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하.”
하얀 입김을 쏟아 내며 이예주는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괜찮아양?”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이예주의 모습에 펭양이 깜짝 놀라 순록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어디 아픈 거양? 웅? 웅?”
모포 위에 분가루처럼 눈이 수북하게 묻어 이예주는 원치 않아도 눈밭을 뒹군 형태가 되었다.
펭양이 두 날개로 정신없이 눈을 털어 주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예주는 지친 눈을 들어 제 앞을 막아선 절벽을 바라보았다.
깎아지른 바위, 그 틈새를 빡빡하게 메운 얼어붙은 눈 덩어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벼랑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기껏 몇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는데,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이다.
“하…….”
가쁜 숨이 입술 새를 타고 흘러 나왔다. 이제 한계였다.
미친놈의 밑에서 구르고 기며 체력이 좀 단련되었나 싶더니, 별로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절벽을 돌아 다른 길로 갈 힘도, 다시 얼음 동굴로 되돌아갈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눈 덮인 절벽을 노려보며 이제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던 찰나였다.
“도, 동굴로 돌아가양. 많이 힘들면 순심이 등에 타서 같이 가양. 응? 같이 돌아가양.”
모포 자락을 잡아당기는 미미한 손길이 느껴졌다.
휙 고개를 돌리자 흠칫 물러서는 펭귄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싸늘하게 식었던 몸에 확 불이 솟아올랐다.
“……그러니까 애초에 네가 길만 알려 줬어도……!”
안내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숲의 끝으로 향하는 방향이 어딘지만 알려 줬어도 혼자 알아서 어떻게든 갔을 텐데.
고작 막다른 곳에 이를 동안의 시간도, 체력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
분노의 화살이 펭양에게로 돌아가자 이예주의 눈초리가 사나워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있는 대로 짜증을 내려던 그녀는, 문득 펭양의 모습을 발견하고 열었던 입을 도로 다물었다.
작은 펭귄은 제게로 쏟아질 역정이 두려워 두 눈을 꾹 감은 채 목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뭉툭한 손을 힘껏 접어 말아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이예주의 화를 모두 감내하겠다는 듯한 모습에 달아올랐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조롱이었다면 그게 왜 내 잘못이냐고 적반하장으로 반박했을 텐데.
이 바보 같은 펭귄은 엄한 화풀이조차 구분하지 못할 만큼 너무 순해 빠졌다.
말없이 펭양을 내려다보던 이예주의 얼굴이 순간 울 것처럼 와락 일그러졌다.
그러나 펭귄이 한참이 지나도 떨어지지 않는 역정에 슬그머니 눈을 떴을 때, 그녀에게서 그런 표정은 말끔히 지워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이예주는 불현듯 모포를 내팽개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펭양이 채 잡을 새도 없이 절벽 쪽으로 달려갔다.
“예, 예주양! 어디 가양!”
뒤에서 당황한 펭양이 이예주를 여러 번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별안간 꽝꽝 언 바위를 움켜쥐고 절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예주양! 위험해양! 위, 위험해양!”
뜬금없는 인간 여자의 기행에 펭양이 비명 지르듯 소리쳤다.
도도도 절벽 앞까지 도달한 펭귄은 이예주를 쫓아가기 위해 바위를 잡고 기어오르려 들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통통하고 짧은 몸은 폴짝폴짝 제자리 뛰기만 할 뿐 좀체 바위를 오르지 못했다.
이예주는 기함하는 펭양의 부름에도 대꾸 없이 바득바득 절벽을 기어올랐다.
위로, 더 위로 오르기 위해 빽빽하게 눈이 쌓인 바위 틈새로 손가락을 쑤셔 넣자 칼에 베이는 것처럼 시리고 따가운 감각이 손끝을 쑤셨다.
“흣!”
저도 모르게 손을 뗄 뻔했던 이예주는 이를 사리물고 간신히 충동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다리를 끌어 올려 좀 더 높은 곳으로 발을 옮겼다.
칼바람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그녀의 얼굴, 손, 드러난 피부들을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라가기 위해 왼손을 최대한 뻗어 튀어나온 바위 끄트머리를 아득 움켜쥐었다.
틈틈이 눈이 끼어 있는 돌덩이는 차갑고 미끄러웠다.
손톱을 세워 잔뜩 힘을 주었지만, 다음 디딜 곳으로 발을 옮기기도 전에 잡고 있던 손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아찔함이 눈앞을 이지러뜨렸다.
“아!”
떨어진다.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이예주의 몸이 속수무책 떨어지던 찰나였다.
턱.
아슬아슬한 순간에 그녀의 엉덩이가 단단한 무언가로 받쳐졌다.
로브 밑에서 무언가 딱딱한 물체가 엉덩이를 찔렀다.
“하, 하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시선을 내리자 눈 덮인 고목의 나뭇가지처럼 하얗고 웅장하게 솟은 뿔이 보였다.
까만 눈이 제 뿔을 깔고 앉아 있는 인간을 향해 도로록 올라갔다.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고, 고마워.”
푸르륵. 마치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순록이 콧김을 한 번 푹 내쉬었다.
오래 살아서 말을 다 알아듣는다고 했던가.
이예주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여전히 순록의 뿔 위에 앉아 있다가 “예주야앙! 이제 그만 내려와양!” 하고 울부짖는 펭양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열심히 오른 보람이 있는지 이예주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절벽은 순록의 기다란 목과 뿔보다 조금 더 높이 위치해 있었다.
자신이 떨어지는 꼴을 보고 황급히 바위 위로 뛰어오른 건가. 이것도 그 남자의 명령에 속하는 걸까?
하지만 그 덕에 이예주는 원래 발을 디디려던 바위로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다시 만지고 싶지 않은 싸늘한 눈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던 그녀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신은 인간인데 순록과 펭귄은 왜 아무런 적대감을 보이지 않는 걸까?
이예주는 그 후로 더 이상 밑을 내려다보지 않고 무조건 위로 높이,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랐다.
딱딱하고 거친 암석 표면은 여린 피부를 쉽게 찢고 상처 내었다.
벌겋게 얼어붙은 손에 하나둘 생채기가 늘어났다.
미끄러져 추락할 뻔한 고비가 몇 번이나 찾아왔다.
더 이상 순록도 뛰어올라 뿔로 받쳐 줄 수 없을 위험천만한 높이였다.
떨어지면 그대로 고꾸라져 딱딱한 바위에 머리부터 처박힐 것이리라.
고소공포증에 대한 두려움이 두피를 타고 엄습할 때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숨을 죽여야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손과 발로, 이예주는 끝내 아득바득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
“하, 흐으! 하아!”
마침내 처음 목표했던 판판한 봉우리에 손이 닿았다.
발을 디딜만한 곳이 없어 두 팔에만 의지한 채 매달리자 저 멀리 아래에서 대경실색하는 펭양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으으윽!”
이예주는 젖 먹던 힘까지 끌어 올려 직각에 가까운 암벽 위로 발을 굴렸다.
가까스로 그녀의 상체가 벼랑 위에 털썩 얹어졌다.
“흑, 허억. 흐윽, 시발…….”
빙판이 볼에 달라붙었다.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살갗이 따가웠지만, 그녀는 쉽게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이게 진짜 무슨 개고생이야.
체력장을 막 끝냈을 때처럼 심장이 쿵쿵 정신없이 뛰고, 목 뒤로 식은땀이 질질 삐져나왔다.
TV에서나 보던 암벽 등반을 했다.
안전장치 하나 없이, 눈이 잔뜩 덮인 까마득한 절벽을. 미친 짓이 따로 없었다.
“하…… 하아…….”
한참을 그렇게 벼랑 끝에 걸쳐진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던 이예주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끄응, 하고 나머지 하체도 봉우리 위로 끌어 올렸다.
한참을 올라왔다고 생각했으나, 그녀가 있는 곳에서도 절벽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도 죽을 동 살 동 올라왔는데, 끝까지 오르는 것은 죽으려고 환장한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다.
이예주는 이 벼랑을 마저 기어올라 길을 개척하겠단 말도 안 되는 생각 따위는 깔끔하게 지웠다.
그리고 제가 거꾸로 오른 낭떠러지를 둘러보았다.
밑에서 올려다볼 땐 몰랐는데, 생각보다 폭이 좁았다.
두 손으로 벽을 꽉 부여잡고 엉거주춤 일어난 이예주의 몸을 매서운 바람이 쌩쌩 내리쳤다.
한 손으로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부여잡은 그녀는 먼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장대같이 솟아 하늘을 가리던 나무들이 그녀의 시야보다 훌쩍 아래에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남쪽 대륙은 또 한 겹의 설원이었다.
나무들 위로 두터운 눈들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휘이잉, 거친 바람이 또 한 번 눈가를 세차게 스치고 지나갔다.
눈을 감은 이예주는 바람이 잠잠해질 때까지 인내하다가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멀리, 최대한 멀리까지 바라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온통 나무, 눈, 나무, 눈. 눈이 잔뜩 쌓인, 뾰족한 침엽수들뿐이었다.
빠져나온 동굴은 물론이거니와, 숲이 끝나는 지점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허탈감에 몸에 힘이 쭉 빠지려던 그때였다.
그녀가 오른 절벽에서 동쪽으로 멀리, 아주 멀리 거대한 산 그림자가 아득하게 보였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최대한 집중하자 환영 같던 그림자가 점점 실체화되었다.
펭양이 말했던 숲의 끝 중 하나,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부터 뻗어져 나온 산맥의 일부였다.
“하…….”
산맥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던 그녀는 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막지 않았다.
동쪽.
동굴에서 나와 무작정 앞으로만 직진했을 때 나온 것이 지금 제가 오른 막다른 절벽이니 다음에 나올 때는 최대한 오른쪽으로 꺾어 걸어야 했다.
펭양이 말해 주지 않아도 방향은 알았는데, 문제는 대체 저기까지 어떻게 걸어서 가느냔 말이다.
그리고 도착한다고 쳐도.
“그 미친놈들이 있는 곳이잖아…….”
다리족 놈들이 사는 곳이라면 이젠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이예주였다.
괴물 때문에 개죽음당할 뻔한 일은 한 번으로도 족했다.
어둠 속에서 괴물의 기괴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덜덜 떨던 기억을 되살리던 그녀는 문득 제가 놓고 온 여자아이가 생각 나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시 돌아갈 거라고 했는데…….
별일 없겠지. 유나, 아니 알리자린은 똑똑하고 영리한 아이니까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살아남았을 거야.”
이예주는 그냥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 외의 다른 가능성은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알리자린은 잘 살아 있을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번 더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당장 알리자린을 데리러 가고 싶었지만 아직은 힘들었다.
숲을 빠져나갈 방법도 잘 모르고, 게다가 몸도 좋지 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이예주는 떼어지지 않는 시선을 떼 요원한 산줄기로부터 반대 방향 쪽으로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지긋지긋한 나무들. 숲의 서쪽도 딱히 끝이라고 추정되는 지점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시야에 높이 솟은 절벽이나 언덕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렇게만 보면 막다른 곳은 없는 듯해 보였다.
서쪽. 그저 막연히 걷다 보면 언젠간 숲도 끝이 나질 않을까.
터무니없고 무모한 계획이었지만, 지금으로써는 이예주가 시도해 볼 만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그 남자가 오기를 멍청히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일단은 확인할 것은 대충 다 했으니, 이 망할 절벽에서 다시 내려가는 것부터.
이예주는 붙어 있던 암벽에서 등을 떼어 제가 올라왔던 벼랑 끝으로 주춤주춤 다가갔다.
흘끗 아래를 보니 펭양과 순록이 너무나도 작게만 느껴졌다.
아까 전 암석에서 미끄러졌을 때처럼 눈앞이 아찔해지며 오금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올라올 땐 눈앞에 뵈는 게 없어 미처 느끼지 못했던 슬금슬금 나타났다.
“……미친.”
이예주는 짧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절벽을 기어오를 때 제 눈에 뭐가 씌인 것이 분명했다.
“망했다.”
이 환장할 높이를 다시 내려가려니 눈앞이 다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절벽을 내려오는 것은 올라올 때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시간과 체력이 소요되었다.
해가 저물수록 바람은 더욱 매서워졌다.
암벽 틈새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칠 만큼 거센 바람이 몰아닥칠 때마다 움직임을 멈추고 잦아들길 기다리는 것은 두 번 못할 짓이었다.
“예주양! 조금만 더 내려오면 돼양! 힘내양!”
펭양의 응원을 받으며 간신히 지상에 발을 디뎠을 때, 이예주의 얼굴은 눈보다도 더 허옇게 변색되어 있었다.
타닥― 마지막 남은 바위 위에서 뛰어내리자 펭양이 모포를 끌고 도다다다 달려왔다.
“예주양! 괜찮아양? 어디 다친 덴 없어양? 웅?!”
다친 데야 많았다. 하지만 녹초가 된 이예주는 대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그녀는 펭양이 내민 모포를 받아 차갑게 굳은 몸 위에 뒤집어썼다.
갑자기 무게가 얹어지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 토할 것 같아…….”
정신없이 질문을 해 대는 펭양을 본의 아니게 무시한 채 이예주는 흐린 눈으로 걸어온 시간을 가늠했다.
도저히 얼음 동굴이 있는 곳까지 다시 걸어가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벌써 주위는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이런 곳에서 노숙을 했다간 분명 입이 돌아갈 텐데.
“……아니, 그러기 전에 얼어 죽으려나?”
“웅? 죽어? 뭐가 죽어양?”
이예주의 혼잣말에 펭양이 해맑게 되물었다. 그렇게 뛰어 대고도 이 작달막한 펭귄은 지친 기색이 별로 없었다.
대단한 체력이다. 아니면 자신의 몸이 펭귄보다 못할 정도로 비루먹은 걸지도.
“너무 늦었어. 돌아가자.”
그녀는 절벽에서 내려온 후 처음으로 평지로 한 발자국을 내밀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머릿속이 울렁울렁 요동쳤다.
“우욱.”
헛구역질이 솟았다.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둥둥 귀에서 고동 소리가 빗발치고 시야가 흐려졌다 선명해지길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