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56)화 (258/319)

이예주는 결국 나비를 쥔 손을 붙들고 무너졌다. 

람이 간신히 멈췄던 눈물방울들이 둑 터지듯 쉽게도 흘러나았다.

“미안해. 미안해, 알리자린. 미안해…….”

“그만 울도록 해. 드디어 빌어먹을 비행선에서 빠져나와 자유로워 졌다며 기뻐하고 있었는데. 네가 그렇게 우니 눈족 계집이 난감해 하는군.”

나비가 다칠까봐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고 엉엉 우는 그녀에게 람이 대신 알리자린의 소식을 전했다. 

그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푸른 날개가 푸르르 진동했다. 

강간을 하려던 놈들 앞을 막아선 이예주를 보며, 무뚝뚝한 얼굴 뒤로 애써 당황함과 난처함을 감추던 알리자린의 모습이 푸른 나비 위로 훤히 그려졌다.

이예주는 그래서 마음 터놓고 울 수도 없었다. 

죽고 나서야 간신히 얻은 알리자린의 자유, 기쁨과 환호를 자신의 울음으로 망치는 게 될까봐.

“이제 떠나야 한다. 그만 보내주지.”

“어, 어디로 가는 건데요?”

“히카톤에게 잡아 먹혀 괴물이 되지 않았으니 자유롭게 이곳저곳 돌아다니겠지. 그러다가 오랜 후에 정착할 곳을 찾을 것이다.”

“그냥, 흐흑, 그냥 같이 있으면 안돼요?”

애써 울음을 참는 인간 여자의 모습에 람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시 세심하게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닦아 주며 툭 내뱉었다.

“검은 파편과 벌거벗고 놀아나는 모습 같은 것 보고 싶지 않으니 배려 좀 해달라는데.”

“……이 나쁜 계집애!”

이예주는 방금 전의 애틋함 따윈 집어치우고 나비를 째려보며 분개했다. 

‘검은 파편이랑 놀아나는 건 내 알 바 아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것도 모르냐?’ 

차가운 얼굴로 빈정대던 알리자린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바로 귀 옆에서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이예주는 자신이 벌거벗은 몸으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악! 당연하게도 그녀는 기겁했다. 허연 살결이 목 끝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때였다. 

이예주가 제 맨 몸을 무려 두 명의 타인에게 보이고 있다는 수치심에 몸부림을 치기도 전에 검지 위에 앉아 있던 푸른 나비가 뿌연 수증기 사이로 포르르 떠올랐다.

“안 돼. 가지마! 가지마, 유나야!”

“스읍-”

그녀가 나비를 잡기 위해 허공으로 허우적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들자 남자가 짧게 혀를 차며 그녀를 다시 품에 잡아 앉혔다.

마치 인사를 하듯 이예주의 머리맡에 닿을 듯 말듯 뱅글뱅글 돌다가 더 높이, 높이 날아올랐다.

이예주는 달을 향해 멀어지는 파란 나비를 올려다보며 울먹거렸다.

“이렇게 가면 어떡해. 미안하단 말도 제대로 못했는데…….”

“괴물이 되지 않고 죽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눈족 계집은 네게 감사히 여기더군. 기회가 있으면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 이젠 떠나야 할 시간이다.”

알리자린은 점점 더 멀어지고, 지상에는 이예주만 남았다.

감사히 여긴다니……. 자신은 해준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이제야 어렵게 사귄 첫 번째 인간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잃어야 한다는 사실이 이예주는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흐린 눈으로 점이 되어 사라지는 나비를 하염없이 쫓던 인간 여자의 모습이 꼭 같이 가길 갈망하는 것 같아 보여, 람은 뒤에서부터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스르륵 감싸 안았다. 

자신의 몸이 결박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이예주는 그를 돌아보며 애타게 물었다. 

어느덧 그를 주먹으로 내리치던 독기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정말이죠? 정말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죠?”

“다시 만나기 위해 유람(遊覽)을 떠나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이 곁에 있게 해주면 안 되는 거예요?”

“지금 놓아주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 텐데.”

“흑…….” 

람은 다시 히끅 거리기 시작하는 인간 여자를 제 쪽으로 돌려 앉혔다.

“울지 마.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지 않아.”

“이게 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이예주는 토끼처럼 벌게진 눈으로 그를 한껏 노려보았다. 

그래. 이게 다 네놈 때문이잖아. 네 놈이 좋다고 정신 못 차리던 날 이용하고, 버려서. 

나한테서 비밀을 털어 놓을 기회조차 앗아가 버려서.

“나 때문이라…….”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 여자의 모습에, 람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그는 아직도 이유를 잘 알지 못했다. 

인간 여자가 왜 자신을 이토록 원망하는 얼굴로 바라보는지. 

그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매번 과거로 돌아갈 궁리만 하는 계집을 묶어둘 수만 있다면 람은 기꺼이 같은 선택을 하리라. 

하지만 이토록 서럽게 울고, 이토록 자신을 원망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조금. 조금쯤은 더…….

“그러면 어떻게 해줄까.”

검은 파편은 그런 고민을 하는 자신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하염없이 우는 어린 인간 계집 앞에서 꼭, 안절부절 못하는 꼴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저절로 주절거리는 제 입을 막을 수 없었다.

“내 조각은 이미 네 일부가 되어 버렸으니 다시 줘봤자 쓸모가 없겠지. 넌 인간 놈들을 죽이는 걸 딱히 좋아하는 편도 아니니 널 괴롭힌 것들을 모조리 소멸시키는 것도 필요 없을 테고.”

“…….”

“온 대륙을 네 손 아래 쥐어주면 네 기분이 조금 풀어지려나.”

그는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어린 것이 더 이상 울지 않는다면. 제게 다시 방긋방긋 어여쁘게 웃어 준다면 그깟 대륙 따윈 얼마든지 도륙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람의 지껄임 덕에 이예주가 훌쩍임을 멈추고 흉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뭐, 뭐라구요?! 나는 그런 거 필요 없어요!”

“그럼 뭘 줘야 하는데?”

람이 곧 바로 되물었다.

“뭘 줘야 네가 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지?”

“당신, 진짜…….”

말문이 막힌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방금 전 까지 만해도 불을 토해내며 버럭 화를 내려던 이예주는 모든 격렬한 것들이 푸시시 꺼짐을 느꼈다. 

그녀는 그저 망연자실 람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를 정말이지, 어떡해야 할까.

허망한 표정으로 그를 멀거니 보기만 하던 이예주의 시선에 문득 그의 맨 몸 위에 새겨진 잔혹한 잔상들이 포착됐다. 

손목을 긋던 결정적인 순간에 폭풍처럼 몰아닥친 남자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미처 알지 못했다. 

그의 팔이. 폭발했던 그의 왼쪽 팔이 거짓말처럼 붙어 있었다. 

눈앞에서 스프링클러처럼 피를 흩뿌리며 사라져 있었던 람의 팔. 

폭발했던 남자의 팔이 온전히 붙어 있음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금도 안도할 수 없었다. 

팔이 온전히 붙어있기만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가 다시 붙은 듯 피부위에 파죽지세로 뻗어진 불그죽죽한 흉터가 왼쪽 어깨부분을 뒤덮고 있었다. 

그 부분은 차라리 나았다. 꽤 오래된 것처럼 색이 옅었으니까. 

남자의 오른쪽 목덜미 뒤쪽에는 새로 생긴 상처가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었다. 

간신히 살이 돋아나 붙은 것처럼 피를 흘리듯 시뻘건 피부. 

그것이 바로 전 손목을 긋고 ‘문’ 으로 도망가려던 자신을 막기 위해 남자가 자행했던 상처라는 것은 곧 바로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신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괴물 같은 재생력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 이예주의 안중에 들어 올 리 없었다. 

용병 대장의 칼에 맞고도 흉터 하나 남지 않았던 남자였다. 

대체 자신의 몸에 무슨 짓을 했기에 이렇게 커다란 흉터가 남을 수 있는가. 

재생되고 난 흉터만 봐도 진저리가 날만큼 끔찍한데, 실제로 팔이 폭발했을 때는 얼마나 참혹했을까. 얼마나…….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색이 다른 그의 왼쪽 어깨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만지면 또 다시 찢어지고, 피를 흩뿌릴까봐 두려운 것처럼 아주 약한 손짓으로.

“다시는…… 다시는 이러지 말아요. 다시는.”

찢어진 채 펄럭이던 그의 텅 빈 소매 자락이, 아직도 눈만 감으면 선연히 떠올랐다. 떨림은 곧 손을 타고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두 번째까지는 맨 정신이 아닌 상태라 어찌 넘어갔지만 세 번째 남자의 그런 꼴을 본다면, 그때는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따스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어깨를 더듬는 그녀의 손은 한없이 차가웠다. 

한 눈에 보기에도 부들부들 떨리는 이예주의 손을 물 아래로 꾹 잡아 내리며 남자가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네가 내 곁에서 멋대로 도망치지 않으면 이럴 일도 없겠지.”

“이, 이 사람이 정말! 곁에 있는 다고 했잖아요. 그, 그런 짓까지 해놓고 뭘 어떻게 떠나요!”

“그런 짓이 뭔데?”

“그, 그건…….”

이예주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직시하는 남자의 눈을 휙 회피했다. 

죽어도 제 입으로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녀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괜찮아.”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예주가 아래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뭐가요?”

“이깟 고깃덩어리는 얼마든지 재생이 가능하다. 여기가 관통 되어도.”

람이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 옆을 툭툭 쳤다.

“펄펄 끓는 용암 속에 던져져 온 몸이 녹아 내려도. 사지가 갈가리 찢겨 조각조각 분해되어도 얼마든지. 재생이 힘들면 다른 개체의 것을 뜯어서 붙이면 되지. 이것도 그러했거든.”

람이 사라졌다 다시 생긴 왼쪽 팔을 슬쩍 들어 보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이게 문제였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그의 무덤덤한 말투는 자꾸만 그녀를 아프게 했다. 

다른 개체의 것을 뜯어서 붙인다는 말에 경악할 만도 했지만, 이예주의 얼굴은 그저 울 것처럼 와락 일그러졌다. 

그녀는 이제 물을 머금다 못해 퉁퉁 불어터진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와락 부여잡았다. 

“그래도 아프잖아요.”

“그런 고통쯤은 별것 아니……”

“당신은 그게 문제에요. 그런 고통쯤이 아니라구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 남자는. 

이예주는 가늠해보려고 해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왜 그 긴 세월동안 아무도 이 남자한테 고통이 뭔지. 아픔을 느끼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려주지 않은 거야. 

시간이란 여신은? 그 여자는 정말 뭘 한거지?

“아프잖아요.”

“…….”

“아픔을 느끼는 건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똑같을 거 아니예요…….”

그의 어깨 위를 만지작거리며 이예주는 울먹였다. 

그녀는 잠시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무언가를 인내했다. 

다시 입을 열며 그녀는 드디어, 그동안 손 안에 꽉 쥐고 놓지 못했던 엄마를 떠나보냈다.

“……내가 졌어요.”

그녀는 정말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를 포기한 것과는 별개로 남자 때문에 자신은 알리자린을 버렸고, 그래서 그 애가 죽었다. 

미워해야 하고 또 원망해야한다. 하지만 자신을 잡기 위해 고통스러운 줄도 모르고 제 몸을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이 남자를 그녀는 도저히. 도저히 외면 할 수가 없었다.

“이제 아무데도 안 갈 테니까 다치지 마요.”

“…….”

“당신이 아픈 거 싫어…….”

남자의 가슴에 이마를 툭 부딪치며 이예주가 어린 아이처럼 웅얼거렸다. 

뜨끈한 피부를 타고 느릿한 심장박동 소리가 전달되었다. 

그제야 그녀는 진심으로 안도할 수 있었다. 

아직 살아있다. 제 눈 앞에서 스프링클러처럼 피를 흩뿌리던 남자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 

이젠 모르겠다. 그냥 다신 그 모습을 보기 싫어. 심장이 발끝까지 뚝 떨어지고 숨을 쉴 수 없었던 그 기분, 다신 느끼기 싫었다. 

이예주는 문득 남자의 가슴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번쩍 쳐들고 외쳤다.

“약속해요.”

“뭘 말이지?”

“다신 이러지 않겠다고. 다시는 자기 몸을 이렇게 다치게 하지 말아요. 아프게 하지도 말고요.”

“…….”

“그리고! 내가 도망가려고 하면 왜 그러는지 좀 말로 물어보라구요, 이렇게 무식하게 굴지 말고요!”

이예주는 한 손으로 붉은 자국이 흉흉하게 남은 어깨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그곳을 바라볼 때마다 애써 경직시킨 표정이 자꾸 허물어져서 힘들었다. 

이 고운 피부 위에 흉측하게 이게 뭐야. 

또 한 번 이렇게 만들기만 해봐. 그땐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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