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43)화 (245/319)

구멍의 너비는 꽤 널찍했다. 

더군다나 반대편에 밧줄이 있어서 아슬아슬하게 손이 닿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금방 남은 밧줄마저 물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예주는 다시 물속으로 빠질 것을 감수하고도 손을 뻗었다. 

닿을 듯 말 듯 애를 태우던 밧줄이 가까스로 그녀의 손가락에 걸렸다. 

그녀는 그것을 정신없이 위로 끌어당겼다.

“안 돼! 안 돼!”

“예, 예주양, 그만해양…….”

펭양이 옆에서 말렸지만 들리지 않았다. 이예주는 미친 사람처럼 줄을 끌어당겼다. 

묵직했던 줄이 어느 순간 뚝 끊어진 것처럼 가벼워진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그래도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르잖아. 

아니, 살아 있는 것과는 상관없었다. 육지 동물인데 적어도 무덤은 만들어 줘야 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새끼가 다신 찾아올 수도 없게 강바닥으로 가라앉으면 어떡해.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밧줄 끝에 매달려 덜렁 끌어 올려진 것은 화살 하나뿐이었다. 

여우의 몸에서 빠져 버린 것이다. 

이예주는 제 손에 쥐어진 젖은 화살을 망연자실 내려 보았다. 

펭양이 뒤뚱뒤뚱 다가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예주양 잘못이 아니양.”

“…….”

“물에 빠지기 전에 이미 죽었을 거양.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양.”

이예주를 위로하는 말은 아니었다. 

귀여운 얼굴로 가끔 가다 소름 끼칠 만큼 냉정한 말을 내뱉던 조롱이처럼, 펭양이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았다. 

조금 더 힘을 쥐어 짜내서 밧줄을 잡아당겼으면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부질없었다.

그녀는 밧줄에 매달린 화살을 꾹 움켜쥐었다. 

어미 여우의 몸을 그 무엇보다 날카롭게 꿰뚫었던 물건인데, 물에 핏자국이 씻겨 나가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못내 서글펐다.

그녀는 화살을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게 때문에 2차 피해가 우려됐는지 순심이는 똑똑하게도 그녀만 건져 낸 후 다시 뭍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걸음을 옮기자 처덕처덕, 물에 젖은 소리가 났다. 

그녀는 제가 벗어 놓은 모포 뭉치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곧바로 모포를 들췄다. 

덫에 걸린 새끼 여우가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놀라 바들바들 몸을 떨어 대었다. 

그녀는 묵묵히 여우를 물고 있는 덫을 살폈다. 

다행히 덫은 지렛대를 이용한 단순한 구조였다. 

“어떡하지양? 동굴까지 가지고 갈까? 주인님이라면 해결책이 있으실 거양!”

펭양이 해맑게 방법을 논했다. 

푸르르, 그 말에 동의하듯 순심이 또한 콧김을 내뿜었다. 이예주만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덫을 잡아 올릴 테니까 느슨해지면 얘 잡아 꺼내.”

“힉! 예, 예주양이?”

이예주는 대답 없이 덫의 날카로운 이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얼어붙은 손에는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덫의 받침대를 단단히 밟아 선 후 남은 힘을 쥐어짰다.

“으으윽!” 

아니나 다를까, 날카로운 덫의 윗니가 손을 파고들어 쉽게 여린 살점들을 베어 냈다. 

“예, 예주양! 피 나!”

펭양이 기겁했지만, 이예주는 힘을 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영부영 들어 올렸던 덫을 중간에 놓치게 되면 새끼 여우가 더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끼이, 끼이익. 낡은 덫의 윗니가 녹슨 소리를 내며 조금씩 벌어졌다. 

덫에 걸려 있는 부분은 꼬리였기 때문에 다행히도 얼마 벌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수월하게 새끼 여우를 빼낼 수 있었다. 

“예주양, 다 됐어양!”

펭양이 하얀 털 뭉치를 안고 기쁘게 외쳤다. 

“하.”

한숨과도 같은 날숨을 크게 내쉬며 이예주는 잡고 있던 덫을 놓았다. 

철컥, 벌어졌던 것이 무색하게 도구는 살벌한 소리를 내며 입을 꽉 다물었다.

“어디 봐 봐.”

피가 흐르는 제 손은 아무렇게나 내버려 둔 채 그녀는 새끼 여우에게 다가갔다. 

“아직 꼬리가 작아서 상처는 크게 안 났어양. 털이 끼어서 못 나왔나 봐양.”

펭양이 여우를 바닥에 내려놓고 상태를 살폈다. 

치료 쪽으론 문외한인 이예주의 눈으로 보기에도 털 사이의 살점이 살짝 긁혔을 뿐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다. 

천만 다행이었다. 

“하…….”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상처가 깊지 않으니 이제 되었다. 자신의 도리는 모두 다한 것이다. 

손가락이 온통 엉망이었다. 

당장 이 망할 숲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이대로는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예주는 잠시 이를 악물고 분노하다가, 이내 그것을 금방 털어 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녹슨 쇠에 베였으니 파상풍도 걱정해야 했고……. 

벌써 물을 잔뜩 머금은 옷가지가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저체온증으로 위험했다.

그녀는 급격히 찾아오는 피곤함에 그만 쭈그려 앉아 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이 설원에선 느껴질 리 없는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 닿았다. 

무심결에 고개를 내리자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할짝할짝 핥고 있는 하얀 새끼 여우가 보였다.

“어맛! 예주양이 자기를 구하다가 다친걸 아나 봐양!”

펭양이 호들갑을 떨었다. 

이예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치지 않은 손으로 새끼 여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안녕, 아가야.”

그녀는 지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하는 인사인지, 헤어질 때 하는 인사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주먹만 한 새끼 여우가 킹킹거리며 손에 제 머리를 비볐다.

그 모습에 이예주는 짧게 웃고는 조심스럽게 새끼 여우를 밀었다. 

밀린 만큼 다시 쪼르르 다가왔지만 인내심을 갖고 반복해서 여우를 보냈다. 

세 번이 넘게 같은 행위가 반복되자 뭔가를 눈치챈 듯 여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한번 등을 밀자, 새끼 여우는 이번에야말로 이해한 듯 숲 어느 방향을 향해 쪼르르 걸어갔다. 

이예주를 등지고 걸어가면서도 여우는 몇 번이나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자신을 구해 준 이가 끝내 잡지 않자 망설이던 것을 멈추고 이내 힘차게 달려갔다. 

하얀 털이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있던 이예주는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동굴에서 나올 때만 해도 제 입에서 나오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말이 허탈하게 흘러나왔다. 

과연 그녀가 그 말을 먼저 꺼낼 줄 예상하지 못했는지 펭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 여우는 그냥 보내도 되는 거양?”

의외의 질문이었다. 

신인류니까 당연히 자신의 이런 행동을 기꺼워할 줄 알았는데. 

의아했지만 이예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크게 다친 게 아니니까 저 정도면 됐어.”

“뭐가양?”

“…….”

어미를 잃고 혼자 살아가는 것. 답은 뚜렷했지만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자신과 펭양이 거둬 주지 않은 어미 잃은 새끼 여우는 앞으로 각박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또 인간이 놓은 덫에 걸리거나 이 황량한 숲에서 먹이를 구하지 못해 굶어 죽을지도, 어쩌면 자신보다 더 큰 천적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래 어미 잃은 새끼들의 삶은 그러했다. 

죽을 둥 살 둥 어떻게든 살아남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서 살아지는 시점이 올 테다. 

그러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또 다른 동물을 만나게 되면 자유로운 자신의 삶에 감사하는 날이 오겠지. 

그러면 남은 삶을 값지고 보람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예주는 새끼 여우가 사라진 쪽을 한 번 더 바라보다가 이내 등을 돌렸다. 

그 옆에 혹 두 마리가 따라붙었다.

“오늘 일은 네 주인한테 비밀로 해 줘. 알았지?”

끝없이 펼쳐진 설원 길을 되돌아가며 이예주는 부탁 같지 않은 부탁을 했다. 

딱히 펭양이 들어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을 더듬으며 거절할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펭양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몇 번이고 제 주인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       *       *

타닥타닥, 모닥불이 타오르면서 장작 주변에 작은 불똥들을 토해 냈다. 

겁도 없이 얼어붙은 강물 위로 뛰어든 탓에 동굴에 도착했을 때쯤 이예주가 입고 있던 옷은 부각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그녀의 몸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동굴에 도착하자마자 졸도하는 게 아닌가 했지만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바탕 앓고 났더니 저질스러운 체력이 조금은 나아진 건가?

“하…….”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며 이예주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러눕고 싶었지만 젖은 옷을 말리느라 펭양과 사이좋게 모닥불을 쬐어야 했다.

탈출은 실패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내일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왜 그래양?”

나지막한 한숨 소리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펭양이 이유를 물었다. 

이예주는 다시 한숨이 솟구쳤다.

펭귄은 원래부터 까만 눈을 빛내며 자신에게 관심을 쏟았지만, 새끼 여우를 구한 이후부터 그 정도가 훨씬 심해졌다. 

동굴로 되돌아오는 내내 “예주양, 멋져! 예주양, 대단해!”를 어찌나 부르짖던지.

내일은 저 찰거머리를 어떻게 떼어 낼 수 있을까. 

“그, 그렇게 바라보면 페, 펭양이 부끄러워양. 나도 나름 숙녀라서……."

“내일은 정말 따라오지 마. 네가 따라오면 힘들어.”

“으응? 뭐, 뭐가?”

이예주는 무엇이 힘든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언제나 진심으로 말했지만, 펭양은 그것을 처음 알아들은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 하지만 나는 예주양이랑 같이 다니고 싶은걸?”

“…….”

“같이 숲속도 걷고 싶구, 예주양이랑 같이 이야기도 많이 하고 싶어. 오, 오늘처럼 위험한 일은 더 이상 없을 거양! 오늘은 조금…… 조금 힘들었지만, 내일은 예주양도 활짝 웃을 수 있을 만큼 즐거운 일들만 가득할 거양!”

펭귄이 두 날개를 위로 치켜들고 연신 파닥였다. 그 모습에 미소를 지을 만도 하건만, 이예주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펭양이 안달복달 말을 이었다.

“난 예주양이 여기 온 이후로 항상 내일이 기다려져양. 예주양은 나랑 함께 노는 게 기대되지 않아? 웅?”

“응.”

“힝, 너무행. 왜에?”

“네가 그 남자의 명령을 받는 신인류니까.”

이예주의 말에 펭양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조잘대던 입을 다물었다. 

동굴 안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펭양은 한참을 부리를 딱딱거리며 할 말을 찾는 듯하더니 이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인님이……”

“…….”

“주인님이 많이…… 많이 미운 거양?”

작게 쏟아져 나오는 의문에 이예주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 남자가 밉냐고? 이제 그에 관한 감정은 밉다, 좋다와 같은 단순한 감정으로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이곳에서 깨어난 후 하루에도 수백 번씩 화가 치솟았다. 

지금껏 멍청하게만 굴다 종국에 이용을 당했던 자신에게. 

애써 그 현실을 외면하고 다른 생각에 몰두하려고 해도 잠시뿐이었다. 

무언가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곳에 처박아 둔 남자에 대한 분노와 원망, 혐오, 갖갖이가 섞인 덩어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울컥울컥 솟았다.

그러다 문득 핏빛으로 물든 남자의 모습이 환영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기라도 하면, 한쪽 팔이 사라진 채 피를 철철 흘리던 모습이 실제였는지 당장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 당장 내 앞에 나타나라고. 나타나서 제발 어떻게 좀! 제발 어떻게 좀 하라고!

그것들을 억누르기 위해 강박증처럼 탈출을 되뇌었다. 

안 그러면 머리가 어떻게 돼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변명의 연속이었다. 

저번에는 길을 찾지 못해서, 그 다음에는 앓아누워서, 이번에는 여우들 때문에 같은 변명으로 탈출에 실패한 것을 합리화할 때마다 자신에 대한 환멸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이 모든 걸 단순히 ‘밉다’라는 감정 안에 욱여넣을 수 있을까?

“……밉다, 좋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이예주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러나 들려오는 답은 맥이 빠질 만큼 황당한 소리였다.

“하, 하지만 예주양 혼자 다녔다가 오늘처럼 또 물에 빠지면 어떻게양?”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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