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45)화 (247/319)

처음 눈을 떴을 때, 이곳이 제 주인님의 얼음 동굴이라 말했던 펭양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동안은 노숙을 하다 얼어 죽을 순 없으니 길을 찾을 때까지만 잠자는 공간이라 여겼던 곳이 더없이 불편해졌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이예주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혔다.

자신을 잡은 펭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녀가 이내 가차 없이 다리를 털어 내려 마음먹었을 때였다.

“나, 나랑 같이 밥 먹기가 싫은 거양?”

“…….”

“힝, 예주양이랑 먹으려고 어엄청 일찍 일어나서 숭어를 잔뜩 잡아 왔는데…….”

“…….”

“눈도 잘 안 떠졌는데 예주양 주려고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었어양. 남쪽 대륙 강물은 뼛속까지 시릴 만큼 엄청 차갑고 추운데…… 그래도 예주양이랑 같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숭어구이를 먹을 생각에 열심히 사냥했는데양…….”

앙큼한 펭귄은 촉촉해진 눈을 빛내며 인간 여자가 도저히 반박할 수 없을 만한 직격타를 날렸다.

“그, 그래도 예주양은 나랑 같이 먹기 싫은 거양?”

*       *       *

펭양과 함께 모닥불 근처에 앉은 이예주는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고민했다.

눈물 공격으로 그녀를 앉히는 데 성공한 펭양은 빠르게 식사 준비를 했다. 

장작을 세워 불을 피우고, 빙어보다 훨씬 커다란 숭어의 주둥이를 벌려 굵직한 나뭇가지에 꽂았다. 

그리고 모닥불 양옆에 세워 둔 지렛대 위에 올려 두었다. 

얼마 안 가 살이 통통하게 오른 숭어의 몸통이 노릇노릇 구워졌다.

“숭어~ 숭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숭어구이!”

고소한 냄새가 동굴 안을 가득 메우자 펭양이 신나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며칠 전에는 빙어가 제일 좋다며? 줏대 없는 펭귄의 음식 기호를 지적하고 싶었지만 관뒀다.

이예주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가만 보면 조롱이 뺨치게 영악한 것 같기도 하고……. 날이 갈수록 자신을 다루는 데 도가 트는 것 같단 말이지. 

관찰하는 시선을 눈치챈 것일까. 

익어 가는 생선을 보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던 펭양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펭귄이 활짝 웃었다. 

마치 자신과 이렇게 마주 앉아서 생선 구이를 먹는 것이 더없이 행복한 일인 것처럼. 

그와 반대로 이예주의 얼굴은 슬프게 일그러졌다.

결국 펭양의 소원대로 사이좋게 마주 앉아 간이 안 된 숭어구이를 나눠 먹은 이예주는 든든한 배로 동굴 입구를 나섰다.

모닥불을 끄고 뒷정리를 하던 펭양은 웬일로 나가는 이예주를 잡고 늘어지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다시 설원에 오르기 전, 이예주는 동굴 뒤편의 온천에 들러 고양이 세수를 했다. 

대충 물 칠을 마치고 다시 동굴이 있는 쪽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예주는 또다시 기막힌 상황에 직면했다. 

그녀의 허리에도 못 미치는 자그마한 펭귄이,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앉아 있는 흰 순록의 등 위로 커다란 짐들을 싣고 있었다. 

수통과 줄에 엮인 말린 생선 따위의 건조식품들이 순심이 위에 얹어졌다. 

그도 모자라 이예주가 지금까지 덮고 잔 모포까지 실렸다. 

짧은 다리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펭양은 근처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예주를 발견하고는 기절초풍했다. 

“예, 예주양! 버, 벌써 다 씻었어양?”

“너…… 이사 가?”

펭양에게 다가가 묻자 헤벌어졌던 노란 부리가 텁 다물렸다. 

대답은 않고 까만 눈을 뒤룩뒤룩 굴리는 모습에서 이예주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영악한 펭귄이 또 무슨 일을 꾸몄구나.

“이제 짐까지 싸 들고 따라오게? 몰래 짐 싸야 돼, 나 감시해야 돼. 바빠 죽겠어, 아주.”

“힝, 예, 예주양…….”

이예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빈정거리자 펭양이 울상을 지었다.

노기를 띤 얼굴에 어쩔 줄 몰라 하던 펭귄이 불현듯 반색을 하고 짐을 뒤적였다. 

그러더니 얼마 안 가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짠! 예주양 선물이양!”

이예주는 제 앞에 내밀어진 물체를 내려 보았다. 

털신. 작은 펭귄이 제게 내민 것은 털이 북슬북슬 달려 있는 어그 부츠 모양의 신발이었다.

“이게…… 뭐야?”

“주인님이 예주양 주려고 인간 마을에서 가져오셨대양! 그 신발로 눈길을 걸어 다니면 발이 너무 시렵잖아양?”

“……”

“펭양이는 신발 같은 거 안 신어도 발이 시리지 않아서 예주양 발이 꽁꽁 언지 몰랐어. 미안해양…….”

이예주는 문득 제가 신고 있는 신발로 시선을 옮겼다. 

마담 페니의 가게에서 얻은 운동화는 어느새 그간의 고생을 알려 주듯 닳고 닳아 있었다. 

신은 지 몇 년은 된 것처럼 천도 다 해지고 떼가 타 꼬질꼬질했다. 

그런 신발이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 더미의 축축함과 어딜 밟든 쏟아지는 찬 기운을 막아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차가운 눈길을 걷는 동안 발바닥과 뒤꿈치가 꽁꽁 얼다 못해 부르트고 갈라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발이 얼굴이나 손보다 통각에 둔하다는 것뿐. 

그녀의 동공이 일순 흔들렸다. 

간밤 새 얼음 동굴에 들린 그 남자가 펭양에게 전해 준 것이 분명했다. 

어떤 생각으로 펭귄에게 이것을 전달한 걸까. 어차피 네 힘으로는 숲을 벗어날 수 없으니 털신 신고 마음껏 뛰어다니라고? 

아니면 또 어린아이 취급하며 그녀의 탈출을 단순히 토라진 것으로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 

어느 쪽이건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안 받아 줄 거양?”

“…….”

“내, 내가 몰래 따라가려 한 게 너, 너무 화가 나서 주인님 선물도 받기 싫은 거양?”

한참을 대답 없이 무뚝뚝하게 신발 한 짝을 내려 보고만 있자, 펭양이 오해를 했는지 울먹거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인간 여자의 마음이 약해질지 조금쯤 감을 잡은 듯해 보였다. 

이예주는 마지못해 털신을 받아들였다. 

펭양의 얼굴이 환해졌다. 

묵묵히 신을 갈아 신으며 그녀는 굳은 얼굴로 생각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설원에서 움직이기 딱 좋은 신발까지 받은 거. 보란 듯이 그 남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줄 것이다.

갈아 신은 털신은 확실히 따뜻했다. 푹신푹신하니 착용감도 좋았다. 

이예주는 허탈한 심정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

“고맙긴! 주인님이 주신 선물인데양!”

펭양은 그걸로 이예주와의 동행이 당연해졌다는 듯 순록을 불렀다. 

“순심아, 가자!”

푸르륵, 들짐승이 콧김을 내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예주는 저보다 앞서 걸음을 옮기는 동물들을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보았다. 

“예주양! 뭐 해, 빨리 와양! 어서 가자구우!”

오늘도 떨거지들을 떨어뜨리는 데 실패했다.

한 번 가 본 길이어서 그런가. 이예주는 어제보다 쉽게 얼어붙은 강에 도착했다. 

어쩌면 눈길을 걷기에 용이한 새 신발 덕분일지도 모른다. 

대체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말린 과일 따위를 야금야금 먹으며 따라오던 펭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주양, 여긴 왜 또 온 거양? 여기 말고 숲에 구경할 곳이 얼마나 많은데양.”

이예주는 대답 없이 저 멀리 지평선 너머,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로 보이는 반대편 숲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인간을 마주쳤던 강 하류 쪽으로 가야 할까 계속 고민했다. 그러나 가는 길을 몰랐다. 

어차피 상류든 하류든 강 건너에 숲이 이어지는 건 똑같았다. 

그러니 계속해서 직진하면 숲이 끝나는 지점이 나오지 않을까. 

“하…… 엄청 머네.”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막상 까마득한 강 건너편을 바라보니 한숨이 나왔다.

펭양 말대로 중간 즈음엔 빙판이 덜 얼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 강물에 속수무책 빠져 보았기 때문인지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쏴아아― 싸늘한 칼바람이 한차례 몰아쳤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엄습하는 두려움과 싸우던 그녀는 이내 과감히 한 걸음 내딛었다. 

“헤엑! 예, 예주양! 가, 강을 또 건너게양?”

펭양이 홀연히 발을 내딛는 이예주를 허겁지겁 붙잡았다.

“처음 건너는 건데?”

“어, 어제두 빙판이 깨져서 정말 위험할 뻔했잖아양! 여, 여기도 얼음이 깨지면 어쩌려구?”

“여긴 오랫동안 얼어 있었다며.”

“헉.”

제가 내뱉은 말을 까맣게 잊고 있던 펭귄이 이예주의 지적에 숨을 집어먹었다.

“반대편으로 갈 다른 방법도 없고.” 

“어, 어…….”

“다른 방법이 있더라도 안 알려 줄 거잖아?”

“…….”

너무나도 맞는 말이라 할 말을 잊어 먹은 듯 펭양에게서 답이 없었다. 

할 말을 짜내느라 작은 머리통을 필사적으로 굴리고 있는 듯했지만 이예주는 그것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휙휙 두터운 눈 위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인간 여자의 모습에 펭양이 화들짝 놀라 빙판 위로 뛰어내렸다.

“순심아! 위험하니까 여기 있어양! 금방 올 테니까 여기 있어야 해!”

푸르, 푸르륵― 흰 순록이 한차례 몸을 부르르 털며 울었다. 

펭양은 혹시라도 거대한 짐승의 무게를 빙판이 견디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어제부터 계속 순록을 떼어 놓는 듯싶었다. 

이예주는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도도도도. 펭귄이 짧은 다리를 열심히 파닥여 힘겹게 쫓아왔다.

“예주양, 예주양. 바, 반대편으로 꼭 가야만 하는 거양? 어제 봤잖아. 반대편은 인간들이 자주 침입해서 너무 위험해양. 무섭구 놀 곳도 별로 없단 말이양…….”

“놀러 가는 거 아니야.”

“그럼? 어디로 갈 계획인데양?”

계획 같은 건 늘 그렇듯 당연히 없었다. 

그저 숲에서, 그 남자에게서 벗어나려는 것일 뿐. 

그나마 깎아지는 절벽과 산맥이 이어지는 숲의 동쪽보다는 서쪽이 평탄할 것이라 판단했기에 그리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예주의 최종 목표는 결국 숲을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으로 가는 것이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어린 소녀에게 가기 위해. 

하지만 제 뒤를 안간힘을 쓰며 따라오고 있는 감시자에게 그것을 들려줄 일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따라오지 마.”

헉헉, 이예주는 제 옆에서 들려오는 가뿐 숨소리에 버릇처럼 중얼거렸다.

“힝, 나두 갈 거양.”

“위험하다며?”

“그래두 예주양 옆에 같이 있을 거양!”

돌아오는 대답이 앙칼졌다. 

결연한 펭양의 위세에 이예주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따라온다는데 뭐 어쩔 수 있을까. 순심이 옆까지 뻥 걷어찰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예주는 더 이상 펭양에게 관심 두지 않고 제가 갈 길을 바라보았다. 

부지런하게 걸었지만 반대편 숲까지 도달하려면 아직도 까마득하기만 했다. 

발목과 발바닥이 찌르르하게 아파 왔지만 이예주는 멈추지 않았다.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으나, 강의 폭이 어찌나 넓은지 이제 절반을 넘어선 상태였다. 

강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천만다행히도 빙판이 갈라지거나 무너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흘긋 옆을 내려 보니 노란 부리를 꾹 다문 채 묵묵히 걷고 있는 펭귄의 머리통이 보였다. 

짧은 발로 쉴 새 없이 쫓아오는 것이 용했다. 

이예주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눈이 두텁게 쌓이기는 했으나 미끄러운 빙판 위에 얹어져 있는 탓인지 살짝 부는 바람에도 눈가루들이 흩날렸다.

“아…….”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눈 결정들을 바라보던 이예주는 불현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살가죽을 에는 칼바람과는 관계없이, 온 세상이 하얀 남쪽 대륙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시리지만 코끝에 와 닿는 깨끗한 공기는 들이마실수록 지치고 피폐해진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것 같았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보다 보면 빌딩과 빽빽한 차도 속을 헤매던 이전의 삶이 다 꿈결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아득한 과거. 그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아등바등 거렸던 지난날의 자신. 

예전의 자신을 생각해 보면 항상 생존하기 위해, 그리고 무언가에 도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질주해 왔던 것 같은데.

그녀는 문득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 위를 짚었다. 

지금의 자신은 무언가 이상했다. 

딱히 필사적으로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 그저 공허했다. 

숲을 빠져나가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막상 빠져나간 이후를 생각해 보면 백짓장 같았다. 

누군가 숟가락으로 속을 박박 파낸 것처럼 가슴이 텅 빈 느낌이었다. 

가끔 펭양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남자의 소식이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알리자린 생각에 무언가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가도 잠시뿐이었다. 

그 감정들은 다 탄 재처럼 금방 푸시시 꺼져 버렸고, 그런 것이 몇 분 간격으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분이 뒤바뀌었다. 

괜찮다가도 화가 치밀어 올라 미칠 것 같았고, 분노가 가시면 숨 막히는 우울감이 찾아왔다.

그러다 모든 게 귀찮아지고 저도 모르게 그냥 죽어 버릴까 소리 내서 읊조리고 나면,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부정적인 생각들에 기함하는 것이다. 

서서히 늪에 빠지는 것처럼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자신의 목을 조금씩, 조금씩 죄어 오는 것 같았다. 

그게 기분 나빠 떨쳐 내려고 애쓸 때도 있었는데,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달라붙어 목을 죄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그냥 관두었다. 

때마침 그녀의 몸에 달라붙은 온갖 질척이는 것들을 조금이라도 떼어 내 주는 것처럼, 싸늘한 겨울 냄새를 한가득 실은 바람이 불어왔다. 

“예, 예주양! 저, 저기 봐양!”

불현듯 펭양이 어느 곳을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서 이예주가 채 확인하기도 전에 파다닥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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