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59)화 (261/319)

“응. 눈족 인간들이 주는 건 필요 없어.”

“예주양…… 힝, 잘 생각 했어양! 너무 잘 됐어양! 펭양이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펭귄이양!”

“내가 숲을 안 빠져나간다는 게 그렇게 좋아?”

“웅, 웅! 그것도 너무너무 좋지만…….”

펭양이 별안간 말끝을 흐리며 우물쭈물 이예주의 눈치를 보았다. 

의아함을 한껏 담은 얼굴로 펭양을 내려 보자 그녀가 자세히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웅얼 거렸어.

“눈족 인간들은 너무 나쁘고 무서워양. 예주양이 혹시나 다칠까봐 펭양이는 너무 무서웠어양.”

“…….”

“예주양이랑 오래오래 이야기도 하고, 낚시도 하구, 숲에 있는 비밀 장소도 보여주고 싶었는데양. 예주양이 우릴 두고 눈족들한테 가 버릴까봐 무서웠어양. 다시는, 영원히 펭양이랑 놀지 못할까봐…….”

“왜 그런 걱정을 해?”

인간들을 얘기할 때면 언제나 과민반응 하던 펭귄이었다. 

하지만 눈족을 거론하는 펭양은 어쩐지 잔뜩 겁에 질려 보였다. 

물기 어린 눈동자와 검은색 털에 가려져 있음에도 알아차릴 수 있는 하얗게 질린 안색.

이예주는 걱정스러운 한편 이해가 가지 않는 착잡한 얼굴로 펭양을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자신이 펭양을 매몰차게 대 해오긴 했지만 눈족 인간들에 대해 그 정도로 부정적인 이야기까지 심도 깊게 나눈 적은 없었다. 

그녀가 개인적으로 눈족 인간들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과는 별개였다. 

“나도 어차피 그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인걸. 눈족들이 날 죽이려고 든 것도 아닌데. 눈족 인간들이 사는 곳까지 갈 생각도 없었지만…… 설사 숲을 빠져나가더라도 영원한 안녕은 아니야. 나중에 또 만나서 놀 수 있잖아?”

이예주는 뭉툭한 두 날개로 제 얼굴을 감싸 안은 채 훌쩍거리기까지 하는 펭양을 애써 달래며 말했다. 

펭양이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눈족에게 가면 다시는 만날 수 없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펭양 답지 않은 단정적인 말에 이예주의 눈이 커다래졌다. 

가정이 너무 극단적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만날 수 없다니? 내가 볼일만 보고 다시 숲으로 오면 되잖아.”

“눈족들이 사는 곳으로 가면 다신 못 돌아와양.”

“왜?”

“순심이가 말해줬어양. 아주 예전에, 눈족 인간들을 따라갔던 펭귄들이 다시는 숲으로 못 돌아왔다고……. 순심이도 가족들이 눈족 인간들에게 끌려가서 벌써 몇 십 년째 보지 못 했어양.”

펭양이 얼굴을 가렸던 두 손을 떼어내며, 그동안 그토록이나 필사적으로 이예주의 탈출을 막았던 이유를 힘겹게 털어놓았다. 

멀리서 순심이가 보였다. 춥지도 않은지 순록은 눈 위에 배를 깔고 앉아 있었다. 

어느덧 까마득한 길을 걸어 정 반대편인 강 끝에 도달한 것이다. 

말없이 강변까지 걸어간 이예주는 순심이가 앉아 있는 턱 위에 걸터앉았다. 

우울한 얼굴의 펭양이 쫄래쫄래 따라와 그 옆에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

이예주는 어렵사리 물었다. 

자신이 이런 물음을 할 주제나 될까. 물어보고도 가슴이 뜨끔했다. 

펭양은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 

이예주 또한 덩달아 침묵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주인님이 남쪽 대륙에서 눈을 뜨셨을 때, 가장 처음 본 동물이 펭귄이었어양. 그래서 펭귄들은 가장 최초의 신인류가 됐어양.”

펭양이 답지 않게 무겁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람의 과거를 입에 담았다. 

신과 같은 남자가 눈을 떴을 때, 바로 옆에 있던 동물. 

최초의 신인류. 

꼭 신화 같은 이야기라 이예주는 정신없이 펭양의 말에 집중했다.

―눈족 인간들은 잔인한 족속들이니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교류하지 말라.

갓 신인류가 된 어리바리한 펭귄들에게 람은 명령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간과했다. 

펭귄들은 쓸데없이 호기심이 많고 경계가 없는 동물이라는 것을.

“주인님이 원대하신 목표를 이루시기 위해 남쪽 대륙을 떠나고 얼마 안 가 인간들이 남쪽 대륙에 찾아왔어양.”

처음엔 인간들을 피하던 펭귄들은 얼마 안 가 그들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막 용암이 사라진 대륙을 접한 인간들은 갓 신인류가 된 펭귄들만큼이나 어수룩했다. 

펭귄들은 주인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들이 터를 잡는 것 또한 도와주었다. 

람이 깨어난 남쪽 대륙의 숲이 개방 된 것은 삽시간이었다.

“……많은 동물들이 잡혀 갔어양. 그중 순심이네 가족이 가장 많이 잡혀 갔어양. 순록은 썰매도 끌고, 또 머, 먹이로도 훌륭해서…….”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이 미안했던지 펭양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잠시 말을 멈췄다. 

순심이가 앉아 있는 쪽을 흘긋 바라본 그녀는 괴로운 듯 빠르게 속삭였다.

“인간들이 남쪽 대륙에서 살아가는 것에 가장 많은 보탬이 되는 동물이양…….”

순록 외에도 많은 동물들이 끌려갔다. 

인간들에게는 총이라는 강력한 살상무기가 있어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토끼, 들개, 커다란 곰까지. 

그에 비하면 펭귄들은 큰 피해가 없었다. 

눈족 인간들이 펭귄 신인류들로 인한 숲의 개방을 일종의 ‘거래’라고 생각하기도 했거니와 펭귄들은 맛도 없어서 딱히 쓸모가 없었다. 

귀여운 외양 때문에 잡아먹기엔 인간들의 양심을 찌르기도 하였고.

생산 활동을 하지 못하여 굶주린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많은 동물들이 희생되었다. 

숲은 점점 황폐해져갔다. 

다시 돌아온 주인은 텅 빈 숲을 보고 그야말로 대노했다. 

다소 지능이 낮고 안일한 펭귄들은 자신들로 인해 시발된 일에 발을 동동 구르기만 할 뿐, 숲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그 아무도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 첫 신인류들이라 더 그러셨을 거양……. 펭귄들이 명령을 무시하고 몰래 인간들이랑 어울려서, 주인님을 기만하셨다고 생각하셨어양…….”

펭양이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며 힘없이 말을 마쳤다.

끝내 사실을 고하지 않고 주인을 기만한 죄로 펭귄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알 속에 있던 마지막 펭귄을 제외한 나머지 펭귄 신인류들이 주인의 손에 몰살됐다. 

알을 깨고 나온 펭양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새하얀 눈 위로 쏟아진 피들과 나동그라진 동족들의 시체였다.

그렇게 펭양은 마지막 펭귄 신인류가 되었다.

“……그랬구나.”

갈라진 목소리에 펭양은 아래로 향했던 고개를 들어 인간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잠시 숨을 멈췄다. 

펭양은 그동안 이런 이야기들을 입 밖에 꺼낼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우매한 펭귄 일족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남쪽 대륙 동물들이라먄 대부분, 동정 혹은 혐오로 반응했다. 

아직 인간에게 이야기 해본 적은 없어서 펭양은 암담한 한편 인간 여자가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했다. 

하지만 막상 바라본 이예주의 얼굴은.

“그동안 미안했어. 너한테도, 순심이한테도.”

마치 제가 겪은 일처럼 참을 수 없이 일그러져 있어서. 

펭양 벙찐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네 호의를 무시하고, 의심하고.”

“…….”

“미운 말만 하고…….”

정말이었다. 그동안 펭양과 함께했던 적지 않은 시간을 돌이켜보면, 이예주는 언제나 못된 말만 지껄였다. 

그 사실이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아니야!”

고통스러운 이예주의 표정에 펭양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예주양! 펭양이는 괜찮아양. 하나도 안 속상했어양!” 

그러니까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 짓지 마양……. 

펭양이는 중얼 거리면서 제 날개끝을 아주 조심스럽게 인간 여자의 손 위로 포겠다. 

주인님께서 그녀를 친히 들쳐 안고 남쪽 대륙으로 오셨을 때부터 펭양은 알아보았다. 

그녀가 절대로 나쁜 인간이 아님을.

제 손 위로 겹쳐진 펭귄의 까만 날개를 바라본 이예주는 고개를 아래로 조금 숙였다.

“……내가, 여기로 와서 그간 조금 힘들었어.”

저를 믿고 말해준 펭양이 고마워서, 이예주는 어렵게 제 속마음을 털어 놓기로 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겠고…….”

“…….”

“숲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어.”

그래서 더 못되게 굴었다. 

귀여운 펭양을 보면 자꾸 조롱이가 떠올라서. 

알리자린을 구하러 가야 하는 마음이 자꾸 안이해지고, 종국에 그녀에게 제 사정을 모두 토로할까봐. 

람에게 도움을 요청할 처지도 못되는 현실이 너무 힘들었다.

“나 때문에 상처받았다면 미안해.”

이예주는 암울한 지난날들을 떨치며 애써 밝은 표정으로 사과했다. 

펭양이 여전히 글썽글썽한 눈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펭양이는 예주양이 눈족 인간들에게 안간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기쁘고, 고마워양. 예주양은 잘못한거 하나도, 하나도…….”

훌쩍이든 펭귄은 결국 두 날개로 제 얼굴을 가리며 우엥 울어버렸다. 

이예주는 그런 펭양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핀잔을 주었다. “왜 울고 그래. 바보.”

덩달아 붉어진 눈시울이 시큰했다. 

순심이 또한 그런지 뒤에서 푸르릉- 하고 콧김을 내뿜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그들의 평화로운 화해는 한참동안 지속되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됐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훌쩍거림이 잦아든 펭양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이예주가 물었다. 

펭양이 크헝, 하고 거하게 코를 들이마셨다.

“웅. 펭양이가 울어버려서 많이 놀랐지양. 어른 펭귄은 우는 게 아닌데 말이양.”

그 말에 자신의 용맹함을 주장하던 어느 새가 떠올라 이예주는 짧게 웃어버렸다. 

갑작스러운 인간 여자의 웃음에 펭양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다. 

정신을 차린 펭양이 날개를 파닥이며 소리쳤다.

“아차차! 그런데 지금이 어느 때지?”

“왜?”

“주인님께서 심부름을 시키셨는데 깜빡했어양!”

펭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무 다급해 보여서 이예주는 무슨 심부름을 시켰는지 물어볼 틈도 없었다.

“예주양. 여기 순심이랑 가만있어양. 금방 갔다 올게양!”

“알았어. 기다릴게.”

펭양의 당부에 이예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여자가 제 말을 이토록이나 호의적으로 들어준 적이 있었던가. 

잔뜩 감동 먹은 얼굴로 이예주를 바라보던 펭양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른 선택지도 내주었다.

“추우면 먼저 동굴에 가 있어도 돼양! 조금 이따 봐양!”

“조심해서 갔다 와.”

급한 일이긴 한 건지, 펭양은 부랴부랴 숲 속으로 뛰어갔다. 

고작 몇 시간이었다. 펭양에게 속을 털어놓고, 사과를 건넨 것은. 

그런데도 더 이상 제가 도망갈까 노심초사 하지 않고 오롯하게 자신을 믿는 작은 펭귄이 신기했다. 

묘한 표정으로 사라지는 펭양의 뒤를 바라보던 이예주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눈족의 칼을 돌려주리라 마음먹었을 때부터 숲을 빠져나갈 생각 따윈 모두 버렸다. 

이젠 필사적으로 숲을 빠져나가야 하는 이유도 사라졌고, 순록도 두고 가서 도망도 못간다.

푸릉, 푸르르- 

때마침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심이가 울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예주는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펭양이 자신 곁에 순록을 두고 간 것을. 

그 펭귄,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은근 치밀하고 얍삽하다. 가끔은 조롱이 보다 더.

그녀는 얼어붙은 강의 광활한 정경을 바라보았다. 

잠시 쉬었다 얼음 동굴로 돌아갈 요량이었지만, 강 주변의 경관이 너무 예뻤다. 

온 세상이 진주 가루가 내려앉은 것처럼 하얗고 반짝거린다. 

설원 너머 아득히 먼 곳을 살피던 이예주는 문득 강바닥 위에 얹은 발을 내려다보았다. 

아침에 펭양이 건네준 남자의 선물이 고이 신겨 있었다. 

이전에 준 부츠보다 기동성이 더 좋은 것이라 하더니 정말이었다. 

이동하는 내내 발은 따뜻하고 푹신했다. 

간밤에 질리도록 껴안았던 남자의 품처럼.

“……직접 와서 줄 것이지.”

아침이 되자 감쪽같이 사라진 옆자리를 떠올리며 이예주는 작게 툴툴 거렸다. 

매번 펭양을 통해서 선물을 전해주는 것이 우스웠다. 

수줍음 타는 소년도 아니고 말이야.

그때였다. 거짓말처럼 따뜻한 온기가 이예주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여기 있었군.”

놀라서 얼굴을 들자 검은색의 기다란 털 뭉치가 훅 내려와 눈을 덮쳤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털 뭉치가 얼굴을 살살 쓸어내리고 목에 닿았다.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어느덧 붉은 눈동자가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뭐, 뭐예요?”

“털목도리.”

“……목도리?”

이예주는 그저 멍청한 얼굴로 남자의 말을 따라했다. 

목도리? 갑자기 목도리는 왜……. 

아니 그보다 이 남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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