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42)화 (244/319)

“하, 망할…… 클라이밍은 며칠 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이예주는 중얼거리며 자세를 낮춰 아래쪽의 엉성한 암벽으로 발을 내렸다. 

물이 얼어붙은 지형이라 그런지 며칠 전 올랐던 절벽보다 훨씬 미끄럽고 위험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폭포 옆에 바위들이 크게 튀어나와 있어 쉽게 발 디딜 곳이 많다는 것이었다. 

물론 잘못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떨어져 골로 갈 것이다.

“흐.”

아찔하게 밀려오는 현기증에 이예주가 흐느끼며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러나 고소공포증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핑! 핑!’ 하고 연달아 울려 퍼지는 화살 시위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밑에 내려다보지 말자. 내려다보지 말자.”

이예주는 거의 암기하듯 달달 외며 딱딱하게 굳은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자신이 어미 여우와 새끼를 모두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실은, 구할 생각조차 없었다. 

‘여우’만 아니었어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덫에 걸려 죽다 살아난 사막 여우 하나가 생각나서, 그래서 도저히 몸을 움직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녀에게 기가 막힌 해결 방안 따위는 없었다. 

그저 어미 여우가 버티고 있을 때 새끼가 걸려 있는 덫째로 들고 도망갈 작정이었다. 

피융― 팟! 

네 번째로 화살이 땅에 박혔을 때, 이예주는 간신히 빙판 위에 발을 내릴 수 있었다.

“예주야앙―!”

멀찍이 폭포 위에서 펭양이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예주는 어질어질한 정신을 추스를 새도 없이 숲 쪽으로 뛰었다. 

다행히 그녀가 내려선 곳에서 덫이 있는 자리까지 멀지 않았다.

주먹보다 약간 큰 크기의 작은 흰 여우가 다가오는 인간 냄새를 맡고 하악질을 했다. 

쪼그만 것이 살겠다고 이를 드러내는 것을 무시한 채, 이예주는 무작정 덫을 들어 올렸다. 

끼잉, 끼잉. 어미와 떨어져 잡혀 가는 줄 알고 새끼가 애처롭게 울었다. 

마음이 급했다. 그대로 숲을 향해 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예주는 ‘왕!’ 하고 제 쪽을 향해 울부짖는 소리에 뒤로 돌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몸에 박힌 화살이 두 개에서 세 개로 늘어나 있었다. 

물 흘리듯 피를 줄줄 내리 흘리며 어미 여우가 새끼를 품에 안아 든 이예주 쪽을 향해 비칠비칠 걸어왔다. 

으르르. 어미가 힘겹게 이를 드러냈다. 

새끼를 훔쳐 가려는 인간을 마지막까지 경계하는 모습에 이예주의 두 눈이 안타까움으로 점철되었다.

“해치려는 거 아니야.”

인간의 말을 동물이 알아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가기 전에, 곧 죽을 어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도와, 도와주려고 그러는 거야. 미안해. 너까지 구해 줄 순 없어.”

그녀의 표정에서 절박함을 읽은 것일까. 조금씩 다가오던 어미 여우가 걸음을 멈췄다. 

빙판의 정중앙에서부터 선명하게 찍혀 있는 핏자국을 보며 이예주는 괴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새끼는 안전한 곳에 풀어 둘게. 그러니까 안심…….”

안심해도 된다고. 그 말을 하려던 이예주는 끝내 여우에게 말을 전하지 못했다. 

퍽. 이전보다 훨씬 더 두껍고 커다란 화살이 어미 여우의 몸을 꿰뚫었다. 화살 끝에 줄이 매달려 있었다. 그 줄은 강 너머 반대편 숲까지 이어져 있었다. 

어미 여우의 몸이 이예주의 눈앞에서 천천히 스러졌다. 

그러나 아직 끈질기게 숨이 붙어 있는 건지 붉게 물들어 있는 하얀 털이 가쁘게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화살촉은 갈고리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화살에 이어진 줄이 팽팽해졌다. 

쓰러진 어미 여우의 몸뚱이가 강 저편으로 끌어당겨지기 시작했다.

어미를 보지 못하도록 꽉 끌어안고 있던 탓에 답답한 듯 모포 속에서 작은 온기가 낑낑거리며 꿈틀거렸다. 

이제 그만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아직 살아 있는데. 저렇게 살아 있는데. 

간신히 새끼를 지켜 낸 어미의 몸이 인간들에게 끌려가는 꼴을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스윽, 스윽. 여우는 최대한 끌려가지 않도록 몸을 바둥거렸지만 끌려가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마침내 어미 여우의 몸이 강 하류의 중앙까지 다다랐다. 

바르작거리던 몸이 점점 힘을 잃어 갔다. 

저대로라면 괴로운 상태로 죽지도 못한 채 반대편 숲까지 끌려갈 것이 분명했다.

짧은 새에 이예주의 눈앞에 환영처럼 수십 가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원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죽어 버린 엄마. 

얼렁뚱땅 사건을 종결시켰던 관할 경찰서. 

눈 깜짝할 새에 치러진 장례와 재수사 요구를 조금도 들어 처먹지 않았던 인간들.

“그만해!”

이예주는 덮고 있던 모포로 덫을 감싸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얼어붙은 강 위를 내달렸다.

설원이라 착각했던 폭포 위쪽과는 달리, 신발에 닿는 바닥 면이 많이 매끄러웠다. 

어렸을 적 엄마와 갔던 옛날식 눈썰매장 같았다. 

휙 미끄러져 그대로 넘어질 뻔한 몸을 다잡으며 이예주는 뛰었다. 

줄을 잡아당기느라 손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 

어둡고 빽빽한 침엽수 숲 저편에서 더 이상 화살이 날라 오진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그녀가 어미 여우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고 있는지 줄을 잡아당기는 속도가 전보다 더 빨라졌다. 

“그만하라고, 나쁜 새끼야!”

불분명한 상대를 향해 험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예주는 늘어져 있는 여우를 향해 휙 몸을 날렸다. 

그녀의 몸이 얼음 위에서 쭉 미끄러져 끌려가던 여우를 덮치듯 붙잡았다. 

이예주는 자리에 주저앉아 뺏기지 않겠다는 듯 여우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팽팽하던 줄에 더 힘이 들어갔다. 

끼이잉,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어미 여우가 고통에 겨워 울부짖었다.

“놔!”

이예주는 여우를 끌어안은 채 한 손을 뻗어 화살 끝에 달려 있는 밧줄을 움켜쥐었다. 

사냥꾼과의 줄다리기에서 오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 줄 심산이었다. 

숲 저편의 인영과 이예주 사이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기어코 다 죽어가는 어미 여우를 끌고 가야겠다는 듯 줄 너머에서 느껴지는 힘이 만만치 않았다. 

이예주는 악착같이 여우와 줄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있는 힘, 없는 힘 쥐어짜느라 그녀의 목에도, 손목에도 핏줄이 부득 일어섰다.

“으흐으!”

악문 잇새로 여우가 울부짖은 것과 같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쩌적, 소름 끼치는 소리가 이예주의 귓등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생명줄처럼 밧줄을 꽉 쥔 채 그녀가 힘겹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쩌저적, 그러나 그 자그마한 움직임과 동시에 방금 전보다 조금 더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의 주변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빙판이 갈라지고 있는 것이다. 

강의 중간은 얼음이 얇아서 위험하다는 펭양의 말이 기억났다. 이예주의 턱이 달달 떨려 왔다. 

위험했다. 빙판이 무너지면 본래 빠진 구멍을 찾지 못한다는 이야기, 익사, 동사 같은 단어들이 마구 떠올랐다. 

“흐, 흑.”

이예주는 흐느꼈다.

쩌적, 쩌적. 빙판이 갈라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아직도 밧줄 너머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만만치 않았다. 

여우는 이제 완전히 움직임이 멎었다. 어쩌면 이미 숨을 거둔 것일지도 모르겠다.

쩌적, 쩌저적, 쩌적. 작정하고 그녀를 죽이려는 듯 주변에서 계속 섬뜩한 소리가 울려왔다. 

무서워서 원치 않아도 두 눈이 절로 꽉 감겼다. 그러나 두려움에 벌벌 떨지언정, 이예주는 붙잡고 있던 밧줄과 여우를 끝내 놓지 않았다. 

끊어질 듯 팽팽해진 밧줄. 자신의 몸까지 덜컹거릴 만큼 거세게 잡아당기는 숲 속의 인간. 

이예주는 겁에 질려 꾹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뜨고 강 너머의 숲을 노려보았다.

“……씨발, 흐, 흐으.”

만약 이대로 얼음이 깨져 자신이 익사하게 된다면, 자신을 죽게 만든 장본인의 얼굴은 보고 죽어야 할 것이 아닌가. 

지독한 두려움을 억지로 참아 내며 온 신경을 집중하자 밧줄이 이어진 곳이 점점 선명해졌다. 

어두침침한 나무들 사이로 흐릿한 인영이 보였다. 이예주의 눈이 커다랗게 홉떠졌다.

자신과 같이 밧줄을 붙잡고 어두운 색의 후드를 푹 뒤집고 쓰고 있는 인영. 

헛것인지 실제인지 얼핏 금발 머리가…… 살랑거리는 것 같았다. 

뭔가 너무 말도 안 되는 것이 보여 위화감이 들었다. 

아니면 기시감이라든지.

“안 놔! 절대 안 놓을 거야!” 

그러나 위화감이고 뭐고, 뒈지기 직전인 이예주는 그쪽을 보고 짓씹듯 외쳤다. 

자신에게 하는지, 밧줄을 잡고 있는 놈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계속 반복하던 그 순간.

파앗―! 

반대편에서 억세게 잡고 있던 밧줄에 힘이 확 풀렸다. 

커다란 반동에 의해 이예주의 몸이 덜컹 흔들렸다. 

쩌억―! 

그리고 종말을 알리듯 빙판이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몸이 아래로 쑥 빠졌다. 

구멍이 뚫린 빙판과 함께 강물 아래로 추락하기 직전, 이예주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어두운 숲속으로 살랑거리며 사라지는 금발이었다.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각이 하체서부터 순식간에 머리꼭지까지 차올랐다. 

꼬르륵꼬르륵, 몸속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와 빙판이 갈라진 곳에서부터 새어 들어오는 한줄기의 빛.

사는 동안 죽음은 언제나 그녀의 곁에서 도사렸다. 

하지만 숨이 턱 막히는 그 순간과 힘이란 힘이 모두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게 되는 것 같은 일련의 과정들은 언제 겪어도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빙판이 무너지며 강물 속으로 빠진 것은 분명 눈 깜짝할 새에 이뤄졌는데, 물속을 부유하는 시간은 꼭 영원처럼 느껴졌다. 

악착같이 안고 있던 여우를 놓치는 것조차 모른 채 이예주는 필사적으로 두 손을 휘적거렸다. 

두려웠다.

이대로 천천히 가라앉아 폐 속에 조금씩, 조금씩 물이 차는 것을 느끼며 괴롭게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게.

그러나 체감하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 이예주가 물속에 잠겨 있던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풍덩 하고 묵직한 무언가가 물속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안 가 그녀의 몸은 엉덩이에 로켓 추진기를 단 것처럼 강하게 밀어 올려졌다. 

‘람?’ 

타인에 의해 끌어 올려지던 그때, 이예주는 지금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해 주는 것이 그 남자가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억척스럽게 후드를 잡아챘던 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끌어 올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푸학!”

수면 위로 이예주가 훅 솟아올랐다. 

콜록콜록. 거칠게 기침하며 들이마셨던 물을 토해 내는 사이, 옆에서 펭양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예주양! 순심아! 예주양 끌어 줘양!” 

흐릿한 시야 사이로 커다란 뿔이 다가와 이예주의 후드에 걸렸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손쉽게 빙판 위로 끌어 올려졌다. 

뺨에 얼어붙은 강바닥이 시리게 달라붙었다. 차가운 물속에 잠겨 있다 나왔는데도 그 시린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콜록콜록, 잔기침과 함께 입술 사이로 침인지 물인지 모를 것들이 주룩주룩 쏟아져 나왔다. 

“예주양! 괜찮아양? 어디 다친 곳은 없어양?” 

물에 동동 떠 있던 펭양이 매끄럽게 물 밖으로 튀어 올라 다가왔다. 

이예주는 엎어져 있던 상태에서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켰다. 

물에 젖은 머리가 아래로 축 쏟아지자 물방울이 와르르 떨어졌다. 

“예주양, 이제 조금씩 움직여서 어서 가장자리로 가야 해양! 빙판이 얇아서 여기 계속 있으면 위험해양!”

펭양이 다급히 재촉했다. 하지만 이예주는 그러지 못했다.

두 손이 허전했다.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데. 물에 빠지기 전까지 뭔가를 잡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였다. 

주변의 빙판을 더듬으며 뭔가를 찾고 있던 이예주의 귀에 ‘휘익, 휘이이익’ 하고 와이어 로프가 빠르게 감기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퍼뜩 고개를 돌리자 펭양과 자신이 빠져나왔던 구멍 속으로 밧줄이 마구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 안 돼!”

이예주가 허겁지겁 기어가 밧줄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예, 예주양! 위험해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