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58)화 (260/319)

*       *       *

이예주는 마치 깨어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깊은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시야가 맑고 또렷했다. 

정말 오랜만에 아무런 꿈도, 악몽도 꾸지 않고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아니, 그것을 잠을 잤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온천에서 한바탕 거사를 치른 후 기진맥진해서 람의 장포에 아기처럼 폭 쌓인 채 동굴까지 안겨왔다. 

그리고 모포에 눕자마자 미친놈 같은 얼굴로 달려드는 남자 때문에 또 다시……. 

이예주는 결국 동이 터올 때쯤이 돼서야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미쳤네, 미쳤어. 아무리 청춘 남녀라고 할지라도 이, 이건 너무 진도가 빠른 거야! 

간밤의 일들을 떠올리며 모포 속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혼자 발악을 하던 이예주는 한참이 지나서야 모포 밖으로 얼굴을 슬쩍 내밀었다. 

동굴 안이 적막에 가득 차 있었다. 

눈을 감기 전까지 위에서 무겁게 그녀를 짓누르던 남자는 어느덧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이예주는 서운하지 않았다. 

혼이 나간 그녀에게 날이 밝으면 급히 동쪽 대륙에 가보아야 한다고 속삭이던 람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오히려 눈을 뜨자마자 그와 마주했다면 그녀는 부끄러움과 수치를 참을 수 없었으리라.

이예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하룻밤 사이에 몇날 며칠을 걸어 다니는 것보다 더 엄청난 체력을 소모하는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몸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흔히들 말하는 첫 경험의 후유증은 심하지 않았다. 

그 온천의 효능이 정말 좋았는지, 아니면 잠든 새 남자가 또 몰래 에너지인지 뭔지를 주입해서 치료해놨을지도 모르겠다.

상체를 일으키자 스르륵 흘러내리는 모포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헐벗은 어깨가 드러났다. 

요 밖에 던져져 있는 옷을 찾으며 무심결에 제 몸뚱이를 본 이예주가 입을 떡 벌렸다.

“히익.”

희멀건한 피부 위로 울긋불긋한 울혈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비행선에서 샤워 하다가 발견했던 자국들은 차라리 약과였다. 

얼마나 깨물고, 핥고 난리를 쳐놨는지 본래의 살색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미, 미쳤어. 이런 미친…… 아, 아야!”

쓰라린 통증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당분간 남자와의 스킨십은 일체 금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두 번 했다간 정말이지 사람 죽일 놈이다.

장포까지 단단히 챙겨 입고 나자, 문득 그녀의 눈에 동굴 한 구석을 나뒹굴고 있는 검은색 칼이 보였다. 

그 근처에 끈덕지게 굳어 있는 핏자국들도. 문득 어제의 참혹했던 잔상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완전히 난장판이었지. 

손목을 긋고 피를 질금질금 흘리던 자신과 어깨에서 피가 솟구치던 남자. 

순간 더운 피비린내가 코끝으로 확 풍겨 들어오는 것 같아서 이예주는 미간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그녀는 손을 들어 제 왼쪽 손목을 바라보았다. 

쟈니아가 준 칼로 베었던 자리는 흔적 하나 남지 않았다. 

그에 비해 어제 온천에서 본 남자의 몸은 어떠했던가. 

확실히 재생되고 있긴 했지만 불그죽죽하고 흉한 상처 자국이, 보는 그녀조차 아프게 만들었다.

이예주는 제 손목 한 번, 굳은 피 웅덩이 한 가운데 있는 검은색 단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그쪽으로 걸어가 단도를 주워들었다. 

피가 엉겨 붙어 있는 손잡이가 찝찝할 만도 하건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그것을 안주머니에 고이 집어넣었다. 

람을 닮은 까만 칼날은 신기했지만 이 칼은 존재 이유가 너무나도 불손했다. 

게다가 처음부터 이걸로 남자를 찌르거나 해칠 생각 따윈 조금도 하지 않은 그녀였다. 

필요 없는 물건은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

굳은 표정으로 생각을 마친 그녀는 이내 동굴 입구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       *       * 

람이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끈적끈적하고 찝찝했던 몸이 일어났을 때는 보송보송하고 깔끔했다. 

하지만 일어났으니 눈곱은 떼야 했기에 이예주는 귀찮아도 온천으로 가 간단히 몸을 씻었다.

다시 동굴 입구 부근으로 돌아왔을 땐 익숙한 작은 인영이 커다란 짐승 옆에서 부산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이예주를 발견한 흰 순록이 고개를 쳐들며 푸르르 하고 인사를 했다. 

하지만 뭐가 그리 바쁜지 순심이의 등에서 무언가를 끌어 내리고 있는 펭귄은 인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다.

“여기서 뭐해?”

이예주가 제 허리에도 못 미치는 까만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톡 치며 물었다.

펭양이 어깨까지 퍼드득 들썩이며 기겁했다.

“꺄앙! 예, 예주양!”

깜짝 놀라는 폼새가 영 수상쩍었다. 

이예주가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바라보자 펭양이 어색하게 웃었다.

“버, 벌써 왔어, 예주양?”

“나 몰래 또 무슨 짓 하고 있었지?”

“헉!”

정곡을 찌른 듯 펭양이 커다랗게 숨을 집어 삼켰다. 

이것 봐. 이렇게 금방 속을 들켜서야 람의 말을 듣고 자신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 할 것인가. 

이예주가 순진무구한 펭귄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그게…….”그러나 그런 그녀의 행동을 잘못 이해했는지 펭양이 울상을 지으며 안절부절 못했다.

“예주양이 씻는 동안 생선국을 만들려고 했어양…… 목욕을 오래 할 줄 알아서, 예주양이 오기 전에 다 해놓으려고 했는데…….”

“…….”

“미, 미안해양. 내가 조금 더 빨리 사냥했어야 했는데. 오늘따라 물고기가 잘 안 잡혀서양…….”

펭양이 시무룩한 얼굴로 들고 있던 제 몸뚱이만한 양동이를 내려놓았다. 

그 안에 은빛 비늘이 반짝이는 물고기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마구잡이로 사냥한 것이 아닌 하나의 종만 골라 사냥해 온 것 같았다. 

그런 펭양의 모습에 일순 이예주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제게 부당한 화풀이를 한 인간에게 밥을 차려 주려고 새벽같이 사냥을 해오고, 또 그 인간이 자신의 존재로 화가 날까봐 눈치까지 보고 있다. 

펭양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자신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제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하고, 그저 타인에게 잘못을 돌리고 분풀이를 하기 급급했다.

목구멍을 죄는 죄책감과 미안함에 이예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꽤 오랜 후, 그녀는 어렵사리 손을 들어 펭양의 머리 위에 가져다 댔다.

“……바보. 화 안 났어.”

“으, 응? 예주양 나 때문에 화난 거 아니양?”

“응. 안 났어.”

이예주는 여전히 제 눈치를 보며 까만 눈을 도록도록 굴리는 펭양에게 한 번 더 확신에 차 말했다.

“그러니까 내게 미안해하지 마.”

“정말이양? 정말 화 안났어양?”

끼루룩, 깍깍. 인간 여자의 말에 펭양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기뻐했다. 

방방 뛰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예주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착하고 순해 빠진 새인데. 

자신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쫓아다닌다며 의심하고 미워했던 지난날의 제 행동이 못내 가슴을 내리 눌렀다.

“예주양. 배는 안 고파양? 얼른 들어 가양! 내가 맛있는 생선국을 끓여 줄 게양!”

“아니야. 배는 별로 안 고파.”

펭양이 내려놓았던 양동이를 다시 번쩍 치켜들었다. 

이예주는 도리질을 쳤다. 

남자와 음험한 짓을 하며 그렇게 땀을 뺐으니 배가 고플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배가고프지 않았다.

“힝. 호, 혹시…… 생선국 싫어해양?”

금세 풀이 죽는 펭귄의 모습에 그녀는 손 사레까지 치며 황급히 덧붙였다.

“정말이야! 진짜 안 고파. 그리고 갔다 올 데도 있고.”

“웅? 어, 어디를?”

“…….”

이예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가 이 광활한 설 숲에서 갈 곳이라곤 몇 개 안 되었기 때문이다. 

답 없는 인간 여자의 모습에 펭양이 불안한 얼굴로 소심하게 물었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돼양?”

“어차피 오지 말래도 따라 올 거잖아?”

“헙! 그, 그건……!”

또 다시 정곡을 찔린 펭귄의 까만 동공이 지진 나듯 흔들렸다. 

그 모습에 이예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같이 가자.”

“응? 진짜양? 진짜 펭양이도 같이 가도 되는 거양?”

“갔다 와서 네가 끓여준 생선국 같이 먹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펭양이 만세를 하듯 두 날개를 번쩍 쳐들고 제자리을 뱅뱅 돌기 시작했다.

“끼루룩! 깍깍깍!”

짧은 날개를 퍼덕이며 아까보다 더욱 격렬하게 환호하는 펭양의 모습은 귀여우면서도 웃겼다. 

펭귄은 저런 괴상한 모양새로 기쁨을 표현하는 구나. 

하지만 이예주는 이번엔 펭양의 행동을 보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지 않았다. 

펭귄에게 처음으로 환하게 마주 웃어주는 그녀의 위로, 따사로운 남극 햇살이 내려앉았다.

“예주양, 이거 주인님이 또 가져 오셨어양. 전에건 너무 무거운 것 같다고 이게 더 좋은 거라고 하셨어양.”

순심이의 등에 펭양이 챙겨온 주전부리와 따듯한 물을 담은 가방을 얹던 이예주에게 불쑥 새신이 들이밀어졌다. 

고개를 내리자 펭양이 폭신한 털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털신을 처 들고 있었다. 

이예주는 저번에 받았던 신발을 신은 발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이것도 아직 쓸 만한데?”

“주인님이 이게 털이 더 짧아서 움직일 때 편하고 가볍다고 하셨어양. 예주양, 얼른 신어 봐양.”

펭양의 재촉에 못 이겨 이예주는 새 신발로 갈아 신었다. 

확실히 전에 신던 묵직한 부츠에 비해 훨씬 가벼워 발놀림이 산뜻했다. 

그녀의 발에 거짓말처럼 딱 맞는 사이즈에 펭양이 좋아라하며 박수를 쳤다.

“예주양이랑 정말 잘 어울려양! 두 개 번갈아 가며 신으면 되겠다양. 그치?”

두 신발 다 심미성보단 기능성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듯 칙칙하고 우중충한 색의 털신이었지만 펭양의 칭찬이 듣기 거북하지 않았다. 

이예주는 짧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나라에선 새 신발 선물 받으면 멀리 도망간다는 속설이 있는데. 자꾸 신발 선물 해주는 거 보니까, 네 주인이 나 도망가라고 등 떠미는 건가?”

“헉! 예, 예주양. 도, 도망갈 거양?”

농담에 펭양의 얼굴이 지나치게 흙빛으로 변했다. 

그 즉각적인 반응에 푸흐, 웃음이 터져나왔다.

“글쎄.”

“주인님은, 주인님은 예주양 발 시려 울까봐 주시는 거양! 저, 절대로 그런 의미로 주시는 거 아니양!”

“그런가?

“웅! 그러니까 도, 도망 안 갈 거지, 예주양? 펭양이 두고 도망가면 안 돼양!”

“앞으로 네 주인이 하는 거보고.”

이예주는 벗어 놓은 또 다른 신발에 묻은 눈을 탈탈 털어 순심이 등 위의 가방 안에 소중하게 집어넣으며 설렁설렁 답했다. 

똑똑한 흰 순록은 인간 여자의 손이 편히 닿을 수 있도록 무릎까지 살짝 굽혀 주었다. 

오로지 작은 펭귄만이 아무것도 모른 채 “안 갈 거지양? 안 갈 거지양?” 하고 애가 타는 목소리로 연달아 물어 볼 뿐이었다.

*       *       *

“예주양. 여긴 왜 다시 온 거양?”

그들은 머나먼 숲길을 걷고, 다시 얼어붙은 드넓은 강물 위를 건너 건너편 숲에 도달했다. 

어두침침한 숲 너머를 바라보며 강의 끝부분에 망연히 서 있는 이예주를 보며 펭양이 불안에 떨었다.

“서, 설마 정말 숲을 빠져나가 도망가려구양?”

“…….”

“힝. 가지마, 예주양. 웅?”

펭양의 애원에도 말 없이 서 있던 이예주는 불현듯 지상으로 올라서는 강변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혹여나 놓칠세라 펭양이 짧은 다리를 열심히 파닥이며 그 뒤를 따랐다. 

펭귄의 걱정과는 달리 그녀는 강의 가장자리에서 멈춰 설 뿐, 그 이상 설원 위로 올라서지는 않았다. 

펭양은 혹여나 인간 여자가 제 말마따나 새신을 신고 숲 속으로 줄행랑을 칠까봐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예주는 묵묵히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검은색 칼을 꺼내들었다. 

검붉은 피가 굳어 있는 시퍼런 날이 난데없이 품에서 튀어나오자 펭양이 ‘히익!’ 하고 기함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끝을 아래로 하여 손잡이를 단단히 쥔 이예주는 아래를 향해 그대로 내리 꽂았다.

푸욱―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단도가 땅 속에 깊숙이 박혔다. 

새까만 칼날이 눈 속에 파묻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그녀는 눈이 묻은 옷을 탈탈 털며 숙였던 허리를 바로 했다. 

쟈니아나 눈족들이 발견 못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때 했던 대화를 떠올려 보니, 눈족 인간들은 람이 무섭지도 않은지 먹을 것을 구하러 강변까지 자주 침범하는 것 같았다. 

단도를 발견하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아먹겠지.

여자를 만나고 칼을 받은 후부터 가슴에 틀어박혀 날카롭게 속살을 할퀴던 가시가 빠진 것처럼 속이 다 후련한 기분이었다.

“가자.”

모든 할 일이 끝났다는 듯 이예주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어리벙벙한 얼굴로 인간 여자가 하는 짓을 바라보고만 있던 펭양이 앞서 걸어가는 그녀의 뒤를 헐레벌떡 쫓아갔다.

“예주양. 저, 저렇게 그냥 두고 와도 되는 거양?”

땅 속에 박아 넣고 온 단검이 마음에 걸리는지 두 발을 바삐 옮기면서도 펭양이 자꾸만 뒤를 흘깃거렸다. 

이예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주인한테 돌려주려고.”

“그, 그치만…….”

펭양이 시무룩하게 말끝을 흐렸다. 

눈족 여자에게서 받은 것을 두고 오면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반응에 이예주는 의아한 표정으로 펭귄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잠시 주저하던 펭양이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로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치만 예주양은 숲을 빠져나가고 싶어 했잖아양…….” 

이예주는 어쩐지 아까부터 자꾸만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각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절대 숲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으려고만 하는 줄 알았더니, 신경 많이 쓰고 있었구나. 

한 마디 뿐이었지만, 그간 자신이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이 작은 펭귄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예주는 애써 씩씩한 목소리로 펭양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이제 필요 없어.”

축쳐진 채 물기를 머금었던 까만 눈알이 그 순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펭양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저, 정말? 정말 필요 없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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