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 이예주의 앞에 펼쳐진 것은 다름 아닌 시커먼 암경이었다.
분명 바다가 보이는 ‘문’ 안으로 뛰어든 것 같은데, 그 선택이 썩 좋지 않았는지 컴컴한 어둠 속에 갇혀 버렸다.
“……씨발.”
욕설을 중얼거리던 그녀는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연거푸 했다.
미친놈에게서 도망치는 데에는 일단 성공한 것 같은데, 여우를 피했더니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격이 되어 버렸다. 흐으!
“아니야, 아니야. 좋게 생각하자, 이예주…….”
어두컴컴한 암경 속에 갇혀 있는 건 싫었지만 그래도 남자에게서 벗어나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만큼은 좋은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지 않아도 지치거나 기운 빠질 일이 없으니까.
그러니 미래로 가는 진짜 ‘문’이 나올 때까지 천천히 걷다 보면, 어떤 답이 나오지 않을까.
“하…….”
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도저히 까마득한 암경 속을 걸어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시나무처럼 몸이 떨렸다.
이예주는 그대로 제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두 팔로 다리를 껴안고 그 위로 얼굴을 묻으니 떨림이 조금씩 잦아드는 것 같았다.
저편으로 증발했던 이성이 되돌아오면서 달아올랐던 머리가 점점 차분해지자 지독한 침묵과 무서움이 찾아왔다.
왜, 왜일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어째서.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머리는 차가워졌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그가 자신을 속이고 이용하게 되었는지.
처음부터 능력에 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은 탓일까?
그래서 그가 자신을 의심하고 종내 쓸모를 입증하기 위해 다리족으로 보낸 건가.
그렇다면 대체 그는 언제부터 제 능력을 눈치챘던 것이지? 사막에서 도망쳐 동쪽 대륙에 왔을 때부터인가?
아니면 서쪽 대륙 팔족 족장의 저택에서 ‘문’을 넘어 그에게 도착했을 때?
아니면 처음부터?
그가 내리치는 벼락을 피해 그의 앞에서 처음 ‘문’을 통해 도망쳤을 때부터였나?
이예주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전지전능한 남자이니 이깟 하찮은 능력 따윈 얼마든지 꿰뚫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눈족들이 신과 같은 존재로 여기는 남자라잖아.
그런데 왜 알아챘을 때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을까.
그저 제게 또 다른 능력이 있나 물어보았을 뿐, 딱히 다른 언질은 없었다.
하긴 있었더라도 둔해 터진 자신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그가 좋아서, 처음 겪는 감정에 헬렐레 거리기 바빴을 테니까…….
“……병신.”
그녀는 여전히 두 무릎 위에 얼굴을 묻은 상태에서 손만 들어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병신, 병신. 이 똘추야!”
그가 이미 제 능력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남자를 속이고 있다는 데에 죄책감을 느끼며 어떻게든 그의 옆에 있기 위해 아등바등했다.
그런 제 모습이 얼마나 웃겼을까. 얼마나, 얼마나 바보 같고 한심했을지…….
“흐, 흐흑…….”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예주를 괴롭히던 상념들은 결국 흐느낌으로 이어졌다.
머리를 쥐어뜯는 것을 관두고 그녀는 두 무릎을 가슴까지 바싹 끌어안은 채 번데기처럼 몸을 웅크렸다.
혼자 두고 온 유나는 어떻게 됐을까. 잘 피했겠지. 혹시 괴물에게 잡아먹히기라도 했으면. 그럼, 그렇다면 자신은…….
눈과 맞닿은 무릎 위가 후끈하더니 이내 그 부분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눈물이 흐른다는 자각을 하자 이예주는 그대로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진짜 좋아했는데.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가도 괜찮을 정도로 진짜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렇게 주저앉아 숨넘어갈 만큼 꺽꺽 울어 젖히던 이예주가 울음을 그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아까부터 요상하게 앉아 있던 자리가 살아 있는 생명처럼 꾸물꾸물 요동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도 거지같은데 이 망할 암경은 왜 더 거지같이 구는 거야.
처음에는 그저 엉덩이를 간질이듯 움찔거리던 공간이, 시간이 지날수록 꿀렁꿀렁 움직였다. 멀미가 날 것 같았다.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이예주가 눈물 콧물로 범벅 된 얼굴을 무릎에서 들었다.
“뭐, 뭐야!”
훌쩍, 훌쩍. 딸꾹질을 하면서도 그녀는 당황했다.
어둠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흙으로 지어진 오래된 건축물이 무너지는 것처럼.
어둠이 부스러지고 그 자리를 눈을 찌르는 듯한 환한 빛이 들어찼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보다 빛이 점유하는 공간이 넓어졌다.
“뭐야? 왜, 왜 이래?”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뜬금없는 상황에 이예주가 당황하여 휙휙 주위를 둘러보던 바로 그때, 그녀의 몸이 어디론가 마구 휩쓸려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몸을 콰득 움켜쥐고 강제로 물속에서 끄집어내는 것 같았다.
“으아악!”
던져지고 있는 건가, 끌려가고 있는 건가. 아니면 깊은 심연 속으로 빨려드는 것인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속도감에 이예주는 눈을 질끈 감고 무아지경으로 비명을 질렀다.
저항할 새도 없이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빙글빙글 빨려 들어가던 몸이 어느 순간 뚝 멈췄다.
으아악! 탕! 탕, 탕, 탕! 크흐악! 크르릉, 컹!
몸이 정지했다는 것을 알아채기도 전에 제일 먼저 느낀 감각은 청각이었다.
귀가 따가울 만큼 시끄러운 고성, 총성, 짐승 소리가 한데 뒤섞여 들렸다.
아까 많이 들었던 소리였다.
그녀는 질끈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네가 도망갈 길은 죽음뿐이라고 했을 텐데.”
시뻘건 눈을 형형히 빛내며, 남자가 지옥에서 올라온 사신처럼 이예주를 내려 보고 있었다.
이, 이게…… 이게 꿈이야, 생시야. 입을 떡 벌린 채 그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자, 남자에게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의 눈이, 그의 눈동자가 꿈에서 본 것처럼 오롯한 검붉음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시뻘건 색깔은 평소와 다를 것 없었지만 그보다 더, 더 검고 진해서 마치 피처럼……
피.
그의 눈동자를 보고 피를 연상하자 코끝을 타고 비릿한 혈향이 훅 끼쳐 들어왔다.
“이젠 네가 가진 능력을 이용하여 도망치려 들어도 소용없다. 무슨 짓을 하든 되돌려 놓을 테니까.”
그것은 말이 아닌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짓씹듯이 무서운 말을 내뱉는 남자의 입, 그 밑으로 조금 더 시선을 내리자 분수처럼 죽죽 피가 쏟아져 나오는 남자의 왼쪽 어깨가 보였다.
분명 어깨와 왼팔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빈 채 찢어진 옷소매만을 펄럭이고 있었다.
“흐, 흐…….”
이예주가 다시 남자의 얼굴로 휙 시선을 돌렸다.
아프지도 않은지 남자는 그녀를 내려 보며 섬뜩하게 웃고 있었다.
아아. 이, 이럴 수는 없어.
그녀는 정신이 완전히 끊어질 것만 같아서, 고개를 양옆으로 내저으며 움찔움찔 뒤로 물러났다.
남자의 팔이 사라졌다. 아아, 꿈처럼 람의 팔이, 람의 팔이 사라졌어. 아니야,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어야 해. 꿈일 거야. 흐으, 이건 꿈이야!
그러나 꿈이 아닌 현실임을 증명하듯 남자가 이예주의 앞에 주저앉아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 그녀의 어깨를 와락 움켜쥐었다.
뜨끈한 핏방울이 그녀의 말간 얼굴에 점점이 튀었다.
폭발한 남자의 팔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피였다.
“아무데도 못 가.”
피보다도 더 검붉은 눈으로 남자가 말했다.
그의 말이 폭력처럼 이예주의 귓속에 쑤셔 박혔다.
“네가 어디로 도망가든 그곳을 모조리 소멸시킬 것이다.”
“…….”
“그러면 다시 내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겠지.”
그 말을 한 후 남자는 빨간 입꼬리를 들어 올려 활짝 웃었다.
사라진 그의 왼쪽 팔, 핏줄기를 내리 흘리면서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웃고 있는 람.
“흐, 흐악! 아아아악!”
이예주는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졸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