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57)화 (259/319)

“알았죠?”

“…….”

“왜 대답이 없어요?”

들려오는 답 없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똑똑 울려 퍼지자, 이예주가 가리키던 검지로 남자의 어깨를 쿡쿡 찌르며 대답을 재촉했다. 

왜 대답이 없냐구요! 그녀가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왈칵 성을 낼 때 비로소, 람은 제 어깨를 찌르는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조금, 이상하군.” 

“뭐, 뭐가요.”

아득 검지를 움켜쥐는 아귀힘에 이예주가 멈칫하는 사이 남자가 그녀의 손을 천천히 잡아 내렸다.

“예전에는 네가 울 때마다 어린 것이 칭얼댄다는 생각만 들었다.” 

“…….”

“그런데 이제는, 여기가. 계속 진동하는데.”

점점 내려가던 그녀의 손가락이 마침내 그의 왼쪽 가슴 부근에 닿았을 때.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아 당겨, 쿡 자신의 가슴팍을 찔렀다.

이, 이 남자 지금 뭐하는 거지. 

당황한 이예주가 손을 빼려 들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장난치듯 그녀의 손가락을 갖고 쿡쿡 제 가슴을 찌르던 남자가, 그도 모자라 이제는 와락 제 왼쪽 가슴 위에 이예주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게 뭐지?”

“……예?”

“이것을 뭐라고 하지?”

그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뭘 말하는 건지 모르는 건 이예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저 멍했다. 남자에게 잡힌 손은 불에 닿은 듯이 뜨거웠고,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느릿한 심장 박동은 점점 거세졌다. 

쿵. 쿵. 점점, 점점 더 크고, 점점 더 빠르게.

대답 없이 우물쭈물하는 이예주를 이번에는 람이 재촉했다.

“알려줘.”

“……어…….”

“네가 내게 알려주기로 했지 않아.”

일순 머리가 하얘져서 이예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그의 왼쪽 가슴 안쪽은 진동하는 것을 넘어 손을 두드리듯이 거세져 있었다. 

그녀는 그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남자를 바라보며 어버버거렸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하냐고? 이렇게 심장이 뛰는 이유를? 

심장이 빠르게 달음박질치는 이유야 여러 가지 있었다. 

무섭고, 두렵고, 충격을 받아서일 때도 있고. 기쁘고, 행복하고, 설레서일 때도 있고……. 

하지만 이예주는 그가 아니었기 때문에 람의 심장이 이렇게 뛰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남자가 다시 한 번 그녀를 재촉했다.

“응? 예주야, 이걸 뭐라 하지?”

“그, 그게……”

“…….”

“그게 중요해요?”

혐오와 살기가 사라져 버린 시뻘건 눈동자를 마주하자 그녀는 희미하게 기억해냈다. 

신체 일부가 시뻘겋게 변한 것을 돌리기 위해 분노 외의 모든 감정을 알고 싶다던 남자. 

다리족들의 비행선에서 본, 지구의 가장 깊은 곳. 이름과는 달리 내핵 속에 있던 새빨간 색의 검은 파편.

남자는 감정을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예주는 어떻게 그것을 알려줄 수 있는 건지 몰랐다.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거니와, 이젠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도 봉구가 죽었던 때, 엄마가 죽었을 때, 수학여행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 멈춰 있는 자신처럼 람 또한 과거에 사로 잡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뭘 느끼는지 그 이름을 아는 게 중요해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지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안돼요?”

이예주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반대쪽 팔을 들어 그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누구나 하는 그것을 남자는 하지 못한다는 것이 가슴 속에 통렬히 내리 꽂혔다. 정

말 아무것도 모르는 구나 이 남자는.

남자는 제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말이 좀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심히 답했다.

“그 계집은 내가 인간들을 돌보고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 했는데.”

“그 계집? 누구요?”

“…….”

“혹시, 시간인지 뭔지 그 여신 말하는 거예요?”

남자의 말에 불쑥 제게 잘도 칼을 건네며 헛소리들을 지껄였던 허여멀건 한 눈족 여자가 떠올라 이예주가 불쾌하게 얼굴을 구겼다. 

그러고 보니 비행선에서 본, 제 얼굴을 여신과 동일화하던 눈족 여족장과 똑 닮은 얼굴이었다. 

시간의 여신 그리고 눈족 여족장. 과거, 참으로 터무니없는 이유들로 징글맞게도 남자를 괴롭히던 여자들이었다. 

못된 것들. 

“칫. 그건 다 헛소리에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이예주는 남자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확 내렸다. 

첨벙, 물이 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단호한 부정에 남자의 눈이 조금 커졌다.

“헛소리라고?”

“그래요!”

“어째서?”

“어째서는요?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잖아요? 벌써 인간들 때문에 화도 나고, 짜증도 나봤고. 신인류들이 잘 살아가고 있을 때는 기쁘기도 하고, 인간들한테 잡아먹히면 슬프기도 하고…….”

이예주는 기억하고 있다. 인간들에게 잡아먹히던 포니를 보았을 때의 람. 

해안 마을에서 사슬에 묶여 인간들에게 끌려가는 신인류들을 보았을 때의 람을. 

신인류들을 바라보는 그는 언제나 변함없이 무표정했지만, 검은색으로 바뀐 그 눈 속에 수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았다.

“그리고 몸이 다치면 아프기도 하잖아요.”

“…….”

“계약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당신은 지금 날 곁에 딱 붙어 있게 하고 싶고, 아무데도 못 가게하고 싶은 거죠?” 

계약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예주는 마음 한켠이 조금 우울해졌지만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냥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내가 당신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길 포기한 것처럼…….”

“나 때문에 과거를 포기했나?”

“예, 예? 어…….”

부지불식간에 치고 들어온 람의 물음에 이예주는 당황했다. 

남자를 위로해준답시고 주절거리다가 죽어도 제 입으로 얘기해주지 않으리라 다짐한 사실들까지 줄줄이 토해내고 말했다. 

과거를 포기했다는 말을 들은 남자의 동공이 방금 전과 달리 기묘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 멍청아! 도망길을 제 입으로 차단하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 

“그, 그게 사실…… 다, 당신 때문만은 아니고요! 그냥 다리족 놈들이 이것저것 거짓말을 잔뜩 치기도 했고…… 또 과거로 가는 방법이 희박하다는 것도 알았고…….”

이예주는 안절부절 못해서 허겁지겁 변명했다. 

그러나 자신이 느끼기에도 앞 뒤 안 맞는 헛소리를 주절거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남자가 시뻘건 눈을 번뜩이며 그걸 또 세상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남자가 마치 어린 아이 재롱 보듯 느른한 눈으로 이예주를 머리부터 쭉 훑었다. 

그의 눈을 가만히 마주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야릇해져서 그녀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 그런데 람. 눈이…… 눈이 좀 이상해요.”

그저 도피처를 찾기 위해 아무 말이나 지껄인 것인데, 다시 보니 정말로 람의 눈이 조금 이상했다. 

이예주는 고개를 모로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원래 이런 색이었나? 예전에는 완전 새빨간 색이었는데……. 지금은 조금…… 조금 무섭게 바뀌었는데요?”

“……어떻게?”

그녀는 정신없이 남자의 눈을 바라보느라 그가 바위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스르륵 제 쪽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당연했다. 남자의 움직임에도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변했느냐고. 남자가 속삭이듯 은근한 목소리로 변했다. 

이예주는 남자가 제게로 바짝 다가와 스리슬쩍 허리를 휘어 감는 줄도 모르고 양 손으로 그의 두 얼굴을 잡고 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의 눈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기 위해서였지만, 그걸로 그녀의 몸이 완전히 그의 팔 안쪽으로 들어섰다는 사실은 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 그니까…….”

“응.”

“꿈에서 본 것처럼 왜 이렇게 검붉게…….”

“어여쁜 것.”

“……네? 지금 뭐라고…….”

코가 닿도록 가까운 곳에서 남자의 붉은 입술이 사르락 움직였다. 

그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거지? 이예주가 환청을 들었나 싶어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을 때. 덫이 이를 다물 듯 남자가 와락 그녀의 허리를 껴안아 잡아 당겼다. 

이예주의 상체가 균형을 잃고 속절없이 그의 가슴 위로 무너졌다.

“어억!”

단단한 살에 얼굴이 처박힌 충격으로 이예주는 한동안 꼼짝할 수 없었다. 

이 남자가 사람 죽일 일 있나! 이,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이야!

“저, 저기요! 뭐하는 거예요?”

“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을 보아하니, 에너지가 덜 주입되어 치료가 잘 안 된 것 같다.”

“예? 그게 무슨 소리…….”

“확실한 계약 성사를 위해선, 한 번 더 하는 게 좋겠지?”

정수리 위에서 타고 내려오는 소리에 이예주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때 남자가 그녀의 몸을 옭아 맨 손으로 그녀의 젖은 등을 훑어내렸다. 

그저 가벼운 쓰다듬기 일 뿐인데 이예주는 일순 목 뒤로 번개가 내리치듯 짜르르 소름이 돋았다.

“자, 잠깐만요!”

좋지 않아. 이런 신호는 매우 좋지 않아. 

이예주는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채고 남자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고 아등바등 거렸다. 

그러나 덫은 한 번 문 사냥감을 놓지 않는다. 

한참을 끙끙 댄 후에야 비로소 그녀는 남자의 가슴에 파묻힌 얼굴을 쳐들고 람을 올려다 볼 수 있었다. 

“뭐, 뭘 해요? 무슨 계약 성사요?”

호흡이 힘들어서 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그녀의 안면은 어느덧 발그레 열이 올라 있었다. 

“나는 네가 멋대로 내 곁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너는 내가 다치지 않는 것을 계약의 조건으로 내세웠지 않았나?” 

“그, 그게 무슨……! 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내가 언제 당신이랑 또 계약 한다 그랬냐고요!”

이예주는 너무나도 기가 막혀 말까지 더듬었다. 

내가 무슨 조건을 내세워? 그건 네 놈을 위해서 한 말이지, 계약을 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고! 

그녀는 남자의 팔이란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하지만 남자는 힘 하나 들지 않은 목소리로 여상히 지껄였다.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선 대가가 필요하다. 대가로 널 치료 해 줄 테니 넌 그저 가만히 있도록 해. 내가 다 알아서 하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버둥거리느라 바쁜 와중에도 이예주는 남자의 말이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이전에도 마치 ‘오빠 믿지? 오빠가 다 알아서 할게.’ 하는 것처럼 이딴 식으로…….

“나 괜찮아요!”

이예주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 꼴이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의 어린 사슴과 같았다.

“나 안 아파요! 그리고 치료를 대체 어떻게 하는데 이런 자세로……!”

“네가 말한 그런 짓으로.”

“……우웁!”

그러나 채 남자를 설득하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 위로 람의 입술이 와락 내리 덮쳤다. 

그녀의 입을 강제로 닥치게 만들 듯 떠벌 거리느라 벌어져 있던 입 속으로 미끄덩한 그의 혀가 물밀 듯이 들이닥쳤다. 

이미 여러 번 해본 전적이 있어서인지 물기를 머금은 그것은 이예주의 입 속을 제 집처럼 쉽게도 점령했다. 

타인에 의해 혀가 뿌리까지 거칠게 옭아 매여져서 비벼지고, 핥아진다. 

이예주는 다시 뇌 한구석에 잘 뭉쳐있던 실이 줄줄 뽑혀나가는 기묘한 감각을 느껴야 했다. 

고개를 위로 번쩍 쳐들고 있는 탓에 꼼짝없이 남자에게 입을 내줘야 했던 그녀는 그가 은색 실을 남기며 천천히 떨어지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간신히 몰아 내쉴 수 있었다.

호흡이 힘겨워 하얗게 점멸했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다. 

하지만 이예주는 가만히 숨을 고를 새도 없었다. 

“헉, 헉. 저기요, 람! 저 아직 아파요!”

설마, 그런 거 아니지?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흔들며 노를 외쳤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미친놈아! 

하지만 놈은 시뻘건 눈으로 이예주에게 단호하게 예스를 선고했다. 

“괜찮아.”

“아니 내가 아프다는데 괜찮긴 뭐가……!”

“이 온천은 상처를 치유해주고 원기를 돋우는 효능이 탁월하다. 그래서 나 또한 종종 이용하고 있지. 너처럼 어린 인간에겐 더 없이 약효가 잘 들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 눈을 떴을 때와는 달리 찌뿌둥했던 몸이 개운했다. 

뜨거운 물에 꽤 오랜 시간 몸을 담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답답하고 숨 막히기는커녕 갈수록 머리가 맑아지고 숨쉬기가 편해졌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그녀는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했다. 

온천이 그런 효능을 가지고 있다면, 남자가 해준다는 ‘치유’는 필요치 않다는 것을.

사지가 붙잡힌 개구리처럼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예주야.”

“잠깐만요! 아니, 잠깐만! 그게, 아흑!”

반항 한 번 못한 채 그녀는 결국 람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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