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46)화 (248/319)

이예주는 영문도 모른 채 덩달아 뛰었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펭양이 우두커니 멈춰 섰다. 

“뭐야? 무슨 일…….”

그 뒤를 따라간 그녀는 무슨 일이냐고 묻다가 눈을 커다랗게 홉떴다. 

그들의 앞, 티 한 점 없는 눈밭 위로 여러 개의 발자국과 함께 시뻘건 핏자국이 점점이 흩뿌려져 있었다. 

“피, 핏자국이양.”

펭양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예주는 자리에 쭈그려 앉아 자국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흔적이 심상치 않았다.

『헨젤과 그레텔』에서 아이들이 떨어뜨린 빵 조각처럼, 그들이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강 건너편의 숲까지 핏방울이 한일자로 이어져 있었다. 

“이, 인간들이 또 숲으로 들어왔나 봐양. 가, 강까지 오는 경우는 드문데…….”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머릿속에 어제 일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핏자국은 흘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응고되지 않고 새빨간 선홍색을 유지하며 눈에 스며들어 있었다. 

이예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주양! 어, 어디 가게양!”

“…….”

“계속 갈 거양? 이, 이렇게 위험한 것을 보았는데두?”

반대편 숲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진 핏자국과 발자국을 따라 빠르게 걷기 시작하자 펭양이 기겁을 하며 쫓아왔다. 

“예주야앙! 어떡하지!”

펭양은 커다란 핏자국이 보일 때마다 멈칫 멈춰 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자신을 두고 멀어지는 이예주를 허겁지겁 따라가는 것을 반복했다. 

전에 없는 속도를 내어 걸은 탓인지 이예주는 얼마 안 가 강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또다시 시작되는 지긋지긋한 눈 덮인 숲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과연 숲의 끝이 존재하긴 하는가.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채 그런 것을 따질 틈이 없었다. 

빙판에서 뭍으로 완전히 올라서자마자, 그녀의 시선을 훅 끄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이예주는 심각한 얼굴로 그쪽으로 다가갔다. 

새로운 숲에 도달하자마자 본 첫 번째 나무 밑동에 화살 두어 개가 살벌하게 박혀 있었다. 

“예주야앙!”

뒤늦게 남은 강을 마저 건너온 펭양이 기어이 이예주를 따라 뭍 위로 올랐다. 

속히 그녀를 설득하여 다시 안전한 주인님의 얼음 동굴로 데려가려던 펭양은 이예주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화살을 보고 까무러치게 놀랐다. 

“에구머니! 이, 이게 뭐양! 이, 인간의 도구양! 사냥할 때 쓰는 이, 인간의 무기……!” 

그 순간 이예주가 돌연 허리를 굽혀 바닥에 나무에 박혀 있는 화살 하나를 뽑았다. 

대체 예주양이 왜 이러는 걸까? 펭양이 그녀가 하는 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 이예주는 나머지 화살 하나 또한 힘겹게 뽑아내었다.

인간 여자는 그 무서운 물건을 불쑥 펭양에게 내밀었다.

“어제 그 여자가 쏜 화살 깃이랑 똑같아.”

“힉! 그, 그럼…… 가, 같은 인간이 또 숲에 들어온 거란 말이양?”

구슬같이 까만 동공이 단번에 겁에 질리는 것을 보며 이예주는 내밀었던 화살을 거둬들였다. 

어제 여우를 잡아가려던 여자와 같은 인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곳에 사는 인간들이 모두 같은 화살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예주는 어느새 어제 마주친 인간을 ‘여자’라 단정 지었지만, 바지춤을 잡고 조르는 펭귄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예주양. 우, 우리 다시 주인님의 동굴로 돌아가면 안 될까양? 인간들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양. 페, 펭양이는 너무, 너무 무서워양.”

“…….”

“주인님도 안 계시고…… 제발 돌아가면 안 될까양? 웅?”

정말로 두려운 건지 펭양이 희게 질린 얼굴로 훌쩍훌쩍 울었다. 

이예주는 달래 줄 생각도 않고 펭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마음이 심란했다. 자신도 그렇게 무서워서 벌벌 떠는 인간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한 걸까? 

어쩌면 펭양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주인의 명으로 따라다니며 감시해야 하는 귀찮은 포로. 어쩌면 자신과 함께 전지전능한 주인님의 선택을 받아 계약을 한 제3인류라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인님의 선택을 받아. 선택. 그 단어에 기분이 순식간에 더러워졌다. 

“너 이제 그만 돌아가.”

이예주는 숲 깊숙한 곳까지 간간이 떨어져 있는 피의 잔해를 확인한 후 펭양에게 빠르게 내뱉었다. 

펭양이 황급히 도리질을 쳤다. 

“나, 나 혼자? 예, 예주양이랑 같이 가는 거 아니면 절대 안 가양!”

“난 너랑 같이 안 돌아가. 너 그럼 계속 나 따라올 거야?”

“흐, 흐으…… 그, 그건……”

“네가 무서워하는 인간이 갑자기 화살 쏘면서 튀어나와도?”

어지간히도 두려운 건지 이예주의 말에 펭양의 몸이 눈에 띌 만큼 벌벌 떨렸다. 

그녀는 기세를 몰아 더욱 냉정하게 말했다.

“오든 말든 맘대로 해.”

“예, 예주양…….” 

“너 화살에 맞아서 인간한테 잡혀가도 난 안 도와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뒤돌아 다시 핏자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예, 예주양!”

펭양이 비명 지르듯 그녀를 불렀지만 돌아 봐주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양!”

멀어지는 인간 여자의 뒷모습 한 번, 순심이를 놓고 온 까마득한 설원 너머를 한 번 바라보며 갈팡질팡하던 펭양은 결국 도도도도 뛰기 시작했다.

“예, 예주양, 같이 가아!”

지금까지 계속 그러했듯 인간 여자가 있는 쪽이었다.

이예주는 숲속으로 이어진 핏자국과 발자국을 따라 정신없이 걸었다. 

하지만 나무 위에 쌓여 있던 눈이라도 떨어진 건지 중간중간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것처럼 사라져 있어서 흔적을 찾는 게 갈수록 힘이 들었다. 

어디지? 어디로 가야 해? 마침내 자국이 끊겼을 때 이예주는 깊숙한 숲에 들어선 상태였다. 

덩그러니 화살을 쥔 채 그녀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사방에 눈이 소복이 쌓인 나무뿐, 어디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분명 피가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을 알아보았는데……. 

“예주양!”

그때 제 둥지로 돌아가지 않은 펭귄이 날개를 퍼덕이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예주양, 길도 잘 모르면서 어딜 그렇게 가는 거양. 뭐, 뭐 찾는 거라도 있는 거양?” 

이예주가 다시 차갑게 내칠까 겁이 났던지 다가온 펭귄은 더 이상 돌아가자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끌고 가기 위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떽떽거리던 조롱이와는 다른 점이 그나마 마음에 들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응?”

“어디로, 어디로…….”

이예주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펭양은 그런 인간 여자의 반응을 좀체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갸웃거릴 따름이었다. 

그때였다. 

빠드득. 

신발에 짓밟힌 눈이 뭉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예주와 펭양의 몸이 멈칫 굳었다.

그들 중 누구도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그럼 대체 방금 전의 소리는 누구에게서 난 것이란 말인가.

사박, 뽀드득. 

그때 좀 더 선명하고 커다란 소리가 공허한 숲에 울려 퍼졌다. 

이예주와 펭양의 몸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휙 돌아갔다. 

더 깊은 숲,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예주는 긴장한 얼굴로 그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느껴졌다. 누군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그녀는 두 개의 화살대를 그러모아 쥔 손에 아득 힘을 주며 천천히 옆으로 몸을 이동했다. 

시선은 여전히 어딘지 모를 깊은 숲속에 고정한 상태였다. 

천천히, 소리가 나지 않을 만큼 신중하게 움직이던 이예주는 펭양을 제 뒤에 완전히 숨기고 나서야 멈췄다. 

펭양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예, 예주양.”

“쉿.”

날아올지 모를 화살에 대비해 펭양을 가리고 선 채 이예주는 한참동안 숲을 노려보았다. 

그러던 순간, 그녀의 시야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한 나무 사이로 사르락 스쳐 지나가는 금빛 머리가. 

“이번엔 진짜 따라오지 마.”

“으, 응?”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정말 따라오지 마. 알았지? 순심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이예주는 속사포처럼 내뱉은 채 무작정 금발이 휘날렸던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예주양! 예주양!”

이번에는 펭양이 따라잡지 못하도록 전속력을 냈다. 

꼭 펭양 때문이 아니어도 여자를 쫓아가지 않는다면 이 숲을 영영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이예주는 남은 체력을 쥐어짜 뛰었다. 

순식간에 금발을 보았던 지점에 도착했지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음침하게 내려앉은 어둠뿐.

“하, 하아…….”

이예주는 정신없이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바라보다가 문득 제 발밑을 보았다.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발자국이 평평한 눈 위에 이리저리 찍혀 있었다.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또 다른 인간들이 이 깊은 곳까지 침입했다는 데에 소름이 끼치는 것과는 별개로, 이예주는 드디어 망할 숲을 빠져나갈 생각에 환희했다. 

선명한 발자국들은 그녀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북쪽으로 계속 이어졌다.

“예주야앙―!”

꽤 먼 곳에서부터 펭양의 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이예주는 펭귄이 자신을 찾아내기 전에 재빨리 뛰었다. 

방향은 당연히 발자국들을 따라서였다. 

그렇게 한참 발자국을 따라가자, 어느 지점에서 눈밭에 찍혀 있던 발자국이 뚝 끊겼다. 

“헉, 허억…….” 

거친 숨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곳이 그곳 같고 이곳이 이곳 같았다.

여긴 어디야? 대체 어디로 가야 하지? 

그녀가 또다시 막막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볼 즈음이었다. 

왼쪽 나무 기둥 사이에서 또 한 번 반짝이는 것이 스르륵 지나갔다. 

워낙 빠르게 지나간 탓에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예주는 그것이 아까 전 보았던 금발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자, 잠깐!”

이예주는 무거운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그쪽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러나 막상 움직임을 포착했던 곳에 도착하니 아까 전과 같이 아무도 없었다. 

그저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뿐이었다. 

또 다른 방향으로 이어져 있는 그것을 보고 이예주는 지체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같은 일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발자국을 따라 미친 듯이 뛰고, 그것이 끊겼을 땐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새겨진 흔적을 따라 다시 뛰었다. 꼭 술래잡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이런 일을 겪지 않았나 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똥개 훈련하듯 열심히 달리며, 이예주는 곰곰이 떠올렸지만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헉헉, 흐으…….”

네 번째로 반짝이는 것이 나무 틈새로 휙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 허겁지겁 쫓아가던 이예주는 불현듯 눈부신 빛과 조우했다. 

화악― 차가운 바람과 미세한 눈가루들이 폭풍우처럼 몰아닥쳤다. 

그녀는 걸음을 우뚝 멈추고 두 팔로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한차례 칼바람이 매섭게 몸을 후려치고 지나간 후, 이예주는 바람을 막던 두 팔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제 앞에 떡하니 나타난 높은 경사로를 보았다. 

산이라고 하기엔 너무 낮았고, 평탄한 길이라고 하기엔 스키장의 슬로프처럼 경사가 가파른 커다란 언덕이었다. 

그녀가 있는 가장 아래쪽에서부터 저 멀리 있는 꼭대기까지. 

새하얀 경사로 위에, 한 쌍의 발자국들이 뚜렷하게도 찍혀 있었다.

“……숲의 끝이야.”

이예주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마침내 빠져나온 것이다.

저 끝에 가면 뭐가 있을까. 남쪽 대륙에서 산다는 눈족 인간들이 득실대고 있을까. 

그러나 이예주는 더 고민하지 않고 발자국을 따라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곳까지 유인한 것인지, 혹은 쫓아오는 그녀를 피해 달아난 것인지 모를 인간이 사라지기 전에 꼭대기에 도달해야 했다. 

체력은 이미 방전된 후였다. 

악으로, 독으로 내리치는 바람과 눈가루들을 헤치며 뛰었다. 

마침내 비척거리며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자신을 기어이 이곳까지 끌고 온 인간을. 

그 여자는 정신없는 손길로 묶어 둔 썰매를 끄르고 있었다. 

이예주가 자신을 쫓아 언덕을 올랐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바람에 휘날리는 금발 사이로 얼굴이 슬쩍 드러났다. 

이예주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다, 당신!”

생각났다. 

자신을 이토록 똥개 훈련시켰던 망할 인간이 누구였는지. 

그때 그렇게 당해 놓고 어떻게 까맣게 잊었을까. 

여자와의 두 번째 술래잡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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