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도다다다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흘끗 뒤를 돌아보자, 동굴 안으로 들어간 줄로만 알았던 펭양이 제 몸보다 몇 배나 커다란 모포를 질질 끌며 뛰어오고 있었다.
“가, 가더라도 이거 덮고 가양!”
헐레벌떡 다가온 펭양이 결연한 얼굴로 이예주에게 모포를 척 건넸다.
“나보다는 네가 덮어야 할 거 같은데?”
“나는 바람이 들지 않도록 겉 털이 단단히 엮여 있고 속 털도 있어서 하나도 춥지 않아양!”
“…….”
“더, 덮고 가면 안 되양? 또 아프면 펭양이 주인님께 혼날 테양…….”
불쌍한 표정으로 모포를 들이미는 펭귄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이예주는 결국 그것을 받아 들고 어깨 위에 걸쳤다.
“고마워.”
조금 무뚝뚝한 인사를 하고 이예주는 더 이상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갈 길이 바빴다. 아무런 지식도 없이 숲을 헤매고 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걸음이 축축 늘어졌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그 남자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기는 싫었다.
“금방 돌아올 거지양?”
“…….”
“응?”
푹푹 빠지는 눈길 위에 조심스레 올라서며 이예주는 대답 없이 묵묵히 걸었다.
먼저 친절을 베풀어 준 펭귄에게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돌아올 것이 아니니까.
이예주는 할 수만 있다면 남자가 없는 지금, 이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고 싶었다.
이예주는 펭양이 건네준 모포를 단단히 여미고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능력만큼이나 무조건적인 직진이었다. 길을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거나 너무 추워서 얼어 죽을지 모른다는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죽게 된다면 그냥 죽어 버리지, 뭐.
자신의 의사도 묻지도 않고 이곳까지 강제로 끌고 온 놈 때문에 죽게 된 것이니 저주를 내릴 명분도 충분하고, 딱 좋네.
숲은 고요하고 어두웠다.
밤이 아니니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빽빽한 나뭇가지 틈새로 보이는 하늘이 온통 잿빛이었다.
금방이라도 펑펑 눈이 쏟아질 것 같았다.
뽀득뽀득,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 더미가 신발에 밟혀 갖은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어렸을 적, 빙판 때문에 등굣길에서 크게 자빠져 ‘문’이 생긴 경험이 꽤 여러 번이라 눈 내리는 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는 건 나쁘지 않았다.
비록 도망 길을 찾기 위해 숲을 헤매는 열악한 여정이긴 해도.
한때는 대학가에서 손 붙잡고 눈을 맞으며 거리를 걸어 다니는 연인들을 부러워한 적도 있다.
지금은 연인은 개뿔, 남자라면 치가 떨리게 됐지만, 그래도…….
그때 이예주의 상념을 깨듯 그녀의 것이 아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차박차박, 토다다다. 차박차박, 토다다다.
번갈아 가며 들려오는 바쁜 소리로 누가 어떤 식으로 뒤를 밟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따라붙다가, 자신의 발걸음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허겁지겁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있겠지.
안 봐도 비디오처럼 그려지는 작달만한 펭귄의 모습에 이예주의 미간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쫓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그녀는 그냥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얼음 동굴이 있는 부근에서 별로 멀어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힘 빼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숲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설마 북쪽 대륙 동물의 숲인지 뭔지 만큼 큰 건 아니겠지?
유나나 여준 놈에게서 남쪽 대륙에 그렇게까지 큰 숲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던 것 같은데…….
사박, 사브작. 발자국 소리가 하나 더 늘었다.
펭귄보다 좀 더 묵직한 발자국 소리에 이예주가 심호흡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이젠 하다못해 친구까지 데려와?
예고 없이 우뚝 걸음을 멈추자 당황하여 파다다닥 몸을 숨기는 기척이 역력했다.
다시 걸음을 옮기자 이번에는 푸륵, 푸르르르 하는 괴상한 소리까지 따라 붙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뒤로 돌았다.
차마 다 숨지 못해 나무 옆으로 삐쭉 튀어 나온 커다란 뿔이 보였다.
저 커다란 건 또 뭐야?
“나와.”
이예주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나 펭양과 뿔 달린 것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 나오면 이대로 도망갈 거야. 네 주인한테 들었지? 나 도망 엄청 잘 치는…….”
“나, 나갈게양!”
이예주의 거짓 협박에 누군가 서둘러 나무 앞으로 튀어나왔다. 역시나 펭양이었다.
그 뒤를 따라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를 내며 또 다른 존재가 커다란 몸집을 드러내었다.
이예주는 나무 바깥으로 나온 눈부시게 하얀 털과 뿔에 입을 떡 벌렸다.
“대체…… 그건 또 뭐야?”
“수, 순심이양…… 나랑 같이 이 숲을 지키는 파수꾼이양.”
순심이라는 동물의 다리 뒤에 숨어 빼꼼히 얼굴만 내민 채 펭양이 우물쭈물 답했다.
거대한 동물은 눈과 코를 제외한 온몸이 순백의 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뭇가지처럼 위로 뻗어 있는 거대한 뿔까지.
어느 것이 눈인지, 어느 것이 사슴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만큼 온통 새하얬다.
“……흰 사슴?”
“순심이는 사슴 아니양. 흰 순록이양.”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사슴의 모습에 이예주가 멍하니 혼잣말을 하자, 작은 펭귄이 얼른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흰 순록, 순심이.
“허.”
펭양에 이어 순심이까지. 기가 막힌 이름에 이예주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대체 누가 저런 이름을 지어 줬는지 모를 일이라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뒤를 돌았다.
다시 걸음을 옮길 요량이었지만, 그런 그녀의 뒤를 바짝 쫓으며 펭양이 소리쳤다.
“주인님께서 최근에 지어 주신 이름이양! 나도 순심이도.”
이예주의 몸이 멈칫했다.
생각만 한다는 게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은 건가?
그런 그녀의 생각에 답하듯 펭귄이 조잘거렸다.
“주인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름을 짓는 행위가 꼭 인간들이 소유를 주장할 때 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하셨어양! 순번으로 불리는 것보단, 각 개체마다 부를 이름이 하나쯤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구 지어 주셨…….”
“쫓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쫓아오는 거야?”
이예주는 펭양의 말을 냉정하게 자르고 물었다.
차갑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차가운 인간 여자의 모습에 펭귄이 퍼드득 몸을 떨었다.
“어응, 그, 그게…….”
“도망 잘 치는 인간이니까. 감시라도 하래?”
짐작할 것도 없지. 매번 황조롱이에게 부여된 임무가 이번에는 펭귄으로 옮겨 갔을 뿐이다.
죄 없는 펭귄에게 화풀이를 한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가지던 자신이 천하의 둘도 없는 멍청이 같았다.
이예주의 날카로운 질문에 펭귄은 펄쩍 뛰며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양! 주인님은 그런 말 안 하셨어양!”
“그럼 왜 쫓아오는 건데?”
그것도 저런 엄청나게 큰 동물까지 달고. 우뚝 서 있는 흰 순록을 향해 흘긋 턱짓을 하며 삐딱하게 되묻자, 펭양이 양 손을 통통한 배 밑에 곱게 포개고 우물쭈물 거렸다.
“그, 그냥……. 남쪽 대륙은 인간들에게 많이 추운 곳이양. 호, 혼자 돌아다니다가 길이라도 잃으면 어떡해양. ……예, 예주 양은 아직 몸도 다 안 나았잖아양…….”
“…….”
“저, 절대 주인님께서 시킨 일 아니양! 화, 화내지 마양.”
올망졸망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 보는 귀여운 얼굴을 보자니 목 아래까지 차 오른 짜증이 푸시시 꺼져 버렸다.
“주인님께서 시키신 거 아니양, 주인님이 아니양.”
필사적으로 제 주인을 옹호하는 펭양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이예주는 이 쪼그마한 펭귄이 어떻게 제 이름을 알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망할 놈이 알려 주었다는 것 외의 또 다른 가능성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예주는 펭귄의 뒤에 동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순록을 바라보았다.
흰 순록이 푸륵, 푸르륵 하고 허연 숨을 뱉으며 눈밭 위에 주저앉았다.
기분 탓인지, 마치 자신의 등 위에 올라타라는 몸짓 같았다.
하지만 이예주는 잊지 않았다.
잊기는커녕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신인류는 인간을 태우지 않는다는 것을.
“쟤도 신인류야?”
“아니양. 그치만 순심이는 오래 살아서 완전 똑똑해양. 우리 말을 다 알아들어양.”
이예주는 더 묻지 않고 그들을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그다지 꼭 알고 싶어 물은 것은 아니었다.
신인류든 아니든, 더 이상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조금 더 관심을 가질까 기대감에 가득 찼던 펭양은 싸늘하게 스쳐 가는 이예주의 뒷모습에 잠시 시무룩해하다가 재빨리 순록 위에 올라탔다.
사브작, 사브작. 뽀득, 뽀드득. 들켰으니 이제 대놓고 동행하겠다는 건가.
옆에 당당히도 붙어 서는 커다란 사슴의 몸통에 이예주의 양 미간이 꿈틀거렸다.
“쫓아오지 마.”
“내, 내가 더 길을 잘 알아양. 나, 나는 숲길을 모두 아는 파수꾼이고 또 인간이랑 말을 할 수 있는 하나뿐인 신인류고…….”
“…….”
“나도 데리고 가양.”
이예주는 자신의 차가운 태도에도 꿋꿋하게 따라 붙는 펭귄과 순록을 더 이상 제지할 도리가 없었다.
펭귄 혼자라면 모를까, 저보다 몇 배는 더 큰 순록을 못 오게 막아설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저 작은 펭귄이 그것을 노리고 일부러 순록을 끌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다 들었다.
조롱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푸르르. 콧김을 내뿜는 순록 위에 올라탄 펭양은 얼추 이예주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미심쩍다는 듯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자 펭귄이 눈을 반달로 접으며 활짝 웃었다.
“왜에?”
의뭉스러움 한 점 없이 해맑은 얼굴이었다.
하, 모르겠다. 고개를 돌려 앞쪽으로 바로 한 이예주는 펭귄을 의심하길 포기했다.
따라올 거면 따라오라지.
아직까진 그저 숲을 배회하는 것뿐이니 제 주인에게 일러바칠 거리도 없을 게 아닌가.
곧 고자질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얼얼했던 코는 이제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얼굴이 완전히 얼어붙은 기분이다.
코를 훌쩍이며 이예주는 검은색 털이 휘날리는 모포를 단단히 여몄다.
두터운 눈이 잔뜩 서린 숲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춥고 고요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발길 닿는 대로 걷길 수 시간째, 오랜 시간 그들을 에워싸고 있던 정적을 깬 것은 펭양이었다.
“예주양, 어디로 가려는 거양?”
“…….”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거양? 내가 데려다줄 수 있는데. 어디가 가고 싶은 거양?”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이예주는 초롱초롱 빛나는 까만 눈과 마주쳤다.
친근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펭귄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춥지도 않은지 순록의 너른 등판 위에 앉아 있는 펭양은 편해 보였다.
오히려 어디가 가고 싶은 것이냐고 묻는 모습이 신이 나 보였다.
이예주는 해맑은 펭양의 모습에 말을 잃었다가 한참 후 입을 열었다.
“이 숲은 입구가 어디야?”
“입구?”
“응. 다른 곳으로 이어지거나 빠져나가는 끝이 있을 거 아냐.”
“우웅, 끝을 말하는 거구나. 침엽수 숲의 끝은 두 군데양!”
“두 군데?”
“웅!”
이예주가 무시하지 않고 말을 걸어 준 것이 기쁜지 펭양이 감격스러운 얼굴을 하고 의욕에 가득 차 설명했다.
“웅! 한쪽은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숲이랑 연결되어 있고, 다른 한쪽은 눈족의 근거지와 맞닿아 있어양.”
“…….”
“두 군데 다 인간들이 종종 출몰해서 동물들은 깊은 곳에 숨어 살지, 절대 그 근처에 얼씬도 안 해양. 주인님께서도 그 주변에 잘못 얼쩡거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인간들에게 잡혀갈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당부하셨는데…… 허헙!”
열심히 설명하던 펭양이 불현듯 파닥이던 날개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마음껏 조잘대다가 뒤늦게 말하면 안 되는 사실까지 발설한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이렇게 허술해서야 원, 그 남자가 마음 놓고 감시 역을 맡길 수나 있을까.
이예주는 제 눈치를 보는 펭귄의 모습에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그, 근데 그, 그건 왜 물어보는 거양?”
펭양이 흔들리는 눈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군데 다 어느 쪽으로 가야 되는지 안 알려 줄 거지?”
“……헉! 그, 그, 그건. 그, 그게 그러니까…….”
펭양은 방금 전보다 더욱 놀라 몸을 떨었다.
동그란 눈을 정신없이 데굴데굴 굴리며 변명거리를 찾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예주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그만 펭양을 구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됐어. 알려 주지 않아도 돼.”
“이, 일부러 안 알려 주려는 게 아니양!”
“알아. 어차피 네 주인이 알려 주지 말라고 했겠지.”
“그, 그게 아니양! 위험해서. 그, 그 주변은 정말 위험해서 그러는 거양…….”
펭양이 쪼그라드는 목소리로 울먹거렸다.
왠지 아까부터 같은 대화가 반복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예주는 급속도로 피곤해졌다.
다시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그녀의 모습에 펭양이 힝힝, 하고 덧붙였다.
“지, 진짜양, 예주양. 믿어 줘양…….”
하지만 간절히 호소하는 펭귄에게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