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65)화 (267/319)

잊고 있었던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동쪽 대륙 해안 마을. 

―당신 때문에 바다 인근에 있는 마을이 절반 가까이 사라졌어요.

남쪽 대륙을 떠날 것을 종용하며 눈족 여자가 한 말이었다. 

이예주로 인해 동쪽 대륙이 파괴되었다고. 

그리고 방금 전의 람 또한 같은 말을 했다. 

그녀로 인해 부숴 놓은 것들을 복구.

갑자기 온몸에 오한이 드는 기분이었다. 

제 볼을 부여잡고 있는 남자가 덜덜 떨리는 몸을 눈치 챌까봐 이예주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대체 뭐 때문에, 또 어떤 식으로 동쪽 대륙이 파괴된 건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예주야.”

“…….”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지?”

도망치는 나를 잡으려고 동쪽 대륙을 부순 거냐고. 그녀는 끝내 람에게 그것을 물을 수 없었다.

꼭 울 것만 같은 이예주의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남자가 재차 물었다.

“내가 가는 것이 그렇게나 싫은 것인가?”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이예주는 횡설수설하며 람의 시뻘건 시선을 피했다. 

문득 자신이 한심해졌다. 

꼭 출근하는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심통을 부리는 아이 같았다. 

하다못해 남자의 행보 하나에도 절절 매는 꼴이니 이 얼마나 우스운가. 

자신을 향해 비관적으로 자조할 적이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뜻밖의 말이 떨어졌다.

“그럼 그냥 있지.”

“예?”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데도 가지 않겠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다시 남자를 돌아보았다. 

이 남자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혹시 농담을 하는 것인가 람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지만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뻘건 눈동자는 웃음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또 까먹고 있었다. 이 남자는 농담의 ‘농’자도 모르는 남자란 걸.

이예주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짧은 사이 머릿속으로 엄청난 갈등이 오갔다. 

그렇다고 하면, 남자는 그렇게 해줄 것 같았다. 

아무데도 가지 않고 그녀의 곁에 남아줄 것처럼 담담한 얼굴.

그냥 이대로 내 곁에 있으라고 할까. 무서우니까, 그냥 곁에 있어달라고. 어디로도 가지 말아달라고……. 

목구멍까지 가지 말라는 말이 솟구쳤다. 

그러나 이예주는 가까스로 그것을 참아내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니에요. 아니에요…….”

“…….”

“그냥 어리광 좀 피운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가야죠. 중요한 일이잖아요.”

람은 이예주의 심경을 가늠하듯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예주는 얼굴 위로 꽂히는 그 시뻘건 시선을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한참동안이나 그녀를 응시하던 남자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제는 익숙한 주의 사항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최대한 멀리 가지 말도록. 답답해도 가급적이면 동굴 근방에만 있어.”

“알았어요.”

이예주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 같은 모습이 기특한지 남자가 또 한 번 양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목에 힘을 풀고 그 손길 위에 고개를 완전히 내려놓았다. 

“피곤해 보이는 군.”

람이 쏟아지는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올려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긴장이 풀리자 걷잡을 수 없이 몸이 무거워졌다.

“피곤해요.”

남자가 힘없이 늘어지는 그녀의 얼굴을 잡아 당겨 끌어안았다. 

이예주는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마주 끌어안았다. 고단하긴 한건지, 외간 남자의 품에 아기처럼 폭삭 안겨 있음에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올랐다. 이예주는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산장에서, 남자에게 꽉 부여 잡인 채 억지로 뜨거운 물을 받아먹고 꾸벅꾸벅 졸았던 때가. 

그때와 같으면서도 다른 상황이다. 그땐 남자를 마주 껴안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어느새 그의 품을 차지하는 것이 이렇게나 자연스러워졌다. 

불현듯 지금 이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낯선 기분을 떨치려, 그의 가슴팍에 마구 얼굴을 묻으며 이예주는 웅얼거렸다.

“졸려요.”

남자가 허리를 감싸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부비느라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돈해주었다. 

그를 올려다보며 흐린 눈을 껌뻑이자 그가 퍽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자도록 해.”

“싫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있을 거잖아요. 그니까 좀 더 볼래.”

이예주는 마구 고개를 흔들며 남자의 허리를 더 세게 껴안았다. 

기껏 예쁘게 정돈 해준 머리가 순식간에 다시 흐트러졌다. 

아이 같은 칭얼거림에 남자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동쪽 대륙의 일이 정리 되면 질리도록 곁에 있을 텐데.”

“……치.”

심술궂은 소리를 내며 입술을 삐죽였지만, 이예주는 결국 남자가 가야 한다는 사실을 수긍했다. 

그래. 지금은 내가 좀 참아준다. 바쁜 남자에게 언제까지 어리광만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예주는 무거운 마음을 애서 털어내며 눈을 감았다. 

남자가 다시 손을 뻗어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을 사근사근 쓸어 올렸다. 

그 간지러운 손길에 잠이 물 밀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람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단단한 가슴에 코를 박았다. 

남자의 품에선 여전히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예주는 더 이상 그의 냄새를 좇지 않았다. 

굳이 냄새를 기억하려 들지 않아도, 더 이상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람이 남쪽 대륙을 떠났다. 그가 떠난 후 이예주는 며칠간 철저히 그의 말을 지켰다. 

대부분의 시간을 동굴 안에만 처박혀 지냈다. 

자주 가는 장소라곤 씻기 위해 온천을 오가는 것뿐이었고 어쩌다 나가는 경우에도 최대한 동굴 근방에만 있었다. 

펭양이 새벽마다 물고기를 건져오는 탓에 먹을 것은 풍족했다. 

매일 같이 생선만 먹어서 입을 헹궈도 비린내가 나 죽을 지경이었지만 뿌듯해하며 제가 잡아 올린 생선을 게걸스럽게 뜯는 펭양에게 이예주는 내색하지 않았다. 

“하…….”

이예주는 동굴 입구에 우두커니 앉은 채 손가락을 꼽았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날씨가 부쩍 추웠다. 

모포를 들고 오지 않아 벌써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꿋꿋이 손가락을 접었다.

7개의 손가락이 접혔다. 람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지 벌써 1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람이 없어도 숲은 똑같았다. 

똑같이 춥고, 고요했다. 

그의 말대로 동굴에만 처박혀 있으니 인기척을 느낄 일도 없었고,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온 이상 눈족 인간들이 동굴이 있는 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올 리 없을 것이다.

이예주는 간만에 맞는 평화 속에서 잘 지냈다. 

일주일 내내 무료하고 지루한 일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뭔가 또 감당 못할 사건을 겪고 싶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때때로 람이 곁에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금처럼 숨이 막힐 정도로 초조할 때가 있었다. 

이유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악몽이나 예지몽 같은 기묘한 꿈을 꾸는 것도 아닌데. 

때때로 이 지루하고도 안정된 평화가 폭풍 전야라는 느낌을 떨치지 못할 때가 있었다.

“간밤에 잠을 설쳐서 그런 가…….”

그러고 보면 꿈자리가 뒤숭숭한 것 같기도 하다며 혼잣말을 중얼거릴 적이었다.

“컁, 컁!”

숲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타고 흰 눈덩어리가 날카롭게 울며 굴러오고 있었다. 

눈덩이는 가까워지면 질수록 까만 눈과 코를 가진 강아지 상이 되었다. 

새끼 여우였다. 

한달음에 이예주가 쭈그려 앉아 있는 곳까지 뛰어온 여우가 제 몸만 한 무언가를 물고 그녀의 주위를 미친 듯이 널뛰었다. 

한 번 튀어오를 때마다 복슬복슬한 꼬리가 휙휙 모터 달린 것처럼 흔들렸다. 

강아지를 키워 본 적 있었지만 여우는 강아지보다 정도가 더 심했다. 

제가 들고 온 것을 알아봐주지 않자 이제는 숫제 머리로 이예주의 몸을 들이 박다 시피 낑낑 댄다. 

정신 사나운 그 모습에 이예주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벌써 가져왔어?”

왈왈. 그녀의 물음에 개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더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연달아 들어온다. 

이예주는 여우가 똥꼬 발랄하게 물어온 제 한 쪽 신발을 받아 들고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 

기분이 좋은지 새끼 여우가 제자리에서 또 겅중겅중 뛰었다. 

공 대신 빼앗긴 신발 때문에 한 쪽 발이 미치도록 시렸다. 

이제 그만 하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뜨끈한 모닥불이나 쬐었으면 하건만.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과 휙휙 정신없이 흔들리는 꼬리를 보건데 이 놈의 새끼 여우는 아직도 체력이 남아도는 것 같았다.

“자! 또 물어와!”

그녀는 다시 동굴 아래쪽으로 성의 없이 제 신발을 휙 던졌다. 

마치 날아가는 새를 잡는 것처럼 낮게 자세를 낮추던 새끼 여우가 날아가는 털신을 따라 빠르게 몸을 도약했다. 

다시 멀어져 작은 눈덩이가 되어 가는 여우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던 이예주는 문득 제가 사준 신발이 넝마가 되어가고 있는 저 꼴을 보면 람이 과연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람의 힘을 받아 치유 된 새끼 여우는 생사를 오갈 뻔했던 것이 언제라는 양 금방 회복되어 눈밭을 뛰댕겼다.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저를 구한 것이 이예주란 사실을 알고 있던 걸까. 여우는 멀쩡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곁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펭양이 제 둥지로 데려 가려 들어도 이예주의 로브자락을 물고 낑낑 늘어져 결국 같이 잠까지 자는 사이가 됐다. 

어미를 잃은 아기 여우가 자신을 어미로 인식하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지만, 이예주는 이번엔 굳이 여우를 숲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언제 또 인간들이 나타날지 몰랐고, 람을 대신해서 껴안고 자는 뜨끈한 온기가 이제는 없으면 안될 만큼 익숙해져 버렸다.

신발이 꽤 멀리 날아갔는지 언덕 밑으로 내려간 여우는 한참이 지나도 올라오지 않았다. 

“좀 보고 싶은데.”

며칠 째 해가 뜨지 않고 꾸물꾸물하기만 한 잿빛 하늘을 바라보며 이예주가 무심결에 내뱉었다. 

곧 바로 그 대상이 여우가 아님을 알아차리고 지레 놀라 주변을 둘러보다 그녀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간지러운 말도 다 내뱉을 줄 알다니. 

정말 중증이라니까.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이예주는 새빨간 눈동자를 그리며 간절히 비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이대로 안오는 것은 아니겠지. 하루속히 남자가 돌아오길 기도하며, 그녀는 한 켠에 드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애써 떨쳐냈다.

깊은 잠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이유 없이 가슴이 수런거리고 알 수 없는 기분에 눈이 번쩍 떠질 때. 이상하게도 한순간에 싹 잠기운이 가신 이예주는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동굴 안은 어두웠다. 빨간 불씨들만 남긴 채 모닥불이 꺼져 있는 걸로 보아 이른 새벽녘이 분명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 난 거지? 

일찍 사냥을 갔다 온 펭양이 밥을 먹으라며 외치는 잔소리를 알람 삼아 느즈막이 일어나던 자신답지 않았다. 

“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문득 옆자리가 휑하니 시린 것을 깨달았다. 

몸이 나은 후로 옆구리를 당연스럽게 꿰차고 자던 새끼 여우가 보이지 않았다. 

고 작은 몸뚱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가 없을 뿐인데, 웬지 모르게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이예주는 주섬주섬 벗어두었던 로브를 주워 입었다. 

람이 선물해준 목도리도 목에 꽁꽁 싸맸다. 

마찬가지로 람이 준 털신을 찾아 신으려고 두리번거렸지만 분명 자기 전에 요 옆에 벗어놨던 것이 통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찾은 후에야 밖으로 나가는 통로의 길목에 나동그라져 있는 신발 한짝을 찾아 낼 수 있었다.

“이게 또!”

부득 그녀의 미간에 내천 자가 생겼다. 

힘이 넘치는 새끼 여우는 이른 아침부터 곧잘 동굴 밖으로 뛰놀러 나가곤 했다. 

이예주가 신발을 공삼아 던지기 놀이를 해준 후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털신이 한 짝 씩 사라져 있었다. 

동굴 밖 눈밭에 패대기쳐 있는 제 신발을 발견 할 때마다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몇 번 목덜미를 잡고 끌고 와 앉혀두고 하면 안 된다고 훈련을 시도했지만 망할 놈의 여우는 개와 달리 도무지 훈련이란 게 되지 않았다.

이예주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맨 발로 길을 나섰다. 

발에 닿는 동굴 바닥이 머리끝이 쭈뼛 설만큼 차가웠다. 

최대한 바닥 면이 많이 닿지 않게 걷다 보니 절뚝거려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한 발로 겅중겅중 뛰다시피 동굴 입구에 간신히 도달하자 신발이 질질 끌린 자국이 하얀 설원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밖은 요상할 정도로 짙고 뿌연 안개가 내려 앉아 있었다. 

진눈깨비라도 내리려나. 

평소보다 훨씬 어두운 회색의 하늘을 흘끗 올려다보며 그녀는 얼른 개구쟁이를 찾아서 동굴로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컁! 캐앵-! 

때마침 내리막길 저편에서 낯익은 짐승 울음소리가 들렸다. 

안개 때문에 훤히 보일 그 아래가 보이지 않았다. 

이예주가 흉흉한 얼굴로 다시 겅중 겅중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벼워서 잘도 눈 위를 사뿐 사뿐 걸어 다니는 새끼여우와는 달리, 무릎 아래까지 푹푹 눈이 파였다. 

덕분에 그녀는 얼마 안가 휘청거리다가 높이 쳐들고 있던 맨 발마저 눈 속에 파묻고 말았다. 

“으 차거!” 

짜릿짜릿한 차가움에 제자리에서 펄쩍뛴 이예주가 버럭 소리치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야! 너 혼난 댔……!”

끼잉, 끼잉……. 

뿌연 안개가 가시고, 허공에서 달랑달랑 흔들리며 애처롭게 우는 여우가 보였다. 

누군가에게 우악스럽게 꼬리를 잡힌 탓이었다. 

추운 날씨와는 별개로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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