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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매드 (244)화 (246/319)

“주인님이, 주인님이 예주양은 물놀이를 정말 싫어한다고 했단 말이양! 특히 차가운 물을!”

“…….”

“나 없이 혼자 갔다가 오늘처럼 꽁꽁 얼 만큼 차가운 물에 빠져 버리면 어떻게양! 내가 예주양 구해 줘야 되는데양! 아, 안 그러면 펭양이 주인님께 혼날 테양, 힝.”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이예주는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남자가 그런 소리도 했어?”

“웅!”

펭양이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말고도 많이 알려 주셨어양! 주인님은 오실 때마다 예주양 이야기를 해 주셔양. 예주양이 인면어도 잘 먹고 아직 어린 인간이라서 채소를 잘 안 먹고…… 또, 또 바퀴벌레 타는 것을 무서워하고, 꽃을 좋아하고…….”

“그만해.”

이예주는 괴로운 표정으로 힘겹게 펭양의 말을 멈췄다. 

“왜, 왜 그래양?”

펭양은 제가 또 눈치 없이 인간 여자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한 건가 싶어 울상을 지었다. 

이예주는 그런 펭양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않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축했던 옷은 어느새 바짝 말라 있었다.

“나 그만 잘래. 피곤해.”

그녀는 펭양이 채 잡기도 전에 도망치듯 화롯가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모닥불과 꽤 떨어진 동굴 한편에 있는 모포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갔다. 

펭양이 순식간에 멀어진 자신을 황망하게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고집스레 등을 돌렸다.

“예주양…….”

펭양이 안절부절못했다. 이예주는 외면하듯 눈까지 감아 버렸다.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몸을 내려놓자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 손가락이 따끔따끔 아파 왔다. 

그녀는 그제야 날카로운 덫에 베였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파상풍 같은 병에 걸리면 어떡하지. 다행히 피는 일찍 멎어 딱딱하게 피딱지가 굳었지만, 녹슨 쇠에 꽤 깊게 베였다. 

때늦은 걱정이 몰려왔지만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예주는 더 이상의 생각을 멈추기 위해 잠을 청했다. 

하루 동안 몸을 아낌없이 내던진 탓인지 그녀는 쉽게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깊은 심연 속을 헤매던 중이었다. 

문득 모포 밖으로 노출되어 있는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죽은 듯이 잠에 빠져 있던 이예주는 피부에 와 닿는 차가운 느낌에 가물가물 눈을 떴다. 

코끝에서 바깥 냄새가 났다. 

하루 종일 질리도록 맡은 설원의 냄새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 남자가 돌아온 것을.

저벅저벅, 그녀가 누워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움찔거릴까 두려워 이예주는 뜬 눈을 도로 꽉 감았다. 

점점 가까워지던 발걸음 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우뚝 멈췄다. 

바닥에 앉는 것인지 털썩하는 소음이 연이어 들렸다. 

이예주는 모포 속에 몸을 움츠렸다. 펭양을 외면하기 위해 벽을 보고 돌아누운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아니었으면 벌써 남자에게 깨어 있다는 사실을 들켰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들켰을지도…….

“예주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았다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남자가 속삭이듯 이예주를 불렀다. 

울컥, 목구멍 저편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남쪽 대륙에 와서 종종 느꼈던 감정이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숨을 죽였다. 

그러지 않으면 벌떡 일어나 차오른 감정들을 쏟아 낼 것 같았다.

“예주야.”

남자가 방금 전보다 조금 더 명료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잠든 사람을 향해 대체 뭘 바라는 건지 그는 그 이후로 꿈쩍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뭐야. 왜 안 가. 왜 안 가는 거야.’

이예주는 미동 않는 남자에게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숨 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그녀의 간절한 소망이 통한 걸까. 마침내 남자가 움직였다.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예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가는구나, 하고 생각할 무렵. 

불현듯 목 끝까지 덮고 있던 모포가 휙 걷혔다. 

얼굴뿐 아니라 온몸 위로 차가운 공기가 단숨에 몰아닥쳤다. 

잘 자고 있는 사람의 이불을 걷다니,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이란 말인가. 그것도 이 추운 곳에서! 

이예주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순간 남자가 불쑥 허리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그녀의 한쪽 팔을 제 쪽으로 잡아 올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이예주는 화들짝 놀랐다. 어쩌면 잡힌 손을 흠칫 떨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 개의치 않고 잡아 올린 손을 휙휙 돌리며 살폈다.

‘이, 이 미친놈,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거야?’

이예주는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다가 퍼뜩 깨달았다. 

남자가 주의 깊게 살피고 있는 손이 하필이면 오늘 다친 손이란 걸. 

“쯧.”

남자가 혀를 찼다. 

그와 동시에 잡힌 손끝에서 방금 전 그가 동굴 안에 당도했을 때 느꼈던 서늘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기묘한 촉감이었다. 바람처럼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를 슬쩍 스치면서도 몽글몽글하게 손끝을 감싸 안는 느낌.

그것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 점점 영역을 넓히더니, 마침내 상처까지 도달했다. 

환부가 조금씩 뜨거워졌다.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추운 겨울,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손난로를 살짝 쥔 것과 같은 따듯함이 곧바로 손 전체에 흡수되었다. 

동시에 베인 상처에서 느껴졌던 화끈거림과 통증이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상처가 치료되고 있는 것이다. 

피부 아래 살점이 빠르게 달라붙고 그 사이로 새살이 차올라 마침내 흉터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펭귄이 그새를 못 참고 제 주인에게 낮의 일을 고자질한 건가. 그러지 않았다면 이 남자가 곧바로 자신의 상처를 알아챌 리 없는데. 

때마침 치료를 끝마친 남자가 원래의 자리로 그녀의 팔을 조심스럽게 되돌려 놓았다. 

남자가 신인류에게 기이한 힘을 쏟아붓는 것을 본 적은 있었지만, 직접 겪었던 기억은 한 번도 없었다.

이예주는 불현듯 자신이 남자로부터 꽤 자주 치료를 받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날엔 분명 있었던 상처나 통증이 다음 날 감쪽같이 사라진 적이 많았다. 

며칠 전 열병을 앓았을 때도……. 

남자는 손을 돌려놓은 것도 모자라, 걷어 냈던 모포를 목 끝까지 꼭꼭 여며 덮어 주었다. 

그러고서도 가지 않고 계속해서 그녀의 뒤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예주는 그에 붙잡혔던 손을 아득 움켜쥐었다.

왜 이러느냐고.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느냐고. 인간 계집 따위, 평소에 그래 왔던 것처럼 다치든 말든 신경 쓰지 말 것이지 치료는 왜 해 주냐고. 

왜 그렇게, 왜 그렇게…… 꼭 걱정하는 사람처럼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거냐고…….

숨을 죽이려고 노력했지만 자꾸만 호흡이 거칠어졌다. 

남자에게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다. 하지만 이예주는 그것을 꾹 내리눌렀다. 

사실은 겁이 났다. 

분수처럼 핏줄기를 질질 흘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던 남자의 잔상이 잊히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그 모든 게 아득하게 느껴졌다. 혹시 꿈은 아니었을까. 남자의 한쪽 팔이 사라진 것은. 

하지만 그 환영 같은 장면을 떠올리는 동시에 그것이 꿈이 아님을 증명하듯 역한 피비린내가 코끝에 맴돌았다. 

그러면 비로소 예지몽이 현실이 되었음을 자각한다.

잠시 ‘문’ 안의 암경 속에 있는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다리족 놈들이 남자를 공격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본능이 말했다. 

어쩌면 자신으로 인해 남자의 팔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자신은. 

람의 팔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기가 두려웠다. 

일어나서 그를 마주 보았을 때 그의 팔이 없으면 어떡하지? 

소매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으면, 단단하고 완벽했던 남자의 몸이 더없이 망가져 있다면. 

남자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금방 일어날 기색이 아니었다. 

숨소리 하나 없는 고요함이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이예주는 지금 그가 대관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토록 원망하고 화를 냈던 남자가 왔음에도 마주하기는커녕, 겁을 잔뜩 먹은 채 숨소리 하나 내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결국 숲을 탈출하려는 이유가, 남자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신체 일부가 소실된 것을 마주하기 무서워서라니. 

도망치는 꼴과 다름없지 않은가?

늦은 밤 몰래 나타나 이예주의 손을 치료해 준 남자는 새벽 동이 틀 때까지 그렇게 그녀의 등을 지켰다. 

그리고 겨울새의 첫 지저귐 소리가 들릴 때쯤 훌쩍 일어나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남자가 사라질 때까지 이예주 또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이예주는 결국 몇 시간 눈을 붙이지 못하고 이른 아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그렇게 몸을 혹사했으니 오늘은 근육통으로 난리 날 줄 알았는데 몸 상태가 썩 나쁘지 않았다.

간밤에 남자가 상처를 통해 간질거리는 힘을 불어넣었던 것이 떠올랐다. 

설마 이전에 죽을 듯이 앓았을 때도 그 남자가 치료해 준 건 아니겠지? 

이예주는 괜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불퉁한 얼굴로 간밤 새 불 근처에서 바짝 마른 로브를 주섬주섬 껴입고 있을 때쯤, 동굴 입구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남자를 제외하고 이곳에 들어올 인물은 하나뿐이라 놀랍지도 않았다.

“숭어~ 숭어~ 숭어 꼬치를 구워…… 어? 예주양!”

펭양이 겉옷까지 다 차려 입은 채 깨어 있는 이예주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일찍 일어났잖아양? 예주양, 좋은 아침이양!”

어제 잠들기 전에 나눴던 대화는 까맣게 잊어버린 걸까. 

제가 들어도 정이 뚝 떨어질 만한 소리를 지껄였건만 펭양은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예주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뭐야?”

그녀는 펭귄이 끌고 온 것을 흘끗 눈짓하며 물었다. 

펭양의 날개만 한 두툼한 생선들이 굴비처럼 줄에 줄줄이 엮여 있었다. 

이예주의 물음에 펭양이 반색을 하며 줄을 휙 들어 보였다. 

“숭어양! 아침에 먹으려고 순심이랑 새벽같이 일어나서 잡아 왔어양!”

숭어구이! 숭어구이!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펭귄을 보며 이예주는 입꼬리가 근질거리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그러고서 동굴 밖을 나갈 때마다 둘러맸던 모포로 무장을 완료했다. 

그녀는 여전히 숭어구이를 울부짖고 있는 펭양에게 나지막이 인사했다.

“그럼 맛있게 먹어.”

“헉! 예주양!”

펭양이 소중하게 끌고 온 숭어까지 내팽개치고 파다다닥 달려와 이예주의 한쪽 다리를 와락 안았다. 

조그마한 펭귄이라 생각했는데 발 위에 얹힌 무게가 꽤 묵직했다.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기려던 이예주는 다리가 꿈쩍 않자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래?”

“어, 어디 가려구양?”

“……어디겠어?”

이곳에 온 후 이예주의 목적은 하나뿐이었다. 

숲을 벗어나는 것. 여상하게 되묻자 펭양의 목소리가 더욱 애절해졌다.

“같이! 같이 숭어구이 먹으면 안 돼양?”

“응, 안 돼.”

“왜에?”

“별로 입맛도 없고 배도 안 고파.”

조금이라도 허기가 졌다면 펭양과 마주 앉아 숭어구이를 뜯어 먹겠지만, 안타깝게도 사실이었다.

오히려 펭양에게 발목이 붙잡히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제 새끼 여우를 구하면서 또 다른 인간의 존재를 보았다.

이예주는 얼어붙은 강 건너편이 숲을 빠져나가는 방향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시종일관 모르쇠로 일관하던 펭귄이 강을 건너려던 자신을 보며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간밤에 남자가 돌아왔다. 지금 심정으론 가장 마주치기 싫은 존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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