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47)화 (249/319)

휘이익― 

한차례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언덕 꼭대기를 휩쓸고 지나갔다. 

침엽수들이 빽빽하게 나 있어 부는 바람을 막아주던 설 숲과는 달리 언덕 너머는 나무 한그루 없는 탁 트인 전망. 

지평선으로 끝도 없이 이어져있는 평평한 설원이었다. 

푸르르, 푸르. 

짐승 우는 소리가 들렸다. 

드러난 얼굴을 때리는 바람에 맞서 서 있던 이예주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가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살짝 커졌다. 

마치 산타가 이끄는 루돌프의 썰매를 연상시키는, TV에서나 보던 커다란 나무 썰매가 자리해 있었다. 

그녀가 놀란 것은 에스키모인 들이나 타고 다닐 법한 썰매 때문이 아니었다. 

썰매 끄트머리에 고삐를 물고 있는 네 마리의 동물들. 

순심이만큼 온 몸이 눈부신 하얀색으로 도배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흔히 알고 있는 갈색 털이었지만, 뿔만은 새하얀 순록들이었다. 

순심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썰매의 바스켓 옆 나무 지지대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토끼 두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축 늘어진 토끼들의 발끝에서 뚝, 뚝 핏방울이 흘러 내렸다. 

이예주는 곧바로 알아 차렸다. 

그녀가 얼어붙은 강 한가운데서부터 뒤쫓아 온 핏방울의 출처가 바로 저것임이 틀림없다고. 

이예주는 다시 고개를 바로해 썰매를 묶어 두었던 밧줄을 쥐고 동상처럼 굳어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역시, 헛것을 본 것이 아니었다. 

입고 있는 어두운 회색의 로브 후드 밖으로 삐져나온 그녀의 밝은 금발 머리칼이 날쌔게 부는 바람에 하늘하늘 흩날리고 있었다. 

여자도, 이예주도 그 누구의 얼굴에도 표정이랄 게 없었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바람이 아니었더라면 어느 사진집의 한 페이지처럼 멈춰 있을거라 착각이 들만큼. 

그들의 정적을 깬 것은 이예주의 움직임이었다. 

“이거… 당신 거죠?”

서 있는 여자에게로 천천히 걸어가며 이예주는 끝내 손아귀에 꽉 쥐고 들고 온 화살 두 개를 내밀었다. 

가까이서 본 여자의 얼굴에는 참으로 이상한 기류가 감돌았다. 

얼핏 보면 30대 초반의 젊고 아름다운 여성 같다가도, 다시 보면 온 세상을 풍파를 모두 겪은 노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검은 동화책 안에서 본 ‘시간’ 이란 여신. 

팔족 족장의 저택에서 자신을 약올리듯 유인하여 결국 빅엿을 먹였을 때는 정신이 없어 책 속의 여신과 똑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책을 본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그런지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잡힐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우며 자신을 이곳 언덕까지 기어오게 만든 금색 대가리를 보고 조금은 여자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그치고 휘날리는 머리카락도 멈췄다. 

후드 속에서 드러난 여자의 얼굴에 다리족의 비행선에서 보았던 천 년 전 검은 파편을 삼키고 배가 터져 죽어버린 눈족 여족 장의 끔찍한 몰골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화살의 수가 항상 부족해서 사냥 후 반드시 수거해야 하거든요.”

이예주가 내민 두 개의 화살을 물끄러미 내려 보던 여자가 한참 후 그것을 받아들었다. 

고개를 약간 숙여 감사인사를 하는 여자가 말끝을 흐렸다. 

들리지 않은 뒷말에 쫓아온 이들로 인해 수거를 하지 못했다는 책망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우리, 구면이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이예주의 말에 여자의 입 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쫓아오는 자신을 피해 부랴부랴 묶어두었던 썰매 줄을 풀었던 행동과는 달리 답하는 무표정한 얼굴엔 숨길 수 없는 여유가 맴돌았다.

“그런가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짐짓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이 구는 여자의 행동에 북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나 이예주는 그것을 무시하고 정신없이 여자를 몰아붙였다.

“당신…… 당신 대체 누구죠?”

“…….”

“대체 누군데 팔족 족장의 저택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날 유인하고…… 이번엔 인간들은 들어오지 못한다는 여기 숲까지 들어와서 여우들을 죽이려하고 이번엔 토끼 사냥까지.”

“…….”

“당신이 여신이야? 아니면 눈족 여 족장? 당신, 대체 누군데 가는 곳마다 내 앞에…!”

얼씬 거리느냐고. 불쑥 화가 치솟아 오르는 기분에 이예주는 말을 멈추고 거칠게 숨을 씨근덕거렸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랬다. 

이 세계로 넘어 온 후 사막과 동쪽 대륙 해안마을을 제외하고 저 여자와 관련되지 않았던 대륙이 없었다. 

직접적이든 ‘여신’의 얼굴이라는 명목하의 간접적이든 모든 일은 저 빌어먹을 면상에 항상 귀결되었다. 

다리족의 비행선에서 엄마의 죽음과 저 면상을 가진 천 년 전의 인간이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까지 미쳤을 땐 눈앞이 까무륵 잠겨들었다. 

“눈족 여 족장…….”

이예주가 뜻밖에 깨달은 여자와의 관계에 충격을 잠겨 있을 무렵 침묵하고 있던 여자가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그 안에 회한, 한탄, 회상을 닮은 갖가지 감정들이 스쳐지나갔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아 낼 수 없었다.

“아쉽게도 난 여 족장은 아닙니다.”

“그럼 당신은 누군데요?”

“나는 현 눈족 족장의 딸, 신전을 관리하며 여신을 모시는 모든 형제, 자매님들을 보필하고 있는 쟈니아입니다.”

“…눈족 족장의 딸?”

여자가 뒤에 뭐라 뭐라 덧붙여 지껄였지만 이예주의 귀는 한 곳에 멈췄다. 

눈족 족장의 딸. 

다리족에서 여준이 그랬다. 

본디 눈족은 과거를 보는 과거를 보는 족장과 미래를 보는 족장, 두 명으로 나뉘었지만 현 족장은 이례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둘 다 볼 수 있는 강한 자라고. 

그렇게 힘이 강한 눈족 족장이라면 제 앞의 여자 또한 강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이예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팔족 족장에서 보았건, 다리족의 비행선에서 보았건. 

저 면상을 가진 여자는 자신에게 하등 도움 되는 일이 없었다.

“내가 이 숲에 들어온 것은 보시다시피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도 먼저 나서서 이 숲에 들어와 먹을 것을 구하려 들지 않거든요. 누구든 검은 파편의 손에 죽고 싶진 않으 테니까. 나는 며칠에 한 번씩 동물이나 식용이 가능한 풀뿌리를 캐내어 가지고 갑니다.”

“…….”

“아, 가끔 장작도 주워가지요. 우린 작물을 키울 수 없기 때문에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모두들 기아와 한파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태평한 얼굴로 죽은 토끼들을 손가락질하며 잘도 이예주가 물었던 질문에 답했다. 

홍대에서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인을 만난 것처럼 여자의 발음에서 이질감이 들었다. 

끝마무리가 영단어처럼 굴려지는 느낌이면서도 알아듣기에 아무 지장이 없어서 신기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왜 작물을 키우지 않고 숲의 동물들을 잡아 죽이냐 묻기 위해 입을 열던 이예주는 금방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인간들이 농사를 짓는 것을 람이 금지시켰다는 것이 연이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대신 다른 질문을 내놓았다.

“그때. 팔족 땅에서 여신 흉내를 내고, 일부러 날 유인해서 팔족 족장 놈한테 들키게 한거. 당신이죠?”

아무것도 몰랐던 그 시절. 그저 람과 관련돼있는 시간이란 여신의 얼굴과 똑 닮았다는 이유 하나로 여자의 뒤를 쫓았다. 

그 결과 자신은 팔족 족장, 그 미친 새끼에게 걸려 피터지게 등짝에 채찍질을 당했다. 

아직도 그녀는 종종 악몽을 꿨다. 

그 개 같은 놈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종국에는 헐벗은 제 몸에 달라붙어 베어나오던 피를 쭉쭉 빨아대는 꿈을. 

그때만 떠올리면 아직도 뒷목을 타고 소름이 쫙 끼치면서 치가 떨리는 이예주였다.

“당신 맞죠!”

순식간에 분노에 휩싸인 이예주가 불어치는 칼바람보다 매섭게 여자를 쏘아보았다. 

뒤늦게 잊고 있었던 트라우마의 원인을 마주하자니 잠잠했던 마음에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 

맞다고 대답하는 즉시 달려들어서 그때 당한만큼 머리끄댕이를 잡아 뜯어 놓을까. 

아니면 똑같이 채찍질을 해야 속이 좀 시원해질까. 

갑자기 드는 폭력적인 상상들에 좀 먹히기 시작하는 그녀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가 허무할 만큼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지껄였다.

“그것을 목적으로 당신을 유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당신을 위험에 빠트린 것이니, 맞다고 할 수 있겠군요.”

“뭐?”

“내가 그때 당신이 팔족들의 비밀을 알게끔 유도한 이유는, 밑바닥까지 타락한 처참하고 참혹한 인간들의 모습을 있는 대로 보여주고 당신의 역량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게 뭔 개소리야?”

이예주는 정말로 여자가 지껄이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되물었다. 

무슨 역량? 뭘 시험해?

“이제 제 차례입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죠?”

하지만 여자, 쟈니아는 돌아가지 않는 이예주의 머리를 해결해줄 생각 따윈 없다는 듯 그저 말갛게 직시하며 물었다. 

자신의 본질까지 꿰뚫어 보는듯한 그 시선에 이예주는 불현듯 말문이 막혔다. 

혹시 이 여자, 자신의 능력에 대해 아는 것인가? 

자신이 이곳에 속한 인간이 아니라 천 년 전, 머나먼 과거에서 왔다는 것을. 혹시 알고 있는 것인가? 

제 능력을 이미 알고서 자신을 떠 보는 것인가 싶어 짧은 순간 긴장한 채 머리를 팽팽 굴리던 이예주는 곧이어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안도했다.

“당신은 구원자가 아니죠.”

“…….”

“그렇다고 인간들의 편에서 우리를 돕는 것도 아니고요.”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구원자도, 그리고 인간들의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람의 편이나, 신인류들의 편에 서서 인간들을 완전히 적대시 해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이 망할 세상에서 혐오했던 인간들은, 본질적으로 자신에게 해를 가한 악한 인간들 혹은 식인을 하는 미친 시간족들 뿐. 

제드나 알리자린과 같이 나름 괜찮은 인간이라고 여겼던 사람들도 분명 존재했지만, 여자가 그들을 알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신은 우리들을 파멸로 몰고 있어요. 당신으로 인해 우리는 위험에 노출되었고 곧 이 세상에서 멸종될 예정이죠.”

마치 그런 이예주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여자가 선수를 치며 냉큼 말했다. 

기묘한 말의 내용과는 달리 내뱉는 그 얼굴이 하도 덤덤해서, 그녀는 여자가 자신에게 안부 인사를 묻는 줄로 착각했다. 

뒤늦게 쟈니아의 말뜻에 담긴 적의를 읽은 이예주가 당황했다.

“뭐, 뭐라구요? 파멸?”

“한때, 우리는 당신을 인간들의 구원자라 여기며 검은 파편으로부터 당신을 떼어내기 위해 안간 힘을 썼지요. 팔족 저택에서의 일 또한 그 일환 중 하나였고요.”

“그, 그게…….”

“하지만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닫고야 만 것입니다. 당신은 구원자 같은 것이 아니라는 걸.”

말을 내뱉으며 쟈니아는 이예주를 지나 뒤편, 아득한 허공 너머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제 앞의 구원자라 믿었던 자신의 탓이라고 뒤집어씌우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분노도, 증오도, 원망도. 여자가 잠시 벌렸던 입을 다물자, 그들 사이로 한 차례 칼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후드 속에서 삐져나와 휘날리는 탐스러운 금발 끝을 손으로 붙잡으며, 여자가 유령처럼 스르륵 눈동자만 굴려 다시 이예주를 응시했다.

“이곳엔 어째서 온 것이죠?”

모든 것에 초탈한 것처럼 여자는 고요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어떤 것을 말해도 들어 줄 테니 어디 한 번 이야기 해 보라는 듯, 그 모습이 자못 자애롭기까지 해보였다. 

“말해 봐요. 다리족엔 분명 당신이 원하는 것이 있었을 텐데요.”

쟈니아란 여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종용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예주는 방금 전까지 여자가 자신을 유인했던 그 빌어먹을 계집이 맞다는 사실에 분노하던 것을 까맣게 잊은 채, 새로 떠올린 또 다른 분노에 활활 타올라 한 자, 한 자 짓씹듯 내뱉었다. 

다리족에서 겪었던 개고생들을 상기하자 여자가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지 와 같은 원초적인 의문점조차 미처 들지 않았다.

“그건 모두 거짓이었어.”

“…….”

“다리족 놈들은, 내게 거짓말만 늘어놓았다고요. 거기에 있는 내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사실이었다. 

탈출하는 도중 위험을 감수하고 실험실을 샅샅이 훑었지만, 이예주가 다리족에서 알게 된 것은 놈들이 얼마나 이중적이고, 미친 또라이 집단인지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 천벌 받을 자식들은 버려진 눈족 아이들을 같은 선상의 인간으로 보지 않을뿐더러 그 어린 아이들을 가지고 실험체로 서슴없이 사용하고 욕보였다. 

어쩌면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이가 제 앞의 여자, 또 다른 눈족 년, 쟈니아가 아닐까? 

이예주가 누가 봐도 불손한 시선으로 여자를 탐색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듯 여자의 희미하게 웃었다.

“완벽한 거짓은 존재하지 않아요. 거짓말은 때론 하나뿐인 정답이 되기도 하죠.”

여자가 늘여놓는 이해 못할 새로운 헛소리들에 이예주는 미간을 뿌직 찌푸렸다. 

저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릴까. 

여자와의 대화는 같은 주제를 가지고 오가는 것 같으면서도 정신 차리고 보면 핀트가 어긋나 있었다. 

이해 못한 그녀를 돕듯이 여자가 덧붙였다.

“다리족 족장이 당신에게 늘여 놓은 여러 거짓 중 반드시 진실이 섞여 있을 거란 얘기입니다.”

“내게 도움이 되지 않은 진실 따윈 필요 없어요.”

이예주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녀의 웃음에 딱딱하게 받아쳤다. 

“글쎄요.”

여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 층 더 진해졌다. 

그녀는 자신보다 키가 조금 더 클 뿐 딱히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눈족들의 특징인 듯 동쪽 대륙에서 보았던 눈족 장로와 비슷한 크기의 펑퍼짐한 로브. 

자신보다 훨 배는 더 커다란 옷을 뒤집어 쓴 모습은 조금 우스꽝스럽기까지 해보였다.

그러나 이예주는 짙어지는 쟈니아의 미소에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껴졌다. 

뒷목을 타고 왠지 모를 쎄한 기류가 흐르면서, 문득 전신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지금 남은 진실은, 당신 때문에 다리족 족장과 수뇌부가 전멸했고 당신이 찾던 진짜 진실은 영원히 묻혀 버렸다는 것이죠.”

“하. 뭐라고요?”

거짓 속에 진실이 있느니 어쩌니 이해 할 수 없는 말들만 지껄이더니, 이제는 뜬금없이 다리족들의 죽음에 대한 책김까지 자신에게 물리는 여자. 

이예주는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흘렸다. 

어딜 가도 정신 이상이 있는 시간족들이 꼭 하나씩 존재한다는 것이 통탄스러웠다.

“말 참 이상하게 하시네. 저기요. 다리족이 전멸하고 인간들이 죽어가는 게 왜 내 탓이에요? 댁이 날 얼마나 봤다고. 허, 참. 기가 막히네. 인간들은요. 아니, 모든 생명들은 태어난 이상 죽게 되어있고요. 그리고!”

“…….”

“진실은, 다리족이 전멸한 것은 내 탓이 아니라 당신들 탓 인 게 진실이죠. 눈족인 당신들 말이에요.”

“…….”

“나도 다 봤어요. 과거의 일들을 나도 다 안다구요. 검은 파편을 깨운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잖아요? 그 남자를 공격해서 분노하게 만든 것도 당신들이구요. 하. 뭐, 말이 되는 소리여야 이해하는 시늉이라도 하지.”

쟈니아에게 다다다다 쏴붙이며 이예주는 그녀를 찌를 듯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왜. 이 여자와 왜 네가 잘못이니, 내가 잘못이니 이런 대거리를 하고 있어야 하지? 

자신은 그저 어제 보았던 인간을 쫓다보면 숲을 빠져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전에 자신을 궁지로 몰았던 빌어먹을 여자를 만난 건 의외였지만, 꽤 오래된 일이라서 딱히 여자를 보고 엄청난 분노가 인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예주를 뚜껑열리기 일보직전으로 만든 것은 거의 처음 보는 것과 마찬가지인 여자에게서 듣는 말이었다.

기가 막힌다. 

여준은 차라리 거짓부렁을 씨부렸을지 언정 말은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그래서 그는 한때지만 자신의 동정까지 이끌어낸 대단한 언변가였다. 

이예주는 다리족 비행선에 있으면서 잠시 동안 람에게 핍박받는 인간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했다. 

물론 천 년 전, 2017년에 있었던 일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과거 영상을 보고 그런 생각은 씻은 듯이 사라졌지만.

그러나 그에 비하면 이 미친년은 대체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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