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61)화 (263/319)

이예주는 그저 닥치고 얼른 눈을 뭉치고 또 뭉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렸던 손조차 차가움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로부터 몇 개 더 눈덩이들을 장전하고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저기, 대충 다 만들…… 억!”

퍽-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면으로 차가운 눈덩이가 튀었다. 

다행히 얼굴에 정면으로 맞은 것은 아니었다. 

방금 전 눈이 처박혔던 나무줄기에 또 한 번 돌…… 

아니 눈뭉치가 날아와 박혀 있었다. 

이번에는 이예주가 일어선 눈높이와 비슷했다. 

고개를 돌리니 남자가 못 맞혀서 아쉽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다.

“아, 아직 시작이라고 안했……!”

퍽- 이번에는 바로 발 앞에 눈덩이가 떨어졌다. 

철퍽, 하고 사방으로 튀는 눈덩이들에 울컥 뜨거운 게 치솟았다.

“이, 이 자식아!”

이예주는 서둘러 만들어 놓은 눈공들을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맞아도 상관없다는 듯 허리를 숙여서 눈을 또 뭉쳤다. 

새하얀 설원 위로 눈뭉치들이 휙휙 던져졌다. 

그리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건만, 힘의 차이 때문인지 그녀가 던진 눈이 통 과녁을 맞히지 못했다. 

흐으, 이예주는 약이 바짝 올라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만드는 것이 모두 끝난 듯, 남자가 거대한 눈덩이를 들고 숙였던 허리를 일으켰다. 

축구공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눈뭉치에 이예주는 입을 떡 벌렸다. 

그녀가 눈사람을 만든답시고 몇 시간 동안 끙끙댄 크기를 단 몇 분 만에 만들어 낸 것이다. 괴물 같은 놈.

그녀가 람의 커다란 손과 힘에 경악하는 사이 그가 그것을 던질 폼을 취했다. 

무거워서 멀리 나가지 않을 것을 염려한건지 남자가 한 쪽 발까지 들고 상체를 뒤로 바짝 젖혔다. 

저 무거운 것이 과연 제가 있는 곳까지 날아 올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저 미친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단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 잠깐, 잠깐! 그, 그거 던질 건 아니죠?”

이예주는 주먹보다도 작은 제 눈뭉치들을 들고도 던질 생각조차 못했다. 

고개를 설레설레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자, 람이 신이 난 사람처럼 씨익 웃었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 남자구나. 

그 생각과 동시에 거대한 눈덩이가 훅 날아왔다.

“으아악!”

그녀는 비명을 지으며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철퍽- 간발의 차이로 그것을 피했다. 

묵직한 눈덩이가 산산조각 났다. 눈이 쌓여있던 바닥이 묵직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푹 패였다. 

엎어진 몸을 일으킨 그녀가 희게 질린 얼굴로 그것을 돌아보다가 분노했다.

“나쁜 놈!”

남자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놈은 이제 미리 뭉쳐둔 눈덩이들을 하나로 합치기 시작했다. 

맞추려면 이때밖에 기회가 없었다. 

그녀는 마구 눈공을 던졌다. 

대부분 빗나갔지만 몇 개는 남자의 숙인 몸을 정확히 맞혔다. 

검은색 옷에 점점 늘어나는 흰 얼룩을 보며 이예주는 희열했다. 

하지만 그 희열도 잠시, 전혀 타격감이 없어 보이는 남자의 모습이 분했다.

왜 저렇게 멀쩡해? 돌이라도 집어넣어야 하는 거야, 뭐야!

방금 전 던진 것 보다 더 거대한 눈뭉치를 남자가 이윽고 허리를 숙였다. 

이제 그녀 차례라는 듯 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제법 스산했다. 

한 마디도 없이 미소만 짓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소름끼쳤다. 

그가 각도를 재는 모습에 마른 침을 삼키며 이예주는 눈을 뭉치는 짓을 관뒀다. 

얼마 안 가 람이그 거대한 돌. 아니, 눈덩이를 던졌다.

“아악!”

후웅-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섬뜩했다. 이예주는 이번에야 말로 진심으로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했다. 

퍽- 눈덩이가 나무줄기에 맞고 와르르 부서졌다. 

그러나 얼마나 꽉꽉 눌러 뭉친 건지, 눈덩이에 맞은 나무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쏴아아- 나무 위에 쌓여 있던 눈들이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다. 

이런 것을 맞았다간 정말로…….

“……주, 죽을 거야.”

몸을 한 번 부르르 떤 이예주가 다시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눈으로 맞혀서 죽일 심산인 미친놈은 또 다시 쭈그려 앉아 열심히 눈을 뭉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간 그들 사이엔 작달만한 눈뭉치 여러 개와 거대한 눈덩이가 오가기를 반복했다. 

남자는 눈을 뭉치면서도 착실히 이예주와의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분명 거리가 꽤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자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왜, 왜 자꾸 다가오는 거예요!”

“거리가 멀어서 잘 맞지 않는군.”

그 말을 하고 남자는 귀신같이 웃었다. 

이예주이 얼굴이 단번에 창백해졌다. 

놈의 눈에는 제가 던지는 눈공들을 피하느라 죽을 동 살 동 눈 바닥을 구르는 자신의 처절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천만다행이도 있는 힘껏 몸을 날린 덕에 간발의 차로 번번이 람의 눈덩이를 피한 이예주는 아직 그것에 맞아 죽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의 몰골은 눈을 양동이 채로 들이 맞은 사람처럼 처참했다. 

“헉, 헉…….” 

거센 헐떡임 때문에 입김이 연달아 터져 나왔지만, 눈밭을 구르던 몸은 추위에 잠식 되어 딱딱하게 굳은 지 오래였다. 

이제 한계였다. 

거리까지 가까워진다면 필히 놈이 던지는 눈덩이를 피할 수 없으리라.

“이야악!”

이예주는 남은 힘을 쥐어 짜내 미친 듯이 눈공을 남자에게 던졌다. 

가까워진 거리 때문에 전과 달리 쉽게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남자를 좀 더 많이 맞춤에도 불구하고 희열이 느껴지진 않았다. 

이미 이 행위는 눈싸움이 아닌 그저 생존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전에 없던 속도로 던진 탓에 만들어 놓은 뭉쳐놓았던 눈공들은 금방 동이 났다. 

이예주는 눈을 뭉칠 새도 없이 두 손을 모아 삽처럼 눈을 푹푹 떠서 남자에게 던졌다. 

남자의 머리칼 위로 금세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은 모습을 보니 치솟았던 울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그렇게 미친 듯이 람에게 눈을 뭉쳐 던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남자가 그동안 만든 것에 2배에 달하는 초거대 눈덩이를 들고 일어섰을 땐 던질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눈을 뭉치다 말고 냅다 등을 돌려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주, 죽을 순 없어!”

눈싸움을 하다가 연인이 던진 눈을 맞고 죽다니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이란 말인가. 

이예주는 숲으로 죽자 살자 달렸다. 

퍽- 그녀가 막 도달한 나무에 남자가 던진 눈덩이가 처박혔다. 

파편들이 머리와 안면으로 후두둑 튀었다. 

이어서, 퍽. 퍽. 맞을 듯 말 듯, 그녀가 지나치는 나무와 바닥으로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스친 눈덩이들이 처박혔다.

휘익-! 

대체 얼마나 세게 던지는 건지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와 처박히는 눈덩이들이 꼭 총알 같았다. 

막 귓바퀴를 스친 것 하나가 뻗은 발치에 박히자 이예주는 와들와들 떨며 소리쳤다.

“미친놈아! 이제 그만해엑!”

남자에게선 아무런 답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숨 헐떡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죽기 살기로 도망치는 것을 보면 안쓰러이 여겨 이제 그만 하자 할 법도 하지 않은가. 

근데 왜 저 자식은! 저 자식은……!

퍽. 퍽. 퍽. 쉴 새 없이 날아오는 눈을 피하기 위해 이예주는 지그재그로 마구 뛰었다. 

마치 그때 같았다. 람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벼락을 내리치는 그를 피해 도망갈 때. 

또 다시 바로 옆 나무에 처박히는 눈덩이에 이예주가 진저리를 치는 그 순간이었다. 

무언가 검은 것이 나무 사이에서 훅 튀어나와 그녀의 허리를 덮쳤다.

“어억-!”

앞만 보고 달리던 이예주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옆으로 고꾸라졌다. 

중심을 잡을 새도 없이 넘어지는 바람에 얼굴이 퍽 눈 위에 처박혔다. 

뼛속까지 시린 그 감각에 정신을 못차리고 허우적거릴 때, 강한 힘이 그녀를 들어 올려 정자세로 눕혀주었다.

“잡았군.”

“헉. 하, 항복! 항복!”

이예주는 그 새로 보이는 시뻘건 동공에 서둘러 항복을 외쳤다. 

이렇게 잡힌 마당에 남자가 눈덩이를 그대로 얼굴에 처박을까 더럭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눈이 묻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잘 보이지 않은 시야 사이로 그림자가 제게 쏟아지는 게 보였다. 

이 자식! 항복이라 했는데도 필히 얼굴에 눈덩이를 뭉갤 심산이야! 

곧 강타할 엄청난 눈덩이 생각에 이예주가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을 때였다. 

“분가루 대신 눈을 묻힌 광대 같군.”

따스한 촉감이 눈가에 닿았다. 그도 잠시 눈이 덮여 답답하던 그녀의 시야도 환해졌다. 

얼굴을 닦아 내주는 손길이 제법 다정했다. 질끈 감겼던 눈이 절로 떠질 만큼. 

눈을 뜨니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남자의 붉은 눈이었다. 

본디 사파이어처럼 새빨갰지만, 이제는 조금 탁해진 검붉은 색의 눈. 

이전부터 느꼈었지만 어딘가 달라진 남자의 눈을, 이예주는 홀린 듯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사이 남자가 얼굴에 잔뜩 묻어 있던 눈을 제 손으로 털어주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그녀의 두 팔 들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이예주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망각했다. 

눈밭위에 정자로 누워있는 그녀 위를 남자가 덮치듯 올라 타 있었다. 

남자에게 잡힌 제 두 손이 묘했다. 

차게 얼어붙어 있었던 그녀의 얼굴이 한순간에 터질 듯 달아올랐다.

“뭐, 뭐하는 거예요?”

죽기 살기로 달리느라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을 람이 억지로 펴들었다. 

얼어붙어 굳은 탓인지 쫙 펴지는 손가락들이 여간 뻣뻣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먹이 펴지고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이 드러났다. 

그녀의 손아귀 안에 녹아 딱딱하게 꽉 뭉쳐진 채 손가락 마디 모양이 고스란히 찍힌 눈덩이가 툭, 바닥으로 낙하했다. 

도망가는 동안 얼마나 심장이 쫄깃했는지 손에 뭉치던 눈을 계속 쥐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 

그것을 멀거니 보고 있던 이예주가 민망한 기분에 헛웃음을 지을 때였다. 

위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그 얼굴로 시선을 돌리니 람의 고운 미간에 설핏 금이 가 있었다.

“또 열병에 걸리겠군.”

“에…… 이 정도는 괜찮아요.”

어린 애도 아니고, 눈 좀 만졌다고요……. 남자의 타박에 그녀가 조금 바보 같은 표정으로  변명하듯 덧붙이던 순간이었다. 

람이 제 두 손을 모아 잡더니, 그대로 그 위로 고개를 내렸다. 촉- 손끝에 간지럽고 말캉한 감각이 닿았다. 

이예주의 동공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 남자가 지금 뭐하는 거야? 손가락에 뽀, 뽀뽀를…… 

하지만 그녀가 채 놀라기고 전에 남자가 연달아 열 손가락 끝에 입맞춤을 했다. 

그러더니 아예 입술을 모은 두 손에 갖다 붙이고 꾹 누르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마치 온기를 불어 넣어주는 것 같은 그 모습에 이예주는 달아오른 얼굴로 그저 버벅 거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단순히 그녀의 생각뿐이 아니었다. 

남자의 입술이 닿자 신기하게도 손끝에서 따스한 기운이 퍼지는 것 같더니, 그것은 곧 손과 팔을 타고 온 몸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이예주는 더 이상 춥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저 찬 겨울 밤, 온풍기를 틀어놓은 실내에 있는 것 같은 온기가 살랑살랑 온 몸을 타고 돌자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몸이 괜찮아 진 것을 알아 챈 건지 손끝에 닿았던 남자의 입술이 떨어져나갔다. 

그저 손에 입을 맞춘 것뿐인데, 떨어져 나가는 람의 얼굴이 한 없이 야해 보여 이예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어떡하지. 이제 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남자는 제 위에서 비켜 날 생각을 조금도 안 하는 것 같았다. 

눈동자가 사방팔방 흔들렸다. 이예주가 야릇한 그들의 포즈에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을 때, 남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미안해.”

“……네?”

뜬금없는 사과에 이예주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뭐가요?”

“네가 열병으로 앓았을 때, 수없이 생각을 했다.”

그의 입에서 한숨처럼 쏟아지는 입김이 살랑살랑 앞머리를 쓸었다. 

이마가 간지럽다는 생각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뭐, 뭘요?”

“대부분이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숲에서의 일들에 대해서였지."

“…….”

“너를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네 능력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게 되었으니까.”

남자의 입을 타고 나오는 뜻밖의 말에 이예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온천에서 나비가 된 알리자린을 보낸 이후 거의 무의식적으로 피해오던 주제였다. 

비겁했지만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았다. 

이예주는 그때 일을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버거웠고, 눈족 여자에게 칼을 돌려준 것으로 그와 관련한 모든 감정들을 묻었으니까.

그러나 묻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어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묻어두었던 그때의 기억들이 둑 터진 것처럼 밀려나왔다. 

눈앞에 그날이 생생히 그려졌다. 

자신을 속인 거냐고 묻던 자신과 속인 건 네가 먼저가 아니냐던 남자. 

터진 그의 왼쪽 팔. 

폭포처럼 내리흐르던 피.

“그런데 네가 깨어나서 숲을 벗어나려고 드는 모습을 보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짐승처럼 끙끙 앓으면서도 나를 다리족 족장을 바라보듯 노려보더군.”

그 말을 하던 람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그 표정이 마치 못 견딜 만큼 괴로운 사람처럼 보여서 이예주는 기분이 조금 생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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