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무심한 손길로 그런 그녀의 목에 기다란 털목도리를 둘둘 감아주었다.
그러면서 무뚝뚝하게 덧붙이길.
“열병에 걸려서 또 징징 울 것이 아니면 앞으로 항시 착용하도록.”“징징? 아니, 징징대긴 누가요!”
이예주의 눈이 단박에 치켜 올라갔다.
끙끙 앓았으면 알았지, 징징대긴 누가! 그리고 누구 때문에 앓게 됐는데!
어이가 없어 남자를 노려보고만 있자, 목도리를 감겨 주느라 불편하게 몸을 숙이고 있던 그가 그녀의 옆자리에 자리 잡고 앉았다.
감겨진 목이 따뜻했다.
마음 한 구석이 봄바람 일 듯 간질거려 그녀는 아랫입술을 이빨로 꾹 깨물었다.
안 그러면 방금 전 ‘징징’으로 화를 낸 것도 잊고 활짝 웃어버릴 것 같았다.
고작 한 나절 못 본 것뿐인데, 다시 만난 람은 눈물이 날만큼 반가웠다.
그것을 숨기려고, 이예주는 그가 감겨준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면서도 새침하게 말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네 기척을 느끼고 왔지. 그리고 네가 갈만한 곳은 이 숲에서 얼마 되지 않는 걸로 아는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예주는 도망가기 위해 숲의 동쪽과 서쪽. 고작 두 개의 길만 걸어 다녔으니까.
뜨끔한 그녀는 애써 화두를 돌렸다.
“그런데 뭐 하고 왔어요? 아침 일찍부터 보이지도 않더니.”
“몸은 좀 괜찮나?”
뭘 하고 왔냐는 물음에 대한 답 대신 딴소리다.
남자의 뜬금없는 질문에 이예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이요? 괜찮은데, 왜요?”
“인간 여자들은 처음 교미를 했을 때 많이 힘들어 한다던데.”
“교, 교미……?”
“그래. 게다가 어젯밤에 그렇게…….”
“닥쳐!”
이예주는 허겁지겁 손으로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안 그래도 걸을 때마다 다리 사이에서 익숙지 않은 감각이 느껴져 불편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자리보전하고 앓아누웠겠지만, 다행히 온천의 약효가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통증이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미친. 교미라니. 교미라니!
“그런, 그런 얘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하지 마요!”
이 남자를 대체 어쩌면 좋아. 이예주는 남자의 입을 막고 있지 않은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무엄하게도 남자의 입을 우악스럽게 틀어막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완전히 패닉상태였다.
생각해보니 남자가 말한 ‘교미’ 중에서도, 이 자식은 그런 적나라한 소리를 잘도 지껄였다.
이예주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좀 더 붉게 물들었다.
“나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무 소리 하지 마요. 알았죠? 응?”
이예주는 여러 번 남자를 다그쳤다.
그녀의 예의 없는 행동에 대해 한 마디 할 법도 한데, 람은 생각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운가보군. 남자가 그딴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예주는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그만 내렸다.
“하…… 우리는 정말, 함께 알아가야 할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남자의 시뻘건 동공을 피해 눈을 돌리며 이예주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남녀관계에 대해 이것저것 무지했지만, 이 미친놈은 더했다.
그녀의 푸념에 남자가 곧바로 되물었다.
“그래서 싫은가?”
“싫은 건 아니고요. 그냥…….”
서로를 알아가는 것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막막할 뿐이지.
이런 착잡한 속마음은 숨겼다.
“싫은 게 아니면 됐다.”
“예, 예. 어련하시겠어요…….”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은지 그녀의 그런 고뇌를 한 번에 일축했다.
완전 예스, 아니면 노야. 왜 나만 이렇게 복잡해야하냐고 불쑥 불만이 치솟았다. 그
러나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 모르게 조금 들떠 보여서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착각이겠지?
“잘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군.”
남자가 불쑥 말했다.
무슨 소린가 싶어 그를 바라보던 이예주는 곧 남자의 시선이 향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선물한 신발을 고이 신은 제 발이었다.
점점 원래의 색을 찾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복숭아 빛으로 확 물들었다.
펭양이 건네니까 별 생각 없이 신었는데,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신발을 받아 신은 게 부끄러워졌다.
꼭 연인에게 당연스레 받는 선물 같지 않은가. 이 남자가 자신의 발치수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고.
이예주는 발그레 물든 얼굴을 아래로 푹 치며 괜히 신발로 눈 덮인 빙판을 툭툭 찼다.
다시금 마음 한 구석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칫. 왜 자꾸 신발 선물을 해주는 거예요?”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아니요. 마음에 들어요. 들긴 드는데요…….”
괜한 심술에 이예주는 짖궂게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발 선물해주면 그 신발 신고 도망가는 미신이 있어요.”
“…….”
“자꾸 신발 줘서 이 신발 신고 도망가면 어쩌려구요.”
“흠.”
그녀의 말에 남자가 제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했다.
그냥 농담인데 뭘 저렇게 고민할 것까지야.
괜스레 불안해져 ‘그냥 농담이에요, 농담.’ 하고 서둘러 말하려던 이예주는 남자에 의해 가로막혔다.
“괜찮다.”
“엥? 도망가도 괜찮다고요?”
“아니. 네가 도망 갈 곳은 없으니까.”
“허. 왜요? 도망 갈 곳이 없긴 왜 없어요. 여기 대륙이 얼마나 많은데…….”
무심결에 답하던 이예주는 자신을 향해 번뜩이는 시뻘건 눈동자를 마주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동공은 그 언젠가 보았던 검붉은 색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네가 도망간 대륙을 도륙내서 다시 되돌려 놓을 테니까.”
“…….”
“그리고 네 몸을 치료해주기로 새로이 계약하지 않았나?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여기서 치료를 받고 싶은가 보군. 그렇다면 내 친히 치료를…….”
“아니요!”
이예주는 황급히 부정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허공에 대고 미친 듯이 손 사레까지 치고 있었다.
“아, 안 도망갈게요! 절대 안 도망가요!”
이 자식아! 어제 그렇게 해대고 또……!
이예주는 눈물을 지으며 금방 꼬랑지를 내렸다.
이렇게 쪽 한 번 못쓰고 질 걸 왜 또 헛소리를 꺼냈는지, 자신이 한심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무서운 소리도 그만해요.”
진짜 당장이라도 눈밭에서 발가벗길 것 같은 그 눈도 좀 치우고. 이예주는 제 신변 보호를 위해 최대한 몸을 사렸다.
별 수 없었다. 좀 더 나댔다간 남자가 정말로 말한 바를 실천할 것 같았다.
“그만 일어나지. 곧 날이 저물겠군.”
그녀의 가상한 노력이 통한 걸까. 다행이도 남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고 일어나라는 걸까. 제게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예주는 다시 고개를 올려 까마득하게 멀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펭양이 기다리기로 했는데요?”
“순심이가 알아서 데리고 오겠지.”
푸흡. 남자의 입 밖에 나온 ‘순심이’ 소리에 이예주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남자가 지어준 걸까. 지극히 한국적인 이름은 무뚝뚝한 남자와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내밀어진 남자의 손을 선뜻 잡았다. 단단한 지지대가 있으니 자리에서 일어나긴 쉬웠다.
오랫동안 차가운 눈 위에 앉아 있었지만 남자가 선물해준 신발과, 메어준 목도리.
그리고 맞잡은 채 놓지 않은 남자의 손 때문에 하나도 춥지 않았다.
자꾸만 베시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숲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실없이 웃는 그녀가 의아한 듯 람의 눈썹이 위로 들렸다.
“왜 웃지?”
“그냥…….”
좋아서요.
그녀는 그런 속마음은 말하지 않았다.
대신 맑게 웃으며 맞잡은 손을 달리해 손깍지를 꼈다.
맞닿은 손바닥을 통해 남자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얼마 안가 헐겁게 깍지를 낀 손이 꽉 조여졌다.
얼음 동굴로 돌아가는 길.
두 사람의 귀 끝이 내내 딸기 끄트머리처럼 빠알갛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이예주는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몰라도 딱히 상관없었다.
* * *
람은 당분간 어딜 가지 않고 일상을 같이 했다.
두 사람은 같이 밥을 먹고, 숲 이곳저곳을 누볐다.
가끔 이예주 혼자 목욕할 때 벌거벗은 채 당당히도 침입해서 그녀가 괴성을 지르는 것을 빼면 나름 평탄한 나날들이었다.
“뭐 하고 있지?”
요즘의 람은 이예주에게 다가와 꼭 무얼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마치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이 신기하고, 궁금한 사람처럼.
“눈사람 만들고 있는데요?”
그녀는 눈이 잔뜩 묻은 손을 탈탈 털며 말했다.
그녀의 옆엔 농구공만한 꽤 큰 눈덩이가 세로로 포개어 져 있었다.
눈사람 만들기에 얼마나 열중했는지 단단히 무장 한 몸 이곳저곳에 눈가루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가 빨갛게 얼어붙은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털신, 털목도리도 모자라, 이제 털장갑까지 사러 다시 인간 마을로 가야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쓸데없다니요!”
심드렁한 남자의 말에 이예주가 눈을 번득였다.
“눈 오는 날을 기념하는 거란 말이에요!”
“여긴 1년 내내 눈이 오는데.”
“그건 그렇지만…….”
남자의 말에 이예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몇 주간 남쪽 대륙에 거주하면서 지긋지긋하게 본 눈이었다.
그러나 동굴을 나와 훌쩍 높이 쌓여 있는 눈을 마주칠 때마다 기분이 들떴다.
그녀는 아득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눈으로 아직 눈, 코, 입을 달아주지 못한 눈덩이를 바라보았다.
“저 사는 곳은 1년에 겨울밖에 눈이 안 내렸어요. 그것도 몇 번 안 내려서 눈 오면 엄마랑 앞마당에서 꼭 눈사람 만들었거든요.”
그도 엄마가 죽으면서 끝났다.
이후 눈이 내릴 때마다, 또래 친구들이 신나게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도 하는 모습을 멀찍이서 구경만 해야 했다.
이유야 한 가지 뿐이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 내내 왕따였기 때문이다.
흐린 눈을 하고 까마득한 과거를 회상하던 이예주는 불쑥 떠오른 생각에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물었다.
“우리, 눈싸움 할래요?”
“눈싸움?”
“네! 눈 뭉쳐서 던지는 거예요. 이렇게!”
그녀는 재빨리 쭈그려 앉아 제 발치에 있는 눈을 모아 대충 뭉쳤다.
그 꼴을 보는 남자의 찌푸려진 눈살은 펴질 줄 몰랐다.
“음. 또 질질 짤 거면 그냥 던지지. 때리고 싶으면 맞아주지.”
람이 비웃으며 팔을 벌렸다.
과거 물고문이 떠올라 이예주의 얼굴이 잠시 시퍼렇게 변했다.
하지만 금방 오기가 부득 치솟았다.
그렇게나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 자신이 한심해서 울상이 지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놈이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얄밉게 말하기 때문이다.
“지, 질질 짜긴 누가요! 이씨, 당신도 얼른 눈 뭉쳐요! 얼른요!”
떼를 쓰듯 외치자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굽혔다.
눈을 모으는 그의 모습에 이예주는 뒤를 돌아 멀리 떨어진 숲 근처까지 한달음에 뛰어갔다.
“여기가 내 기지고, 당신은 그쪽이에요!”
이예주는 해맑게 웃으며 외쳤다.
람이 있는 허허벌판과는 달리 그녀가 있는 곳은 나무들이 많이 세워져 있어서 확실히 유리했다.
비열하고 치사한 짓이었지만 별 수 없었다.
뭐, 어때? 자신은 연약한 여성인데, 이 정도 패널티 쯤은 있어야지.
이예주는 악동처럼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당당히 생각했다.
남자는 그녀의 말에 별 소리 없이 눈을 뭉쳐 제 앞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질 세라 이예주 또한 쭈그려 앉아 열심히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장갑 없는 맨손이라 손이 미친 듯이 시렸다.
주먹만 한 눈공을 세 개쯤 뭉치고 나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손끝이 아렸다.
그녀가 잠시 눈 속에 파묻고 있던 두 손을 빼내어 입가에 가져다 대려던 차였다.
퍽- 쭈그려 앉아 있던 바로 옆 나무에 눈덩이가 날아와 처박혔다.
“흐억!”
이예주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부서진 눈 부스러기들이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바로 머리 위 지점에 처박힌 눈덩이가 나무줄기에 처참하게 부서진 채 처박혀 있었다.
무슨 야구공이야? 대체 얼마나 세게 던졌기에 눈이 이렇게 나무에 껌처럼 붙어있는 걸까.
“자, 잠시만요! 아직 시작 안 했다구요! 바, 반칙이야!”
그녀는 고개를 돌려 다급하게 외쳤다.
그새 산더미처럼 눈뭉치를 쌓아 둔 남자가 또 다시 눈을 던지려는 듯 팔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아쉽군. 맞출 수 있었는데.”
남자가 들었던 팔을 내리며 지껄였다. 이예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저 자식, 또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죽이려 드는 거야.
“빨리 시작해.”
그가 채근했다.
이예주는 서둘러 박박 눈을 긁어모으며 제가 또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닐까,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에도 이미 늦었다.
막 재미가 들린 것처럼 남자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배어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