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64)화 (266/319)

그녀는 람에게 잡힌 팔을 비틀며 비명처럼 소리쳤다.

“알리자린 거예요, 틀림없어요! 알리자린이 반대편 숲에 있는 거예요!”

“알리자린이라면…….”

남자가 눈살이 좁혀졌다. 

이예주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름의 주인이 누군지 가늠하는 듯 했다. 

이예주는 애가 타들어갔다. 

당장 되돌아 가야하는데, 여전히 람에게 잡힌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는 얼마 안 가 알리자린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그 눈족 계집을 말하는 것인가?”

“람, 저 다시 가 봐야 돼요. 알리자린이 눈족 인간들이랑 같이 있는 걸지도 몰라요. 가서, 확인 좀……!”

이예주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면서도 등을 돌려 어떻게 서든 순록 위에 올려 타려고 몸을 허우적대는 통에, 결국 람은 거칠게 그 몸을 돌려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예주야.”

“이거 놔줘요! 저 알리자린한테 가봐야 해요. 가서……!”

“그 눈족 계집은 죽었다. 며칠 전에 긴 유람을 떠나는 것을 나와 같이 보았지 않아.”

람의 단호한 말에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던 이예주의 몸짓이 멈췄다.

“하지만…….”

그녀는 목이 죄이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유나의 안대가 맞는데요?”

“올빼미를 바로 보내 정찰해보도록 하지. 새끼 여우를 치료한 후 다시 확인하러 가도 늦지 않다. 그러니…….”

“…….”

“울지 마.”

팔을 억세게 부여잡고 있던 남자의 손이 불쑥 올라와 이예주의 뺨에 닿았다. 

울고 있다고? 

람의 말에 그녀는 한 손을 들어, 남자의 손이 닿지 않은 반대 쪽 뺨을 더듬더듬 만졌다. 

손이 닿는 자리마다 온통 물기로 흥건했다. 

언제부터였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엉엉 울고 있었던 것이다. 

맞아. 알리자린은 죽었지.

이예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눈 근처를 문질렀다. 

눈물을 닦아 내기 위함이었지만 손짓이 워낙 거칠어 여린 눈두덩이 살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남자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움직여 그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일단 들어가지. 몸이 많이 차군.”

람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하고 조심스러웠다. 

이만큼 몸이 따뜻한 남자가 아닌데. 잠시 의문이 들던 이예주는 그제야 자신이 차갑게 얼어붙은 몸으로 벌벌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동굴 쪽으로 이끄는 남자에게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

그에게 잡혀 힘없이 질질 끌려가던 이예주는 람과 마주잡지 않은 손을 들어 다시 한 번 눈 근처를 쓸었다. 

여전히 눈가가 축축했다.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       *       *

새끼 여우의 치료는 순조로이 진행됐다. 

람은 많이 해본 사람처럼 신중하게 화살을 뽑았고, 곧이어 그 특유의 검은 색 힘을 내뿜어 상처를 아물게 했다. 

새끼 여우는 기력이 많이 쇠 한건지 치료 내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서 낑낑 거리며 어미를 찾으면 어쩌나 걱정하던 이예주는 차라리 여우가 눈을 감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몸을 관통했던 화살 끝에 묶여 있던 알리자린의 안대는 이예주가 챙겼다. 

람이 갖다 버리라며 한 번 성화를 냈지만 그녀는 꿋꿋이 그것을 로브 안쪽 주머니에 넣어 만능 열쇠와 함께 소중이 보관했다.

치료가 끝난 새끼 여우는, 뒤늦게 동굴로 돌아온 펭양이 제 둥지로 데리고 갔다. 

동굴 뒤편의 숲에 있는 펭양의 보금자리는 정말로 동물이 지을 법한 야생이었다. 

이예주가 당황하여 제가 보살피겠다고 막아섰다. 

하지만 남자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타박했다.

“제 몸도 성치 않은 것이 누굴 보살핀다고.”

“그치만, 아직 아기인걸요. 펭양이 둥지는 지붕도 없어서 바람이 많이 불 텐데…….”

“그리 걱정 할 것 없다. 아무리 어린 것이라도 이 설원에선 너보다 추위를 더 잘 버틸 테니.”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모포를 둘러도 강추위가 적응 되지 않는 그녀와 남쪽 대륙에서 나고 자란 동물들은 엄연히 달렸다. 

그리고 어미를 잃고 홀로 서기를 해야 할 새끼 여우가 자꾸 제 손을 타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머리는 인정하는데, 그래도 어린 것이 낑낑 거리던 잔상이 자꾸 마음에 남았다.

“그래도…….”

이예주가 끝내 소심하게 반항했다. 

람은 그것을 깔끔하게 묵살하며 제 손을 내밀었다.

“그보다 손.”

“손?”

“그래 손.”

그녀는 마치 강아지를 훈련시키듯 제게 내밀어진 람의 손바닥을 그저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참을성이 좋지 않은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얼른.” 하고 재촉하자 그녀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제 한 손을 올렸다. 

람이 손을 뻗어 반대편 손도 끌어당겨 잡았다. 

오므려져 있던 손가락들을 펼쳐 잡은 그가 눈앞에 드러난 처참한 상흔들에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 잘 날이 없군.” 

얼어붙은 바위를 타고 절벽을 내려가느라 손바닥과 마디에 흉하게 까지고 패인 상처들이 한 가득이었다. 

남자의 말처럼 이곳에 온 후로 유독 바람 잘 날 없이 상처가 생기는 것 같았다. 

뭐에 긁힌 것인지, 꽤 피가 많이 난 듯 커다란 피딱지가 진자리도 여러 군데였다. 

그것들을 보며 이예주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제 하도 다쳐서 아프지도 않은 모양이야. 아예 부러트려서 오지 그래.”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빈정거렸다. 그녀의 대답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눈을 흘기며 억울한 표정으로 외쳤다.

“아프지 않긴요! 얼마나 아팠는데요…….”

사실, 새끼 여우를 데리고 오는 동안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아픈 것도 몰랐다. 

여우가 치료 되는 내내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손이 남자의 따뜻한 온기에 닿자 그제야 느끼지 못했던 통증들이 와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상흔들에 이예주는 있는 대로 울상을 지었다.

미운 말만 골라 하던 입과는 달리, 남자는 섬세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이예주의 손을 어루만지더니 곧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서 검은 빛이 새어나오더니, 이내 그 빛은 솜사탕 같은 반투명한 뭉치들이 되어 그녀의 상처투성이 손 위로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벌어진 상처 위로 검은 뭉치들이 닿는 족족 흡수 되었다. 

그와 동시에 상처가 아물며 새살이 돋기 시작했다. 

마치 상처를 통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기분 탓만은 아닌지, 실제로 이예주는 기묘한 기운들이 온 몸에 듬뿍 샘솟는 것을 느꼈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한 람의 치료 과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고 물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뭐가.”

“눈족들이 어떻게 자꾸 숲을 침범하는 거예요?”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벌써 숲에서 눈족들을 만난 지 세 번째였다. 

그도 모자라 펭양의 말로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눈족 인간들이 곧잘 숲을 들어온다고 그랬다. 

쟈니아는 숲에 람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이예주와 람의 관계나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중턱에서 있었던 일들 또한. 

다리족처럼 작전을 세워 몰래 접근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가 안 갔다. 

그들은 람의 분노가 두렵지 않은 것인가?

“이 숲에 당신이 있는 것을 뻔히 아는데, 눈족들은 왜 겁도 없이 자꾸 기어들어오는 거예요? 사냥을 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아무리 눈족 인간들을 쉽게 죽일 수 없다고 해도…….”

이예주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 보니 더러워진 검은 안개를 가진 눈족 인간들은 죽으면 히카톤이란 그 끔찍한 괴물로 변할지도 모른다 했던가. 

그래서 람은 눈족 인간들이 숲에 들어오는 것을 알고도 방치 하는 것인가? 

그녀는 새로 깨달은 사실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되물었다.

“눈족 인간들이 죽으면 괴물이 되니까 숲에 들어오는 걸 그냥 내버려 두는 거예요?”

남자는 묘한 얼굴로 이예주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히카톤은 먹이가 없으면 자연 도태되어 사라진다. 게다가 이곳에서 죽은 눈족이 히카톤으로 변하면 잡아먹히는 건 눈족 놈들뿐이야. 그 버러지 같은 것이 내 숲에 발을 들이는 꼴을 보고만 있지 않을 테니까.”

“…….”

“눈족 놈들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매번 힘이 약한 동족들을 밖으로 내버리는 거겠지. 설령 죽어 괴물로 변하는 것이 있더라도 사막에 갖다 버리면 알아서 서로를 뜯어먹으며 개체 수를 줄일 것이다.”

람의 설명에도 이예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든 눈족 인간들을 죽일 수 없어 숲에 들어오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 듯싶다. 

변한 괴물이 이 숲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란 말도 알 것 같고. 

하지만. 

“힘이 약한 동족들…….”

힘이 약한 동족들이란 바로 알리자린 같은 버려진 어린 아이들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일족에게 버려지고, 실험체로 쓰이기 위해 다리족으로 잡혀가는 아이들. 

왜 눈족들은 주기적으로 아이들을 버리는 거냐는 그녀의 질문에 다리족 족장은 자기들도 그것까진 알 수 없다고 했다. 

알리자린은 힘이 약한 것들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일족에게서 추방을 당하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납득 갈 만한 이유였지만, 이예주는 람에게 한 번 더 물었다.

“왜 힘이 약한 아이들을 버리는 건데요?”

“궁극적으로는 힘을 유지하며 본인들을 위협하는 괴물이 탄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지. 인간들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람에게선 또 다른 답이 들려왔다. 

이예주는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니까 그게 뭔 소린데. 애들을 내다 버리는 게 힘을 유지하면서 괴물이 탄생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그것과 인간의 욕심은 또 뭔 상관인데? 

이해가 가지 않아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람은 더 설명 해주지 않았다. 

이예주가 더 묻기도 전에 그는 다시 눈족들이 숲에 자주 나타나는 출몰하는 이유로 화제를 돌렸다.

“네가 이곳에 오기 전까진 놈들은 숲을 자주 침입하지 않았다. 내가 어쩌다 숲을 비울 때나 쥐새끼처럼 기어들어오는 것들이 요즘 들어 대담해졌지. 네가 남쪽 대륙에 있는 것에 꽤나 두려운 가 본데.”

“헉. 그럼 저 때문에 그렇단 소리에요?”

“정확히는 너를 가지고 있는 나 때문이지.”

“가, 가지다니요…….”

이예주는 얼굴을 확 붉혔다. 

가, 가지다니! 내가 소유물도 아니고 어떻게 네 놈이 가지고 있는데!

“놈들은 네 능력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니까, 내가 널 어떤 식으로 이용해먹을지 알 수 없어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기어 들어와서 너를 찔러보는 것이지.”

일순 눈앞이 아연해졌다. 

이예주는 이제야 놈들이 왜 그녀의 눈앞에서 그렇게 어미 여우와 새끼 여우를 죽이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이가 부득 갈렸다. 개새끼들. 따로 할 것이 없어서 생명을 가지고…….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당신은 인간들의 기척을 알 수 있잖아요?”

“눈족들 중에는 미래를 엿보는 것들이 있다. 종종 내가 없는 것을 알아내고 숲에 침입하는 것이지. 이번에도 같은 경우겠군.”

이예주의 낯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깜빡 잊고 있었다. 눈족에는 미래를 보는 인간이 있다는 걸. 

비록 가까운 미래만 볼 수 있는 불완전한 능력이지만 자신의 엄마가 그러했고, 알리자린 또한 그러했다. 

“놈들이 숲에 있더라도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도 있다. 그 놈들 중에서 살아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거든.”

덧붙여지는 그의 말은 이예주를 놀라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녀는 휘둥그레진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람은 생명의 기척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런데, 살아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는 게 없기에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도 있다고? 

그럼 눈족 인간들은 다 좀비들이란 말인가?

이예주는 더럭 겁이 나서 다급히 물었다.

“그럼 당신이 숲에 없을 때 눈족 인간들이 또 들어와서 해꼬지를 하면 어떡해요?”

“놈들의 간이 배 밖으로 튀어 나오지 않은 이상 이곳까지 기어 들어오진 않겠지. 하지만 조심해야해.”

이예주의 눈이 지진 나듯 떨리기 시작하자 남자가 짧게 한숨을 쉬며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고 제게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했다.

“당분간 매우 바빠질 예정이다. 얼굴 보기 영 힘들 것 같군.”

“왜, 왜요?”

이예주는 양 볼에 와 닿는 따뜻한 온기에 안심하기는커녕 들려오는 남자의 말에 더더욱 기함했다. 

아니! 놈들이 언제 들어 올 줄 알고! 심지어 미래까지 쳐봐서 숲에 언제 없는지도 알 수 있다며!

“그러고 보니 맨날 어딜 가는 거예요! 뭐가 그렇게 바쁜데요?”

급작스럽게 치솟는 불안감에 이예주의 목소리도 덩달아 삐족해졌다.

그동안 람의 부재에도 서운해 하지 않고 의연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원래도 그녀를 곧잘 조롱이에게 팽개치고 나돌아 다니던 남자였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람이 매번 동쪽 대륙과 남쪽 대륙을 오간다는 사실은 펭양에게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가 몸소 겪어 본 결과 대륙 간의 거리는 절대 짧지 않았다. 

그렇게나 바쁜 와중에도 제게 신경을 쓰려 노력하는 남잔데, 괜히 먹히지도 않은 어리광을 부려 바쁜 사람 성가시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예주는 겁쟁이라서 오늘 같은 일이 또 발생하면, 도저히. 도저히 홀로 의연하게 대처해 나갈 자신이 없었다. 

람이 없는 사이 또 누가 다치면. 펭양이나, 순록이 인간들이 쏜 화살에 꿰뚫려 버리면. 

죽어가는 그들을 붙잡고 자신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예주는 또 다시 저를 두고 떠나려는 남자 때문에 저도 모르게 화를 내듯 소리쳤다.

“매번 혼자만 바쁘고 혼자만 있는 부산 다 떨죠! 대체 그 놈의 일은 언제 끝나는 건데요!”

“글쎄. 너 때문에 부숴 놓은 것들을 복구하는 것이 꽤 오래 걸리는군.”

그러나 즉각적으로 들려오는 람의 답에 잔뜩 찌푸려졌던 그녀의 표정이 한 순간에 희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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