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예주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저 혼자면 모를까, 자신을 따라 나온 이 떨거지들은 어떻게든 되돌려 놔야 했기 때문이다.
그 미친놈의 극렬한 진노와 혐오를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괘, 괜찮은 거양?”
펭양이 그런 그녀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이예주는 가까스로 답했다.
“응, 괜찮아. 그러니까 빨리 쫓아와.”
“어, 어…… 웅!”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것이 고역이었으나 이예주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쫓아오지 말란 말 대신 재촉을 하자 펭귄이 신이 나서 뛰어왔다.
푸르륵, 흰 순록이 몸을 털며 그 뒤를 따랐다.
“그, 그런데 예주양, 갑자기 절벽은 왜 오른 거양?”
인간 여자를 열심히 쫓아가며 펭양이 이유 모를 그녀의 기행에 대해 물었다.
그토록 높은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맨손으로 잡고 올라갈 생각을 하다니.
몇 번이나 위험천만한 고비를 겪으며 절벽을 오르내리던 인간 여자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했다.
답을 기다렸지만 그녀에게 되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인간 여자는 주인에게 전해 듣던 것에 비해 무척 냉정하고 과묵한 편이었다.
“……펭양은 잘 모르겠어양. 예주양은 조금 이해하기 힘들어양. 우, 우리가 아직은 만난 지 얼마 안 되서 그런 거지양?”
“……”
“내가 예주양한테 길을 안내해 주려고 했는데양…….”
시무룩한 표정으로 펭귄이 덧붙였다.
말없이 걸음을 걷던 이예주는 그제야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가 길을 알려 주지 않았잖아.”
“아니양! 진짜 알려 주려고 했어양!”
펭양은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속마음과 억울함을 토로하기를.
“그런데 예주양은 그, 그냥 산책하러 나온 게 아니라……”
“…….”
“그니까…… 꼭 숲에서 빠져나가려는 사람처럼 그러니까양…… 펭양은 예주양이랑 같이 숲을 돌아다니면서 놀고 싶었는데양…….”
“맞아.”
불현듯 이예주의 바쁜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로 인해 발만 보고 쫓아가던 펭양은 그녀의 무릎에 쿵 하고 머리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아얏!”
뒤로 나동그라질 뻔한 펭양이 날개를 퍼덕여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걸음을 멈춘 인간 여자가 휙 뒤로 돌았다.
“웅?”
작은 펭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멈추는 거양?’ 하고 묻기도 전에 이예주가 싸늘하게 진실을 내뱉었다.
“숲에서 나가려고 이러는 거야.”
“…….”
“지금 나와서 걸어 다니는 것도, 절벽을 오른 것도 모두 이 망할 숲에서 빠져나가려고 그러는 거라고.”
펭양을 내려 보고 있는 이예주의 얼굴은 더없이 차가웠다.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낯빛, 손이라도 닿으면 그대로 얼어붙을 것처럼 서늘한 시선으로 절벽에 오른 이유를 말하던 그녀는.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 친근하게 굴 필요 없어. 어차피 곧 헤어질 사이니까.”
마지막 말을 끝으로 거짓말처럼 풀썩 쓰러졌다.
어떻게 얼음 동굴로 되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도장 찍듯 시린 눈밭 위로 아낌없이 얼굴을 처박았던 것 같은데, 다시 눈을 뜨니 높다란 얼음 천장이 보였다.
얼음 동굴로 되돌아왔구나.
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이예주는 이틀씩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펭양의 말을 무시했던 걸 죽도록 후회할 만큼 내리 앓았다.
온몸에서 용암 같은 신열이 펄펄 들끓었다.
차라리 얼음 동굴을 나와 싸돌아다니기 이전에 아팠을 때처럼 정신이라도 잃으면 고통도 없을 텐데.
그러나 한 번 깨어난 그녀의 정신은 치열하게 의식을 붙들었다.
덕분에 이예주는 온몸을 불사르는 것 같은 뜨거움과 벌거벗은 몸뚱이를 얼음물에 쑤셔 박는 것 같은 차가움, 두 간극 속을 번갈아 오가며 몸부림쳤다.
하, 망할. 아주 잠깐씩 고통이 가시고 조금 정신이 들 때마다 이예주는 작은 소리로 욕을 중얼거렸다.
아니, 과연 작은 소리였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동굴 안이 쩌렁쩌렁 울려 퍼질 만큼 커다란 소리로 쌍욕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적으로, 진짜 너무 아팠다.
딱히 어디가 아프다고 짚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2017년 현대에 살 때 이렇게 아팠던 적이 있을까.
하지만 생각을 이을 수도 없이 곧바로 엄습하는 통증 때문에 이예주는 엉엉 울었다.
짜증 나. 짜증 나.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데 왜 아파야 돼. 왜 나만, 왜 매번 나만 이렇게 최악의 패를 뒤집어야 하냐고.
“어떡해양! 예주양, 허엉엉! 어떡해양!”
짐승 같은 울부짖음에 펭양이 난리법석을 떠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것이 환청인지 실제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실은 열이 펄펄 끓는 자신의 몸뚱어리를 대충 동굴 구석탱이에 던져 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러고선 아픔에 겨워 울음을 터뜨린 자신을 아낌없이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게 주인님의 명령도 듣지 않고 기어 나가더니 꼴좋다. 네까짓 게 해 봤자 뭘 얼마나 하겠어.
넌 저주받은 음침한 마녀고 괴물이야. 찬바람이 송곳같이 찌르는 남쪽 대륙을 어디 한번 기어서 나가 보라지…….
수학여행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예주를 좀먹던 속삭임이 다시금 귓가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싫어, 아니야. 듣기 싫어서 귀를 막고 싶은데, 팔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수렁이 갈작 갈작 발끝부터 다리를 타고 몸을 갉아 먹으며 점점 위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면 깊은 늪 속으로 머리채가 잡힌 채 질질 끌려가고 있던가. 그도 아니면…….
“예주야.”
어디로든 점점 몸을 빼앗기던 그때, 이예주를 붙잡는 듯한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시원하면서도 청량한 감각이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혀 위에서 몽글거리던 그 감각들은 삼키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목구멍 저편으로 넘어갔다.
그러더니 쏜살같이 이예주의 온몸, 장기, 혈관,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몸속을 휘저어 대듯 감각들이 지나갈 때마다 그 자리에 고통 대신 시원한 감각이 뭉클 차올랐다.
천길 같은 지옥 속을 헤매다가 구원으로 해방되는 그 느낌이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통증이 가시자 이예주는 힘겹게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시뻘겋게 빛나는 두 동공이 보였다.
자신을 내려 보고 있는 남자의 눈동자는 이예주가 익히 알던 그 눈동자가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혐오와 분노로 점철되지 않은 그의 눈동자는 믿기지 않게도…… 걱정과 불안, 다정함을 한데 모아 담은 듯했다.
“왜…….”
“응?”
입술을 달싹이자 남자가 손을 뻗어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 올려 주었다.
입을 통해 몸 안으로 쏟아졌던 오묘한 감각처럼 남자의 손이 닿은 이마가 시원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 남자가 나를 이렇게 바라볼 리가 없는데. 믿기지 않아서, 그녀는 그냥 꿈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메마른 땅처럼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예주는 그럼에도 억지로 소리를 끌어내었다.
어차피 꿈이니까. 현실에선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을 거니까.
“내가…… 내가 뭘 포기했는데.”
“…….”
“……내가 뭘 포기하고 당신에게 돌아간 건데.”
절대로 이야기해 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위해 포기한 것이 뭔지.
하지만 한편으론 간신히 남자에게 털어놓자고 마음먹었던, 그 꽁꽁 숨겨 둔 비밀을, 진실들을 이제 영영 털어놓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더럭 서글퍼졌다.
“나한테 왜 그렇게 가혹하게…….”
굴었어. 이 나쁜 새끼야.
뒷말을 분명하게 전했는지, 안 전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일순 눈앞이 까무룩 해지더니 이예주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 * *
반짝 눈이 떠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불구덩이 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 같은데, 눈을 뜨니 거짓말처럼 정신이 맑고 몸이 가뿐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이예주는 가볍게 상체를 들어 올렸다.
툭, 위에서 무언가가 모포 위로 떨어졌다. 작고 하얀 천이었다.
이게 뭘까. 이예주는 별생각 없이 손을 뻗어 그것을 매만졌다.
축축한 물기가 묻어 나왔다.
물수건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얼음 동굴이었다.
분명 기억이 끊기기 직전까진 눈밭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여기까지 옮겨진 거지?
이예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곰곰이 행방을 되짚어 볼 때였다.
딸그랑!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렸다.
흠칫 시선을 틀자 작달막한 펭귄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동굴 입구 쪽에서부터 뒤뚱뒤뚱 뛰어왔다.
“예, 예주양!”
펭양의 표정은 마치 몇 년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사람이 하루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을 본 듯했다.
까맣고 반질반질한 눈동자에 온갖 걱정이란 걱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이예주는 그리 길지 않은 거리를 짧은 다리로 열심히도 달려오는 펭귄과 바닥에 내동댕이친 놋대야를 번갈아 바라보다 짧게 혀를 찼다.
자신에 대한 걱정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예주양, 괜찮아양?”
“…….”
“그, 그렇게 마구 움직이면 안 돼양! 오랫동안 아팠단 말이양.”
펭양이 짧은 날개를 뻗어 모포 위로 떨어진 물수건을 들어 이예주의 이마 위에 허겁지겁 올려 주었다.
물수건은 그대로 스르륵 이예주의 얼굴을 훑고 다시 철썩 아래로 떨어졌다.
힝, 펭양은 그 짓을 그로부터 두 번 더 반복한 후에야 인간 여자가 앉아 있는 한 물수건은 계속해서 떨어지리란 것을 깨달았다.
얼른 다시 누우라고 종용하는 펭귄의 미약한 손길에 이끌려 이예주는 자리에 순순히 도로 누웠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이예주는 꼬물꼬물 모포를 목 아래까지 끌어당기며 물었다.
‘웅?’ 하고 펭양이 사랑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절벽 아래 서 있었잖아.”
“나흘 전에?”
“나흘……?”
나흘이라고? 나흘간이나 앓아누웠단 말이야?
이예주는 방금 못 들을 것을 들은 사람처럼 눈살을 꿈틀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펭양은 그녀와 함께 얼음 동굴에 돌아오기까지의 경위를 순순히 털어놓았다.
“예주양이 갑자기 쓰러져 버려서 순심이 등에 업혀 왔잖아양! 걷기 힘들 정도로 아팠으면 절벽 내려오자마자 말하지! 펭양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양?”
“…….”
“순심이도 깜짝 놀라서 동굴 쪽으로 완전 빨리 달렸어양. 나 혼자 예주양을 순심이 등 위에 붙잡아 놓는 것이 힘들어서 바닥으로 몇 번 떨어진 적은 있는데 그래도 별로 안 다쳤…… 헙! 이, 이건 비밀인데양!”
펭양이 조잘대다가 두 날개로 화다닥 제 노란 부리 끝을 가렸다.
그러나 이예주의 미간이 완전히 일그러진 후였다.
미친. 어쩐지 단순 감기 몸살치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더라.
겅중겅중 뛰어 다니는 순록 위에서 떨어져 바닥에 여러 번 처박히는 게임 캐릭터 같은 제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힝. 갈아 줄 물을 가져왔는데 다 쏟아 버렸어양.”
그러나 이예주가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놋쇠 그릇을 바라보며 울먹이는 펭양을 보자, 차곡차곡 차오르던 분노는 푸시시 사그라졌다.
그녀는 마침내 인정했다. 이게 바로 펭양과 조롱이의 차이라는 것을.
“……괜찮아.”
이예주는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펭양을 달랬다.
“이제 열 안 나니까 물수건 올리지 않아도…….”
한 손을 올려 거칠거칠한 제 볼을 쓰다듬던 그녀는 문득 위화감에 퍼뜩 얼굴에서 손을 떼고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주먹을 쥐어 손끝을 확인하고 휙 손을 뒤집어 손등 또한 확인해 보았다.
아기가 죔죔 하듯 이리저리 손을 움직여 보았지만 똑같았다.
분명 거친 절벽을 기어오르느라 너덜너덜해졌던 손이, 손톱 끝이.
“손이…… 손이 다 나았어.”
“웅?”
“손이…… 상처가 다 나았다고.”
정말이었다. 마치 다친 적도 없었던 것처럼 상처투성이었던 손이 멀쩡했다.
이예주는 애써 펭양이 물수건을 올려 준 노력이 무색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손으로 온몸을 더듬었다.
끙끙 앓았던 기억이 선명했다. 온몸이, 장기 하나하나가 끔찍하게 불타올랐던 통증.
하지만 거짓말처럼 고통과 통증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예주는 그제야 떠올랐다.
눈을 반짝 떴을 때, 긴 단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몸이 가뿐했다는 사실을.
“예주양, 왜 그래양?”
물이 엎어진 바닥을 대충 정리하려던 펭양이 심상치 않은 인간 여자의 행동거지에 다시 뒤뚱뒤뚱 다가왔다.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뤼미에르 꽃밭이 있던 산 중턱, 산장에서 자고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
동쪽 대륙에서 살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느라 생겼던 상처들이, 자고 일어나자 말끔히 사라졌다.
왜 그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일까.
자신의 능력은 위험을 회피하는 기능만 있을 뿐 상처를 감쪽같이 치료하는 능력은 없었다.
“왜 그래양? 어, 어디 또 아픈 거양? 웅?”
“…….”
“헥! 예, 예주양. 왜…… 왜 울려고 하는 거양.”
작은 손으로 걱정스럽게 자신의 팔을 토닥이는 펭귄에게 이예주는 물어볼 수 없었다.
앓아누워 있었다던 지난 나흘간, 그 남자가 자신을 찾아왔냐고. 그래서 자신을 치료해 준 것이냐고.
이상하게 더럭 겁이 나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그래서 끝내 물어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