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시 말을 멈추던 남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때 그것이 옳은 방법이라 여겼다. 널 속인 채 다리족에 보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한 번에 이룰 수 있었으니까.”
“…….”
“네가 과거를 포기하게 만들고, 그런 널 가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지. 덤으로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던 다리족 놈들도 쉽게 해치울 수 있었다. 그놈들은 약아빠져서 조금만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도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치기 때문에 잡아 죽이기 여간 성가셨거든. 복수를 원하던 붉은 개들과의 계약 조건도 지킬 수 있었고. 여러모로 일거양득이었다.”
“…….”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하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다리족놈에게 끌려가는 걸 지켜만 보고 있을 거다. 네가 아무것도 몰라야 놈들도 완벽하게 속을 테니까. 나를 찾으며 불안에 떨어도 도움 하나 주지 않고 내버려 두겠지. 네 스스로 내게 돌아올 때까지.”
“…….”
“……내가 다른 이의 것을 뺏기 위해 인간들을 보고 배운 것은 그런 저열한 방법뿐이니까.”
남자가 문득 들고 있던 이예주의 두 팔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볼에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네가 그리 찢어지듯 울 것을 알았더라면…….”
뺨에 닿는 남자의 손바닥이 무척이나 따듯했다.
울고 있는 게 아닌데도, 이예주가 울 때처럼 남자가 엄지로 그녀의 눈가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나.”
답을 구하는 것처럼 남자가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예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답을 구한 것은 아닌지 그 또한 개의치 않고 물었다.
“차라리 기회를 달라고 했지.”
“…….”
“부디 네가 내게 기회를 줬으면 좋겠군.”
“……무슨 기회요?”
“날 용서해줄 기회.”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남자는 담담히 말했다.
“미안해.”
이번에는 이예주의 얼굴이 고통에 겨운 사람처럼 와락 일그러졌다.
이 남자가. 이 남자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다.
람이 자신에게 용서나 사과를 구할 줄은 조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제 감정에 못 이겨 남자가 제발 자신에게 차라리 사과를 해주길 간절히 바랐던 때가 있었다.
남쪽 대륙에서 처음 깨어났을 때는 그 정도로 끔찍하고 힘겨웠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남자가 자신의 잘못이 뭔지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고, 자신이 그런 그를 과연 용서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이예주는 람 때문에 수 십 번 쓰러지고, 부서지고, 찢어졌다가 다시 붙었다.
그를 좋아하는 감정이 없었더라면 좀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은 너무 괴로워서 나중에는 남자가 자신을 속이는 줄도 모르고, 그저 그의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던 자기 자신까지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제게 한 행동에 비해, 그를 속인 자신의 행동은 애교 수준에 불과하다고 여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가 생각 하는 동안 이예주 또한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서, 그녀는 람을 끝내 놓을 수 없었다.
“내가…….”
“…….”
“내가 더 미안해요.”
이예주는 남자가 조심스럽게 놓아준 한 손을 들어 제 뺨에 닿아 있는 손을 겹쳐 잡았다.
타인의 온기가 손등을 덮자 남자가 몸을 움찔거렸다.
“……나는 그동안 내 자신도 속이고 살았어요.”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겐 능력이 있지만 그다지 특별한 능력은 아니라고. 난 지극히 평범하다고.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다고.”
“…….”
“사실을 말해도 다른 사람들은 나보고 미친년이랬어요. 무당 딸에 괴물 같은 년. 다른 사람들 목숨을 빼앗고 혼자 살아남는 애라고.”
엄마는 말했다. 능력에 관해 절대로 입 밖에 꺼내선 안 된다고.
그 말은 사실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절박하게 진실을 말하던 그녀를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체 그 누가, 죽기 전에 미래로 갈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어줄까.
하지만 그때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답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리했고, 결과는 처참했다.
이예주는 그때부터 자신을 속였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에 안고 살면서도 동시에, 자신은 별거 아닌 저주 하나를 가지고 있을 뿐 타인과 다를 게 없다며 본인을 양분화 했다.
치졸하고 졸렬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지 않은가. 믿어주는 이도 없었고 밝힐 수도 없었다.
평범하고, 보통의 인간이라고 말하는 건 입버릇이자 습관이 되었다.
남자에게 능력에 관해 사실대로 밝힐까 싶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당신도 그렇게 나를 볼까봐. 혹시나 내가 조롱이를 죽이고 살아남은 거라고 생각할까봐.”
한두 번의 거짓말은 쉬웠다.
그러나 조롱이가 죽은 걸 알았을 땐 그저 어떻게든 숨겨야 한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제드와 함께 마을 숲길을 지나 광장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던가.
정말이지 역겹게도, 자신은 람을 보면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조롱이의 죽음으로 미칠 것 같으면서도, 람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까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그녀를 다시 혐오스러운 벌레처럼. 손으로 찍어 눌러야하는 하찮은 박멸 대상으로 볼 것이.
“그러면,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이예주는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가끔 남자의 눈이 시뻘겋게 물드는 것을 볼 때면, 그녀는 상상했다.
자신의 능력을 알고 ‘시간족’과 동일시하는 람의 모습을. 그 후 차갑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는, 상상만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숨긴 거지, 절대로.”
“…….”
“절대로 당신을 속이고 기만하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이예주는 새된 목소리에 그 모든 것을 담아 고백했다.
어쩌면 이것은 애원이었다.
불현듯 펭양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남자의 손에 몰살된 펭귄 신인류들.
그들 또한 람을 기만하기 위해 사실을 숨긴 것은 아닐 것이다.
그토록이나 냉정하고 자비 없는 남자였다. 그런 람이 과연 자신이라고 관대하게 넘어 가 줄 것인가.
“정말, 미안해요.”
이예주는 떨리는 눈을 들어 조심스럽게 남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눈앞이 온통 희뿌예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자신은 울고 있었던가.
그녀는 남자가 새빨간 거짓말을 쳐왔던 그녀에게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화를 내는 대신 그저 나머지 손도 들어 그녀의 눈 꼬리를 타고 흐르는 눈물들을 하염없이 닦아주며.
“괜찮아.”
그 뿐이었다.
람도, 이예주도 서로에게 죄를 고했지만 누구도 화를 내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다정한 손길로 우는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던 남자가 문득 고개를 내렸다.
입술위로 와 닿는 따스한 감촉을 받아들이며, 이예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이예주는 제법 나쁘지 않은 컨디션으로 눈 위를 걸었다.
이젠 제법 숲길에도 익숙해진 탓인지 꼭 산책을 하러 가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는 천 년 전 과거에도, 천 년 후 현재에도 산책 따윈 하지 않았다.
게을러터진 성격도 한 몫 했지만 그런 쓸데없는 일에 낭비할만한 체력도 없었다.
“나는야 빙어가 좋아~ 나는야 연어가 좋아~ 나는야 청어가 좋아~ 흠흠흠~”
펭양은 더 이상 따라 오지 말라며 차갑게 쳐내지 않는 것이 기분이 좋았는지 알 수 없는 음의 콧노래를 마구 흥얼거렸다.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덩달아 들뜨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생선이 좋아?”
무아지경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던 펭양은 위에서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인간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펭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 오, 오징어도 좋아해양…….”
민망한 듯 팽양이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예주는 역시 펭귄은 펭귄이구나, 하고 대답하려다가 놀리는 말에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달았던 이전의 펭양을 생각하고 관뒀다.
그 대신 그녀는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더 크게 불러도 돼.”
“아, 아니양, 다 불렀어양…… 그, 그런데 예주양. 강 쪽으론 또 왜 가는 거양? 그쪽은 놀기에는 좀 위험한데양…….”
자주 오갔음에도 불구하고 펭양은 인간들이 자주 출몰하는 숲의 서쪽으로 가는 것이 영 꺼려지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그녀의 말에 바로 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눈족 여자가 줬던 검은색 칼을 되돌려 놓은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그동안 람이 곁에 철썩 같이 붙어 있어서 얼어붙은 강 근처까지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람은 딱히 그녀에게 그 흉기가 어디서 난 것이냐 묻지 않았다.
그것을 되돌려 놓은 후에도 왜 그랬냐는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로, 남자는 오늘 일이 있다며 또 다시 이른 아침 훌쩍 동굴을 나가버렸다.
그런 람이 조금 찜찜했지만 이예주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제 입으로, 그 칼로 당신을 찌르고 도망가기 위해 받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예주양?”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이예주는 팔이 흔들리는 느낌에 그제야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펭양이 까만 날개 끝으로 손을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이예주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펭귄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순심이가 안 보이네?”
“순심이? 어…… 그러고 보니 순심이는 오늘 혼자 놀러 갔나 봐양. 펭양이도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거든양. 순심이도 오늘 그런 기분인가 봐양.”
“그렇구나.”
이예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납득했다. 항상 곁에 있던 커다란 존재가 없으니 괜시리 허전함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비가 올 것 같네.”
문득 하늘이 꾸르릉 불길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흘끗 위를 올려다보니, 지난날들과는 달리 하늘에 유독 잿빛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한숨 같은 이예주의 혼잣말에 펭양이 해맑게 답했다.
“남쪽 대륙은 비가 오지 않아, 예주양. 눈이나 진눈깨비가 오는 거양.”
“얼른 갔다 와야겠네. 가자.”
“그랭!”
펭양은 이예주가 왜 또 그곳으로 가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걸음을 재촉하는 그녀의 곁을 신나게 쫓을 뿐이었다.
얼마 안 가 설 숲에는 다시 작은 펭귄의 흥얼거림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이예주와 펭귄은 얼어붙은 광활한 강 위를 지체 없이 가로 질러 반대편 숲이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이예주는 육지 위로 올라서지 않고 여전히 강 위에 우뚝 선채 음침한 숲을 바라보았다.
“……없네.”
샅샅이 훑었지만 소복이 눈이 쌓여 있는 지상 그 어디에도 칼을 꽂아 놓은 흔적이나 발자국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남쪽 대륙은 밤사이 눈이 내려 지형이 바뀌는 곳이니 언제 가져간 건지는 가늠 할 수 없었다.
어쨌든 눈족들이 이예주가 돌려준 칼을 가져갔다.
땅 속에 깊게 박아 놓았던 칼을 지나가는 들짐승들이 물어 갈리는 없을 테니.
“아직 있어야 했던 거양?”
어지간히도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펭양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닌데…….”
말끝을 흐리며 이예주는 다시 한 번 제가 칼을 꽂아 두었던 곳을 살폈다. 다시 가져가라고 놓은 거였다.
나름 단호하게 제 뜻을 놈들에게 전달했으니 어쩌면 다행인 일인데.
그녀는 왠지 모르게 드는 찝찝함을 쉽게 떨칠 수 없었다.
이 기분 더러움은, 눈족 놈들이 쉽게 숲 속을 드나드는 것에서 기인 한 걸까?
아니면, 악명 높은 시간족 놈들이 자신의 이런 선택에 너무 쉽게 수긍했다는 것에서 기인한 걸까…….
쿠르르릉―
그때, 불길한 이예주의 심경을 대신하듯 하늘에서 또 다시 커다란 소리를 내며 꿈틀거렸다.
“예주양. 이, 이제 그만 돌아 가양. 웅?”
주변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인간들이 자주 다니는 근방에 있는 것이 영 불안한 건지 펭양이 채근했다.
이예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음침한 숲 너머로 눈길을 주다가 이내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건, 칼을 돌려줬으니 이제 제 알 바 아니었다.
놈들이 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싸해졌지만, 어차피 진짜로 그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걸로 보아 람도 이미 그 정도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예주는 단념하고 걸음을 옮겼다.
어두워진 그녀의 낯빛 때문인지 펭양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그저 열심히 짧은 두 발을 놀릴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절반정도 강 위를 건넜을 때였다.
캐앵―!
찢어질 듯 짐승 울부짖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이예주도, 펭양도 바삐 걷던 걸음을 뚝 멈췄다.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펭양을 돌아보니 그녀 또한 커다랗게 홉뜨여진 눈으로 이예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캐앵― 캥!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연달아 짐승 울음소리가 공허한 설원 위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