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50)화 (252/319)

가야할 길도, 목적도 완전히 잃어 버렸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디로 가야할지, 뭘 해야 할지 조금도 알지 못하는 그녀에게 주워진 것은 기기괴괴한 칼 한 자루뿐이었다.

쟈니아라는 구면의 눈족 여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예주에게 남은 이야기는 결국 단 하나였다. 

자신 때문에 그 남자가, 그 남자의 팔이 다쳤다는 것. 결국 인간들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자신이 ‘문’을 넘음으로써 남자의 신체가 훼손되었다. 

자신 때문에. 자신의 존재로 하여금.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때부터 렉이라도 걸려 있는 것처럼 좀체 다른 이야기를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을 배신한 남자. 그리고 자신 때문에 끔찍하게 부상당한 남자. 

이예주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정말 너무 심하잖아. 어떻게 견디라고. 주위의 모든 것이 자신을 버겁고, 무섭고, 아프게 했다. 

비단 그 남자뿐이 아니었다. 진저리나는 숲, 빌어먹을 추위, 눈, 설원, 펭귄, 순록, 쟈니아. 하다못해 쥐고 있는 검은색 단도까지 모조리…….

“예, 예주양…….”

그때 문득 뒤쪽에서 이예주를 조심스럽게 부르는 작달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은 채 길 잃은 아이처럼 허망하게 서있던 이예주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굵직한 나무 기둥 뒤에서 익숙한 인영이 자박자박 걸어 나왔다. 

펭귄이었다.

“너, 왜 여기 있어?”

반사적으로 의문을 토로하던 이예주는 펭양이 완전히 다가오기 전에 황급히 뒤를 돌아들고 있던 칼을 로브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저 촉새 같은 펭귄에 들켜봤자 하등 좋을 것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물기로 축축한 눈가까지 손등으로 대충 문질러 닦았을 즈음, 펭양이 이예주의 등 뒤에 완전히 다가섰다.

“너 왜 여기 있냐고. 내가 분명, 동굴로 돌아가 있으라 했잖아.”

펭양 쪽으로 몸을 돌린 인간 여자의 눈가는 채 닦이지 못한 물기와 짜증, 그리고 들키고 싶지 않은 걱정과 한데 섞여 일그러져 있었다. 

빽빽한 나무나 바위틈처럼 숨을 곳이 지척에 있는 숲에서 벗어난 펭양은 완전히 무방비 해보였다. 

하얀 언덕 꼭대기 너머에서 썰매를 끈 인간이 단숨에 다가와 낚아채도 저항 한 번 못하고 끌려갈 것이다.

이예주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기어이 여기까지 따라와 속이 좀 풀려? 네 입으로 위험한 곳이라 해놓고 여기 있다가 인간들이 잡아가면 네 주인이 나를…….”

“저, 정말 남쪽 대륙을 떠날 거양?”

네 주인이 나를 눈 속에 파묻어 죽일 것이라는 이예주의 말허리를 끊고 펭양이 기세 좋게 끼어들었다. 

벌어져있던 이예주의 입이 딱 다물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불어치는 칼바람처럼 차가워지는 줄도 모르고 펭양은 주절거림을 참지 못했다.

“정말. 저, 정말 그 인간의 말을 듣고 숲을 나갈 거양?”

“…….”

“인간들의 말은 믿을게 못 돼양! 약속을 잘 지킬지도 알 수 없고, 또… 또 그 인간은. 그 인간은 순심이한테…….”

“위험하다, 어쩐다 하면서 잘도 엿들었네.”

차가운 이죽거림에 이번에는 펭양의 부리가 텁 다물렸다. 

그저 예주양이 저열한 인간 여자의 말을 듣고 금방이라도 숲을 빠져나가려 들까봐. 당장에라도 어떤 행동을 할까 싶어 앞, 뒤 재지 않고 그녀를 부르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자신을 보며 걱정으로 찌푸려졌던 그녀의 눈이, 지금은 그 어떤 빙판보다 차갑게 얼어붙어 있음을. 

펭귄은 추위에 강한 동물이었지만, 펭양은 순간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추위를 느꼈다. 

펭양의 자유 분망한 부리마저 얼어붙게 만들만큼 시린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던 이예주는 불현듯 홱 몸을 돌려 숲 쪽으로 걸어갔다.

“예, 예주양!”

박차를 가하는 인간 여자의 빠른 걸음에 넋 놓고 있던 펭양이 파다닥 날개를 퍼덕이며 그 뒤를 쫓았다.

“예, 예주양. 화났어? 미, 미안해양. 일부러 그러려는 건 아니였어양! 그, 그냥 예주양의 발자국을 보고 간신히 쫓아갔는데에…….”

“…….”

“그, 그치만! 그치만 그 인간은 너무 위험해양! 숲에 들어와서 순심이의 가족들을 모조리 끌고 간 여자양! 그 여잔 거짓말쟁이양! 매번 동물들도 죽여서 잡아가구 주인님께 해만 끼쳐왔어양. 너, 너무 무섭고 위험해. 그 여자 말은 믿지 마, 예주양.”

“…….”

“안 갈 거지양? 웅? 그치? 숲을 떠나지 않을 거지?”

“하.”

숲에 채 확실히 진입하기도 전에 이예주는 찬웃음과 함께 다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가만히 들어주고 있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거센 발길질 때문에 눈덩이가 팍 튀길 만큼 거친 몸놀림으로 그녀가 휙 뒤돌아섰다. 

뒤뚱대며 열심히 인간 여자의 뒤를 따르던 펭양은 살벌한 기세를 담아 자신을 노려보는 이예주의 모습에 파드득 몸을 떨며 오던 걸음을 멈춰 섰다. 

“인간들이랑 다른 취급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네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나도 네가 그렇게 끔찍해 마다 않는 인간들이랑 같은 종족이야. 너 같은 신인류가 아니라 나도 인간이라고. 알아들어?”

예주양의 눈에서 이번에는 활화산 같은 불꽃이 쏟아져 나와 촘촘한 겉 털을 고슬고슬하게 태우는 것 같았다. 

그 뜨거움에 아차차 펭양은 아차차 혀를 차며 우물쭈물 거렸다. 

그러지 말아야지, 그러지 말아야지 했으면서. 어째서 자신은 매번 예주양의 화를 돋우는 건가. 

펭양은 기필코 이예주가 눈족 여자와 같은 인간임을 상기시키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 바보 같은 말실수로 인해 그녀는 이미 잔뜩 빈정이 상한 듯 해보였다. 

펭귄은 짧은 팔로 퍼덕퍼덕 손사래까지 쳐가며 서둘러 해명했다.

“아니양, 예주양. 그, 그런 말을 하려던게 아니양! 나, 나는 그저 예주양이…… 어, 그 여자가 너무 위험하니까. 저기, 그래서 예주양이…….”

하지만 펭양이 해명을 빙자한 필사적인 우물거림을 하는 동안 이예주의 분노는 아슬아슬한 한계까지 차올랐다.

“그럼? 그럼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뭔데? 그 여자가 위험하다는 걸 나한테 알리고 날 조심시켜서 너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데? 네 주인이 하지말래? 그래서 이러는 거야?”

“아, 아니양! 주, 주인님은 그런 말 안 하셨어양. 주, 주인님은…….”

“네 주인은 나한테 다를 것 같아?”

“…….”

“똑같아. 나한테 무섭고 위험한건 네 주인도 똑같다고. 아니 똑같은 건 약과야, 네 주인은 그 여자보다 더 해. 그러니까, 그만해.”

제발 좀 그만해. 이예주는 누구한테 하는지 모를 애원을 힘겹게 읊조렸다. 

이제 한계였다. 

오늘 하루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이제 좀 머릿속을 정리하고, 정신을 가다듬고. 안 그래도 남자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얼음 동굴로 되돌아가려면 이 혼란스러운 감정들 또한 재정비해야 하는데 왜 그런 틈조차 주지 않는 거야.

이예주는 정말이지 모든 것이 지치고 피곤했다. 

그러나 펭양의 눈에 그런 그녀 따윈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다.

“왜, 왜 그렇게 무섭게 이야기 하는 거양, 예주양…….” 

“…….”

“주, 주인님은. 주인님은 예주양을 많이 아끼셔. 나한테 매번 예주양이 하루 종일 뭐하고 놀았는지, 뭘 먹었는지 묻고, 예주양이 아프면 걱정하시고…… 그리고 예주양이 싫어할까봐 항상 나한테만 이야기 하셔. 절대 그 인간처럼 위험한 사람 아니야앙…….”

제 주인을 쟈니아와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한 취급을 한 것에 대해 어지간히도 충격을 받은 건지 더듬더듬 말을 늘여 놓는 펭양의 눈에는 굵직한 물방울들이 그렁그렁 하게 달려 있었다. 

용케도 떨어뜨리지 않고 눈 끝에 매달려 있는 그것들의 꼴을 보자 이예주는 애써 잠재웠던 불덩이가 목구멍을 타고 불쑥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펭양이 훌쩍 거린다. 

“그 인간처럼 예주양을 이곳에서 쫓아내려는 말도 안하셔. 힝. 그런데 어떻게 주인님이 예주양한테 그 인간이랑 똑같은…….”

“……그만해. 그만 하라고 했잖아!”

이예주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펭귄을 상대로 버럭 화를 냈다. 

아니, 그것은 실로 비명에 가까웠다. 

진짜 울고 싶은 것은 정작 자신인데. 

진짜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싶은 건 이도저도 포함되지 못하고 길을 잃은 자신인데. 왜 하나 같이 나한테만! 

나한테 못 뒤집어씌워서!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것처럼!

“네 주인이 나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알아?”

차분한 가면은 집어 치운 채 이예주는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속내를 가감 없이 터뜨렸다. 

눈앞이 시뻘게지는 기분이었다. 이럴까봐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다시 되돌아보면 죽을 것 같아서. 

엉뚱한 사람에게 이 화를, 분노를 표출해 내고 활활 타오르다 죽을 것 같아서.

“예, 예주양…….”

제가 느끼기에도 온갖 감정 덩어리들로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에, 작달만한 펭귄이 기겁 하고 주춤 물러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르잖아. 모르면 제발 닥쳐!”

“…….”

“네 주인은 이미 나를 버렸어!”

이예주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랬다. 기를 쓰고 외면해왔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버리는 것도 모자라 지 편할 대로 이용해 처먹고! 한 번 쓰고 버리는 루어처럼 나를! 나를 그렇게……!”

“…….”

“그런데도 난 멍청하게! 그 남자가 다친 게 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

그 생각만 했다. 다른 생각을 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실은, 예지몽을 꿨을 때부터 한 번도 그 악몽에서 벗어난 적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절규하듯 지껄여내고 난 동시에 이예주는 비로소 깨달았다. 

남쪽 대륙에서 눈을 뜬 이후, 자신이 무엇 때문에 분노했고 무슨 이유로 그 분노를 외면해왔던 건지. 

그 나쁜 자식이 속이고, 이용해 먹었다는 배신감 때문이 아니었다. 결국 그 남자에게 자신이 존재가 그 정도뿐이라는 것이. 

그럴지 모른다는 가정은 해왔지만, 결국 그 가정을 당사자에게 직접 확인 받았단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지만 이예주는 여자를 쫓아 언덕 위를 내달릴 때보다 더 심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제 귀까지 들릴 만큼 숨소리가 거셌다. 펭양은 확실히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녀의 입장에서 이 얼마나 억울한 화풀이란 말인가.

“예, 예주양…….”

아래쪽에서 미약하게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을 보고 펭양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치오른 분노 때문인지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제 멋대로 분풀이를 해댔지만 이예주는 그 후 펭양의 반응이 더럭 겁이 났다. 기껏 위험하다 조언 해주었더니 닥치라고 꽥꽥 고음을 지르는 자신을 미친년 보듯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역시 인간들은 다 똑같다며 치 떨리는 시간족 놈들과 같은 취급을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 그녀에게 히스테릭에 진절머리가 난 나머지 제 주인에게 달려가 막돼먹은 인간 계집이 제게 이런 소리까지 했다며 쪼르르 일러바칠 지도.

“내, 내가 잘못 했어양. 내, 내가 다 잘못했어양!”

그러나 펭양이 있는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못된 생각만 부러 하던 이예주에게 참으로 허무하고…… 따듯했다.

“아, 앞으로 안 그럴게. 그런 말 다시는 안 할게양! 그러니까……!”

“…….”

“울지 마…….”

제게 화풀이를 하는 것인데. 우는 것이 아닌데. 저 바보 같은 펭귄은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이예주는 아무렇게나 내팽겨져 있던 두 손을 들어 제 뺨 위를 더듬었다. 

추위에 노출되어 그대로 서늘하게 식은 무언가가 흥건하게 묻어나왔다. 

“흐, 흐으…….”

꾹꾹 억눌렀지만 숨결 새로 채 억누르지 못한 오열이 터져 나왔다. 

손에 묻어나온 것이 물기라는 것을 확인한 이예주는, 그대로 제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       *       *

어떤 정신으로 얼음 동굴을 돌아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걷다, 주저앉다, 다시 걷길 반복하다 보니 어느 틈엔 흰 순록의 등 위에 젖은 빨래처럼 얹힌 채 질질 끌려가고 있었고. 또 어느 틈엔 걱정을 한껏 담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펭양의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모든 장면이 오래된 사진기의 필름처럼 단편, 단편 스쳐지나갔고,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덧 얼음 동굴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이 보였다.

“예주양, 주인님은 너무 바빠서 오늘은 동굴로 못 돌아온다고 하셨어양.”

“…….”

“바, 밥은 안 먹을 거지?”

바깥바람이 잔뜩 묻어있는 겉옷을 벗어낼 힘도 없이 동굴 한 편에 마련되어 있는 누울 자리에 쓰러지는 이예주의 등 뒤로 펭양이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때 아닌 밥 타령이 참으로 징하기도 했다. 

이예주는 끝없는 우울 속으로 침잠하는 기분에도 어이가 없어 웃었다. 

물론 등을 지고 누운 탓에 펭양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요로 쓰이는 널찍한 동물 가족 한편에 찌그러져 있는, 인간 여자가 며칠간 덮고 잤던 모포를 끌어다 그녀의 위에 잘 덮여주고, 모닥불을 피우고. 또 그 근처에 녹아 물이 되도록 깨끗한 눈을 소복이 퍼다 담은 바가지를 가져다 놓는 등 총총총 동굴 바닥을 돌아다니며 부산을 떨던 펭양이 미동 없는 이예주의 등 뒤에 웅얼거렸다.

“그럼 푹 쉬어, 예주양. 나, 나는 갈게양.”

“…….”

“……나는. 나는 순심이랑 동굴 근처에 있을 테니까 필요한거 있으면 동굴 밖으로 나와서 큰 소리로 부르면 돼양. 알았지양?”

그녀가 붙잡아 주기를 바라는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미적거리던 펭양은, 끝까지 인간 여자에게서 대답이 없자 시무룩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예주양의 곁에 남아 있고 싶었지만 얼음 동굴은 주인님의 거처였고, 펭양의 둥지는 본디 동굴 밖으로 이어진 숲의 어귀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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