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35)화 (237/319)

그 일이 있고 난 후 더 이상 이예주를 직접적으로 붙잡거나 하는 애는 없었다. 

소문은 여전히 그녀의 근처를 맴돌았지만 막상 그녀가 정면으로 마주 서려고 하면 후닥닥 자취를 감췄다. 

엮이면 죽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괴담이 퍼져서 그녀가 지나다니는 길은 언제나 한산했다.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급식실이나 매점같이 사람이 많이 붐비는 곳에 발을 들이밀었을 때, 등장과 동시에 제 앞이 모세의 기적처럼 쩍 갈라지는 그 기이한 경험을. 

엄마가 죽은 것보다 더한 지옥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시련은 자주 찾아와 이예주를 한계까지 치몰았다. 

불우한 사고로 죽은 반 아이들의 49제가 지나고 국화꽃이 쌓여 있던 빈자리들이 교실에서 막 치워졌을 무렵이었다. 

하교를 하는 이예주의 앞을 창백한 몰골의 아줌마 셋이 가로막았다.

“네가 이예주지?”

채 답을 하기도 전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아줌마들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무섭게 다그쳤다.

“너한테 정말 신이 내렸다는 게 사실이니? 응?”

“네? 아니, 아니…….”

“우리가 애들한테 다 듣고 왔어! 너 때문에 우리 아들이 죽은 거야? 그런 거니? 어?!”

“왜 대답을 못해! 너 때문이냐고!”

장례를 막 치룬, 죽은 아이들의 엄마들이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이들의 억센 손아귀에 이예주의 몸이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아니,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아줌마, 저 아니에요!”

이예주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깨를 움켜쥔 아귀힘은 점점 더 살을 파고들 것처럼 거칠고 날카로워졌다.

“넌 어떻게 이렇게 멀쩡해! 우리 애는 사지가 다 찢겨서 살점을 간신히 주워 모았는데 넌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게 걸어 다니냐고!”

“아이고, 성민아! 성민아, 어떡하니. 성민아!”

다른 아줌마 한 명이 바닥에 나자빠졌다. 

또 다른 아줌마가 왼쪽에서 고함을 질렀다.

“그래! 너 말 잘했다. 너희 담임 선생님조차 입원했어! 지금도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애들이 태반인데, 어떻게 너만 멀쩡히 병원까지 걸어올 수가 있어!”

“말해! 애들 말처럼 네가 저주를 내린 거잖아! 우리 애 돌려 내! 우리 애 돌려놓으라고!”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비명과 곡소리에 더럭 겁이 났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살인범을 보는 듯한 중년 여자들의 섬뜩한 눈빛이 너무 따갑고 무서워서 이예주는 그저 울먹였다. 

“그게…… 아니에요. 흐, 흐으. 그게 아니라. 제가, 제가 미래로…… 미래로 가는 능력이 있는데요. 제가 안 다친 건 무, 문을 넘어가지고…… 악!”

어깨를 움켜쥐었던 아줌마가 손을 쳐들어 별안간 이예주의 머리채를 와락 쥐 뜯었다. 

아차 할 새도 없이 일어난 일에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어디서 어른 앞에서 거짓말을 쳐! 그런 허무맹랑한 거짓부렁으로 사람을 농락해? 너 때문에 일어난 거지? 너 때문이야!”

“네가 대신 죽었어야 했어! 우리 딸이 왜 너 같은 음침한 애랑 같은 반이 돼서는!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머리채가 잡혀 고개를 못 드는 사이에 왼쪽에 있던 아줌마가 두 손으로 이예주의 등과 팔을 찰싹찰싹 내리쳤다. 

“아니에요! 아줌마, 저 진짜 미래로 갈 수 있어요! 저 진짜 문 넘을 수 있어요! 미래로 갈 수 있다고요!”

미래로 갈 수 있다고. 그래서 살아남았다고. 믿어 달라고. 이예주는 울면서 악다구니를 썼다. 

하지만 뒤늦게 수위 아저씨가 달려와 아줌마들을 떼어 낼 때까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들어 주는, 또 믿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르는 아줌마들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얻어맞고 있는 걸 못 본 척 지나치는 아이들도.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서 구경하며 쟤 완전히 미친년이라고 수군대는 아이들도. 

이예주의 여린 살점을 뜯고 꼬집고 잡아당기던 아줌마들도. 

무서웠다. 

자신을 보호해 줄 부모조차 없는 열여덟의 그녀가 겪기엔 너무 무섭고 가혹한 일이었다.

*       *       *

“어머니들 때문에 많이 놀랐지? 장례식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예민하셔서 그래. 너도 많이 놀랐겠지만…… 그래도 조금만 이해해 주렴.”

다음 날 입술 끝이 쥐 터진 채 등교한 이예주를 교무실에 앉혀 두고 담임 선생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예주야. 주위 애들 말로는 네가 요즘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닌다던데…… 그, 미래를 간다고…….”

멍하니 손끝만 내려다보던 이예주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눈이 독기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상한 소리 아니에요.”

“뭐?”

“진짜예요. 미래로 가서 살아남은 거라고요!”

왜 믿지 않지? 진짠데. 이예주는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렇지, 이 사람은 그때 자신이 소리 소문 없이 병원에 나타난 것을 제일 처음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빠르게 읊조렸다.

“병원도 그렇게 도착했어요. 사고가 났을 때 문을 넘고 미래로 와서! 그래서 다친 데 하나 없이 병원에 온 거예요! 선생님도 보셨잖아요, 제가 병원에서 갑자기 나타난 거……!”

“예주야.”

점점 격양되는 이예주의 목소리를 담임 선생님이 단호하게 끊었다.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긴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너도 힘든 거 알겠는데…… 선생님이 많이 힘들다, 예주야.”

“…….”

“소문도 지금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학부모님들까지 알게 돼서 항의 전화도 많이 오고 있어. 대부분 반을 옮기거나 전학 같은, 네 처우에 관한 거야. 이제 곧 고3인데 전학은 말도 안 되는 일이고…… 그래도 우리 2반은 내가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서 너 반 옮기자는 얘기도 간신히 막고 있는 상태야.”

“…….”

“지금 다들 불안한 실정인 거 알지? 말도 안 되는 소문이란 거 아는데, 소문이란 게 또 당장 진압되는 게 아니잖아. 이런데 너까지 중심 못 잡고 자꾸 이렇게 말썽 일으키면 선생님 감당 못한다.”

불신과 짜증, 피곤함이 범벅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담임 선생님의 모습에 이예주는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아이들이 우글거리는 복도를 터벅터벅 걷고 있자니 어디선가 안 좋은 소리가 툭 들렸다.

‘마녀.’

이예주는 걸음을 우뚝 멈춰 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란스럽게 수다를 떠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을 던졌을 누군가를 찾았지만 모두가 자신을 흘끗흘끗 바라보고 있어서 그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체념하고 다시 한 걸음 떼던 그 순간이었다. 

‘저주받은 년.’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렸다. 

이번에도 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의 주인공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한 걸음. 신 내림 받은 년. 

한 걸음. 무당 딸. 

한 걸음. 괴물. 

한 걸음 한 걸음 이를 악물고 걸어가면서 이예주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고립시켜 나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인생이 완전히 어그러진 거지? 엄마가 죽었을 때? 아니면 수학여행에서 애들이 죽었을 땐가? 

수천 번도 넘게 생각해 보았지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자신이 죽음을 몰고 다니는 걸까? 미래로 가는 능력은 결국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살아남기 위한 저주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잊고 있었던 애완견의 죽음도 떠올랐다. 

봉구의 죽음은 경고였던 걸까. 가지고 있는 능력을 안일하고 멍청하게 사용한 자신을 향한 경고. 

시작은 애완견이지만 그 뒤는 엄마였다. 그리고 다수의 죽음과 부상들.

이렇게 알고 있는 이들의 수만 세어 봐도 열 손가락이 넘는데, 능력을 별거 아니라 치부하고 넘겼던 지난 무수한 과거에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 자신으로 인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을지 모를 일 아닌가. 

분노, 원망, 비명, 자괴감, 죄책감이 시시때때로 이예주를 덮쳤다.

더 이상 진실을 알리는 것은 불필요했다. 

아무리 외쳐 봤자 그 아무도 제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저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고, 미래로 가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밝혔음에도 상황은 더 악화됐지, 나아지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래, 말하는 건 불필요해.”

이예주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말해 봤자 자신의 능력은 다른 이들에게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렇게나 비참하게 알게 된 그녀는 가슴에 자물쇠를 걸고 또 걸고, 또 걸어서 그 안에 진실을 묻었다. 

그 위로 흙을 덮고 물까지 뿌려 꾹꾹 밟은 이후에 시멘트를 한 번 더 덮어 원천 봉쇄 했다. 

다시는 자신 이외의 타인에게 꺼내 들지 않게, 아무도 알지 못하는 금기 사항으로 두고 꽁꽁 숨겼다. 

금기를 다시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이예주는 달리는 차도에 뛰어들고, 건물 옥상을 오르거나 커터 칼을 손목에 갖다 대었다. 

과거로 돌아가서 제 손으로 어그러진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서였다.

*       *       *

이예주의 몸은 격랑에 끊임없이 휩쓸렸다. 

회오리 깊은 곳까지 끌려 들어온 것처럼 그녀는 과거 속을 헤맸다. 

저항도 못하고 하릴 없이 흔들리다가 하얀 포말과 함께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살아 있는 봉구의 밥을 챙겨 주며 녀석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하얀 포말이 찾아왔다. 

그 뒤 눈을 뜨면 걱정스러운 표정의 엄마에게 큰소리를 탕탕 치고 있는 자신이 있었고, 곧 다시 하얀 포말과 함께 다른 상황 속의 자신이 찾아왔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자신.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자신. 버스 사고에서 살아남은 자신. 

악몽에서 깨어나 까득까득 손톱을 깨물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자신.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이를 악물고 손목을 긋던 자신.

어른이 되고 나서도 엄마가 보고 싶어서 어린애처럼 엉엉 울던 자신…….

싸아아. 파도가 물러가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다시금 하얀 포말이 찾아왔다. 

차가운 바닷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얼굴 위로 한기가 일렁였다. 

이예주는 가물가물 눈을 떴다. 

잠이 오는 것도 아닌데 온몸이 물을 먹은 듯 축 늘어져 가눌 수가 없었다. 

초점이 불분명한 그녀의 눈에 스치듯이 보인 것은 온통 새하얀 눈송이, 설원이었다. 

또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피부 위로 서늘한 찬바람이 내려앉았다. 

눈시울이 시린 것 같아서 이예주는 스르륵 도로 눈을 감았다. 

눈앞이 컴컴해지자 깊은 수렁 속으로 밑도 끝도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또 과거 속으로 끌려가려는가 봐. 싫은데, 그냥 잊은 척하면서 살고 싶은데. 그 끔찍했던 경험, 심정, 다시 기억하기 싫은데. 

이예주는 자신을 보호하듯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추워, 엄마. 추워. 너무 추워……. 

그때 추위에 떠는 그녀의 몸을 누군가가 꽉 끌어안았다. 

따듯함을 넘어 뜨겁기까지 한 온기에 이예주는 정신없이 그 품속을 파고들었다. 

정신을 난도질하던 악몽에 소스라치게 놀라 깰 때마다 그렇게 찾았지만,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온기에 이예주는 울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자 따사로운 손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쉬― 괜찮다, 예주야.”

얼핏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귓가로 다가왔다. 

우는 저를 위로해 주는 다정한 목소리에 이예주는 오히려 울컥 서러움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토록 찾을 때는 없었으면서 이제 와 이렇게 다정하게 굴면 어떡하라고. 그렇게 춥고 두렵고 무서웠는데. 

이제 와서, 왜 이제 와서……. 

숨죽여 오열하는 이예주를 알아차린 걸까,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서서히 내려와 조심스럽게 축축한 눈가를 덮었다. 

일부러 의식을 차리지 못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눈을 감기는 손길에 조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예주가 고개를 움찔거리며 미약하게나마 반항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조금 더 자도록 해.”

여전히 다정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강압적인 어투에 몸의 힘이 거짓말처럼 탁 풀렸다. 

남자가 무어라 더 말을 건넸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깨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지더니 수면 위로 잠깐 떠오른 의식이 다시 침잠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더 이상 미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얼굴 위를 감싼 따스한 온기는 가시지 않았다.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으니…….”

그의 속삭임과 함께 이예주는 검은 무저갱 속으로 까무룩 빨려 들어갔다.

*       *       *

무의식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처 없이 흔들리던 이예주는 어느 순간부터 다시 과거의 길을 걸었다. 

이번에는 ‘문’을 넘어 미래로 넘어온 이후의 일들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수많은 과거를 담은 파편들이 이예주의 몸을 베듯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과거의 편린 속에서 그 순간 자신이 느꼈을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을 고스란히 다시 겪으며 길을 걷는 내내 울고 웃었다. 

어떤 때는 눈앞이 시뻘겋게 타오를 만큼 화가 났으며, 또 어떤 때는 머리끝이 짜르르 울릴 만큼 짜증이 치솟았고, 가끔은 뼛속을 파고드는 절망감에 좌절하고 체념했다. 

수십 번 넘게 가루처럼 부서졌다. 그리고 다시 붙고 단단해지고, 다시 부서지는 자신이 보였다. 

이예주는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제삼자의 시선으로 그것을 관조했지만 진짜 관객인 양 초연할 수는 없었다. 

당연했다. 실제로 제가 겪어 온 일들이었으니까. 

수많은 과거의 파편에 베어 울고 웃던 그녀는, 그중 가장 아프게 박힌 왼쪽 팔의 마지막 파편 조각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람이 다리족을 산 중턱까지 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속이고 이용했던 것을 알았을 때였다. 

파편이 박힌 자리인 어깨와 팔의 경계 부분이 벌건 속살을 보일 만큼 벌어지더니 주루룩 피가 흘러내렸다. 

그 상처가 실제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이예주는 마냥 그곳이 아프다는 생각을 했다. 

아팠다, 왼쪽 팔이. 아니, 아픈 건 팔이 아니다. 

그녀는 손을 들어 팔이 아닌 왼쪽 가슴 부근에 가져다 대었다. 

아팠다. 마음이, 심장이. 

결국 아무도 자신을 믿어 주지는 않았던 건가. 

‘문’을 넘어 미래로 온 후 진정으로 소중한 인연들이 생기면서 그래도 조금쯤은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람과 조롱이. 그 밖에 포니, 나비 아저씨, 제드, 알리자린. 

일생을 친구 하나 없이 살아온 이예주였으나,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만남이 없었다. 

때론 화가 나거나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을 만큼 미울 때도 있었지만, 팍팍하고 고단했던 삶에서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새롭고 강렬하고 신기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던 감각들. 

현대였다면 죽을 때까지 이 느낌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망설이다가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보다 미래에 남는 것을. 

하지만 그 결정의 중심은 언제나 람이었다. 

그의 옆에 있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고, 손도 잡고 싶고, 뽀뽀도 하고 싶었다. 

엄마와 친구들, 봉구를 되살리는 것을 포기해 끝내 평생을 악몽에 시달려야 한데도, 함께하고 싶었다. 

미래로 넘어온 이후 걸어왔던 길은 남자를 빼놓으면 존재 자체가 무색했다. 

람은 이예주에게 최후의 선택이었다. 

그를 믿고 따라가다 보면 이 길은 끝을 보이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예주는 파편이 박혀 벌겋게 벌어진 속살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어 제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앞은 누군가 칼로 잘라 낸 것같이 깔끔하게 끊긴 길뿐이었다.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잘라진 경계 너머에는 금방이라도 그녀의 눈을 멀게 만들 기세로 일렁이는 환한 빛을 내뿜는 벽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은 길의 끝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자, 문득 빛무리가 물에 반사되는 것처럼 일렁이더니 벽 너머에 한 영상이 나타났다. 

마치 미래로 가는 ‘문’처럼. 

무심결에 거대한 ‘문’이 비추는 상을 들여다보니 저 멀리 그녀를 등진 채 의자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이예주의 눈이 점차 커졌다. 

꽤 오래되었는데도 단번에 알아볼 만큼 익숙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엄마였다. 

식탁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거나 자신이 올 시간에 맞춰 과일을 깎느라 정작 딸이 들어온 것도 몰랐던 엄마의 뒷모습이었다. 

왈칵 눈앞이 흐려짐과 동시에 이예주는 끊긴 길의 경계를 넘어 거대한 ‘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환한 빛이 이예주를 덮쳤다. 

혹시 사라졌으면 어떡하지? 

이예주가 제일 처음 걱정한 것은 엄마의 부재였다. 그러면 안 되는데……. 

두려움에 질끈 감았던 눈을 뜨는 것조차 겁이 났다. 

그러나 이예주는 억지로 힘을 줘 눈을 떴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또 악몽에 농락당하는 거면 빨리 받아들이는 게 더 편할 테니까. 

하지만 눈을 떴는데도 여전히 그리운 이의 뒷모습이 존재했다. 

이예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제 닿으면 사라지는 건가. 또 얼마나 나를 지옥 속으로 내몰려고. 

그러나 꿈에서 일어나면 지옥 같은 현실이 펼쳐질 것을 안다고 해도, 이예주는 달릴 수밖에 없었다. 

“엄마!”

허겁지겁 달리느라 발이 꼬여 넘어질 뻔한 것도 괘념치 않고 엄마를 무작정 끌어안았다. 

다행이 무던히도 자신을 괴롭히던 악몽의 일환이 아닌지, 두 팔 안에 닿은 실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

이예주는 처음 호흡하는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악몽은 자주 꿨지만 실제로 엄마가 나오는 꿈은 손에 꼽을 만큼 별로 없었다. 

이예주가 보는 것은 언제나 제 눈높이에서 덜렁거리는 엄마의 발뿐이었으니까. 

꿈이라도 좋으니까, 환영이라도 좋으니까 엄마를 보게 해 달라고 얼마나 빌었던가.

“엄마, 여긴 너무 힘들어.”

하지만 막상 엄마를 만나니까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리광과 울먹거림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도 나를 믿어 주지 않아. 나는 힘도 없고 쓸모도 없고…… 그냥 짐 덩어리인가 봐.”

입술 끝이 바르르 떨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그랬다. 람에게 자신은 그 정도였다.

“그만하고 싶어. 나 이제 더 이상 못하겠어.”

“…….”

“나도 데려가면 안 돼, 엄마?”

이예주는 엄마의 어깨에 매달려 떼를 썼다. 

다 큰 성인이나 돼서 엄마한테 떼를 쓰는 꼴을 남들이 보면 철없다 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냥 응석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그 정도로 절박했다.

“과거로 가는 법! 그래. 어떻게 과거로 가는지 알려 줘. 엄마는 알지? 어떻게 하면 돼? 내가 어떻게 하면 과거로 갈 수 있어? 알려 줘. 제발, 제발!”

“…….”

“제발 나도 데려가…….”

아이처럼 엄마한테 매달려 애원하던 이예주가 끝내 어깨를 작게 경련하며 흐느꼈다. 

엄마의 옷에 뜨듯한 물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때, 여태껏 말 한 마디 없이 그저 이예주에게 안겨 있던 엄마가 품에서 빠져나오려는 듯 몸을 틀었다. 

짠물이 잔뜩 묻은 낯을 닦을 새도 없이 그녀가 휙 고개를 돌렸다.

“예주야!”

오랜만에 대면한 엄마의 얼굴은 충격적이었다.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뻥 뚫려 텅 빈 공간을 내보였다. 눈이 없는 엄마가 두 팔을 마구 휘저어 댔다.

“앞이 안 보이는구나, 예주야! 내 눈을 찾아 주렴!”

“어, 엄마.”

전혀 예상치 못한 엄마의 모습에 이예주가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몇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콰당―! 

이예주를 잡으려는 듯 계속해서 팔을 휘저어 대는 통에 엄마가 앉아 있던 의자가 기어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앞으로 넘어졌다. 

깜짝 놀란 이예주가 다가가기도 전에 엄마는 섬뜩한 모양새로 바닥을 기며 이예주를 찾았다.

“앞이 하나도 안 보여! 내 눈! 내 눈이 어디 갔지?”

엄마의 얼굴이 점점 기괴해졌다. 

시꺼멓게 변색된 눈구멍이 점점 커지더니 순식간에 얼굴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녀를 부축하려던 이예주는 본능적인 위화감에 흠칫 몸을 굳혔다. 

커다랗고 시커먼 구멍이 두 개나 있는 하얀 얼굴은 기괴하고 섬뜩했다. 

흡사 일본 공포 영화에 나오는 귀신 같은 모양새였다. 

“내 눈! 내 눈 내놔! 내 눈! 눈!”

엄마가 탁탁, 손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바닥을 기었다. 

새하얗게 얼어붙은 이예주가 있는 쪽은 어떻게 알았는지 정말로 귀신처럼 괴기스러운 동작으로 기어 왔다. 

엄마, 아니 여자는, 종내엔 바닥을 박박 긁으며 괴성을 질렀다. 

“내 눈 내놔! 내 눈 내놔!” 

까드드득, 귀신이 머리끝이 쭈뼛 서는 소리와 함께 눈 깜짝할 새 기어와 이예주를 덮쳤다. 

“아아아악!”

눈! 내 눈을 내놔! 눈! 눈!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손톱이 경악으로 홉떠진 눈을 쑤시기 바로 직전.

“헉!”

이예주는 번쩍 눈을 떴다. 

헉, 헉. 오랫동안 숨을 참은 것처럼 가쁜 숨이 입술 새로 터져 나왔다. 

뭐야. 뭐야. 꿈이야? 엄마, 아니 그 귀신은? 미친, 미친. 

아직도 심장이 벌컥 벌컥 갈비뼈를 두드렸다. 

무슨 이런 미친 꿈을…….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제가 누워 있는 옆벽의 끄트머리에서 스으윽 하고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곁눈질로 그것을 확인한 이예주의 몸이 반사적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디지? 내부인 것으로 보아 아직도 다리족이 있는 그 빌어먹을 비행선인가? 

눈알을 굴려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시야가 어두워 쉽게 알아볼 수는 없었다.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누워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광원으로 추정되는 어두운 불빛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불빛이 비추는 벽 위의 그림자가 제게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뿐.

타박타박, 나지막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어두운 인영이 점점 커져 결국 이예주의 위를 완전히 덮었을 무렵.

“괜찮아양?”

그녀의 시선 안으로 작달막한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누, 누구…….”

워낙 몸에 힘을 주고 있는 상태라 이예주는 꼴사납게 말을 더듬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용케 들은 듯 상대방이 환하게 웃었다. 

노란 부리가 웃고 있다니, 그녀는 드디어 자신의 눈이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순간에 이예주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커다란 그림자의 정체는.

“나는 펭양이양.”

펭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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