는 눈족 족장을 쏘아보는 눈을 거두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칼을 돌려 준 걸로 눈족과의 이야기는 모두 끝난 걸로 알았는데요.”
“글쎄요. 제가 드린 선물은 잘 받으셨다고 보고 받았는데…….”
허허. 노인이 인자한 얼굴로 웃었다.
선물?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의문을 표하자 족장이 답했다.
“다리족의 비행선에서 우리의 동족이었던 아이를 발견 했지요. 안타깝게도 자살로 이미 숨을 거둔 상태더군요. 미래를 보는 아인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죽게 놔두지 않았을 것을…….”
눈족 족장이 아깝다는 듯 쯧즛, 혀를 찼다.
이예주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핏기가 가셨다.
알리자린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자살이라니? 제가 두고 온 유나가 자살로 죽어버렸단 말인가?
따끈한 새끼 여우의 몸을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억했다.
알리자린은 괴물에게 잡아 먹혀 죽는 자신의 미래를 보았고, 그것이 실제가 될까봐 내내 두려움에 떨었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녀는 결국…… 자신을 보내고, 괴물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남은 총알로…….
처참한 진실에 이예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유품은 구원자님께 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보냈는데, 마음엔 좀 드셨습니까?”
족장의 이어지는 물음에 이예주는 로브 안주머니에 고이 넣어둔 알리자린의 안대를 떠올렸다.
알리자린의 유품. 그것을 새끼 여우를 화살로 관통하는 끔찍하고 쓰레기 같은 방법으로 전해준 것이다.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몸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늙은이의 눈에는 그저 안쓰러운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그 아이는 쏜 쓸 수 없는 곳으로 먼저 가버렸지만, 그 아이의 동생은 구출 해 내 안전하게 신전으로 데리고 와 보살피고 있답니다.”
“……동생?”
“어떻습니까? 이제 다시 나눌 이야기가 생겼군요.”
물론 저희의 근거지에서 말이지요.
족장의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가 진해졌다. 이예주의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알리자린에게 하나뿐인 동생이 있다는 것을 그녀 또한 똑똑히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제 누나도 알아보지 못한 채 실험실에 갇혀 있던 것을 알리자린과 함께 보았고, 또 그를 구해주겠다고 알리자린에게 약속까지 했는데.
그런 그 애를 눈족에서 데리고 있다.
이예주에겐 그 하나만으로도 스스로 눈족 놈들의 소굴로 걸어 들어갈 명분이 충분했다.
외면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충분히 외면했기 떄문에 알리자린이 죽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동생을 두고 유리벽을 까득까득 긁어 대던 그녀가 잊히지 않았다.
“내가…….”
이예주는 갑자기 목이 메어 피가 날만큼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지금 이 순간, 미치도록 람이 보고 싶었다.
오늘을 작정하고 온 놈들 앞에서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죠?”
“…….”
“막상 갔는데 알리자린의 동생이 없을 수도 있잖아요. 뭘 믿고 당신을 따라 가는데요?”
제법이군. 눈족 족장은 다른 의미로 쯧, 혀를 찼다.
조금만 죄책감을 부추겨도 쉽게 구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쟈니아가 그러했으니. 멍청한 어린 계집인줄로만 알았더니 영 머리가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속마음과는 달리 여전히 변화 없는 자애로운 표정으로 눈족 족장은 지껄였다.
“구원자님 대신 잠이 들어 도망치지 못하는 식량을 마차에 가득 실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이득이지요. 아, 인체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뭐라고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구원자님께서는, 본인의 안전이 한낱 수십 미물들의 목숨과 맞바꿀 가치가 있다고 보십니까?”
“……나쁜 새끼들.”
이예주가 저도 모르는 새 짓씹듯 욕설을 뇌까렸다.
두려움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서슬 퍼렇게 눈족 족장을 노려보는 그녀의 몸이 분노로 퍼들퍼들 떨렸다.
늙은 노인은 쟈니아와 달랐다.
그리고 지금껏 보아온 여느 족장들과도 달랐다.
직설적이고, 무례했다.
매끄러운 말로 거짓말을 듣기 좋게 포장하여 그녀를 구슬리던 다리족 족장과 달리 직접적인 협박이 서슴없었다.
오랫동안 타인을 짓밟고 위에 군림했던 자의 표본이었다.
이예주는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방금 전보다 안개가 더 짙어져 있었다.
숲 어딘가에 쥐새끼처럼 숨은 인간들이 계속, 계속 수면 향을 피우고 있는 탓이었다.
고개를 내려 제 두 손 안에 들려 있는 새끼 여우를 바라보았다.
하얀 털을 보니 머릿속에 순심이 그리고 이어서 펭양이 스쳐지나갔다.
그 작은 펭귄은 부지런하니까, 지금쯤 물고기를 잡고 있겠지. 펭귄과 세트처럼 꼭 함께 다니니까 순심이도 이 근처엔 없을 것이다.
매일 아침밥을 먹으라며 시끄럽게 깩깩 대던 펭양의 목소리가 안 들리는 것이 오늘만큼 다행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눈족 족장에게서 등을 돌리고 람이 선물해준 목도리를 목에서 풀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 그 위에 새끼 여우를 고이 내려놓았다.
부디 펭양이 여우를 빨리 발견하길 간절히 빌며.
다시 일어선 그녀는 눈족 인간들을 돌아보며 어금니를 아득 깨물고 말했다.
“후회하게 될 거예요.”
“후회는 게으른 자들이나 하는 짓이지요.”
노인네가 유들유들하게 미소 지으며 즉답했다.
빌어먹을 노친네. 이른 아침부터 동굴까지 쳐들어온 노력은 가히 가상했다.
이 시간에 이곳까지 기어올 정도면 적어도 새벽을 꼴딱 샜을 것이다.
“가시죠. 마차가 있는 곳까지는 좀 더 걸어야 합니다. 썰매를 끄는 순록들까지 재울 수는 없어서 말이지요.”
놈이 앞서 걸었다. 잠자코 족장의 뒤를 따르자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서 있던 열 댓 명의 다른 인간들이 우루루 이예주의 주변을 감쌌다.
도망을 방지하기 위한 철저한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 람의 얼음 동굴을 바라보았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를 두고 제 발로 눈족들의 소굴까지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이 미칠 듯이 억울하고 화가 났다.
아무데도 가지 않기로 약속 했는데.
자신이 또 도망을 갔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를 배신하고, 또 다시 도망 길에 올랐다고.
돌아와서 텅 빈 동굴을 발견할 람이 어떤 생각을 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 구석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부릅뜬 눈으로 아로 새길 것처럼 람과 함께 지낸 얼음 동굴을 바라보았다.
샅샅이 동굴 주변 지형을 훑던 그녀의 눈이 불현듯 커다래졌다.
동굴 뒤편에 몸을 숨긴 채,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눈물이 그득 차올라 있는 두 개의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숲에 살아남은 유일한 새 신인류가 바보같이 노란 부리를 벌렸다.
‘예주양. 가지마.’
멀어지는 인간 여자를 바라보는 까만 몸뚱이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들썩거렸다.
펭양이 기어코 엉엉 울며 쫓아오기 전에, 이예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괜찮다는 듯 환하게 웃어주었다.
펭양이 환히 웃는 이예주를 향해 애원했다.
‘예주양, 제발 가지마.’
“구원자님.”
그런 그녀의 소리 없는 절규는, 한 무리의 인간들이 이예주를 데리고 숲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