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31)화 (233/319)

이예주의 손을 한 번 더 힘 있게 쥔 유나는 다음 순간 뿌리치다시피 내쳤다.

“이제 빨리 가.”

“……유나야.”

“나도 도망쳐야 하니까 빨리 가라고!”

끼기, 기기기긱. 

기분 탓인지 괴물이 내는 울음소리가 아까보다 한층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유나의 다급한 외침에 이예주의 마음 또한 덩달아 다급해졌다. 

제가 자꾸 미적거려 봤자 유나에게 폐만 될 뿐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당장 람에게로 가야 했다. 

그래서 유나를, 그리고 그녀의 동생과 일족에게 버림받고 이용당하는 아이들을 도와야 했다. 

이예주는 주춤주춤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어 ‘문’ 쪽으로 이동했다. 

단 하나의 지표처럼 활짝 열린 문이 그녀를 맞이했다. 

문 바로 앞에 도착하자 떨어져 있을 때보다 람의 뒷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람이다. 드디어 람에게로. 

마지막으로 문을 넘기 전, 이예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이 눈에 익어 유나의 형체가 보일 만도 했지만, 자신만 볼 수 있는 ‘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광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직 유나가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나는 람한테, 그 사람한테 가야 돼.”

이예주가 속절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죄를 고백하듯 말했다. 

유나를 버리고 혼자만 살아남으려는 게 아니다. 

다만 그녀에겐 람에게 가기 위해서 ‘문’을 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이 유나가 집중하라던 이예주의 하나뿐인 선택이었다.

“그치만, 그치만 다시 돌아올게.”

하지만 무슨 일이 있건 간에 다시 돌아 올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네 동생이랑 다른 애들이 죽지 않도록 꼭 도와줄게. 정말 다시 올 거니까, 그때까지.”

“…….”

“제발 죽지 마.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다시, 다시 만나자, 유나야.”

이예주가 여러 번 당부했다. 제발 죽지 말라고. 제발, 제발……. 

유나의 목소리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들려왔다. 

유나가 있을 만한 어둠 속을 눈 하나 깜짝 않고 바라보며 애타게 기다린 것치고는 간결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알리자린.”

“…….”

“그게 내 이름이야.”

이예주는 보이지 않는 유나 쪽을 향해 환히 웃으려고 애쓰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런 제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알려 준 이름이, 절대 죽지 말라는 제 말에 대한 알겠다는 답 같았다.

“다시 돌아올게. 기다려 줘.”

이예주는 조금쯤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문’에 몸을 집어넣었다. 

유나에게 확답을 받으니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 같았다. 

문 너머 람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가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일지 모른다. 

게다가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산의 정상으로 가자고 설득해야 했다. 한시가 급했다. 

제발 바로 람에게 도착하길. 빨리, 빨리.

환한 빛이 이예주의 몸을 감쌌다. 

눈앞이 빛으로 점멸되어 도저히 눈을 뜨지 못할 때까지 유나가 있을 곳을 바라보며 그녀는 쉴 새 없이 되뇌었다. 

알리자린, 알리자린, 알리자린…….

*       *       *

어둠 속에서 여자의 기척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일전에 본부에서 보았던, 위성 카메라에 찍힌 순간 이동을 한 것인가. 

능력이 없다더니, 없긴 개뿔. 

여자가 삽시간에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알리자린은 작게 웃었다. 

고작 이틀을 겪었지만 정말 알다가도 모를 여자였다. 

자신을 챙겨 줄 필요 없다고 화를 내더니 먼저 오지랖 넓게 위험천만한 일에 끼어드는가 하면, 능력 따윈 쥐뿔도 없다며 빌빌거리다가도 가장 중요한 때에는 제 능력을 십분 발휘할 줄 아는 여자였다. 

족장이 알면 가히 기절할 정도로 신통방통한 능력이다. 

아니, 여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여자의 존재 자체일 테니까. 

끼긱, 끼기기긱― 

괴물의 소름 돋는 울음소리가 아까보다 가까워졌다. 

피 냄새를 맡고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저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다리족 놈들을 벌써 다 잡아먹은 건가. 

알리자린은 이예주가 떠난 기둥 뒤의 자리에 홀로 주저앉으며 생각했다. 

아마 부상을 당한 채 피를 흘리는 놈들은 다 잡아먹었겠지. 

나머지 살아남은 놈들은 지금쯤 1층 구석 한군데에 숨어 지원군을 기다리며 바들바들 떨고 있을 것이다. 

구원자가 이 미친 곳을 빠져나가려는 것을 보면 못해도 붉은 개 요원을 전부 보내어 막을 줄 알았는데, 고작 철수 한 명뿐이라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나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혈안이 되어 찾던 구원자를 내팽개치고 이런 하바리들만 보낸 걸로 보아 여자가 횡설수설 던진 말에 모든 총력을 다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그놈은 검은 파편을 제거하는 것밖에 모르는 놈이니까. 

멍청한 새끼. 알리자린은 젊고 건장하지만 앞뒤가 꽉 막힌 다리족의 족장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가 더 중요한지도 모르고.

쿵, 쿵. 기둥에 몸을 기대고 알리자린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이 눈에 익은 상태지만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생각이 있더라도 그럴 만한 힘이 터럭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B구역 1층은 전력이 차단되어 외부와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구도 엘리베이터도 없으니 방법이라고는 내부의 먹이들을 모조리 잡아먹은 히카톤이 날뛰다 잠잠해지길 기다리는 것뿐이다. 

족장이 오기 전까지.

여자에게 총알이 스쳤다고 한 것과 달리 알리자린의 다리는 총알에 관통당했다. 

지혈조차 할 틈이 없어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게다가 그 이후 억지로 몸을 일으켜 히카톤이 갇혀 있는 문의 잠금쇠를 조준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그 탓에 눈앞이 어질어질해 금방이라도 의식을 놓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이름 알려 줬어.”

알려 줘서 다행이야. 

아찔한 정신을 다잡으며 알리자린이 이예주에게는 보여 주지 못했던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 나이 또래에 맞는 소녀다운 해맑음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자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제가 본 미래는 자신의 죽음, 바로 지금이었다. 

구원자 주제에 아무런 능력도 힘도 없던 미래에서 본 여자. 

생사를 내달리는 급박한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채 어영부영하던 여자는 결국 자신을 버리고 홀로 가 버렸다. 

그래서 자신은 죽었다. 혼자 남겨져 괴물에게 잡아먹혀서. 

제가 미래를 보았다는 것을 확신하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비참한 죽음이 담긴 환영을 보았기 때문일까. 

알리자린은 구원자랍시고 온 볼품없는 여자가 아니꼽고 원망스러웠다. 

자신은 구원자도 뭣도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선을 그으며 화를 낼 때는 더더욱. 

구원자잖아. 인간을 구원해 준다는 구원자가 어떻게 이런 계집일 수가 있냐고. 

여자와 시비가 붙을 때마다 알리자린은 두려움과 분노로 점철되었다. 

이 여자는 결국 자신을 내버리고 혼자 가 버릴 거야. 

할 줄 아는 거라곤 지가 구원자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밖에 없으면서 여긴 왜 온 거야.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계집애. 

이기적이야. 이 여자가 날 죽게 만들 거야. 

여자가 자신을 둘도 없이 비참하게 죽게 만들 거란 생각에 알리자린은 더욱 날카롭게 반응하고 비웃고 여자에게 상처가 될 말들을 서슴없이 지껄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알리자린이 본 미래는 틀렸다. 

여자는 자신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저만 살겠다고 홀로 도망을 간 것도 아니었다.

“그래, 틀렸잖아.”

미래 따위.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거짓일 줄 알았다면 좀 더 잘해 줬을 텐데. 

그렇게 버릇없이 굴진 않았을 텐데. 

알리자린은 뒤늦게 아쉬움이 들었지만, 그래도 후회하진 않았다. 

다시 돌아온다고 해줬으니까 그걸로 충분하다.

끼기이이…… 

끼기기긱― 

히카톤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렸다. 

알리자린은 애써 기분 좋게 지은 미소를 거두지 않으며 더듬더듬 옆에 놓아 두었던 총을 잡아 들었다. 

제가 본 미래와 가장 틀린 점이 바로 이 점이다. 

미래인 줄로만 알았던 환영에서 자신은 꼼짝없이 히카톤에게 잡아먹혀 괴물의 일부가 되어 죽었다. 

그러나 현실의 자신은 그렇게 역겹게 죽지 않아도 되었다. 

사실 아까 전 총을 네 발이나 쐈을 때는 환영이 현실이 될까 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천만다행이도 환영은 그저 환영일 뿐이었다. 알리자린에겐 아직 한 발의 총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괴물에게 잡아먹혀 죽어서 또 괴물이 되지 않는 게 어디야.”

그녀는 입을 크게 벌려 총구를 제 입 안에 쑤셔 넣었다. 

다시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일은 없었다.

끼기, 끼기기긱. 

이제 정말 괴물이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읏, 스읏. 

스치고 비비는 소리로 추측하건데, 수십 개의 손들이 기둥을 더듬으며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알리자린은 눈을 감았다.

어쩌면 다음에, 다음 생에. 

다음 생이 안 된다면 다다음 생이라도, 한 번쯤은 꼭…….

탕― 

단 한 발의 총성이 B구역 1층에 외로이 울려 퍼졌다.

*       *       *

감았던 눈을 다시 번쩍 떴을 때, 이예주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깜깜한 B구역 1층에서 벗어나 ‘문’ 너머의 미래에 도착해 있었다.

아직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잠식되어 있는 상태라 그녀는 다리족들의 근거지에서 벗어났다는 자각을 바로 하지 못했다. 

심장이 가슴 속을 내리치듯 거칠게 벌렁거렸다. 

문을 넘은 거 맞지? 확실히 거기서 벗어난 거지?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제 얼굴과 머리를 정신없이 더듬어 보던 이예주는 문득 ‘쏴아아―’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붉게 노을 진 하늘 아래 활짝 핀 뤼미에르, 그 수많은 꽃송이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그의 뒷모습이.

“흐, 흐으…….”

이예주의 입에서 울음 같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람이었다. 드디어, 람이 있는 곳으로 온 것이다. 

현실이 맞겠지? 또 꿈을 꾸는 건 아니겠지? 

또 예지몽이라면, 또 끔찍한 꿈을 꾸는 거라면 싫어. 그에게 가지 못해서 무서움에 덜덜 떠는 건 이제 싫어. 

“……람!”

이예주는 그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두려워 그쪽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그에게 가는 데에만 치중한 나머지 제 발길이 채인 꽃송이들이 스러지고 꺾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그가 실제인지 확인해야 했다. 꿈이, 환영이 정말 아닌 건지. 손에 잡히는지 확인해서, 그래서……. 

정신없이 뛰어 그의 근처에 간신히 도달했을 때였다.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했지만 너무 마음만 앞선 탓일까. 

발에 빽빽하게 차이는 식물 줄기들에 걸려 그대로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어, 어!”

아찔함이 전신을 타고 흐를 무렵, 누군가의 팔이 그녀의 허리춤을 낚아채듯 단단히 잡아챘다.

“조심.”

곧 넘어질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예주는 넘어지지 않았다. 

대신 머리맡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넘어질 뻔했지 않아.”

이예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시뻘건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잠에서 막 깬 사람처럼 조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흐려지다가 종내에는 완전히 일그러졌다.

“이거…… 꿈 아니죠?”

이예주가 아무렇게나 늘였던 두 팔을 들어 남자의 양 뺨을 마구 만지고 문질렀다. 

부드럽지만 서늘한 피부가 손바닥에 감겨 왔다. 꿈이 아닌 것이다.

“나, 나 온 거 맞죠? 그렇죠?”

“그래.”

이예주의 무례한 손길에도 그것을 뿌리치지 않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긍정했다.

“다행이도 개화기가 끝나기 전에 도착했군.”

“흐으.”

덧붙이는 말에 이예주는 눈시울이 후끈해졌다. 

눈앞이 금방 뿌옇게 변했다. 

왔어. 드디어 도착했어, 람에게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