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주의 얼굴에서 그와 재회한 이후부터 떠나지 않았던 환희와 확신이 점차 사그라졌다.
“왜…… 왜 그런 식으로 말해요?”
“…….”
“당신이 그럴 리…… 없잖아요. 당신이 나를 일부러 보낼 리가…….”
“대어를 낚기 위해선 가지고 있는 미끼 중 가장 값지고 좋은 것을 써야 하기 마련이지.”
확인 사살처럼 남자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떨어졌다.
그 순간 참 이상하게도 이예주의 귓가에 단단한 무언가가 쩍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전군, 공격 준비!”
그때, 여준의 목소리가 들판 위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어느새 흐트러진 전열을 정비한 다리족 인간들이 금방이라도 달려올 듯 전운을 띠었다.
그 모습에 이예주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걸 막기 위해 그 진창에서 탈출했는데, 기어코 놈들이 람을 공격하려 들고 있었다.
“람!”
이예주는 다시 허겁지겁 람을 돌아보았다.
뭐든 간에 일단 여기서 나가야 했다.
“여기서 당장 나가야 돼요! 빠, 빨리! 빨리……!”
그러나 돌아본 남자의 얼굴은 마치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나른한 웃음이 감돌았다.
“전군, 준비.”
여준을 조롱하듯 람이 그가 했던 말을 나직하게 따라했다.
이예주는 눈을 커다랗게 홉떴다.
람은 이 상황을 피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공격하라!”
최후의 통첩을 날리듯 여준에게서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공격.”
마지막까지 람이 여준의 말을 따라 뱉은 그 순간이었다.
와아아아아―
인간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우렁찬 함성 소리 사이에 이상한 소리가 섞였다.
아우우우―
꼭 짐승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저 멀리 숲 쪽에서부터 들려왔다.
그 순간 이예주의 코앞까지 다가온 다리족 인간 한 명이 갑작스레 훅 사라졌다.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간 일이라 그녀는 미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식하지도 못했다.
무언가가 으적으적 으깨지고 씹히는 소리.
자동차 한 대만큼 커다랗고 붉은 덩어리들이 눈앞을 넘실넘실 스쳐 지나가는 모습.
“크아악, 부, 붉은 개! 붉은 개다!”
인간들의 경악 어린 비명 소리. 그리고 왠지 모르게 드는 기시감. 기시감…….
훅― 코앞에서 커다란 붉은색 덩어리가 또 한 번 스쳐 지나갔다.
붉은 털들이 하늘하늘 내려앉았다.
이예주는 그제야 조금 더 넓은 시야로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누군가 숲에다가 빨간색 물감을 탄 물을 잔뜩 쏟아 버리고 있는 걸까.
아니, 그게 아니었다. 숲 쪽에서 수십, 수백 개의 붉은 뭉텅이, 아니 붉은 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털만큼 새빨간 눈동자를 가진 짐승이 사납게 우짖으며 인간을 덮쳤다.
눈을 한 번 뜨면 옆에 있던 다리족 동료가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적의 출현에 다리족의 대열이 흐트러진 것은 당연했다.
“으아악! 끄아악!”
붉은 개에게 물어뜯긴 인간들이 비명을 질렀다.
산 채로 몸의 일부분이 짐승에게 씹혀 먹히는 것만큼 끔찍한 죽음은 없으리라.
엄청난 속도로 달릴 수 있는 다리족들이 능력을 사용하여 피하려 들었지만 모두 허사였다.
아무리 빠르게 달려 봤자 그들은 거대한 가시장벽 안에 갇혔고, 목표를 한 번 정하면 그 목표를 따라잡을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는다는 붉은 개가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독 안에 갇힌 쥐 신세, 죽음을 모면할 방법은 없었다.
“붉은 개는 멸종했다고 그랬는데…….”
대체 이 많은 붉은 개들이 어디에 숨어 있었던 걸까?
끝도 없이 꾸역꾸역 밀려 나오는 들짐승을 바라보며 이예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렇지.”
람이 드디어 그녀의 말에 동조해 주었다.
“인간들에게 공식적으로는.”
이예주가 스윽 몸을 돌렸다.
“나를…… 나를 속였어요?”
람을 바라보는 그녀의 낯빛은 핏기가 완전히 가셔 하얗게 질려 있었다.
허옇다 못해 푸른색이 감도는 그녀의 입술이 경련하듯 덜덜 떨렸다.
저를 바라보는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예주가 새된 비명처럼 물었다.
“나를 속였어요?”
“속인 건 네가 먼저 아니던가?”
이예주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람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되물었다.
무엇을?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속였냐고…….
말을 더듬는 사람처럼 떨리는 입술로 떠듬떠듬 묻던 이예주가 일순 숨을 멈췄다.
남자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수차례 물었지. 네게 내가 모르는 능력이 더 있느냐고.”
“…….”
“그리고 수차례 말했다. 과거로 가는 방법 따윈 없다고.”
“…….”
“능력에 대해 말하지도, 그렇다고 내 말을 믿지도 않았지.”
남자의 말에 이예주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람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 남자가, 지금 나한테 무슨 소리를.
좀체 돌아가지 않는 머리와는 달리 그녀의 호흡이 점차 거칠어졌다.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는 그의 시뻘건 눈 아래,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나는…… 나, 나는…….”
람에게서 뒷걸음질 치며 이예주가 말을 더듬었다.
새파랗게 얼어붙은 그녀의 얼굴에 그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지? 붉은 개 일족이 멸종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곤 모두 원하는 대로 해 주었잖아.”
“…….”
“네가 그토록 원하던 과거에 관한 흔적을 알 수 있도록 해 주었고, 과거로 갈 수 없다는 것 또한 확인시켜 주었다. 모든 것을 안 후에 인간들과 나 중에서 결국 날 선택한 게 아니었나?”
자꾸만 제게서 멀어지는 인간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그가 지껄였다.
날 선택한 게 아니냐고.
그의 말이 맞았다.
이예주는 과거를 버리고 그를 선택했다.
그렇지만 그를 선택한 것은 수많은 고뇌와 갈등의 산물이었다.
이런 것을 원한 건 절대로, 절대로…….
“그러니 이리 와.”
“…….”
“예주야.”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는 남자의 모습에 허연 도자기같이 얼어붙어 있던 이예주의 얼굴에 천천히 금이 갔다.
“나는…… 나는…….”
나는, 과거로 가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해서가 아니라, 당신에게 돌아가고자 과거를 포기했다.
과거로 되돌아가 봉구를, 수학여행에서 죽은 같은 반 친구들을, 엄마를 되살리길 포기했고, 제 탈출을 도와주다 결국 같이 엮여 위험에 빠진 유나를 내버려 둔 채 홀로 ‘문’을 넘었다.
당신에게 가야 한다는 이유 하나로, 당신을 선택했다는 이유 하나로…….
“흐…… 흐으…….”
이예주의 입에서 기어이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턱을 타고 뜨거운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예주야.”
갑작스럽게 터진 그녀의 울음에 놀란 듯 남자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다가왔다.
그러나 이예주는 도리질을 치며 그를 피해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은 심정으로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으윽, 끄아악. 탕탕탕. 으르릉, 크르르.
인간과 짐승의 울부짖음이 한데 섞인 뤼미에르 들판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태양 빛을 담은 소담스러운 꽃봉오리가 산들산들 흔들리는 환상적인 정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군데군데 시뻘건 피 칠갑이 되어 있는 난장판, 그 한가운데에서 이예주가 기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무서워.”
으슬으슬 몸이 떨려와 그녀는 두 팔로 제 몸을 감싸 안았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이제는 람도 믿을 수 없어졌다.
그에게로 되돌아오면 이 한기가, 이 두려움이 모두 사라질 줄로만 알았는데.
이예주는 비행선에서 괴물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숨 막히는 불안과 공포, 경악을 고스란히 다시 느끼고 있었다.
“이예주.”
점점 제게서 멀어지는 인간 여자를 바라보는 람은 문득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인간 여자가 자신을 선택했는데도 초조하고 마음이 급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결국 참지 못하고 큰 보폭으로 그녀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을 때였다.
인간 여자가 흠칫, 한 눈에 알아볼 정도로 크게 몸을 떨더니 돌연 제게서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쯧.”
입 안이 말라 람은 혀를 찼다.
붉은 개들에게 여러 번 당부해 두었으니 별 탈은 없겠지만, 아직 다리족 놈들이 전멸하지 않은 상태라 저리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것은 위험했다.
“아악!”
왠지 그가 뒤를 쫓아오는 것 같은 불길한 느낌에 정신없이 도망가던 이예주는 흘끗 뒤를 돌아 보다 괴성을 질렀다.
눈깔 시뻘건 미친놈이 바로 제 뒤에 바싹 붙어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은 보고 가야지.”
사색으로 변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남자가 태평하게 조언했다.
이예주는 기절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미친, 미친. 왜 따라오는 거야! 따라 오지 마! 따라오지 말라고!”
놈은 술래잡기 놀이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지만 이예주는 그때부터 죽기 살기로 도망갈 구멍을 찾으며 뛰었다.
그런 제 곁을 붉은 개들이 훅훅 지나갈 때마다 혹시라도 다리족 인간들처럼 물어뜯길까 두려워 눈앞이 새하얘졌다.
뒤에는 시뻘건 미친놈이 쫓아오고 있고, 양옆은 사나운 짐승들이 날뛰고 있는 개판.
이예주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빨리! 빨리 이 미친 곳에서, 저 미친놈한테서 도망쳐야 돼! 빨리!
그런 절실한 바람을 들어준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그녀의 행로가 죽음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붉은 개들이 스쳐 지나가는 저 멀리, ‘문’이 열렸다. 무려 두 개나.
두 개의 ‘문’ 모두 너머에 영상이 보였다.
왼쪽은 푸르른 바다의 정경이었고, 오른쪽은 알 수 없는 나무들이 우거진 울창한 숲이었다.
“문! 문!”
사납게 문을 울부짖으며 이예주는 본능적으로 바다가 보이는 왼쪽 문을 향해 뛰어들었다.
붉은 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숲 쪽으로 내달리고 있었기에 택한 것이었다.
실은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어디든 일단 이 미친 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저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한테서…….
남자가 등 뒤를 바짝 쫓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돌아볼 틈도 없었다.
‘문’의 환한 빛이 몸을 감쌌다.
그렇게 이예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간신히 다시 만난 람에게서부터.
* * *
한끝 차이로 인간 여자의 후드를 놓쳤다.
움켜쥐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놓쳐 버린 것이다.
텅 빈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왜지?”
람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인간 여자가 왜 그렇게 사색을 하고 제게서 도망쳤는지.
“원하는 대로 모두 해 주었잖아.”
지금까지 그에게 거짓을 고하고 그를 속이려고 들었던 수많은 것들 중 살아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 동물, 식물, 신인류 할 것 없이 그를 속이고 기만하려 드는 것들은 모조리 소멸시켰다.
저 인간 계집을 제외하고는.
람은 허망하게 벌리고 있던 손을 아득 움켜쥐었다.
“나를 선택하였지 않아.”
이 세계의 가장 높은 산의 정상으로 보내 다리족 놈들의 실체를 보여 주면 계집이 모든 것을 포기하리라 생각했다.
그 놈의 지긋지긋한 과거 타령도, 손에 움켜쥘 만하면 나비처럼 포르르 도망가 버리는 망종 같은 버릇도, 그의 권능 아래 있지 않은 능력도.
모든 것을 알게 되면 결국 저를 선택하리라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인간 계집은 개화기가 끝나기 전, 제게로 되돌아왔다.
그것으로 모두 끝난 것이라고, 과거와 인간들을 버리고 저를 택한 것이라고 여겼는데…….
‘봐. 인간 여자는 너를 버리고 떠날 거라고 했잖아.’
한 줌 남은 검은 안개들이 왕왕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다를 마저 종알거리기도 전에 분노한 검은 파편이 휘두른 손에 의해 ‘꺄아!’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아무 데도 못 가.”
그가 짓씹듯이 으르렁거렸다.
더 이상 한끝 차이로 놓치고, 다시 되찾기 위해 온 대륙을 헤매며 뒤지는 짓 따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가려는 곳이 어디든.”
그곳이 어느 대륙이든 다 때려 부수고 파멸시켜서 다시 제 곁에 잡아 두겠다.
검은 파편의 시뻘건 눈이 일순 번뜩였다. 그 순간.
퍽-
그의 왼쪽 팔이 폭발하며 허공에 시뻘건 피를 흩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