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왜 그래양?”
그럼 그렇지. 이예주는 까득 이를 갈았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도망을 가려고 한다는 것을 아는 놈이 이렇게 자신을 방치해 둘 리가 없는데. 아예 그녀가 혼자서 숲을 빠져나갈 가능성조차 염두하지 않은 모양이다.
뭐? 놀러? 놀러 나가? 주먹을 한 번 꾹 쥔 그녀는 다시 빠르게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녀를 따라 같이 멈췄던 펭양이 서둘러 날개를 파닥이며 쫓아왔다.
“전했긴 했나 보네?”
“응? 뭐를?”
“내가 숲에서 빠져 나가려고 했던 거.”
“……헙!”
까마득한 숲을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내뱉자 반걸음 뒤에서 급하게 숨을 집어먹는 소리가 들렸다.
펭귄의 아이큐가 이렇게 낮았던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내리누르며 이예주는 내리막길 끝에 당도하자마자 급격히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펭양이 힝힝 하고 특유의 우는 소리를 내며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아, 아니양! 예, 예주양. 고, 고자질한 게 아니라…… 예주양 아픈 거 보고 주, 주인님이 너무 깜짝 놀라셔서…!”
“너 쫓아오지 말래도 쫓아올 거지?”
“…….”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긍정이었다.
이예주의 미간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감시하든 말든 신경 안 쓸 테니까, 쫓아올 거면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쫓아와.”
“힝…… 펭양이는 예주양이랑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면서 걷고 싶…….”
화를 내는 그녀에게 제법 적응이 됐는지 조심스럽게 주장하던 펭양은, 문득 무시무시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인간 여자의 모습에 그만 부리를 다물었다.
눈으로 한 협박이 통한 건지 그 이후로 펭양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도주를 방해하는 이가 없어 이예주는 잠시 안심했다.
그러나 그도 얼마 가지 않았다. 펭귄이 ‘쀼륙, 쀼류륙!’ 괴상한 새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거대한 흰 순록이 숲에서 겅중겅중 튀어나왔다.
이예주는 어이가 없어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눈치를 살살 보며 펭양이 순록 위에 올라탔다.
“순심아, 예주양이 이번에는 조용히만 하면 숨지 않고 쫓아가도 된대양.”
그러고는 대놓고 인간의 뒤를 쫓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푸르륵! 순록이 콧소리를 내며 펭귄의 말에 답했다.
한차례 감정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설원 위로 금세 적막이 찾아왔다.
그녀는 제 뒤를 바짝 쫓아오는 펭귄에게 신경을 끄고 새로 들어선 길을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물론 며칠 전 길을 나섰을 때와 별다를 바 없는 광경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눈과 변함없이 줄지어 우뚝 솟아 있는 앙상한 겨울나무들. 다른 점이라곤 방향뿐이었다.
그래도 온천욕이 효과가 있는 걸까. 앓다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설원을 헤맬 때에 비하면 훨씬 덜 추웠다.
몸도 가뿐하고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도 좋았다.
뒤에 따라오는 혹 두 개만 아니라면 더할 나위 없이 도망치기 좋은 날이었다.
이예주는 주위를 둘러보며 서두르지 않고 찬찬히 걸었다.
미리 아등바등 절벽을 올라 길을 봐 두길 잘한 것 같았다.
해가 저물기도 전에 막다른 길이 나왔던 초행길에 비해 서쪽으로 가는 방향은 딱히 길을 막는 요소도 없고 평탄했다.
뽀드득, 발밑에서 눈이 뭉개지는 소리, 가끔 바람에 흔들리며 아래로 후두둑 눈가루를 털어 내는 나무 소리를 벗 삼아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이예주가 마침내 숨을 고르며 멈춰 선 것은 끝도 없이 이어졌던 침엽수 숲에 조금의 변화가 생겼을 때였다.
반나절을 걷기만 해 피로하던 그녀의 기색이 달라졌다.
숲길에 끝이 보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 나무가 끝나는 지점이 존재했다.
“어, 어! 예주양!”
펭양이 아차 할 새도 없이 이예주는 남은 힘을 끌어모아 그쪽으로 뛰었다.
서쪽으로 뻗은 침엽수 숲이 이렇게 짧았던가?
뛰어가는 동안 이예주는 절벽에서 내려 본 숲을 떠올렸지만,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만큼이나 걸었으니 숲이 끝난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발에 박차를 가했다.
얼마 안 가 탁 트인 시야가 바람과 함께 이예주의 안면을 훅 덮쳤다.
“하, 하아. 허억…….”
거칠게 어깨를 들썩이며 이예주가 멈춰 섰다.
드디어 숲이 끝났나 보다고 일말의 기대에 환희하는 것도 잠시.
“흐. 이, 이게 뭐야…….”
그녀의 표정이 실망으로 빠르게 일그러졌다.
앞에 펼쳐진 것은 그저 평평하고 넓은 설원의 연장선이었다.
침엽수 숲의 끝이 맞기는 했다. 빌어먹을 나무가 없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것이었다.
눈이 잔뜩 뒤덮여 있는 널따란 평야를 지나, 이예주가 있는 쪽의 반대편에서는 다시 숲이 시작되었으니.
“예주양!”
등 뒤에서 펭양을 태운 흰 순록이 빠르게 다가왔다.
멈춰 선 순심이의 등에서 펭양이 폴짝 뛰어내렸다.
“여, 여기는 숲의 끝이 아니양…….”
그녀가 기대하고 실망하고 있던 것이 뭔지 꿰뚫어 본 듯 펭귄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멍하니 드넓은 허허벌판과 반대편 숲을 바라보던 이예주는 한참이 지난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긴 어디야?”
“숲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이 얼어붙어서 생긴 곳이양. 따듯한 시기가 오면 녹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꽝꽝 얼어 있어양.”
“…….”
“그래도 순심이랑 나랑 얼음을 깨 둔 곳이 있어서 그 구멍을 통해 들어가서 빙어도 잡고! 순심이 먹을 연어도 잡고 그래양! 예주양, 생선이 먹고 싶어?”
말만 하면 곧바로 뛰어들겠다는 듯 펭양이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이예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펭귄이 잡아다 준 생선을 구워 먹으며 한가롭게 노닥거릴 시간 따위 없었다.
실망으로 잔뜩 물든 그녀는 반대편에 다시 시작되는 숲을 노려보았다.
이 얼어붙은 강을 건너 또다시 언제 끝날지 모를 숲을 헤매고 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앞이 깜깜했다.
그러나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강물이 땅처럼 단단히 얼어붙고 그 위에 눈이 쌓인 이 지대는 땅보다 높이가 미묘하게 낮았다.
펭양의 부연 설명이 없었더라면 강이 얼어붙은 지대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후, 이예주가 길게 심호흡 하며 그 위로 주춤주춤 발을 내딛었다.
“헉. 예, 예주양. 강을 건널 거양?”
두 발이 모두 얼어붙은 강물 위에 안착했다. 펭양이 그런 그녀의 모습에 기함했다.
혹시나 그대로 빙판이 무너져 내릴까 두려워 발을 한 번 세게 굴러 본 이예주는 멀쩡한 바닥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응.”
“가, 가면 안 돼양! 강의 중간은 얼음이 얇아서 위험할지도 몰라양!”
까만 눈을 크게 홉뜬 펭귄이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그 말에 이예주는 잠시 빙판길을 돌아보았다.
두터운 눈이 잔뜩 쌓여 있어 지금껏 걸어왔던 땅 위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별로 그래 보이진 않는데.”
이예주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물론 펭양의 말처럼 강 한가운데는 위험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말에 노란 부리를 다무는 펭귄을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
강이 언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한동안 동공이 흔들리던 펭양이 다시 이예주를 설득할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 그리고 여긴 인간들이 가끔 출몰하는 곳이양. 나도 그래서 물고기 잡으러 올 땐 새벽 일찍 왔다가 후다닥 돌아간단 말이양…….”
펭귄은 이제 훌쩍이며 애원했다.
“우, 우리 너무 멀리까지 왔어양. 예주양, 우리 그만 돌아가면 안 돼양?”
“응, 안 돼. 이제 난 알아서 갈 테니까 넌 그만 돌아가. 안녕.”
이예주가 있던 정도 뚝 떨어질 만한 인사를 하고는 차갑게 뒤로 돌았다.
결심한 듯 걸음을 부지런히 옮기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에 안절부절못하던 펭양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힝, 힝. 그, 그럼 같이 가양!”
앞뒤 가릴 것 없이 펭양은 강물 위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순심이에게 당부했다.
“순심아, 여기 잠깐 있어양!”
푸르륵, 순심이는 콧김을 한 번 훅 내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랜 시간 강물 위에 두텁게 얼어붙은 빙판은 바위보다 단단했지만, 펭양은 단 한 번도 이 위를 걸어 반대편 숲까지 도달해 본 적이 없었다.
인간들이 종종 먹이를 구하기 위해 강이 있는 깊숙한 숲까지 출몰하곤 했다.
그래서 가끔 정말 어쩔 수 없이 반대편 숲 가까이 갈 일이 생기면, 사냥을 위해 미리 뚫어 놓은 구멍으로 들어가 두꺼운 빙판 아래를 헤엄쳐 갔다.
“예주양! 조, 조금만 천천히……!”
자신이 뒤쫓든 말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인간 여자의 뒷모습은 한기가 폴폴 전해질 만큼 너무 냉정했다.
짧은 다리를 쉼 없이 옮기며 뒤쫓는 펭양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 차올랐다.
그때였다. 거침없이 강의 중앙을 향해 걸어가던 이예주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예, 예주양. 왜 그래양?”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웅? 무슨 소리?”
이예주는 석연치 않은 얼굴로 휙휙 주위를 둘러보았다.
잘못 들었나? 이예주는 불쑥 고개를 돌려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직 강줄기의 중간에도 한참 미치지 못한 곳에 서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눈밭 위에 새하얀 순록이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아무도 없는데 순록이 기다란 목을 바짝 든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려하게 솟은 흰 뿔 옆의 귀가 위로 쫑긋 섰다.
뭔가를 느낀 것 같았다. 방금 전의 이예주처럼.
그녀는 순록이 바라보고 있는 쪽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강을 건너 반대편으로 갈 생각만 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
자신과 펭양이 있는 곳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곳이 칼로 자르듯 뚝 끊겨 있었다.
강줄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은 아닌 듯싶었다. 저긴 뭐지?
“……절벽?”
“예주양?”
펭양이 길이 끊어진 곳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이예주를 불렀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한 발자국 움직였을 때였다.
캥! 캐앵―!
“헉.”
이예주와 펭양, 둘 모두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번에는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비명 소리와 흡사한, 날카로운 괴성.
아오오오―
이어서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밭 위에 조신하게 앉아 있던 순심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다음에는 펭귄이 먼저 이예주를 앞질러 뛰어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뛰던 펭양과 순심, 이예주는 설원의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어렴풋이 예상했던 것처럼 깎아지른 절벽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것은 높은 폭포였다.
아래로 쏟아지던 폭포 줄기가 허공에 얼어붙어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경치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폭포 아래 얼어붙어 있는 강의 하류, 그 위에 개와 비슷한 형태의 하얀 동물이 화살에 맞은 채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모습이 보였다.
아우, 아우우우―!
도움을 요청하듯 동물이 구슬프게 울었다.
화살이 두 대나 박힌 자리에서 뚝뚝 피가 떨어져 하얀 털과 빙판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힉! 여우양! 다쳤나 봐!”
펭양이 옆에서 숨넘어갈 듯 소리 질렀다.
귀가 짜리몽땅하고 다리도 개처럼 길쭉한데, 저게 여우라고? 이예주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핑―
숲 어딘가에서부터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와 여우의 근처에 박혔다.
그 주변에 작은 폭발이 일듯 눈이 팍 튀었다.
캐앵! 가까스로 몸을 피한 하얀 여우가 도망칠 생각은 않고 여전히 피를 질질 흘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왜 도망가지 않는 거지?”
그런 의문이 들 무렵 이예주의 눈에 여우의 뒤편, 숲이 보였다.
강과 근접한 땅 한쪽에 커다란 덫이 있었다.
그리고 덫 사이에 끼여 있는 작은 털 뭉치도.
갓 태어난 여우 새끼였다.
그를 눈치챈 건 펭양도 마찬가지인지 발을 동동 구르며 헐떡였다.
“어, 어떡해! 어떡해양! 주, 주인님을 불러와야 해양! 주인님을……!”
“여기서 기다려.”
“웅? 어디서…… 예, 예주양! 예주양!”
기다리라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이예주는 아래쪽에 튀어나온 바위 위로 훌쩍 뛰어내렸다.
펭양이 그것을 보며 기절할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