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48)화 (250/319)

제 입으로 당당하게 숲에 침입해, 동물들을 사냥했다는 것도 모자라. 뭐? 인간들을 파멸로 몰고 다리족이 죽게 된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에라이, 말이면 다 인줄 아나.

웃기지도 않은 여자의 개소리에 이예주는 연달아 혀를 찼다. 

역시 시간족 인간 들 중 제대로 된 머리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쩜 저렇게 하나같이 참신한 소리를 지어낼 수 있을까. 

아니면, 약간 어디가 모자란 사람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자꾸 초점이 나가는 저 눈동자도 그렇고……. 

동쪽대륙 지하 동굴에서,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조롱이를 응시하던 눈족 장로가 생각났다. 

신인류들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 것도 모자라 죽기 전까지 폭행하고 욕보인다는 그 여자는 미쳐도 단단히 미쳤었지. 

자고로 미친놈도, 미친 여자도상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도출되자 이예주가 더럭 겁을 집어먹고 주춤주춤 두어 발 뒷걸음 질 쳤다. 

그 모습을 보며 여자가 소리 내지 않고 요요히 웃었다.

“당신이 죽게 만든 것은 비단 인간뿐이 아닙니다. 당신은 수많은 무고한 신인류들도 같이 죽게 만든걸요. 자신의 손으로 구해냈던 어린 신인류들을 다시 사지로 몬 기분이 어떻죠?”

“뭐, 뭐요? 이, 이 아줌마가! 내뱉는다고 다 말인 줄 아나! 아, 나 이런 캐릭터는 또 처음이야, 진짜 미치겠네.”

이젠 인간도 모자라 신인류들까지 들먹거리는 여자의 막말에 이예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화살을 넘기고 난 빈 손으로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녀가 버럭 소리 질렀다.

“어떻긴 뭐가 어때! 난 이곳에 와서 개미 한 마리 제대로 죽여 본 적도 없구만, 헛소리도 작작해요! 당신이 봤어? 내가 막 살인하고! 신인류들 죽이는 거, 당신이 봤냐고!”

흥분한 이예주가 콧김을 내뿜으며 마구 소리쳤다. 

반말과 존댓말을 오묘히 섞어가며 외치는 것은, 이 미친 여자를 따라가면 길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굳게 믿었던 과거의 멍청한 자신에 대한 일말의 양심이었다. 

제가 따라 온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마주쳤던 것이라면, 이예주는 주저 없이 저 재수 없는 면상에 쌍욕을 토해냈을 것이다.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공간, 시간, 상황을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하지요.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문명은 다릭족이 훨씬 앞서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도움을 얻어 확인하고 있습니다.”

“와, 나 돌겠네.”

사람이 이토록 화를 내면 개소리도 작작 할 법하건만, 여자의 얼굴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저 이예주 혼자 화내고 북치고, 장구 치는 모습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던 여자는 그녀의 분노가 알아서 사그라지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그냥 이대로 뒤돌아서 언덕을 다시 내려갈까. 

연신 거칠게 이마를 쓸어 올리며 이예주는 고민했다. 

그간 어떻게든 힘 안들이고 숲을 빠져나가기 위해 비교적 평탄해 보였던 서쪽 길을 택해 며칠을 날려먹긴 했지만…… 

그래도 다시 내려가서 발칙한 펭귄을 어떻게든 닦달 하다보면 또 다른 길을 알려 주지 않을까. 

이 미친 여자랑 더 이상 말 섞는 것보단 차라리 그 편이……. 

그때였다. 

몸을 돌려 그대로 내려갈지 말지 고뇌하는 이예주의 심경에 돌을 던지듯 여자의 오묘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동쪽 대륙 해안 마을.”

그 전까지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던 것은 모두 장난이었다는 듯, 여자의 얼굴이 전에 없이 무표정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까진 눈치 채지 못했는데, 여자의 얼굴이 좀 이상했다. 

시체같이 핏기하나 없이 창백한 피부. 꽤 예쁜 외양에 푸른빛이 도는 입술이 기괴했다. 

“당신 때문에 바다 인근에 있는 마을이 절반 가까이 사라졌어요.”

“하……. 그건 또 무슨 근거 없는 헛소린데요.”

“구원자로 여겼던 당신은 이 세계에 나타난 후, 우리들을 구원하기는커녕 그 어떤 때보다 더 거대한 단위의 끔찍한 죽음을 몰고 다니더군요. 팔족, 다리족, 시간족과 관계없는 중간 지대의 일반인들까지. 당신이 거치는 곳은 모조리 전멸되고 종국엔 복구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지요.”

여자는 채 반박할 말을 고를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미묘한 억양의 한국어로 마구 몰아 붙였다. 

이예주는 쟈니아의 말을 좀체 따라 갈 수 없었다. 

마을의 절반이 뭐? 뭐가 어떻게 됐다고?

“잠깐, 잠깐만요! 그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뭐가 죽음을 몰고 다니는…… 그리고 멀쩡한 마을이 왜, 왜 사라져요?”

더듬더듬 말을 막아서는 이예주의 모습에 쟈니아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그녀또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동쪽 대륙의 절반이 통째로 붕괴되었어요. 다리족들의 인공위성에 지반이 무너지는 것이 똑똑히 찍혔습니다. 인간, 신인류, 동식물들 가릴 것 없이 수많은 생명체들이 죽었고 그 수치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예주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이 여자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릴까. 몇 주 전 조롱이를 구하기 위해 피똥 쌀 만큼 굴렀던 엿 처먹을 동쪽 대륙 해안 마을이 왜 뜬금없이 사라졌단 말인가. 

그리고 그게 왜 또 자신 때문이고. 물론 자신이 거하게 사고를 치긴 했다. 

자신과 조롱이를 쌍칼로 난자하기 위해 쫓아오던 용병 대장을 죽이기 위해 등불을 깨트려 가연성이 높다는 검은 안개를 터뜨렸다. 

그 때문에 족장의 저택이 폭싹 주저앉았단 소리는 꽤 오랜 후 람의 입을 통해 언뜻 전해들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예주가 폭발로 날려버렸던 것은 족장의 지하 동굴 하나뿐이었다. 

아무렴 폭발로 인한 화력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무슨 대륙의 절반을 날려 버리기 까지 한단 말인가.

만약 그랬다면 자신은 진즉 죽어 없어졌어야 했다.

“그러니까, 왜요? 동쪽 대륙이 왜 사라지고…… 그게 왜 또 나 때문이란 건데요?”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요. 아니면 나지 않은 척을 하는 건가요.”

“내가 뭘…….”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중턱에서 당신이 했던 일. 다리족, 붉은 개, 뤼미에르. 그리고 검은 파편.” 

“…….”

여자가 붉은 입술을 벌려 수수께끼의 힌트를 주듯 몇 가지 키워드들을 나열했다. 

이예주의 머리가 자동적으로 그 때를 회상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중턱. 

이예주는 다리족들의 비행선에서 알리자린을 두고 홀로 ‘문’을 넘어 람이 있는 뤼미에르 꽃밭에 도착했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정신을 추스를 새도 없이 너무나도 급박하게 흘러갔고, 이 얼어 죽을 남쪽 대륙에서 깨어난 이후엔 되새기기 싫어 의식적으로 피했기 때문에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나마 선명하게 기억나는 몇 가지는 다리족 족장에게도, 그 남자에게도. 실제 얼얼한 아픔이 느껴질 만큼 뒤통수를 실컷 후려 맞았다는 것을 알았고, 멸종한 줄로만 알았던 붉은 개 수 백 마리들이 어디서부터 쏟아져 나와 날뛰었고, 그 아수라장을 외면하듯 자신은 열린 ‘문’ 안으로 도망쳤고.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람의 왼쪽 팔이 사라져 있었다. 

비릿한 피 냄새. 허공으로 분수처럼 뿜어지는 그의 뜨끈한 생명수가 몇 방울 얼굴에 튄 것 같았다. 

예지몽이 현실이 되었고, 람의 피가. 람의 팔이…….

‘주, 주인님은 잠깐 도, 동쪽 대륙에 가셨어양…….’

왜인지 모르겠는데, 그 이후로 남쪽 대륙에서 눈을 뜨고 펭양과 처음 나눈 대화가 그녀의 귓가에 생생하게 살아났다. 

동쪽 대륙? 거긴 왜? 묻던 자신. 그런 자신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거리던 작은 펭귄.

‘그, 그게…… 동쪽 대륙에 요즘… 주, 주인님께 중요하고 원대한 일이 생기셔서양…….’

“이제, 기억이 났나요?”

불쑥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이예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순식간에 상념에서 끌어올려졌다. 

여자가. 쟈니아가 아까와 같은 명료한 눈으로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시간’이란 여신, 천 년 전의 눈 족 여족장과 꼭 닮은 여자. 

거짓을 말하지 않는 다는 듯 표정 없는 그 얼굴을 마주하자, 이예주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다. 

예지몽처럼 폭발한 람의 팔. 그가 동쪽 대륙으로 갔다던 펭양. 동쪽 대륙의 절반이 붕괴되었다는 쟈니아의 말.

숨이 거칠어졌다. 이예주의 얼굴이 혼란으로 얼룩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당신의 존재가 어떤 불행들을 이끌고 다니는지. 이젠 운명을 받아들일 만도 한 것 같은데요.”

“운명…… 무, 무슨 운명요?”

“당신이 지나가는 곳마다 재기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요. 팔족 부터, 다리족, 해안 마을까지. 당신의 발자취가 지나간 곳마다 여지없이 죽음이 덮쳤군요. 이래도 당신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자의 물음에도 이예주는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팔족 땅도, 다리족의 근거지도 자신이 다녀온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해안 마을은 예외였다. 동쪽 대륙이 무너져? 무너진다는 게 무슨 말이야. 지반이 무너지고, 대륙의 반이 사라져? 

그러나 좀체 쟈니아의 말을 납득하지 못하는 머리와는 달리, 이예주는 아까 전 여자가 동쪽 대륙을 언급했을 때부터 으슬으슬 떨리던 몸이 지금은 오한이라도 들린 듯 덜덜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추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찬 기운을 몸에 묻히기 위해 안달 난 것처럼 쌩쌩 불어대던 고원 위의 칼바람이 거짓말처럼 멈춰있었다. 

고로 그녀의 몸이 떨리는 이유가 빌어먹을 남쪽 대륙의 강추위와는 별개의 이유때문이란 소리였다. 

그렇다면 제 몸이 이렇게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이유가 뭘까. 뭐가…….

이예주는 정말 찰나의 순간. 눈앞의 스쳐지나간 영상을 본능처럼 부정했다. 

타당, 타다다탕! 끊임없는 총성과 인간들의 비명소리, 짐승의 울부짖음이 한데 섞여 온통 난장판이었던 그곳. 

뤼미에르 꽃밭을 등지고 숲 쪽으로 뛰어가던 자신이 본 두 개의 ‘문’. 

그리고 그 ‘문’들 중 하나는 바로…….

“뭐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

“…….”

“나, 나는…… 나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뭘…….”

“당신에게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근원은 당신의 존재, 그 자체이죠.”

이예주의 흔들리는 동공 따윈 알 바 아니라는 듯 여자는 단정적으로 이어 말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중턱에서 살아남은 다리족은 아무도 없기에 우리에게 전달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죽음이 종결된 후 눈족들이 과거를 읽어냈지만 대부분의 흔적이 지워진 상태였기에 모든 상황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죠. 하지만 당신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겠죠. 그 참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이니까.”

“…….”

“당신의 존재는 그분을 파멸로 이르게 하고 그것은 어떤 경위와 연결고리로 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간의 죽음, 나아가 대륙의 파멸까지 이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눈을 감고 기억해내 보세요. 그분이 스스로를 파괴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냉철하고 계산적인 그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변하게 된 데에는 분명 당신의 어떠한 행동 때문일 텐데요.”

여자가 말하는 냉철하고 계산적인 ‘그’가 람을 칭한다는 사실은 단번에 눈치 챌 수 있었다. 

떨리는 상체에서 전이가 된 걸까. 이예주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문득 코 끝에서 비린 냄새가 감돌았다. 혈향이였다. 

아직도 눈만 감으면 생생한, 허공을 향해 흩뿌려지는 선홍색의 물줄기.

이예주는 새파랗게 질린 입술 틈 새로 새된 소리를 비명처럼 내질렀다.

“당신 말은,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람이 스스로를 다치게 만들었다는 소리에요?”

“당신이 곁에 있는 이상 그 빈도수는 갈수록 늘어나겠죠.” 

“왜, 왜요? 나, 나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그, 그 사람이 왜 스스로를 다치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건 당신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까요.”

알쏭달쏭한 여자의 말에도 이예주는 화를 낼 수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아예 외면하던 장면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은 분명 ‘문’을 넘었다. 

푸른 바다가 넘실거렸던 ‘문’ 너머의 영상. 

그리고 심연과도 같은 암경 속에 빠진 후 엉엉 울었다. 남자에게 맞은 뒤통수가 너무 아파서. 

그러다가 암경 속 공간이 지진 나듯 요동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 제가 있는 어둠이 우루루 녹아내리듯 무너지고, 그 자리를 눈을 찌르는 밝은 빛들이 채워갔다. 

암경이 사라지고 있다는 자각이 들 때쯤 이예주의 몸은 알 수 없는 무형의 힘에 의해 엄청난 속도로 끌려갔다. 

던져지고 있는지, 빨려들어 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무아지경 휩쓸리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문’을 넘기 직전의 아수라장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한 쪽 팔을 잃은 남자가 피를 철철 흘리며 귀신처럼 웃었다.

그것이 모두 자신의 탓, 이라고. 

제가 ‘문’을 넘으려 들어 남자의 팔이 폭발하고, 더불어. 더불어 동쪽 대륙의 해안마을 마저 하루아침에 붕괴해 버렸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을 알았지만 이예주의 핏기가 가신 허연 낯빛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남자는 자신을 사지로 몰았다. 성가신 다리족들을 끌어내 죽이기 위해 자신을 속이고, 이용했다. 

자신은 그저 까맣게 속아 넘어간 채 숨이 깔딱깔딱 넘어 가기 직전에야 비로소 남자에게로 되돌아갔는데. 그런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 남자의 팔을 폭발시킨단 말인가?

말도 안 돼. 이예주는 부정했다. 

하지만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론 부정할 수 없는 마음이 들었다. 

예지몽을 꾼 직후에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남자가 그렇게 끔찍한 몰골로 다쳐버린 것은 다리족 놈들의 수작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다리족들은, 족장이고 졸병이고 할 것 없이 붉은 개들에게 쫓기고 씹어 먹히기 바빴으니까.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란 쟈니아의 말처럼, 놈들이 그를 공격할 틈도 없었다는 것을 그녀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대략 감이 온 모양이군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그 날의 회상과 상념들을 쟈니아가 단호하게 끊어냈다. 

감을 잡은 것은 오히려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이예주의 안색을 보고 작게 웃는 여자 같았다.

“그렇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당장 남쪽 대륙에서 떠나는 것뿐입니다.”

“…….”

“떠나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여자가 이예주에게 고개까지 숙이며 정중하게 부탁했다. 

“떠…나라구요?”

“그래요. 부디 이곳에서 떠나주세요. 당신 하나만 사라지면 남쪽 대륙은 파멸될 위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숲에 사는 모든 동물들, 신인류들 또한 안전해지겠죠. ……부모를 잃은 이 불쌍한 아이들 또한요.”

쟈니아가 손에 뻗어 제 옆에 가장 가까이 있던 회갈빛 순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푸르르- 썰매 옆에 피를 뚝뚝 흘리는 죽은 토끼를 매달아 둔 것과는 판이한 자애로운 그 행동이 오히려 괴기함을 자아냈다. 

네 마리의 순록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제법 애처로웠다. 

그런 주제에 토끼는 왜 죽인 것이냐고. 결국 잡아먹기 위해 사냥을 한 게 아니냐고. 순심이와 같은 흰 뿔을 가진 순록들을 왜 썰매를 끄는 쓰임새로 이용하고 있느냐고. 

이예주는 입술을 움찔 거리며 여자에게 따지려 들었지만 여자가 한 발 더 빨랐다.

“무엇보다.”

“…….”

“그분. 검은 파편이 당신으로 인해 다치고 부서지며 자기 파괴를 하는 모습을 계속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않나요?”

“나, 나는. 나는…….”

이예주는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다른 건 다 모르겠다. 

동쪽 대륙이 어떻고, 자신의 존재로 인해 많은 인간들이 죽고, 어쩌고. 하지만 정신 없는 와중에도 여자의 말 한마디가 이예주의 고막 깊숙이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검은 파편이 당신으로 인해 다치고 부서지며 자기 파괴를 하는 모습을 계속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않느냐고. 

검은 파편이 당신으로 인해. 이예주로 인해. 람의 한 쪽 팔이 사라진 것에 어떻게든 자신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외면 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군요.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 남쪽 대륙을 희생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대륙이 사라지고 무수히 많은 생명들이 한 순간에 스러지는 참사는 한 번으로 족합니다. 우리가 떠나지 않은 당신을 죽이기 위하여 조치를 취하기 전에.”

“…….”

“떠나요.”

이예주는 여자의 말에 죄인처럼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무언가 말을 꺼내야 했다. 

그것이 여자의 말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든, 그렇게 나에게 닦달 하지 않아도 어차피 떠나려고 했다는 것이든, 혹은 내가 왜 나를 엿먹였던 네 말을 들어야 하냐는 것이든…….

그러나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녀는 아래로 향한 입술을 뻐끔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렇게 무엇에 대한 번뇌인지 본인도 모를 것을 번뇌하고 또 번뇌하던 이예주가 한참이 지난 후 간신히 쥐어 짜낸 말이라곤. 

“…어디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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