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40)화 (242/319)

*       *       *

펭양은 이예주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하수인처럼 온갖 것을 해 바쳤다. 

며칠 전의 빙어 구이처럼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솥에 곡물을 넣고, 또 어디선가 직접 잡아온 생선을 척척 손질해서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척척은 아니었다. 

몇 번이나 불안한 모양새를 반복했는데 그 때마다 ‘도와줄까?’ 묻는 이예주를 격렬히 거부했다. 

그렇게 힘겹게 완성된 요리를 그릇에 담아 든 펭양이 신나게 다가왔다. 

“인간들이 아플 때 먹는 거양.”

제 앞에 내밀어진 그릇 안에 희멀건 죽이 가득 담겨 있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펭양은 나무를 대충 깎아 만든 듯한 숟가락 두 개를 짠 하고 꺼내 들었다.

“예주양 거 하나, 내 거 하나.”

이예주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 준 펭양은 제 몫의 죽을 와구와구 퍼먹기 시작했다. 

펭귄이 이런 곡물 죽을 먹어도 될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숟가락이 필요 없을 만큼 그릇에 부리를 박고 먹어 대는 펭양의 모습에 이예주도 죽을 한 숟가락 퍼서 먹었다.

부드럽게 익은 생선 살이 씹혔다. 

펭양이 직접 잡아온 생선으로 만든 죽은 간을 하지 않아 밋밋하고 비렸다. 

하지만 며칠 굶어서인지 꽤 먹을 만했다. 

펭양은 죽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그릇째로 솥에 담가 두 번째 죽을 펐다. 

죽이 뚝뚝 흐르는 것에 눈살을 찌푸리던 이예주가 입을 열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가져오는 거야?”

“우움, 그건 주인님이…… 헙!”

죽을 마시듯 들이키던 펭양이 지나가듯 물은 말에 대꾸하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탓에 부리에 잔뜩 묻어 있던 죽이 허공으로 후두둑 튀었다.

이예주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애처롭게 자신을 쳐다보는 까만 눈에 못 이겨 짧게 한숨 쉬었다.

“됐어, 마저 먹어. 더 안 물어볼 테니까.”

별게 다 비밀이네, 진짜. 

이예주는 속으로 빈정거렸다. 

하지만 다시 먹으란 말에 정말로 눈치 없이 그릇에 코를 박는 펭귄을 보니 어쩐지 허탈해졌다. 

가만 보면 혼자서 열 받았다가 푸시시 식는 것이 반복되는 것 같았다. 

며칠을 굶은 것 같은 펭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는 이내 자신의 죽 그릇으로 관심을 돌렸다.

입맛이 썩 돌지 않았지만 요리를 해 준 펭양의 성의를 두 번이나 거절하기도 미안했다. 

이예주는 다시 수저를 들어 멀건 죽을 떠먹었다. 

“한 그릇 더 줄까양?”

그릇이 바닥을 보일 때쯤 펭양이 문득 귀신같이 물었다. 

손을 내미는 펭양을 멀뚱멀뚱 보다가 이예주는 물었다.

“국자는…… 없어?”

왜 비위생적으로 솥에 먹던 그릇을 넣어 죽을 퍼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러나 펭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게 뭐양?”

“아니야. 배불러서 더 안 먹어도 돼. 잘 먹었어.”

“웅!”

이번엔 남기지 않고 빈 그릇을 내미는 인간 여자의 모습에 펭양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동했다. 

이로써 이예주는 한 가지 사실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펭양이 생필품이나 요리 도구 등을 공수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이 펭귄 녀석은 인간 생활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펭양은 이후 한 번 더 죽을 퍼먹은 후 행복한 얼굴로 식사를 마쳤다. 

“예주양, 우리 이제 뭐 하고 놀 거양?”

펭양이 까만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뭐하고 놀 거냐고? 어지간히도 태평한 그 물음에 이예주는 기가 막혔다.

앓아눕기 전, 그녀가 숲을 빠져나가기 위해 길을 찾아다녔던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것인가. 

하지만 잊어버린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펭양은 “웅? 웅?” 하고 계속 답을 채근했다.

“좀 씻고 싶은데.” 

이예주는 대답을 회피하며 눈을 떴을 때부터 느꼈던 불쾌함과 찝찝함에 대해 토로했다. 

“웅? 씻어?”

“응. 땀이 많이 나서 그런지 찝찝해. 여기 뭐 씻을 데라든가 물 있는 곳 없어?”

그 말을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펭양의 노란 부리가 위로 활짝 벌어졌다.

“예주양…….”

“왜, 왜 또…….”

“물놀이가 하고 싶었던 거구나! 그럼 진작 말하지 그랬어양!”

펭양이 두 날개를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마치 ‘지금부터 파티 시작이야!’ 같은 행동을 취했다. 

그녀가 부인하기도 전에 펭귄은 도도도도 뛰어가 동굴 한구석에 박혀 있던 이예주의 로브를 끌고 왔다. 

“펭양이가 자주 가는 곳으로 안내해 줄게양! 동굴 바로 뒤편이양! 얼른 일어나양!”

“아니. 물놀이 아니야, 잠시만……!”

“얼르은!”

그렇게 이예주는 작은 펭귄에게 질질 끌려 반강제로 동굴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며칠 전 동굴을 나설 때와는 달리 몇 줄기의 햇살이 숲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차가우면서도 깨끗한 아침 냄새가 코 밑을 간질였다. 

얼음 동굴은 고지대에 위치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숲의 정경이 나쁘지 않았다.

펭양의 말대로 씻을 만한 곳-물놀이 할 곳-은 동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다. 

입구 주변에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을 헤치고 동굴이 자리한 언덕의 반대편으로 빙 돌아가니 놀랍게도 뭉실뭉실한 수증기가 이예주를 맞이했다.

눈이 빼곡하게 쌓인 나뭇가지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예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김의 출처는 설원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못이었다.

“……온천?”

빽빽한 침엽수들과 그 밑에 쌓인 눈 한가운데, 연기가 피어오르는 웅덩이. 

“이런 곳에 무슨 온천이 다 있지?”

“온천이 뭐양?”

펭양이 콧노래를 부르듯 즐거이 되물으며 뒤뚱뒤뚱 나아갔다. 

“얼른 이쪽으로 와양! 같이 신나게 놀자구양!”

날개를 퍼덕이며 연신 그녀를 재촉하는 펭귄의 모습에 이예주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따라 옮겼다. 

일본에도 이렇게 설원 한가운데 있는 온천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녀는 온천도, 일본도 가 본 적이 없어 무척 신기했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이예주가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눈과 못 사이엔 작은 절벽이 존재하듯 경계가 극명했다. 

“……여긴 주인님께서 가끔 휴식하시는 곳이양.”

펭양이 답지 않게 조금 뜸을 들인 후 답했다.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듯 목소리가 한층 작아졌다.

“사실 주인님이 안 계실 때마다 몰래 물놀이하러 왔어양. 순심이는 차가운 물엔 못 들어가니까양…….”

“……”

“순심이 말고 여기 데리고 온 건 예주양이 처음이양! 주, 주인님한텐 절대, 절대 비밀이양!”

이예주는 대답 없이 입고 있던 포대 자루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솔직히 반가웠다. 얼음장 같은 물에 손을 담가 씻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했었다. 

“웅? 웅? 약속해양! 주인님이 여긴 함부로 들어오지 말랬단 말이…… 꺅!”

말없이 옷을 벗는 동안 계속 조잘대던 펭양은 이예주가 안에 입고 있던 내의마저 휙 벗으려 들자 비명을 지르며 양 날개로 눈을 가렸다.

“뭐, 뭐하는 거야, 예주양?”

“씻으려면 옷 벗어야지. 그러는 너야말로 뭐 하는데?”

“그, 그…… 그렇게 갑자기 훌렁훌렁 벗으면…… 부, 부끄럽잖아양.”

“뭐가 부끄러운데? 옷 입고 물에 들어갈 순 없잖아.”

이예주는 바지까지 마저 훌훌 벗어 내렸다. 

펭양은 두 날개 끝에 얼굴을 파묻고 대놓고 부끄럼을 탔다.

“그, 그렇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순심이 이외에 아무한테도 속살을 보여 준 적이 없어서양…… 조, 조금 마음의 준비가…….”

“넌 지금도 발가벗고 있잖아?”

“……응?”

이예주의 대수롭지 않는 어투에 펭양이 눈을 가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펭귄의 충격받은 얼굴을 미처 보지 못한 그녀는 쐐기를 박았다.

“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벌거벗고 있었어. 가릴 것도 없구만 새삼 이제 와서…….”

“힝! 예, 예주양 너무해양!”

펭양은 수치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지르며 온천에 몸을 던졌다. 

“……쟤 왜 저래?”

홀로 남은 이예주는 펭양의 과민 반응에 입술을 삐쭉이다가 찬 공기에 닿은 피부에 닿아 선득해지자 얼른 뒤따라 온천 안으로 들어갔다.

*       *       *

정말로 물놀이를 온 듯 펭양은 한쪽에서 물장구를 쳤다. 

그와 달리 이예주는 성공적으로 온천욕을 마쳤다. 

물에 무슨 좋은 성분이 들어 있는 건지, 목용용품 없이도 땀으로 젖어 꿉꿉하고 기름졌던 몸이 깔끔하게 씻겼다. 

신기한 기분으로 뽀득뽀득한 머리를 매만지던 이예주는 물이 닿지 않은 넓적한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몸을 말리며 홀로 놀고 있는 펭양을 구경했다.

그새 토라진 것이 풀어진 펭귄은 저 혼자서 첨벙첨벙 자맥질을 하며 재밌게도 놀았다. 

그 모습이 참으로 즐겁고 행복해 보여 이예주마저 비죽 미소 짓고 말았다.

“예주양! 이거 봐라! 고래양!”

배영 하듯 물 위에 둥둥 뜬 펭양이 입에 물고 있던 물을 허공에 내뿜었다. 

그러고는 이예주가 있는 쪽을 향해 낑낑대며 고개를 돌리곤 환히 웃었다. 

한껏 휘어진 펭양의 노란 부리, 티 한 점 없이 해맑은 그 얼굴을 보던 이예주는 불현듯 자신의 처지가 떠올랐다. 

“아.”

지금 내가 감시 목적으로 남자가 보낸 신인류와 한가로이 웃으며 물장구를 칠 땐가.

이 시간에도 알리자린은 자신을 기다리며 피가 바짝바짝 말라 갈 것이다. 

당장 이 숲에서 빠져나가 산 정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저 펭귄과 그 주인의 입에서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예주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 자리를 울 것처럼 왈칵 일그러진 표정이 대신했다. 

재롱을 피우는 아가처럼 몸을 요리저리 뒤집던 펭귄이 하던 놀음을 멈추고 물었다.

“예주양, 왜 그래양?”

이예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벗어 두었던 옷가지 쪽으로 걸어갔다. 

“예주양? 예주양?”

당황한 펭양이 물살을 헤치고 빠르게 헤엄쳐 왔다. 

이예주는 물기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몸에 억지로 옷을 껴입었다. 

그리고 물에 뜬 채로 애처롭게 자신을 바라보는 펭양에게 냉정하게 말한 후 서둘러 뒤로 돌았다.

“추워서 먼저 들어갈게. 더 놀다 와.”

“예, 예주양! 잠깐만! 가, 같이 가양!”

갑자기 돌변한 인간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기는커녕 쫓아오려는 펭양을 뒤로한 채 이예주는 동굴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나무 사이를 마구잡이로 걷던 그녀는 물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만큼 온천에서 멀리 떨어진 후에야 비로소 발을 멈췄다.

“하…….”

이예주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묻은 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껏 열심히 병간호를 하고 요리도 해 준 펭양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하지만 한편으론 결국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아 자신한테 잘해 주는 거라는 생각이 들 때면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치솟았다. 

“후. 정신 차려, 이예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손바닥 뒤집듯 마음이 뒤집히는 자신에게 환멸이 일었다.

그녀는 얼굴을 감쌌던 손으로 두어 번 가볍게 제 볼을 내리치며 자신을 일깨웠다. 

그 남자와 마주치기 전에 숲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는 자신이 앓던 와중 동굴을 들락날락 거린 눈치였지만, 무슨 생각인지 아직까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하기야 바쁘기도 하겠지. 자신을 이용해서 여준을 잡았으니 기세를 몰아 비행선까지 갔을지 알 게 뭐란 말인가. 

이예주는 조금 우울한 얼굴로 멈췄던 발걸음을 재개했다. 

그나마 만만한 펭양만 있을 때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상황은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헐레벌떡 뒤쫓아 온 펭양이 저를 잡기 전에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한 이예주는 뜻밖의 상황에 돌입하게 되었다. 

동굴 입구에서 다시 만난 펭양은 밖을 나서는 그녀를 말리지 않고 끔뻑끔뻑 바라보기만 했다. 

그도 모자라 당당하게 걸어와 옆에 붙어 섰다. 

허, 기가 막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이젠 아예 대놓고 따라오기로 했나 봐?”

“응? 응?”

“어젠 못 가게 막았잖아. 네 주인이 분명 나가는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녀는 펭귄에 대한 배려 없이 내리막길을 빠르게 내려가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펭양이 시무룩하게 답했다.

“주인님은 그런 명령 안 하셨어양…….”

퍽이나. 비꼬는 음색이 튀어나올까 봐 이예주는 잠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펭양이 그보다 더 환장할 소리를 덧붙였다.

“오히려 다 아픈 게 낫기만 하면 예주양이 놀러 나가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라고 하신걸양.”

“……놀러?”

인간 여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표정이 싹 사라진 얼굴을 돌리자 펭양이 흠칫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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