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54)화 (256/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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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주는 끊임없이 캄캄한 어둠 속을 걸었다. 

언제부터 걷기 시작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의식을 차렸을 때 그녀의 몸은 어둠, 회명, 암흑 속에 갇혀 있었다. 

걸음을 우뚝 멈춘 채 빛이 나는 제 몸을 바라보던 그녀는 서둘러 왼쪽 소맷부리를 걷어 올렸다. 

왼쪽 손목을 일자로 가르며 자글자글하게 자리하고 있어야 할 흉터가 보이지 않았다.

“……꿈?”

이예주는 어색할 만큼 밋밋한 재 손목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다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꿈속임을 어렴풋이 인지했다. 

서울에서 1000년 후의 세상으로 넘어 간 후 오랫동안 꾸지 않아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자신이 종종 암경 속을 헤치고 다니는 악몽을 꾼다는 것을. 

“하…….”

유쾌하지 않은 자각몽의 깨달음에 그녀는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암흑이 모두 꿈인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변하는 것은 딱히 없었다. 

현실처럼, 꿈에서 깨기 전까지 그저 하염없이 어둠 속을 헤치고 다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연 끔찍하고 가장 꾸기 싫은 악몽이었다.

이예주는 우울한 얼굴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이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는 가만히 있다간 없던 온갖 공포증이 생기는 것은 물론이고, 영원 같은 시간 속에 갇혀 버린듯한 기분이 든다. 

때문에 그녀는 방향도, 길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억지로 걸었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빨리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을 거라 애써 믿으며.

그렇게 하염없이 암경 속을 걷고 또 걷길 반복한지 얼마나 됐을까. 

꿈속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다 못해 갑갑증이 일만큼 지긋지긋한 어둠. 그 끝을 알리듯 그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환한 빛을 쏟아내는 ‘문’이 나타났다. 

깨어날 시간이야. 

이예주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문’을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과연 ‘문’을 통과하면 이 암경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에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을 뿐이었다. 

한참을 달리고 또 달려 그녀는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곧 새하얀 빛이 눈앞을 잠식했고, 이예주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얼굴 가죽이 화끈할 만큼 뜨거운 열기를 느꼈을 때였다. 

타닥타닥. 

모닥불에 장작이 타오르는 것 같은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이게…….”

이예주는 붕어처럼 입을 벌린 채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녀의 앞에 펼쳐진 것은 펄펄 들끓고 있는 시뻘건 용암이었다. 

앞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있는 협소한 크기의 땅 양 옆, 뒤. 매캐한 냄새와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모든 것을 불사르는 지옥불이 사방에서 철철 내리흐르고 있었다.

“꾸, 꿈…… 꿈 아니지?”

온통 불타오르고 있는 주변을 바라보자 이예주는 덜컥 겁이 났다. 

당장 소매를 걷어 올리고 꿈인지 생신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혹시 이 천불 같은 뜨거움이 현실일 까봐. 

용암으로 뒤덮여 멸망하고 있는 세상이 진짜일 까봐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 주위로 둥그런 띠를 만든 채 용암이 점점 좁혀왔다. 

금방이라도 입고 있는 옷이 불타오르고 드러난 살갗이 불타오를 것 같은 뜨거움이 느껴졌다. 

곧 용암 물에 삼켜져 뼛가루조차 남기지 못한 채 불타 녹을 것이다. 

지구가 멸망하고 있어. 어떡해. 이게 바로 세기말 용암 폭발 인가봐. 

이예주는 두 손으로 제 머리를 부여잡고 벌벌 떨었다. 

그녀의 두 동공이 사방팔방으로 날뛰었다. 

조금이라도 이 천불 같은 뜨거움에서 벗어나 피할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그녀의 눈에 이상한 것이 포착되었다.

그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직 용암이 덮치지 않은 땅. 

온 천지가 불타오르고 있는 아비규환 한가운데에 작은 인영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두려움에 하염없이 떨리던 이예주의 눈이 부릅 홉떠졌다.

“얘, 얘야!”

그렇게 있으면 안 돼. 얼른 피해야 하는데! 

그녀는 애타는 마음에 큰 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그러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것인지 아이는 이예주에게서 등을 돌린 채 쭈그려 앉아 있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얘야!”

그녀는 다시 한 번 애타게 아이를 불렀지만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지상이 타오르며 뿌옇게 일어나는 연기 때문에 아이가 뭘하고 있는 건지 잘 보이지 않았다. 

이예주는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심정을 느꼈다. 

아이에게 당장 달려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가 있는 곳과 자신이 있는 곳 사이에는 마그마가 강물처럼 출렁이며 흐르고 있었다. 

하으, 씨. 울상을 한 채 그녀는 제가 있는 곳과 아이가 있는 곳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용암 줄기는 계곡의 시냇물처럼 그리 넓은 폭은 아니었다. 있는 힘을 다해 도약하면, 어쩌면 뛰어넘을 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두 번의 기회가 없다는 것 뿐. 혹시라도 넘지 못하면 그대로 저승 행 급행열차를 타야 한다.

“흐, 흐윽…….”

이예주는 무서워서 울먹였다. 

학교 체력장 때 멀리 뛰기 점수가 몇이나 됐더라. 

얼마 뛰지도 못한 채 흙바닥에 흉하게 자빠졌던 제 과거를 애써 외면하며 그녀는 천천히 달려올 거리를 위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최대한 멀리서 뛰어와 도약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뒤에서도 빌어먹을 용암이 꾸물꾸물 기어 오고 있었기에 거리가 한정 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뛰기 위해 가장 먼 곳의 용암 앞까지 도착한 이예주는 뛸 자세를 취하며 마른 침을 모아 삼켰다. 

용암 너머에 있는 아이에게 가기 위해선 기회는 단 한 번. 자칫 미끄러지면 그대로 끔찍한 소멸이다. 

눈을 꾹 감고 잠시 심호흡을 하던 이예주는, 이내 번쩍 눈을 뜨고 다리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달렸다. 

땅과 땅 사이를 가르는 용암을 건너뛰기 위해. 

“으흐!”

타다다닥. 빠르게 달려오던 그녀의 발이 용암이 흐르기 일보 앞에서 발돋움을 위해 세게 땅을 딛었을 때였다. 

두텁게 땅을 뒤덮고 흐르던 용암이 그 순간, 기적처럼 양 갈래로 촤악 갈라졌다. 

누군가 눈삽을 들고 억지로 마그마를 가른 것처럼 그렇게. 

그리고 아이가 있는 곳까지 길이 생겼다.

“이, 이게 뭐야? 이게 무슨…….”

모세의 기적이야 뭐야? 

멍하니 제 앞에 홍해바다처럼 갈라진 용암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예주는 얼마 안 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찌된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넘어지면 타죽을 것을 감수하고 용암 위를 뛰어넘는 위험천만한 짓을 하지 않아도 아이에게로 갈 길이 생긴 것이다. 

이예주는 자신이 이런 기적을 행하게 된 원인을 찾는 것은 뒤로 미루고 무작정 건너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얘야!”

용암이 없으니 아이가 있는 땅까지 한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예주는 얕게 헐떡이며 조심스럽게 작은 어깨를 짚었다.

“얘야. 여기서 뭐해? 여기 있으면 안 돼. 너무 위험해!”

“…….”

“엄마를 잃어버렸니? 나랑 같이 가자. 내가 엄마한테 데려다…….”

등을 돌린 채 미동 없이 앉아 있던 아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애탄 마음에 속사포처럼 어서 가자는 말을 내뱉던 이예주는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람?”

그녀는 일순 제 눈을 의심했다. 

사방이 뒤덮인 용암으로 펄펄 들끓는 멸망의 땅에서, 부모를 잃고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아이는 바로 어린 람이었다. 

항상 고개를 처들고 올려봐야 했던 시뻘건 눈동자가 이제는 허리춤에서 아롱거렸다.

“람!”

이예주는 경악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어린 람을 정신없이 훑어보자 그의 발목이 사슬에 결박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어린 아이의 발목 옆에 두기에도 살벌해 보이는 녹슬고 두꺼운 사슬이 땅에 박혀 있는 말뚝에 고정되어 있었다. 

온통 불바다인 이곳에 누군가 람이 도망 칠 수 없도록 일부러 잡아둔 것이 틀림없었다.

“누, 누가 이래 놨어요? 대체 누가 이래 놓은 거예요?”

“…….”

그녀의 다급한 질문에도 어린 람은 대답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 말간 얼굴에 이예주는 그야말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인간들이, 인간들이 이래 놓은 거죠? 당신을 또 다시 죽이려고! 폭발시키고 총을 쏴서 당신을 또 다시 죽이려고……!”

그녀는 똑똑히 기억했다. 

다리족 놈들의 거주지였던 비행선에서 본 1000년 전 과거의 모습. 

인간들이 어떻게 람을 지상으로 끌어올렸고, 또 어떻게 막 깨어난 어린 그를 죽이려 들었는지. 

놈들이 이 사람을 또 죽이려고 드는 거야. 그게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 일을 초래하는지도 모르고. 이 사람을 또 아프게. 처참하게……. 

이예주는 람의 가느다란 발목을 우악스럽게도 감싸고 있는 묵직한 사슬을 두 손으로 와락 움켜쥐었다. 

“조,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내가 이거 금방 풀어줄게요. 내가 금방 풀어줄테니까…….”

“왜?”

그때였다. 

여태껏 꾹 다물려 있던 아이의 조막만한 입이 열렸다. 

“네?”

“왜 풀어줘?”

이예주는 어린 람의 질문에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왜 이런 질문을 하지? 이렇게 온 사방이 용암으로 부글부글 들끓고 있는데. 

지금도 새빨간 유황들이 불꽃을 날름거리며 그들의 명줄을 천천히 조여오고 있는데. 

여기 있으면 너무 위험했다. 아무리 천하의 람이라도……. 

아니, 지금의 람은 더군다나 이예주의 허리춤에나 간신히 올법한 어린 애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예주는 일그러진 얼굴로 다시 한 번 어린 람의 모습을 살폈다. 

고작 사막 여우 포니의 또래나 될 법한 작은 아이가 공허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인데. 그 무감각한 얼굴에 이예주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여기는 너무 위험하잖아요. 너무 뜨겁고, 무섭고…….”

“…….”

“나랑 같이 안전한 곳으로 가요. 응?”

이예주가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발 날 믿고, 내 손을 잡아줘요. 다른 인간들처럼 해치려는 게 아니야. 정말로 해치려는 게 아니니까……. 

그녀는 간절함을 담아 제 앞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새빨간 눈동자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어차피 날 버릴 거잖아.”

쪼르륵- 

어디선가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예주는 스르륵 눈을 떴다. 

뭔가 방금 전까지 엄청난 꿈을 꾼 것 같은데. 

눈앞에 어른거리는 뿌연 연기를 따라 생생한 잔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일어났나?”

문득 머리맡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인 것은 맨 살의 향연이었다. 

“이, 이게 뭐…….”

탄탄한 남자의 가슴팍에 당황하던 이예주는 혼비백산하여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자신은 동굴 뒤편의 온천 안, 남자의 품 안에 고이 안겨져 있었다. 

뿌옇게 일어나는 연기는 다름 아닌 온천 위로 피어오르는 수증기였던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남자의 벌거벗은 맨살을 바라보며 이예주는 심각하게 지난 일들을 회상했다. 

남자에게 들키지 않고 동굴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목을 그었다. 

그리고 그에게 들켰다. 그다음 남자가 널 안겠다며 개소리를 지껄였고 그다음은…….

“흐헉!”

이예주는 창백한 얼굴로 허겁지겁 제 왼손을 번쩍 들어 눈앞에 바짝 들이대었다. 

그 바람에 첨벙하고 물이 튀겨 남자의 고운 미간이 일그러졌지만 그런 것 따윈 신경 쓸 새도 없었다. 

검은색 대리석처럼 변한 흉측한 흉터가 보였다. 

그 바로 밑으로 분명 깊게 손목을 그었던 것 같은데. 그랬는데. 

그녀의 손목엔 고등 학생 때부터 가지고 있던 흉터를 제외하곤 아무런 상흔 없이 말끔했다.

“뭐하는 것이지?”

심각한 얼굴로 제 손목을 바짝 들여 보고 또 들여 보기만 하던 이예주를 보고 람이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답할 수 없었다. 

“꿈이…… 꿈이…….”

꿈이 아니었다. 

남자에게 손목을 긋는 것을 들킨 것도, 도망가는 것 외에 다른 능력이 있는 것도. 그와 무려 벌거벗고 뒹군 것도 모조리. 왼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예주는 너무 당황스럽고 기가 막힌 나머지 저 또한 남자와 같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온천물에 오래 담겨 있어 뜨겁고 축축한 손을 들어 그녀의 맨 어깨를 어루만지지 않았다면, 이예주는 언제까지고 손목을 들여다 본 그 자세 그대로 굳어져 있었을 것이다.

“예주야.”

“헉!”

저를 부르는 목소리와 손길에 전과 다른 음습함이 느껴졌다. 

이예주는 갑작스러운 타인의 접촉에 화들짝 놀라 손목에 못 박아두었던 시선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코앞에 시뻘건 레이저 두 쌍이 흔들림 없이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거지?”

남자가 눈살을 설풋 찌푸렸다. 

그는 이예주의 어깨를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손목을 제 쪽으로 끌어 당겼다. 

잡힌 부위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워 그녀의 몸이 한 차례 파드득 떨렸다.

“아직도 아픈 건가?” 

이예주를 대신해서 요리조리 손목을 뜯어본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에너지를 확실히 주입했는데.”

멍청한 표정으로 그저 남자를 바라보기만 하던 이예주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아직도 아프냐고? 에너지를 확실히 주입했다고? 그게 지금. 그게 지금 나한테 할 말이야?

명치 깊숙한 곳에서부터 부지불식간에 뜨거운 덩어리가 불쑥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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