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32)화 (234/319)

“우, 우리 일단 빨리 다른 데로 가요. 여긴, 여긴 너무 위험한 것 같아요. 당신이 꿈에서, 당신 팔이 꿈에서…….”

이예주는 숨을 돌릴 새도 없이 그에게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그를 껴안고 다시는 버리지 말라고 화를 내고 어리광도 부리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미래를 보았다. 그가 다치는 꿈을. 그리고 ‘문’이 열렸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일단 다른 데로 가요. 다, 다리족 놈들이 당신을…….”

유나를 두고 먼저 탈출하면서까지 선택한 남자였다. 

꿈에서 본 것처럼 다치게 둘 수 없었다. 

이예주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던 손을 내리고 어서 그와 함께 이 미친 산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아득 움켜쥐지 않았다면.

억센 힘으로 제게서 벗어나려는 이예주를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은 남자가 음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건 아무래도 나를 선택한 게 맞겠지?”

“……예?”

“개화기가 끝나기 전에 돌아오라고 했지 않느냐.”

“……개화기?” 

순간적으로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해 갸웃거리던 이예주가 곧 바로 무언가를 기억해 냈다. 

그렇지. 뤼미에르 꽃의 개화기. 남자가 사흘간의 개화기가 끝나기 전에 제게로 돌아오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게 당장 중요한 게 아닌데. 당장 중요한건…….

“그, 그건 먼저 피한 다음에 다시 얘기하는 게…….”

“그리고 넌 내게로 돌아왔지.”

그의 동공처럼 시뻘건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나를 선택했군.”

다시 한번 뜻 모를 소리를 반복한 남자가 이윽고 해사하게 웃었다. 

“그, 그게 무슨…….”

남자가 제게 이렇게 활짝 웃어 준 적이 있던가? 

좀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와중에도 미소 짓는 얼굴에 넋을 잃고 그를 올려 보던 순간이었다. 

바스락. 스스스, 바스락. 불현듯 풀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남성의 커다란 외침이 불청객처럼 그들 사이를 불쑥 끼어들었다.

“구원자님!”

람의 웃는 모습만 맹목적으로 바라보던 이예주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어깨를 떨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헉하고 날카로운 헛바람을 집어먹었다.

“저, 저 새끼가 어떻게 여길……!”

대체 저 망할 놈들이 어떻게 여기에 온 거지? 

나는 ‘문’을 넘었는데. 분명 문을 넘어 미래로……. 

람과 제가 있는 뤼미에르 꽃밭 한가운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여준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놈이 그토록 자랑하던, 붉은 개만큼 빨리 달릴 수 있다는 다리족 정예 요원 수십 명이 일사분란하게 시립해 있었다.

여준이 이예주를 바라보며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거대 개체가 수용실을 이탈했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정상으로 되돌아갔지만 구원자님께서 비행선 내부에 계시지 않아 많이 걱정했습니다. 저녁밥을 별로 드시지 않았다는 소리에 혹시 몰라 마킹 기구에 위치 추적기를 장착하여 구원자님의 몸에 삽입하지 않았더라면 바로 뒤쫓아 올 수 없었을 겁니다.”

“…….”

“이제 저희와 함께 돌아가시죠, 구원자님. 위험하니 어서 저희 쪽으로…….”

“닥쳐!”

여전히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놈의 이중성에 이예주가 치를 떨며 빽 고성을 질렀다.

“개새끼! 위치 추적기?! 위치 추우적기이?! 누구 몸에 위치 추적기를 심어? 그리고 이제 안 속으니까 헛소리 작작해라! 내가 네놈 거짓말에 속아서 개죽음당할 뻔했던 것만 생각하면……!”

이예주는 심호흡하며 람에게 다급히 말했다.

“람, 저 새끼들 말은 무시하고, 우리 어서 가요. 어서 가야지 당신이 다치지 않을 수가……!”

“검은 파편은 당신을 일부러 우리에게 보낸 겁니다!”

구원자가 저를 무시한 채 고개를 돌리자 여준이 애가 타는 목소리로 황급히 그녀를 설득했다. 

그녀를 위해 이것까지는 밝히지 않으려 했지만 별 수 없었다.

“처음 산 중턱으로 구원자님을 모시러 왔을 때, 검은 파편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던 말은 당신을 속이기 위한 거짓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별수 없었습니다. 놈에게 버림받았다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도저히 사실을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지랄 마! 더 이상 네놈에게 안 속는…….”

“당신을 데려가는 내내 우리는 검은 파편의 에너지 파동을 계속해서 감지했습니다. 블랙 웨이브 측정 기계가 터져 버릴 정도로 매우 강력한 파동이었고, 그래서 당신을 데리고 가는 것을 강제하다시피 서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치를 잴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에너지 파동을 내뿜는 것은 검은 파편의 본체뿐일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

“그러나 당신을 산 정상까지 데리고 가는 동안 검은 파편은 우리를 막지 않았습니다.”

여준이 숨조차 돌리지 않고 쉴 새 없이 말을 쏟아 냈다. 

듣지 않으려 해도 놈의 목소리가 화살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예주는 여준의 말에 멈칫했다가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네 말은…… 네 말은 이제 안 믿어.”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검은 파편은 당신을 우리에게 일부러 보낸 겁니다. 당신을 진정 아꼈다면, 놈이 당신을 끌고 가는 우리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않습니까?”

여준은 구원자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린 것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그녀를 설득하는 데에 조금씩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하면, 조금만 더.

“우리가 당신을 데리고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당신을 그대로 놓아준 놈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우리는 계속 경계해야만 했습니다. 보안과 정찰을 강화하고, 조금 위험하지만 구원자님을 비행선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 둘 수밖에 없었지요. 당신의 몸에 위치 추적기를 삽입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

“하지만 구원자님께서 비행선을 빠져나가 검은 파편에게 되돌아온 지금은, 그때 놈이 당신을 놓아주었던 이유를 잘 알 것 같습니다.”

“…….”

“아무래도 당신을 이용하여 우리를 비행선 안에서 끌어내려고 그런 게 틀림없…….”

“그만, 그만해!”

자신을 현혹하려 드는 여준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이예주는 거의 악을 쓰다시피 여준의 말을 막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네 말에 안 속는다고 했지! 그리고 람이 그럴 이유가 없잖아?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나를 이용해서 너넬 끌어내려 하겠어!”

이예주는 제 말에 확신을 싣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람을 돌아보았다. 

“그렇죠, 람?”

남자는 여준과 제가 설전을 벌이는 동안 말 한 마디 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준이 너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여서 그도 어이가 없는 모양이라고 이예주는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

“……람?”

“시간 됐군.”

남자가 마치 정오를 알리는 라디오처럼 무뚝뚝하게 읊조렸다. 

시간이 됐다고? 무슨 시간이……. 

스슷. 스으으으― 

그 순간 한 차례 거센 바람이 들판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예주의 머릿결 또한 그 거센 바람에 휩쓸려 천 자락 휘날리듯 정신없이 휘날렸다. 

“왜 땅이…….” 

얼굴을 덩굴처럼 얽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떼어 내며 그녀는 바람이 너무 세서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중얼거렸다.

마침내 바람이 가라앉고 얼굴에 얽힌 머리카락도 다 떼어 냈을 무렵, 그녀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다홍빛으로 물든 하늘을 가리며 자라나고 있는 굵은 덩굴줄기들이었다. 

뿌즉, 스슥, 뿌드득. 스산한 소리를 내며 거대한 가시덩굴들이 얽히고설켰다. 

그것들은 들판을 모조리 감싸며 자라났다. 

눈 한 번 깜빡하니 하늘이 사라졌고,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이니 덩굴 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빛줄기마저 사라졌다. 

“조, 족장님!”

갑작스럽게 자라나는 가시덩굴에 인간들은 우왕좌왕했다. 

위급 시 대피해야 할 퇴로가 차단되었다. 

무럭무럭 자라난 가시 덩굴은 마침내 산 중턱 전체를 덮어 버렸고, 하늘에서 빛이 사라졌다. 

활짝 개화했던 꽃들이 거짓말처럼 지면서, 새로운 빛이 지상으로부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장님! 퇴로가 가시 덩굴로 막혔습니다!”

“본부와의 연락 또한 두절되었습니다. 가시 덩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장님!”

요원들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상황이 좋지 않음을 보고했다. 

부득, 여준이 주먹을 꽉 쥐었다. 

구원자를 설득하기 위한 간절한 얼굴에서 순식간에 냉철한 지도자의 얼굴로 낯을 바꾼 그의 턱이 단단해졌다. 

구원자의 말을 듣고 하루 동안 끊임없이 산 중턱을 정찰했지만 검은 파편은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런 놈을, 사라진 구원자를 뒤따라오자마자 마주쳤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 직감했지만, 이런 식으로 중턱에 갇힐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가시 덩굴이 사라져 방심한 것이다. 

“어쩔 수 없군.”

여준이 결단을 내린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뇌까렸다. 

예기치 못한 검은 파편과의 직면에 구원자를 설득하여 최대한 피해 없이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작전은 실패했다. 

그도 모자라 퇴로까지 차단당한 위험천만한 상황. 

다리족 족장은 최후의 수단을 꺼내들었다.

“플랜 C. 정면 돌파한다.”

“조, 족장님!”

웅성거리는 요원들의 모습에도 여준은 결연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전군 모두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검은 파편을 공격하는 동시에 빠져나갈 틈이나 구멍이 있는지 이 지역 전체를 샅샅이 확인한다. 작은 구멍이라도 상관없다. 틈을 발견하는 즉시 보고하도록.”

“대장님! 그렇다면 구원자님의 구출 작전은 이대로 무산되는 겁니까?”

요원 중 한명이 질문했다. 

그 물음에 여준은 제 부하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이예주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자라난 가시 덩굴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는 족장의 시선에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놈이 냉혈동물처럼 차가운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여준의 본모습이었다.

“1순위 목표를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으로 두지만, 동시에 빠른 공격으로 검은 파편의 주위를 환기시켜 구원자를 구출해 낸다.”

“하, 징글맞은 놈들.” 

제발 나 좀 놓아줘! 족장이 내리는 명령을 들은 이예주는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뒤흔들었다. 

놈이 덧붙였다.

“단, 구출 도중 구원자께서 비협조적일 시.”

“…….”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모든 무력 동원을 허용한다.”

“아, 아니 저 새끼가……!”

이예주는 치를 떨며 연신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저를 날카롭게 쏘아보는 그녀의 눈빛에도 여준은 되레 당당히 그녀를 마주 보았다.

“당신은 검은 파편에게 속았습니다. 제 말을 믿지 않은 것을 곧 후회하게 될 겁니다.”

“아, 그럴 일 없다니까 그러네!”

끝까지 거짓말만 늘어놓는 놈의 악랄한 혀에 이예주가 꽥 소리를 지르고 람을 돌아보았다. 

이 남자는 저 자식이 자꾸 자신을 비난하는데 왜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 걸까, 속상하게.

“그렇죠, 람?”

람이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남자의 태평한 태도가 답답했다. 

“왜 자꾸 아까부터 아무 말도 안 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내게 무슨 대답을 원하지?”

“……네?”

“네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줄 테니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말해 봐.”

무슨 대답을 원하냐고? 

이예주는 남자의 말에 일순 머리가 하얘졌다. 

그거야…… 대답이라면 당연히 하나밖에 없지 않는가? 

하지만 그 대답은 그녀가 강요해서 나올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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