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해치려는 불순한 세력이 아닌 것을 깨달은 이예주의 입에서 야트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말없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펭귄을 바라보며 호흡을 정리하던 그녀는 안정을 되찾자 누워 있던 몸을 바로 세워 앉았다.
얼마만큼 누워 있었던 건지 머리를 들자 아찔한 현기증이 눈앞을 덮쳤다.
이마를 부여잡고 끙, 신음하자 펭귄이 걱정스럽다는 듯 뒤뚱뒤뚱 다가섰다.
“괜찮아양? 어디 아파양?”
이예주의 어깨 근처에 아담하고 끝이 둥그스름한 팔이 척 올라왔다.
펭귄 하면 기껏해야 만화영화에서 본 것이 다인 이예주는 제게 말을 거는 펭귄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본 적이 없어 알려진 것과 다른 생김새에 새삼 놀랐다.
돌고래처럼 미끌미끌하고 윤기가 돌 거란 생각과는 달리, 펭귄의 날개에는 짧고 보송보송한 털이 솟아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이예주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넌…… 신인류야?”
펭귄이 까맣고 올망졸망한 눈알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말을 하니 당연히 신인류겠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은 꿈의 여파 때문인가, 이예주는 잠시 제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망각하고 있다가 말하는 펭귄을 보며 차차 현실로 돌아왔다.
“펭양이양.”
누가 지어 줬는지 묘하게 잘 어울리는 이름에 이예주는 짧게 웃었다.
“몸은 괜찮아양? 이틀이나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어양.”
“뭐? 이틀?”
이어지는 펭양의 걱정에 이예주는 기함했다.
분명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에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서 다리족을 만나 그들의 끔찍한 실체를 알고 유나와 탈출을 감행했었다.
그리고 결국 그녀를 둔 채 홀로 ‘문’을 넘었고 람을 만나서……
람.
거기까지 기억을 되새기던 이예주의 몸이 흠칫 굳었다.
지옥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흉흉한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폭포처럼 피를 질질 내뿜으며, 그보다 더 검붉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반사적으로 손끝이 차가워지고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이예주는 고개를 뒤흔들며 그 생각에서 억지로 주의를 돌렸다.
주변을 돌아보니 속이 훤히 비칠 만큼 투명하고 깨끗한 벽면이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수정? ……얼음?
마치 누가 임의적으로 깎아 만든 조각품처럼 반듯한 절단면들이 서로를 비추었다.
그 때문에 높은 천장과 넓은 공간이 온통 푸른 물색을 띠어 꼭 바다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굴이구나.
내부는 그리 밝지 않았으나 동굴임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어둡지는 않았다.
이예주는 문득 몸 위에서 무언가 스르륵 흘러내리는 느낌에 아래를 내려 보았다.
짐승의 털가죽을 그대로 잘라 낸 것이라 볼 수 있는 두꺼운 모포가 꼼꼼히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바닥에도 비슷한 것이 깔려 있었다.
타닥, 타닥. 멀지 않은 곳에서 모닥불이 타올랐다.
“여기가 어디야?”
“여긴 남쪽 대륙에 있는 주인님의 얼음 동굴이양.”
펭양은 이예주의 물음에 숨기지 않고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남쪽 대륙…….”
원하는 답을 내준 펭귄을 따라 중얼거리던 순간 이예주의 머릿속에 눈송이가 내리는 설원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기절한 사이에 제 몸이 멋대로 움직여 이곳까지 걸어왔을 리는 없을 테니 남자가 데리고 온 것이 분명했다.
꿈이 아니었구나. 그녀가 차분하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할 때쯤 펭양이 짧은 날개를 파닥거렸다.
“아차차! 오늘쯤엔 깨어날 것 같다고 하셔서 내가 사냥을 해 왔어양! 배고프지 않아양? 생선! 같이 생선을 먹자구양!”
호들갑스럽게 돌아선 펭귄은 이예주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모닥불이 있는 쪽으로 뒤뚱뒤뚱 걸어갔다.
“맛있는 생선! 흠흠흠~ 맛있는 생선을 잡아먹자구양~”
먹을 생각에 신이 났는지 정체불명의 노랫말을 흥얼거리는 모습이 퍽 유쾌해 보였다.
생선을 들어 불에 집어넣으려는 펭귄은 한순간 멈칫하더니 ‘나무 꼬치를 어디 두었지양?’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후 ‘아차차!’ 하는 소리와 함께 생선을 바닥에 철퍽 내려놓고 모닥불의 반대편으로 파닥파닥 움직였다.
쌓아 놓은 나무 꼬치 중 하나를 든 펭귄이 ‘아차차! 생선을 두고 와 버렸어양!’ 하고 멍청한 소리를 할 적에 이예주는 다시 자리에 누워 등을 돌렸다.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동굴 안은 고소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빨리 와양! 더 있으면 다 타 버려양! 빨리 와양!”
짧은 두 팔을 미친 듯이 퍼덕이며 재촉하는 쪼그마한 펭귄 탓에 이예주는 어쩔 수 없이 꽁꽁 싸매고 있던 모포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동굴 내부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선득한 한기가 돌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빙어양!”
펭양이 기쁜 얼굴로 불 위에 걸쳐진 꼬치들 중 하나를 후후 불며 건넸다.
두 뼘 남짓한 길이의 작은 물고기가 먹음직스럽게 구워져 있었다.
“고마워.”
이예주는 작게 인사하며 잘 쥐어지지 않는 날개로 힘겹게 쥐고 있는 펭양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꼬치를 빼내었다.
꼬치를 쥐여 준 것으로 제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한 건지 펭양은 황급히 반대편으로 달려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양손에 꼬치를 하나씩 들고 와구와구 먹어 대기 시작했다.
이예주는 제 물고기를 먹을 생각도 못하고 펭양이 물고기를 통째로 꿀꺽 삼키는 모습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난 후, 꿰어 놓은 생선들을 다시 불 위에 얹으려던 펭양은 이예주 쪽의 물고기가 조금도 줄지 않았다는 것을 보고 크게 당황했다.
“왜 그래양? 맛이 없어양?”
며칠 굶었니? 네 주인이 굶기는 거야? 측은한 얼굴로 물어볼까 하던 것을 관두고 이예주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구운 거 먹어도 돼?”
“나, 나도 신인류라구양!”
펭양이 빽 소리를 지르며 대답했다. 그냥 신기해서 물어본 건데,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날개를 펼쳐 들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물론 조롱이도 당과 같은 튀긴 음식을 잘 먹긴 했지만……
아무래도 동물인 펭귄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어 잘 와 닿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왜 신인류인데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은 거지? 추워서?
‘쀼루룩, 꾸구국.’ 괴상한 소리를 내던 펭양은 이예주가 짤막하게 사과하고 나서야 부리를 다물었다.
이예주는 펭양의 성의를 거부하지 않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가운데 부분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씹자마자 부드러운 생선살이 부서지면서 동시에 입 안에서 무언가가 톡톡 터졌다.
깜짝 놀라 내려 보니 알이 꽉 차 있는 빙어의 단면이 보였다.
현대에서도 못 먹어 본 빙어를 1000년 후에 다 먹어 보다니.
새삼스러운 기분에 이예주는 한 번 더 들고 있던 생선을 왕 베어 물었다.
그리 크지 않은 크기 탓에 세 입 만에 빙어 먹방은 끝났다.
타지 않게 가장자리로 옮겨 놓은 생선 구이를 하나 더 집어 들며 이예주는 여상스럽게 물었다.
“이 동굴에는 너 혼자 사는 거야?”
무아지경으로 생선을 삼키던 펭양이 이예주의 질문에 입 안 가득 우물거리던 것을 단번에 꿀꺽 삼켰다.
“아니양. 난 이 동굴에 살지 않고 밖에서 살아양. 원래 이곳은 주인님의 거처라 함부로 들어오면 안 돼양. 주인님께서 인간 여자를 부탁하셔서 잠깐 와 있는 거양.”
“…….”
“여기 왔을 때 인간 여자가 열이 많이 난다고 많이 걱정하셨어양. 지금은 안 아프지양?”
그렇지양? 내가 간호를 아주 열심히 했단 말이양! 강요하다시피 해 이예주에게 그렇다는 답을 들은 펭귄은 다시 꿀떡꿀떡 생선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이예주는 말이 막혀 잠시 떨떠름한 얼굴로 펭귄을 바라보다 진짜 궁금한 질문을 꺼냈다.
“그래서 어디 갔는데?”
“응? 누구 말이양?”
“너한테 날 내팽개친 네 주인.”
콜록콜록! 갑자기 생선 가시라도 목에 걸렸는지 펭양이 격렬하게 기침을 내뱉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두 주먹에 꽉 쥐고 있던 꼬치들마저 바닥에 내던진 채 부리를 막고 콜록거리던 펭양은 까만 눈을 굴리며 이예주의 눈치를 보았다.
심상치 않은 인간 여자의 기세를 이제야 감지한 듯싶었다.
“나 혼자 여기에 처박아 두고 또 어딜 간 거냐고.”
이제 보니 인간은 자신의 성의에 못 이겨 처음 건네준 생선 하나만을 먹었을 뿐, 그 이상은 입도 대지 않고 있었다.
딱히 화가 나 보이지 않아 금방 알아채지 못했다.
다시 묻는 건조하고 딱딱한 어투가 어쩐지 분노한 것 같아 보였다.
펭양은 부리를 가린 손을 조심스럽게 내렸다.
“주, 주인님은 잠깐 도, 동쪽 대륙에 가셨어양…….”
“동쪽 대륙? 거긴 왜?”
“그, 그게…… 동쪽 대륙에 요즘…… 주, 주인님께 중요하고 원대한 일이 생기셔서양…….”
펭양은 우물쭈물 거리다가 끝내 이예주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 까만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아. 중요하고 원대한 일.”
어디서 들어 본 소리인가 했더니, 조롱이에게서 들은 소리였다.
숲에서 뭘 하고 있느냐는 제 질문에.
―주, 주인님의 원대한 목표 때문에 왔어여.
그 원대한 목표란 바로 인간 박멸이었다.
어쩐지 그때와 겹치는 상황에 이예주는 점점 고양되던 감정의 온도가 푸시시 꺼져 들어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위화감 없이 대화를 나눴다.
물론 펭양이 먼저 친밀하게 대해 준 탓도 있지만, 무의식중 조롱이를 대하던 버릇이 튀어나왔음이 분명하리라.
이예주는 제 눈을 필사적으로 피하는 펭귄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제 곁에 조롱이는 없었다.
아니, 앞으로 영영 없을지도 모르겠다.
“뭐 좋아. 내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예주는 들었던 생선 꼬치를 근처의 돌멩이 위에 내려놓았다.
펭양이 얼마나 끙끙대며 그것을 만들었을지 눈에 선했지만 관심 두지 않기로 했다.
“왜, 왜 더 안 먹어양? 별루양?”
“아니야, 맛있어. 그냥 입맛이 없어서.”
정말이었다. 정신을 놓은 동안 아프긴 아팠는지 썩 당기지 않았다.
펭양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통통한 아랫배 위에 두 날개를 축 늘어뜨렸다.
이예주는 그런 펭귄의 반응을 무시하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보다 이 동굴 입구는 어디 쪽이야?”
“그건 저쪽…… 헙!”
침체된 분위기 속에 먼저 말을 걸어 준 게 기쁜지 무심결에 해답을 가리키던 펭양이 얼마 안 가 파다닥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 그, 그건 왜 묻는 거양?”
“일어났는데 가만히 여기 있을 수만은 없잖아.”
“주, 주인님이 아무데도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양…….”
펭귄은 불안한 듯 까만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며 소심하게 덧붙였다.
이예주는 이번에도 그 말을 무시했다.
펭양의 팔이 짧아 가리킨 방향은 불분명했다.
하지만 어렵지 않게 입구로 가는 길을 알아보았다.
다른 쪽에 비해 그 쪽이 더 밝고 환했기 때문이다.
남쪽 대륙이 많이 춥다고 했던가?
읏차,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이예주는 머릿속을 뒤져 남쪽 대륙에 관한 정보들을 떠올렸다.
남쪽 대륙에 관한 정보들은 대부분 다리족에게 얻은 것들뿐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열악한 환경. 그 탓에 밥만 축내는 쓸모없는 아이들은 내쫓은 눈족들이 주둔하는 곳.
그런데 눈족들은 왜 다른 대륙들을 놔두고 굳이 남쪽 대륙에 온 거지? 물론 다른 대륙들이 이곳과 비교가 될 만큼 뛰어나게 좋은 것 또한 아니었지만…….
이예주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걸을 즈음이었다.
파닥 파다닥, 날개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펭양이 이예주의 바로 옆까지 쫓아와서 다급히 외쳤다.
“나, 나가면 안 돼양! 아직 열병이 다 나은 게 아니양!”
“쫓아오지 마.”
“힝힝. 주, 주인님한테 펭양이 혼나양!”
“…….”
이예주는 더 이상 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입구로 나가는 통로에 들어서니 확실히 시야가 환해졌다.
꽤 깊게 형성된 동굴인지 밖으로 나가기까지의 거리가 제법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밖은 훤한 대낮이었다.
태양빛이 반사된 얼음벽은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것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이예주는 커다란 고드름이 줄을 지어 매달려 있는 천장을 신기한 눈으로 살펴보며 지체 없이 길을 걸어 나갔다.
통로의 굴은 안쪽의 굴보다는 천장이 좀 더 낮고 폭이 좁았다.
그래도 고드름이 닿을 정도는 아니라 걷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 남자의 키 정도면 머리를 부딪힐지도 모르겠는데. 으, 아프겠다.’
실없는 상상을 하며 다리를 부지런히 옮기던 이예주는 문득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저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그 남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던 것이다.
누가 누굴 걱정해. 아직 덜 당한 거지, 이예주.
자조하던 그녀는 이내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펭양은 이예주를 따라오는 것을 포기했는지 얼음 통로가 고요했다.
조롱이처럼 끈질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때쯤, 동굴 안에서 느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찬 바람이 얼굴로 쏟아졌다. 이예주는 짧게 신음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읏.”
그리고 다시 눈꺼풀을 들었을 때, 그녀의 앞엔 눈이 멀 것만 같은 새하얀 설원과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 빽빽한 나무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하…….”
무의식중에 벌린 입에서 허연 입김이 쏟아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몸이 저절로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추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한 한기에 이예주는 양팔로 제 몸을 끌어안았다.
동굴은 숲보다 조금 더 고지대에 위치했다.
발치까지의 꽤나 가파른 경사로가 티 한 점 없는 두터운 눈으로 덮여 있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겨울나무 숲을 살펴보던 이예주의 얼굴에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
걸치고 있는 두꺼운 장포가 무색하게 천을 뚫고 속속들이 들어오는 칼바람에 몸이 으슬으슬 시려 왔다.
너무 춥잖아. 몸도 별로 좋은 것 같지도 않고, 이 상태로 저 눈 덮인 숲을 사방팔방 돌아다닐 수 있을까.
오늘은 포기해야 하나.
새하얀 내리막길 위에 잠시 발을 내밀었다가 들이밀기를 반복할 즈음이었다.
“예주 양! 자, 잠깐 기다려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