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51)화 (253/319)

펭양까지 밖으로 나가자 동굴 안은 완벽한 침묵에 잠겼다. 

가끔가다 모닥불이 일렁이는 소리, 타닥타닥 장작이 불꽃에 튀 오르는 소리가 나는 소음의 전부였다. 

주위가 고요해지자 이예주는 다시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예주야. 너 어떻게 할래.

당장 내일부터 동굴을 기점으로 동쪽 방향을 향해 무작정 걸어야했다. 

쟈니아가 이 세계에서 가장 빌어먹을 산을 오를 수 있도록 사람을 보내둔다고 했으니, 어떻게 됐던 산맥이 닿는 근처까지는 도달해야했다. 

외딴 곳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황망함을 느낀 것이 아직도 생생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예주에게는 목표가 분명히 주어졌다. 

숲의 동쪽,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 알리자린.

다만 그 목표라는 것에 도달하기까지 또 얼마나 숲과 설원을 방황하고, 시간을 흘려보내야 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길도 모른 채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무작정 끝나지 않은 눈밭을 헤치고 다닐 적 느꼈던 두려움과 암담함이 엄습했다. 

잠시 눈을 떠 눈에 닿는 푸르른 얼음벽을 노려보던 이예주는 현실에서 고개를 돌리듯 도로 눈을 꾹 감았다. 

다시 그 짓거리를 반복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앞이 깜깜해지고 종아리가 시큰거렸다. 

물집마저 얼어붙었던 눈가루 속을 걸어 다니며 길을 찾을 엄두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쟈니아, 그 망할 년에게 산맥 끝에 도달하는 길이라도 물어볼걸.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개소리들을 한꺼번에 전해 들어서, 그것을 물어볼 정신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예주는 곧 물어보았더라도 별 다를 바 없을 것이라 합리화했다. 

그 여자는 자신이 따라 올 수밖에 없는 미끼를 던져 유인했다. 

어쩌면 대면 직후 바로 건네줄 수도 있었던 칼을, 기어이 자신의 입에서 떠나겠다는 확답을 듣고 나서야 선심 쓰듯 내준 여자였다. 

그렇게 당장 자신을 쫓아내기 위해 안달을 냈던 깐깐한 계집이 산으로 가는 길을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이예주는 꾹 감고 있던 눈을 다시 열었다. 

얼음벽에 반사되어 은은하게 동굴 내부를 비추는 모닥불 빛에 드러난 그녀의 동공에는 방금 전엔 없던 괴로움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생각하기를 미루고 있었지만 머릿속 한 구석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은 그 남자에 관한 것들이었다.

단도. 이예주의 모든 탈출의 시초는 쟈니아에게서 받은 칼로 그녀를 탈출을 막을 것이 분명한 람을 찌르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미뤄두고 있었던 검은색의 흉흉한 날붙이를 떠올리자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예주는 펭양이 고이 덮어준 이불을 걷어 차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추위를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뒤집어썼던 로브의 후드조차 벗지 않고 그대로 이부자리 위에 누운 탓에, 품에 넣었던 칼을 다시 꺼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커머튀튀한 색깔에 둔탁한 모양새. 그러나 어찌나 날카로운지 조그만 움직임에도 칼날에서 번쩍 번쩍 섬광이 맺혔다.

그녀는 남들이 보면 귀신 들렸다고 생각할 만큼 벽 쪽을 향해 멀뚱히 선 채, 제 손에 쥐어진 딱딱한 흉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요리저리 둘러봐도 조금 특이한 모양새의 단도,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지만 그 색 때문에. 

흑요석처럼 요요히 빛나는 검은색을 보자 곧바로 생각나는 같은 색의 부드러운 머릿결 때문에 이예주의 표정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차분히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잘라내고 있는 사실만을 정리했다. 

남자가 자신을 속였다. 

제게 일반인들과는 다른 어떤 ‘능력’이 있음을 알아차렸으면서 모르는 척 떠보았고, 붉은 개가 멸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겼다. 

자신을 미끼로 다리족을 끌어내기 위해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으로 보냈다. 

그리고 속았다는 것을 알고 ‘문’으로 달아나던 자신을 도로 되돌려 놓았다. 

그래, 남자가 자신을 도로 되돌려 놓았다. 

혼이 나갈 것 같은 와중에도 이예주는 생생히 기억했다. 

‘문’ 속의 컴컴한 암경이 허물어지고, 자신의 몸이 내던지듯 끌려가다가 기어이 ‘문’밖으로 내팽개쳐졌던 그 순간을. 

남자의 팔 한 짝이 사라지고 분수처럼 피가 튀었다. 

그로 인해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동쪽 대륙이 박살났고, 그것은 도망치려 했던 자신의 ‘탓’으로 되돌아왔다. 

쟈니아는 자신 때문에 남자가 다치고, 동쪽 대륙이 박살났다고 했다. 

두 번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이예주는 이제, 남자와 맞닥뜨려 자신의 탈출을 막을 그를 찌르고 달아나는 것. 그 뿐이다.

그녀는 하나뿐인 방법을 되뇌다 문득 헐겁게 쥐고 있던 칼 손잡이를 힘을 줘 아득 움켜쥐었다. 

손등을 바깥으로 하고 칼을 바싹 세웠다. 

제법 누군가를 찌를 수 있을만한 모양새가 되었다.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막상 쥐어 보니 그랬다. 이렇게 조그마한 칼로 그 태산 같은 미친놈을 어떻게 찌른단 말인가? 

찌르기도 전에 벼락 맞고 뒈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데. 

제가 칼을 들고 네놈을 찌르겠다며 설치면 그 남자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네깟 게 어디 한 번 숲을 빠져나가 보라며 픽하고 비웃을까. 

아니면 어디 한 번 찔러봐라 하고 어린애 장난하는 구경하듯 인자한 얼굴로 순순히 두 팔을 벌려줄까. 

이예주는 비죽 웃으며 순순히 자신이 들이미는 칼을 배때기로 받는 남자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위로 자신 대신 용병대장의 칼을 맞고도 괜찮다며 웃어주던 남자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의 눈이 질끈 감겼다. 

“흐…….”

꽉 문 이새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 전에…… 그 전에. 제가 과연 그 남자를 찌를 수나 있을까. 

애초에 남자를 찌를 거라는 생각 따윈 조금도 하지 않았던 자신인데. 

단도의 손잡이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짓을.”

이예주는 파리한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칼끝은 본연의 목적을 잃은 채 바닥 쪽을 향해 축 늘어진지 오래였다.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자신 때문에 남자가 다쳤다. 

애초 그를 찌를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어떻게. 

어떻게 그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까지 와서도, 그 꼴을 당하고도 그 남자의 폭발한 팔 걱정이나 하고 있는 멍청한 인간이 바로 자신인데.

침엽수 숲을 빠져나가는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는 둥 지껄였던 눈족 인간들의 성물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었다. 

람을 찔러야 한다는 목적이라면 절대로 쓰지 못할 테니까. 

그렇다면 결국 그녀가 눈족 인간과 접촉했다는 펭양의 고자질이 남자의 귀에 들어간다면 이예주의 탈출은 영영 요원해질지 모른다.

이예주는 침울한 얼굴로 단도를 쥔 왼 손을 내려 보았다. 

그녀의 뒤에서부터 희미하게 비치는 모닥불에 비쳐 어둠에 잠겨있던 칼날이 검은 빛을 내었다. 

그리고 그 빛에 반사되어 드러난 제 손목의 검은색 흉터 또한.

“아.” 

그 순간 이예주의 머리 곁을 번개처럼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 남자를 찌를 수 없다면. 그렇다면 자신을 찌르면 될 것이 아닌가? 

그녀에게는 능력이 있었다. 

위험에 처하면 어느 때, 어느 곳으로 열리는지 모를 ‘문’이. 그리고 제 손엔 칼이.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이었다. 

‘문’ 속으로 들어갔다가 남자에 의해 ‘문’밖으로 패대기쳐진 어마 무시한 경험을 겪어서 그런가. 

제게 난감한 상황을 모면할 특별한 방법이 존재하긴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비록 그 방법이 다분히 폭력적이고, 자기 파괴적이고, 제 정신으로는 절대 못할 끔찍한 방향이긴 하지만……. 

제가 떠올려 놓고도 참으로 무식하다 싶어 이예주는 일그러진 얼굴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한 번 한거 또 못할 건 뭐야.”

그녀는 왼손에 쥐고 있던 단도를 오른손으로 옮겨 쥐었다. 

그리고는 이미 손목을 가르며 자리 잡고 있는 검은색의 흉측한 흉터 밑에 칼날을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채 완전히 닿기도 전에 날카로운 금속의 감각이 느껴져 얇은 피부 위로 소름이 오소소 솟았다. 

처음, 손목을 그으려고 마음먹었을 때.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얼른 과거로 돌아가 엄마를 되살리고, 손 쓸 틈도 없이 망해버린 제 인생을 바로 잡을 생각이 팽팽할 만큼 뇌 속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여서 그런가. 

막상 손목 위로 가져다 댄 칼날의 서늘함에 이예주는 벌벌 몸이 떨렸다. 

피부가 한 일자로 찢어지고 살갗이 벌겋게 벌어지며 그 속에서 피가 쏟아졌던 장면은 잊을 수가 없는 종류였다. 

아픔보다는 무서움이 먼저 들었다. 그냥 과거로 돌아가려는 것뿐인데, 이렇게 피가 많이 쏟아져서 죽으면 어떡하지. 

‘문’에 도착하기 도전에, 쓰러져 그대로 요단강을 건너면 억울해서 어쩌지.

그렇지만 이예주는 ‘문’을 여는데 성공했고, 그리고 멀쩡히 그 안으로 뛰어들었었다. 

비록 과거로 가는 길은 아니었지만, 대신 빌어먹을 뭣도 아닌 암경을 건너 나름 죽지 않고 잘 살았다.

그래. 무섭지만, 이미 한 번 그은 거 두 번 긋지 못할 거 뭐있나. 

이예주는 그렇게 읊조리며 아직도 다리족 놈들의 비행선 어딘가에서 간신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알리자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남자를 찌르지도, 그렇다고 맞서지도 못한다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도 십분 이용해 먹을 수밖에.

이예주는 손목에 칼을 가져다 댄 상태로 그 상태로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이렇게 쉽게 ‘문’이 나타날 일이 없음을 알았지만 그래도 헛된 기대를 한 번 품어 본 것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칼날을 가져다 댄 것으로는 빌어먹을 능력은 실현되지 않았다.

“하으, 씨…….”

영락없이 손목에 징그러운 상처를 또 내야 한다는 상황에 이예주의 얼굴이 절로 울상으로 찌푸려졌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이내 오른손에 천천히 힘을 가했다. 

거실 거실하게만 느껴졌던 칼날이 피부 속으로 야트막하게 파고들었다. 

간지러우면서도 그 사이 묘하게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워낙 날이 잘 들어있는 칼이라 그런지 그렇게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금방 피부가 찢겨 상처를 만들어 내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예주는 두려움에 질끈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보지라도 않고 일을 치루면 좋겠지만, 그랬다가 ‘문’이 어느 쪽에서 열리는지도 확인 못한 채 피를 보고 졸도할지도 모르니까. 

다 살자고 하는 짓거린데 ‘문’이 열리는 구경을 하기도 전에 쓰려져서 과다 출혈로 어처구니없게 죽기는 싫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굳게 마음을 먹으며 손목에 칼날을 쑤셔 넣었다. 

그렇게 아픈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여린 살은 쉽게 갈라져 칼날 끝을 머금었다. 

그 근처로 몽글몽글 핏방울이 솟더니 가는 핏줄기가 손목을 타고 주루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정도도 아직 안 된 건가? 

여전히 ‘문’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예주는 울 것만 같은 심정으로 오른 손에 힘을 줬다. 

좋아. 한 번에 끝내는 것이다. 

바로 ‘문’ 안으로 들어가야 고통도, 피가 솟구치는 광경도 보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한 번에.

이예주는 이를 악물고 칼의 손잡이를 꾹 다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손목에 파고든 칼을 오른쪽으로 확 잡아 빼려던 순간.

얼굴 옆면이 환해졌다. 

이예주가 있는 이부자리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 벽 밖에 없는 동굴 가장 안쪽에서부터 눈을 쑤시듯 폭발적인 빛이 흘러나왔다.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무, 문!”

‘문’이 열려 있었다. 

제 손목에 스스로 칼을 꽤 깊게 박아 넣은 후에야 비로소. ‘문’ 안에 희미하게 영상이 보였다. 

이예주는 그곳이 어딘지 곧바로 알아맞혔다.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아 보였던. 쓰레기뭉치들이 음산하게 굴러다니던 죽은듯한 회색 도시. 

“…서쪽 대륙….”

‘문’이 끝없는 사막 너머에 존재하는 팔족들의 땅을 비추고 있었다. 

욕 나올 만큼 지랄 같았던 기억밖에 없었던 팔족 땅으로 가는 음산한 도시의 모습을…… 

그 기괴하기 짝이 없던 공간에 빨려 들어간 인간 동상들이 저 멀리 도로 옆에 위치해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한 손에 칼을 들고, 그 칼로 다른 손목을 자해를 하고 있던 위험천만한 꼴이라는 것조차 잊은 채 멍하니 ‘문’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에주는 문득 퍼드득 정신을 차렸다. 

이런저런 불평불만을 할 때가 아니었다. 열린 것만 해도 어디야. 비록 다신 가고 싶지 않은 재수 없는 곳이지만…….

이예주는 망설임 없이 주춤주춤 ‘문’ 쪽을 향해 걸었다. 

한 발자국 걸음을 옮기자 그동안은 느끼지 못했던 저릿한 통증이 손목에서부터 찌르르 울려 퍼졌다. 

그렇다고 당장 칼을 뽑을 수도 없는 상태라 칼로 이어진 두 손목을 앞으로 쭉 빼고 걷자니 걸음이 영 시원찮았다. 

그렇게 그녀가 ‘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던 그때였다.

“그동안 네 능력이 어떤 때에 발현되는지 알 수 없었다.” 

“으허억!”

이예주는 등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정말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마나 놀랐냐면 없는 애까지 떨어질 정도로. 

꽥 비명을 지르며 뒤뚱뒤뚱 뒤를 돌던 이예주는 둘째로, 놀라다 못해 머리끝이 짜릿짜릿하니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은 심정을 절감했다. 

모닥불 빛이 채 닿지 않아 어둠이 내려앉은, 동굴을 빠져나가는 어두운 통로 입구. 

한밤중에 컴컴한 숲에서 야생 동물을 만난 것처럼 시뻘건 눈동자 두 개가 정확히 그녀에게 못 박힌 채 형형하게 발광하고 있었다.

“다, 다, 당신!”

이예주가 입을 쩍 벌리고 어버버 거리다가 간신히 새된 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어, 어떻게. 그 망할 펭귄이 분명 오늘 저 남자는 안 온다고 했는데! 뭐야? 뭐야! 

“다, 당신이 어떻게…… 아! 아야…….”

알고 있던 정보와 현실과의 괴리에 정신이 나가는 도중 칼을 쥔 손에 너무 힘을 줬는지 왼쪽 손목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이예주는 그제야 제 멍청한 꼴을 기억해냈다. 

한 손엔 칼을 쥐고, 다른 손 손목에 그 칼을 박은 채로 엉거주춤 서 있는 제 꼴을. 

통로 입구 벽에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기대 서 있던 남자가 그 순간 몸을 일으켰다. 

마치 그동안 이예주가 하는 행동을 모조리 지켜보기라도 했던 양 그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아. 그, 그 게요. 이, 있잖아요. 이건 그러니까…….”

“매번 매 때 보이는 공간도 달랐고, 열리는 빈도가 워낙 종잡을 수 있어야 말이지.”

남자가 다가오기 시작하자 이예주는 너무 혼비백산한 나머지 무작정 변명했다. 

그녀가 조금 더 냉정한 성격이었으면 바로 칼과 제 몸을 무기로 삼아 다가오지 말라고 협박했을 것이다. 

하지만 통탄스럽게도 이예주는 절대 그런 성격이 못 되었고, 그녀가 알고 있는 시뻘건 미친놈 또한 그런 같잖은 협박이 먹힐 남자가 아니었다.

몇 번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눈을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남자의 얼굴이 훅훅 가까워졌다. 

가까이서 본 그의 눈이 멀리서 봤을 때보다 더욱 살벌해보였다. 

제 쪽으로 다가오는 남자의 흉흉한 기세에 이예주의 얼굴이 점점 허옇게 질려갔다.

“자, 자살시도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저-얼대! 이건 그냥 한 번 시험을 해보려고……!”

“그런데 이제 좀 알겠군.”

“……예? 뭐…… 뭐, 뭘요?”

“저건. 네가 제 발로 구렁텅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 위험을 자처하던가, 아니면 네 스스로를 파괴할 때마다 열리는 것인가?”

저벅저벅 걸어오던 남자가 이예주의 뒤쪽을 향해 흘긋 턱짓했다. 

잠시 제 등 뒤에 뭐가 있었는지 망각했던 그녀는 금방 그가 뭘 가리키는지 알아차렸다. 

여전히 환하게 빛나고 있는 ‘문’이었다. 

……문? 

그 ‘문’은 나밖에 못 보는데. 이 남자가 그걸 어떻게…… 

남자가 가리킨 것이 정말로 제 ‘문’이 맞는 것인지. 이 사람이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멍하니 람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정신이 우주선을 타고 저 멀리 날아가는 상상을 하고 있을 때쯤, 그가 드디어 그녀의 앞에 당도했다.

“그럼 널 붙잡기 위해서, 나는.”

콰득. 쟈니아가 주었던 검은색 칼을 잡고 있던 이예주의 오른손이 휘어 잡혔다. 

어찌나 힘을 주고 잡은 건지 순간 악! 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커다란 손으로 단도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을 완전히 덮은 그는, 아이를 위험에서 떨어뜨리듯 아주 간단하게 그것을 왼쪽 손목에서 떨어뜨렸다. 

소름끼치는 감각과 함께 살갗에 묻혀 있던 칼날이 스르륵 뽑혀 나가고, 그 자리에서 뭉큼 피가 새어 나온다. 

그러나 이예주는 그것을 미처 알아차릴 새도 없었다. 

아니, 그녀는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남자의 눈이 위험할 만큼 검붉다는 것도, 왼쪽 팔이 폭발했을 때처럼 한쪽 입 꼬리를 한껏 비틀어 올려 웃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칼을 쥔 그녀의 손을 움켜쥔 남자의 손이 사라졌던 왼쪽 손이라는 것 또한.

“내 육체를 파괴해서 저걸 없앨 수밖에 없겠군.”

캉, 챙캉- 

남자가 가하는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이예주의 손아귀에서 기어이 칼이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그와 동시에, 이번에는 남자의 오른쪽 어깨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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