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63)화 (265/319)

이전처럼, 강의 하류로 이어지는 폭포 아래쪽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였다. 

서로를 바라보던 이예주와 펭양은 너나 할 것 없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순심이야!”

깎아지는 절벽 위에 도착 했을 때, 펭양이 날카롭게 외쳤다. 

이예주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폭포 아래쪽을 허겁지겁 내려다보았다. 

어린 짐승이 밧줄이 매달린 화살에 꿰뚫린 채 그때처럼 숲 쪽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흰 순록이 그것을 막기 위해 짐승의 꼬리를 물어 당기고 있었다. 

순심은 꼬리를 물어 당기는 것도 여의치 않자 발을 뻗어 작은 짐승의 앞을 가로 막고, 밧줄을 끊기 위해 뿔로 밧줄을 들이 박는 둥 필사적으로 끌려가는 것을 저지했다.

한참 위에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짐승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새하얀 설원 위에 마구 흩뿌려져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새끼 여우였다. 그때 구해줬던 새끼 여우. 

흰 빙판도, 흰 여우도, 흰 순록도 피투성이였다. 

순심의 필사적인 저지에도 화살을 맞은 새끼 여우는 주르륵 속절없이 끌려갔다. 

끼잉, 낑. 숨이 꺼져갈 듯 어린 것이 헐떡였다. 

푸르륵- 순록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겅중겅중 날뛰었다.

“예주양!”

이예주는 그와 동시에 거의 몸을 내던지다 시피 절벽에서 뛰어 내렸다. 

강물이 얼어붙은 절벽의 돌 위는 여전히 미끄럽고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한 번 해 보았던 덕분일까. 

그녀의 몸은 제법 능숙하게 중심을 잡고 빠른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니면 위험하다는 생각조차 할 틈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거친 돌에 긁혀 손바닥과 손끝이 금세 까졌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데도 급하게 발을 내린 탓에 미끄러져 절벽 아래로 떨어질 뻔한 위험이 순간순간 닥쳤다. 

폭포수가 얼어붙은 날카로운 고드름에 하마터면 꼬치처럼 꿰뚫릴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이예주는 폭포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몸을 아낌없이 내던졌다. 

그 덕분일까. 그녀는 생각보다 엄청난 속도로 절벽을 내려와 빙판 위에 발을 얹을 수 있었다.

“헉, 허억…….”

마지막 바위 위에서 뛰어 내리자마자 이예주는 곧바로 빙판 한가운데를 향해 달렸다. 

입 사이로 가쁜 숨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비단 절벽을 내려오느라 많은 체력을 썼기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어미 여우를 구하다가 쩌저적 갈라진 빙판과 함께 시꺼먼 강물로 빠졌던 기억 때문에 본능적으로 몸이 떨려왔다. 

언제 또 빙판이 갈라질까 두려워 뛰는 걸음이 자꾸만 둔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순록과 새끼 여우가 있는 곳으로 달음박질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간신히 강 하류의 중간 지점에 도착 했을 무렵, 순록이 더 이상 끌려가지 못하도록 커다란 굽으로 밧줄을 밟고 있었다. 

이예주는 제 자리에서 도약하여 덮치듯 새끼여우를 품에 안았다. 

“으윽!”

바닥과 맞닿은 충격으로 인해 그녀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잡음으로써 밧줄이 팽팽해지는 느낌이 새끼 여우를 통해 전해졌다. 

캐앵-! 여우가 고통에 겨워 울었다. 

이예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 큰 성체도 아니고 어린 것이 과연 그 끔찍한 줄다리기를 감내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언제 또 빙판이 갈라질지 몰라 겁이 났다. 

“제발. 제발, 조금만 참아.”

이예주는 숨이 넘어 갈 듯 헐떡이는 어린 짐승을 품에 꽉 껴안고 빌었다. 

푸르륵- 순록이 빙판을 뿔로 긁으며 늘어진 밧줄을 어떻게 서든 제 뿔에 감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예주는 그것을 도울 수조차 없었다. 

아기를 안은 손에 힘을 푼다면, 속수무책으로 끌려 갈 것만 같았다. 

어미 여우보다 훨씬 작아서 새끼 여우를 온 몸으로 안았는데도 품이 남아 헐거웠다. 

무게도 훨씬 가벼웠기 때문에 한 번 놓치면 다시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예주는 그저 새끼 여우를 끌어안고 온 몸으로 버텼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대체 어떻게 해야 해. 왜 하필 람이 없을 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인가. 왜. 대체 이 어린 것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왜! 

수 만 가지 생각이 교차하던 그 순간이었다. 

팽팽하게 잡아 당겨지던 힘이 일순 탁 풀렸다. 

고통에 겨워 낑낑대던 새끼의 숨소리가 곧 바로 한결 편해졌다. 

이예주는 여우를 껴안느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 빙판 너머 숲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숲 너머는 그저 어두컴컴할 뿐 아무리 살피고 또 살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깐의 휴지(休止)인 것인가. 

저 개새끼들의 사정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이예주는 이 잠깐의 틈조차 감사히 여기며 허겁지겁 역으로 밧줄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언제 다시 새끼 여우를 끌고 가기 위해 다시 잡아당길지 모른다. 

그 전에 최대한 여유를 만들어 놔서, 더 이상 몸속에서 화살대가 쑤석거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안간힘을 쓰고 절벽에서 내려온 탓인지 별거 아닌 노동에도 금방 어깨와 팔뚝이 빠질 듯이 아려왔다. 

무릎에 놓여 있는 두 주먹 크기의 작은 짐승의 들썩임이 점점 느려졌다. 

이러다가 죽겠어.

“흐으…….”

죽는다. 

그 생각에 이예주의 입에서 흐느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쫓기듯 쉴 새 없이 밧줄을 잡아 당겼다. 

얼마나 잡아 당겼는지, 얼만 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한 번 밧줄을 잡아당길 때마다 언제 다시 밧줄이 팽팽해질지 몰라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그렇게 팔이 떨어져 나가라 악착같이 밧줄을 잡아당기던 이예주의 몸짓은 빙판위로 질질 딸려오는 밧줄의 끝 부분과 함께 끝났다. 

“끝이야…….”

그녀는 제 손짓에 힘없이 딸려오는 뭉툭한 밧줄의 끝을 보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정말로 끝이었다. 

끊어질 듯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놈이, 밧줄을 놓고 새끼 여우를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왜? 

이예주는 여우를 잡아가려던 놈이 포기했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기보단 되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미 여우 이전과는 다르지 않은가. 

그때는 그녀가 아무리 여우를 끌어안고 막아도, 어떻게 서든 끌고 가려고 힘을 풀지 않았다. 

놈이 포기한 것은 결국 빙판이 갈라져 그녀와 여우가 강 물 속으로 빠질 때쯤이었다. 

그러나 그에 비하면, 지금은 마치…….

깊은 상념에 빠져있던 이예주는 자꾸만 꼬리를 무는 생각을 물리고 황급히 새끼 여우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태평하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화살에 정확히 관통 된 어린 짐승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가. 괜찮니?”

이예주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무릎에 축 늘어져 있는 작은 몸을 들어 올렸다. 

눈처럼 하얀 털을 자랑하던 여우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손바닥에 닿는 온기가 차가웠다.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예주는 더럭 겁이 났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제발, 제발 람한테 갈 때까지……!”

순식간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아기 여우를 들고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이예주는 그 순간 눈길을 잡아 무언가에 의해 멈칫했다.

“이, 이거…….”

새끼 여우의 몸통에 박혀 있는 화살대의 끝 부분이었다. 

무언가가 화살 끝에 묶여 있었다. 마치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알리자린?”

마치 비명을 지르듯 그녀가 내뱉었다. 

새끼 여우를 관통한 화살 끝에, 알리자린의 안대가 묶여져 있었다. 

다른 이의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없었다. 

끝이 다 헤진 낡은 안대는 분명 그녀가 차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게 어떻게…….”

이예주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대체 이것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건지. 왜 이 화살에 묶여 있는 건지. 

새된 목소리로 그것을 논하려던 순간이었다.

“예주양!”

멀리서 커다랗게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예주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위에서 내려온 펭양이 창백한 얼굴로 이쪽을 향해 뒤뚱뒤뚱 걸어오고 있었다. 

“위험해양! 순심이랑 어서 같이 이리로 와양!”

그제야 현실로 돌아오듯 느껴지지 않던 손 안의 미지근한 체온이 자각되었다. 

줄줄 피가 흘러내리며 느릿하게 오르내리는 새끼 여우의 몸을 바라보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서둘러 자리에서 마저 일어났다. 지금은 안대고 뭐고 한시가 급했다. 

그러나 정신없이 잡아당긴 탓에 마구 널브러져 있는 화살에 이어진 밧줄 때문에 당장 펭양이 있는 곳으로 뛰어갈 수 없었다. 

한 손으로 새끼여우를 받쳐 든 채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가 무아지경 밧줄을 끌어 모을 때였다.

푸르르- 순록이 서리 같은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뿔로 툭툭 이예주를 쳤다. 

그녀가 돌아보자, 순록은 제자리에 앉았다. 

새끼 여우를 태우라는 뜻인 것 같았다.

이예주는 지체 없이 순록의 너른 등판에 새끼 여우를 올려놓았다. 

비록 순록의 뒤를 성가시게 질질 늘어져 따라오겠지만, 이렇게 하면 굳이 밧줄들을 힘겹게 그러모아 가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여우를 올려놓았음에도 순록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예주는 초조한 마음에 재촉했다. 

“왜 그래? 어서 가자.”

순록은 움직이지 않고 그저 고개를 한 번 까딱이기만 했다. 

그녀는 그제야 그 뜻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나도 타라는 거야?”

푸르륵- 정답이라는 듯 순록이 한 번 더 울었다. 

이렇게 무게가 뭉쳐지면 빙판이 깨지지 않을까.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새가 아니었다. 

이예주는 망설이다 이내 조심스럽게 커다란 짐승의 등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늘어져 있는 새끼 여우를 끌어안고 여유분의 밧줄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순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거워진 무게로 빙판이 갈라지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흰 순록은 겅중겅중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미끄러운 빙판이라 착지 할 때 위험할 법도 한데, 널찍한 등 위는 조금의 흔들림 없이 안정했다. 

이예주와 새끼 여우를 태운 짐승은 순식간에 육지 위에 도달했다. 

빠르게 달리던 순심은 팽양을 보고 속도를 조금 늦췄다. 

“난 괜찮으니까 동굴로 먼저 가양!”

하지만 곧 외치는 펭양의 목소리에 순심이는 언제 늦췄냐는 듯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주변 광경이 정신없이 휙휙 스쳐지나갔다. 

날카로운 바람이 드러난 피부를 따갑게 스치고 지나가자, 이예주는 새끼 여우를 꽉 안은 채 그저 고개를 숙였다. 

손바닥에 닿는 온도가 자꾸만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무슨 정신으로 균형을 잡은 채 미친 듯이 질주하는 순록 위에서 버텼는지 알 수 없었다. 

“죽지 마. 제발 죽지 마. 죽지 마, 아가.”

이예주는 그저 쉴 새 없이 빌었다. 어미도 모자라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아직 살아갈 날들이 얼마나 창창하단 말인가. 

이러려고. 이런 것을 보려고 어미 잃은 새끼를 숲에 홀로 두고 온 것이 아닌데.

순심 덕분에 매번 한 시간이 넘게 걷던 거리가 얼음 동굴까지의 거리가 단 몇 분으로 좁혀졌다. 

푸르륵-! 동굴 앞 설원에 서 있는 장신의 남자를 발견한 순록이, 투레질을 하며 가까스로 멈춰 섰다. 

“예주야.”

남자가 순록 위에 올라탄 채 사색이 되어 달려온 이예주를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람이 있는 것을 발견한 이예주는 바싹 얼어붙었던 몸이 한 순간에 확 풀어지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서둘러 순록 위에서 펄쩍 뛰어 내려 그에게로 뛰어갔다.

“람!”

갑작스레 안도해서 그런지 그 순간 속에서 울컥하고 울음기가 치솟았다. 

이예주는 정신없이 로브 안에 품고 있던 새끼 여우를 꺼냈다.

“아기가, 아기가 아파요.”

인간 여자가 조심스레 건네는 핏덩이를 본 남자의 얼굴에는 별로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한순간에 시뻘건 눈동자에서 흉흉한 기세가 쏟아져 나와 남자의 분노를 충분히 짐작케 만들었다. 

놀란 기색조차 없이 묵묵히 이예주에게서 새끼 여우를 받아든 람은 늘어진 어린 것의 몸을 빠르게 훑었다.

“심장을 피했기에 죽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기운이 이미 여우의 몸을 절반쯤 잠식하고 있었다. 

깔끔한 관통상이었지만, 피를 많이 흘리고 체온도 떨어진 상태였다. 

조금만 늦었다면 이미 절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인간 여자에게 굳이 그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화살을 제거하고 상처를 치료해야겠군.”

담담한 남자의 말에 이예주는 한시름 내려놨다. 

몸이 차가워서 오는 내내 혹시 죽었을까봐 얼마나 겁이 났는지 몰랐다. 

람의 힘이라면 금방 다시 괜찮아 질 것이다. 

“그럼 부탁할게요.”

이예주는 그의 품에 미동 없이 늘어져 있는 새끼 여우를 한 번 바라보고 등을 돌렸다. 

순심이는 여전히 바닥에 자세를 굽히고 있었다. 

지능이 높은 건지, 아니면 영물인 건지, 그녀가 뭘 하고자 하는지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예주가 허겁지겁 다시 그 위에 올라타려던 그 순간이었다. 

“어딜 가려는 거지?”

탁- 

그러나 람이 바로 팔을 낚아 챈 탓에 그것은 저지되었다.

“저, 저 다시 돌아가 봐야 해요.”

“…….”

“알리자린이 있어요! 여기, 알리자린의 안대가요. 안대가 묶여 있어요.”

이예주는 아직도 여우에게 박혀 있는 화살 끝을 가리키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횡설수설했다. 

몸은 동굴 앞이지만 아직도 정신은 강 하류, 미끄러운 빙판 위에 있는 것 같았다. 

늦기 전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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