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49)화 (251/319)

이제야 이 멍청한 계집과 말이 통하는 것 같아 쟈니아의 안면 위로 후련함이 스쳐지나갔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이예주는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티끌 한 점 없는 하얀 눈밭 어딘가를 바라보는 시야가 가엾이 흔들렸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이 지긋지긋한 침엽수 숲을 빠져나가는 길을 찾은 것조차 몇 날 며칠을 설원을 헤매고 나서야 가능해졌는데. 

그것도 완전한 탈출 또한 아니었다. 

탈출의 길목에서, 쟈니아라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버린 것이다. 

“어디로든.”

“…….”

“우리들의 터전으로부터. 검은 파편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가능하면 당신이 원래 속해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편이 좋겠군요.”

여자는 절대로 길을 내어주지 않을 것처럼 이예주의 눈이 닿는 지평선 너머를 족족 제 몸으로 가로막았다. 

그녀를 언덕 꼭대기, 이 이상 발을 들이밀게 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눈족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생각도 하기 전 애 저녁에 이미 막힌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가능하면 내가 원래 속해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이예주는 허탈하게 웃음 지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병신처럼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다리족으로 가서, 다리족 족장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이 여자는 모르는 것 같았다.

이예주는 언뜻 자신이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아무것도, 단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다시 숲으로 되돌아가면 빠져나가기 힘들어요.”

이예주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미아가 된 것 같다는 공허한 심정과는 다르게, 그녀는 자신이 서서히 현실과 타협하고 체념하고 있음을 알았다. 

쟈니아가 이예주의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왜죠?”

“반대편 숲의 동쪽으로 난 길은 막다른 길이나 절벽 같은 게 많아서 일부러 이쪽, 서쪽 방향을 선택한 거였어요. 일단 숲을 빠져나가서 우회를 하든 어쩌든……. 다시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갈 생각이었어요.”

“안타깝지만, 더 이상 당신에게 길을 내줄 수 없습니다. 눈족에게 당신이 남쪽 대륙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울 방법이 분명 있겠지만, 우리 땅에 위험의 핵심인 당신을 들일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이 무리를 해서라도 억지로 이쪽 방향으로 진전하려 한다면 나는 조명탄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을 하며 쟈니아가 품 안에서 재빠르게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바톤 모양과 같은 원통형의 빨간색 물건이었다. 

그 끝에 초의 심지처럼 길쭉한 줄이 삐져나온 것으로 보아 점화를 해서 폭죽을 터뜨리는 원리 같았다. 

조명탄이라는 현대적인 이름에 비해 구시대적 방식이기 그지없다고 생각하며 이예주는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죽음을 전염시키는 바이러스라도 되는 양 취급하는 어투에 화가 날만 했지만 어쩐 일인지 머리 한 구석이 뜨거워지는 일은 없었다. 

여자가 길을 내주지 않을 것임을 이미 예상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가는 길이 다시 되돌아가는 것뿐이라면 어쩔 수 없겠죠.”

막다른 길에 들어서지 않고, 산으로 올라가는 완전한 길을 찾을 때까지 다시 몇날 며칠이 걸릴 것을 생각하면 눈앞이 다 깜깜해지는 기분이었지만 문제는 그 뿐이 아니었다.

“그치만 그 남자가 돌아오면…… 남쪽 대륙은 고사하고, 숲에서 나가는 것도 불가능해요. 쉽게 빠져나가게 두지 않을 테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확실했다. 

자신이 숲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눈뜨고 태평하게 바라보고만 있을 남자가 아니었다. 

아직도 그 나쁜 자식에게는 자신의 이용가치가 남아 있는 걸까. 

끈질기게도 따라붙던 펭양의 생각에 이예주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여자를 쫓느라 숲에 그냥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제발 동굴로 고이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좀 더 쉬운 길이라 생각했던 서쪽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길이 쟈니아 때문에 막혔으니 이제 이예주가 갈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산맥으로 직결되는 숲의 동쪽 길. 

그쪽으로 가려면 지금껏 아득바득 서쪽으로 걷고 또 걸어 온 것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시 얼음 동굴이 있는 곳을 지나쳐야 했다. 

그녀가 방향을 잡는 기준점이 모두 얼음 동굴이었기 때문이다.

높은 절벽에 올라 보았음에도 까마득했던 산맥에 도달하기까지 몇 시간, 아니 며칠을 더 걸어야 하는지 가늠도 할 수 없었다. 

평탄하다고만 여겼던 이 길을 찾는 데만 해도 어마어마한 시간을 소비했지 않은가. 

뼛속까지 시린 강추위와 계속 보다간 화이트아웃이라도 일으킬 것만 같은 지긋지긋한 눈덩이들을 헤치고 다닌 것은 지금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 짓을 또 해야 한다고. 게다가 가는 길이 서쪽보다 몇 십 배는 더 험난해 보였던 그 길을.

길을 찾기 위해 다시 며칠을 허비하는 동안 돌아온 남자가 자신의 탈출을 눈치 채지 않을 가능성이 몇 퍼센트나 될까. 

수학도 잘 못하면서 이예주는 멍청하게 손가락으로 숫자를 꼽았다. 

2? 3? 퍼센트는 무슨, 마음만 먹으면 얼음 동굴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할 남자인데.

이예주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짱구를 굴려 봐도 해답이 나오지 않으니 별 수 없었다.

“나를, 지금 당신이 사는 곳으로 데려가서 산꼭대기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줘요. 그 방법엔 없어요.”

“유감이지만, 굳이 당신을 들여 우리의 신성한 터전이 사라지는 꼴을 볼 수는…….”

“나도 그 사람 곁에서 떠나고 싶은 건 마찬가지예요. 나도 날 기다리고 있는 애한테 가야하고 한시가 급해요. 또 길을 찾기 위해서 몇날 며칠을 헤맬 수는 없어요!”

“…….”

“모든 걸 다 내 탓으로 돌렸으니까, 날 그쪽들 땅에서 내몰고 싶으면 당신들도 어느 정도 위험감수는 하라구요!”

답답한 마음에 덤덤했던 이예주의 목소리가 급격히 커졌다. 

짜증을 냈다고 생각했지만, 그 목소리에 울음기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기실 쟈니아가 딱히 잘못 말한 것은 없었다.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만큼 그녀를 본인들이 사는 곳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결심이 굳기 때문이겠지. 

“……당신의 탈출을 도울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자가 전광석화처럼 꺼내들었던 빨간색 조명탄을 주섬주섬 도로 제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녀가 입고 있던 펑퍼짐한 로브 속으로 길쭉한 물건이 쉽사리 사라졌다. 

이어서 쟈니아는 가슴팍을 들쑤시던 손을 바꿔 다른 쪽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익히 알고 있는 모양새와는 달리 기괴한 그것을 간격을 두고 알아차린 이예주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손에 덜렁 딸려 나오는 것의 끝이 흐릿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반사되어 날카롭게 빛났다. 

칼이었다.

“받아요.”

쟈니아가 칼집도 없이 시퍼런 날을 세우고 있는 단도의 끝을 잡고 손잡이 부분을 이예주에게 건넸다. 

그녀는 제게 내밀어진 뜬금없는 무기를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손바닥보다 약간 큰 길이의 칼은 온통 새까맸다. 

알 수 없는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손잡이까지 온통 까맣게 물들여져 있는 그것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단도의 겉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요석처럼 오묘한 빛이 감도는 칼날이 낯설지 않았다. 

누군가를 쉽게 연상케 만드는 그 순수한 검은색. 

“이건…….”

“남쪽 대륙을 떠나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니 이정도의 호의는 베풀도록 하지요. 당신을 떠나게 만드는 데엔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도 있으니까요.”

그녀가 도통 내민 것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자 쟈니아는 딱 한 걸음. 

그 이상은 다가오지 않고 오로지 한 걸음 더 다가와 단도를 내밀었다. 

“받아요. 남쪽 대륙을 벗어날 당신에게, 가장 필요할 물건입니다.”

시커먼 빛을 내는 칼날이 제 쪽으로 향해 있는 것도 아닌데, 여자가 내민 칼을 내려 보고 있자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와락 엄습했다. 

이예주는 그래서 선뜻 여자에게서 칼을 받아 들 수 없었다.

“이게, 뭔데요?”

“우리 눈족들에게만 대대로 전수되어지는 방법으로 만든 무기입니다. 재료도 무척이나 희귀하고, 제련하는 과정이 워낙 까다롭기 때문에 하나를 만들기 위해선 십 년, 혹은 백 년. 천 년…… 무수한 시간들이 필요하지요.”

“…….”

“인간들이 만든 여타 무기들로는 그분에게 아무런 피해를 줄 수 없습니다. 사막에서, 당신도 보았겠죠?”

여자가 말하는 사막이 어느 때를 말하는 건지는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였다. 여준이 구원자를 구하러 왔느니, 어쩌니 하며 이예주를 납치하려 들 때였다. 

어둠 속에서 살곰 살곰 다가와 덮치려던 다리족 인간들을 남자는 모래를 이용하여 참 가뿐하게도 막아냈다. 

무수히 쏟아지던 총알과 탄약들은 람리 만든 얄팍한 모래를 뚫지 못했다. 

어디 그뿐이랴. 해안 마을에서 남자는 그녀 대신 용병 대장이 휘두른 칼에 관통 당했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기절했던 이예주가 눈을 떴을 때, 등 뒤에서 뱃가죽까지 뚫렸었던 커다란 상처는 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하지만 제 앞을 단단히 가로막은 채 하루라도 빨리 자신을 이곳에서 내쫓지 못해 안 달난 괴악한 말투의 여자가 그 남자의 무시무시 방어력과 치유력을 논하기 위해 자신에게 이딴 정체불명의 칼을 들이민 것은 아닐 것이다. 

이예주가 단도에서 눈을 떼어 가만히 여자의 허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걸 자신에게 건네는 이유가 뭐냐는 뜻이었다.

여자는 방금 전 이예주 탓이라며 신랄하게 책임을 전가했던 것과 같은 여상한 어투로 쉽게 무언의 물음에 답했다.

“그 칼은 검은 파편을 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기입니다.”

흐읍. 이예주가 들이마시던 숨을 그대로 멈췄다. 

여자의 안온한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덩달아 부릅 힘이 들어갔다.

“그 칼로 힘껏 찌르고 달아나세요. 지금까지 지켜보아온 결과, 아무런 힘이 없는 당신에게 그는 대체로 무방비한 편이죠. 당신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잘하면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남쪽 대륙을 빠져나갈 시간을 더 벌 수 있겠지요.”

“…….”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오를 수 있는 가장 낮은 산맥의 초입에 사람을 보내놓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이 도착하는 즉시 산을 오를 수 있도록. 당신처럼 숲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아니라 숲을 우회해서 가는 것이니 시간이 좀 걸릴지 모릅니다. 그 안에 부디 당신이 거사에 성공하여 탈출하기를 여신께 기도드려야겠군요.”

이 여자가. 이 여자가 대체 뭐라 지껄이는 건가. 

안 그래도 색이 바랬던 이예주의 낯빛은 이제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은 시체 같았다. 

그녀는 파리하게 얼어붙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랗게 홉떠진 눈, 입술 뒤에서 덜덜 떨리는 이빨로 보건대. 

아니, 꽝꽝 언 빙판보다 더 차갑게 성에가 끼기 시작하는 머릿속 때문에 이예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칼은 우리 눈족들에게 성물과도 같습니다. 그 작은 칼 하나로 우리는 지금까지 분노한 검은 파편에게서부터 우리 스스로를 지켜 내왔다고 믿어왔지요. 물론 그것으로 그분을 이 땅에서 제거 할 수는 없습니다. 턱없이 부족하고 우습겠지만, 그건 별 보잘 것 없는 칼이 아닙니다. 그 것은 우리 눈족의 상징이고 정체성입니다.”

“……”

“나는 당신에게 이것을 줌으로써 여신께서 내게 주신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당신을 도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요. 그러니.”

“…….”

“받아주세요.”

여자의 금발 머리위에 단단하게도 쓰인 후드가 기울었다. 

두 손으로 칼날의 끝을 맞잡고 그녀는 이예주의 앞에 경건히 고개 숙여 부탁했다. 

자신들의 보물인 이것까지 내주며, 본인들의 삶에 해가 될 것이라 판단한 이예주가 부디 이 땅에서 떠나주길 바라는 눈족 인간들 전체의 간절함이 여자의 말과 태도에 묻어 있었다.

뭐가 뭔지.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혼란스러웠다. 

그런 거 할 수 없다고. 어떻게 그렇게 흉악한 짓거리를 부탁을 빙자해서 내게 덮어씌우려 드는 거냐고. 

분명 마음은 그렇게 외치고 있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이예주의 손은 주인을 배반하고 쟈니아가 내민 단도의 손잡이를 받아들였다. 

받아들 생각도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있기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손아귀엔 뭉툭하고 딱딱한 감촉이 가득 쥐어져 있었다.

이예주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쟈니아에게서 건네받은 검은 칼을 내려다보았다. 

여자가 처음 칼을 내밀며 받으라고 종용했을 때는 받기는커녕, 이딴 흉측한 것을 받아 뭐에 쓸까 싶었는데. 결국 받아 버렸다. 

왜 받은 걸까. 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제 행동에 답을 찾으려 들었다. 

하지만 채 깊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이예주에게 칼을 넘김으로 제 할 일은 모두 끝난 것처럼 쟈니아가 서둘러 거센 바람결에 흐트러진 로브의 후드를 여며 맨 채 걸음을 옮겼기 때문이다.

“여신의 가호가 당신과 함께 할 겁니다.”

그 한 마디만 던지듯 남겨두고, 여신과 똑 닮은 얼굴의 여자는 허겁지겁 자신의 썰매에 올라탔다. 

이예주가 언덕 위를 달음 박칠 쳐서 올라왔을 때 이미 썰매를 고정 시키고 있던 줄을 푸른 상태였으니 여자가 떠나는 발걸음을 더 이상 지연시키는 것이 없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여자는 무언가에 쫓기듯 서둘러 바스켓 안쪽에 늘어져 있던 고삐를 당겼다. 

마치 이예주가 혹시라도 자신을 쫓아올지 모를까 두려운 것처럼.

푸르륵! 

한가로이 눈을 밟고 서 있던 네 마리의 순록들이 고개를 젖히며 가쁜 숨을 내쉬다 이내 새하얀 지평선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여자와 죽은 토끼를 태운 썰매는 눈 위를 매끄럽게 달렸다. 

방금 전 여자와 마주보고 사이좋게 대화한 것이 꿈만 같았다. 

정신이 몽롱했다. 다시 열병이 도지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휘이잉- 언덕 위, 홀로 서 있는 이예주에게로 버티기 힘든 칼바람이 내리쳤다. 

뿌옇게 휘날리는 눈가루 사이로 순식간에 멀어지는 썰매의 형체가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그저 멀거니 바라보았다.

작은 점이 되어가던 썰매의 흔적마저 완전히 사라진 후. 

이예주는 끝없이 펼쳐져 있기만 할 뿐 더 이상 길이 존재하지 않는 황량한 설원 위에, 남자를 찌를 수 있는 칼과 함께 덩그러니 남겨졌다.

*       *       *

뭐 더 떨어질 콩고물도 없건만, 이예주는 쟈니아가 떠난 언덕의 꼭대기 지점에서 한참을 더 서 있다가 코끝에 방울진 콧물이 딱딱하게 얼어붙을 무렵 언덕을 걸어 내려왔다. 

올라올 땐 여자의 뒤를 쫓느라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쌓인 언덕은 오를만한 경사와는 달리 꽤 높았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몇 배나 더 멀게 느껴졌다. 

여자와 기막힌 대화를 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금세 모포와 로브를 뚫고 엄습했다. 

연신 코를 훌쩍이며 터벅터벅 언덕을 걸어내려 온 이예주는 숲에서 조금 외떨어진 침엽수 한 그루가 있는 곳에서 멈춰 섰다. 

여기가 처음 숲을 빠져나왔던 지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앞에 있는 나무를 제외하고도 그녀의 양 옆으로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늘어져 있는 것이 온통 똑같아 보이는 나무, 나무, 나무뿐이었으니.

멈춰선 것은 나왔던 곳을 가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갑자기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지쳐서이기 때문이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몸이 무거운 추를 잔뜩 매단 것처럼 축축 늘어지고 눈앞이 간헐적으로 흐려졌다. 

제가 걷는 길이 늪도 아니건만 눈 속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제 신발을 잡아끄는 것 같았다. 도저히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예주는 그냥 위치를 알 수 없는 눈 밭 한 가운데에 우뚝 멈춰서 허망하게 서 있었다.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에 손마디 끝이 베이는 것처럼 시려왔다. 

무심결에 왼손을 내려 보던 그녀는 그제야 찬 공기에 노출된 제 손이 하얗게 변할 만큼 무언가를 꽉 쥐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쟈니아가 준 흉물스러운 검은색 칼이었다. 

요리 할 때나 과일 깎아 볼 때를 제외하곤, 칼이라고는 들어본 적 없는 제가. 누군가를 찔러야 하는 목적을 명백하게 담은 칼을 손에 쥘 것이라고 언제 상상이나 해봤을까. 

“하.”

제 신세가 하도 어이가 없어 이예주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용암을 피해 ‘문’을 넘어 천년 후로 넘어와 갖은 개고생을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날이 바짝 선 칼로 사람을 찔러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예주는 늘어뜨렸던 칼 쥔 손을 들어올렸다. 

제가 들고 있는 것이 정녕 무기가 맞는 것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함이었지만, 그녀의 눈길을 끈 것은 들고있던 칼이 아닌 드러난 손목이었다. 

누군가 대리석에 검은 락카칠을 해서 한 조각, 한 조각, 제 손목에 박아 넣은 것처럼. 남자로 인해 변해버린 검은색의 흉터가 손목을 자글자글하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 들려진 검은색 칼. 

그 칼로 그 남자를 찔러야 그녀는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다. 

이예주는 또 한 번 짧게 웃었다. 

하, 하, 하. 정말 어처구니가 없고 웃겨서 웃는 건데. 

억지로 웃듯 작위적으로 터져 나오던 웃음에 울음기가 섞인 것은 삽시간이었다.

“…하….”

이예주는 결국 들어 올은 칼 쥔 손으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눈가를 짚었다. 

딱딱한 칼 손잡이 끝이 한쪽 눈꺼풀 위를 아프게 찔렀다. 

“…힘들어.”

그녀는 서러운 한숨과 함께 작게 속삭이듯 속내를 털어놓았다. 

너무.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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