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 B7구역으로 이동 중. 반역자와 같이 총기를 소지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조심하라. 최대한 부상 없이 구출한다.
이예주가 다음 기둥 쪽을 향해 뛰기 무섭게 철수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메시아라는 염병할 암호로 자신을 칭하는 걸로 보아, 자신의 이동 경로를 확인한 후 곧바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그의 임무인 듯싶었다.
망할 새끼. 구출을 하긴, 누가 누굴. 이를 부득 갈며 이예주는 욕설을 내뱉었다.
족장이고 수하고 간에 다리족 놈들은 하나같이 괜찮은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탕, 타다타탕. 탕, 탕!
다음 기둥까지 뛰는 와중에도 뒤에서 끊임없이 총소리가 들려왔다.
앞만 보고 최대한 일직선으로 뛰기도 바빠 유나가 내는 소리인지, 아니면 다리족 놈들이 퍼붓는 총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탕, 탕! 듣기만 해도 고막이 터져 나갈 것같이 살벌한 총성이 들릴 때마다 눈앞이 노래지고 다리에 힘이 주루룩 풀렸다.
하지만 이예주는 이를 아득 물고 달렸다.
지금 제가 넘어지거나 쓰러진다면 안 그래도 버거울 유나에게 폐가 되리란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헉, 흐헉, 허억!”
쉴 새 없이 뛰고 뛰어 간신히 다음 기둥에 도착한 이예주는 턱까지 차오른 호흡을 고를 새도 없이 뒤로 돌았다.
“유나야, 괜찮…….”
유나가 제 뒤를 잘 따라왔는지부터 확인하려던 이예주는 거칠어진 호흡과는 별개로 숨이 턱 막혔다.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만큼 요동치던 심장이 덜컥 발끝까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유나가 아직도 그 기둥에 붙은 채로 서서히 접근하는 다리족 군인들에게 총질을 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뛴 건 자신뿐이었다.
저만 홀로 다음 기둥으로…….
탕, 타, 탕! 피융, 피융―
“뭐 해! 계속 뛰어!”
날아오는 총알들을 피해 기둥 뒤에 몸을 웅크린 유나가 다음 기둥 옆에 망연자실 서 있는 이예주를 바라보며 소리 질렀다.
자신을 바라보며 화를 내는 그녀의 얼굴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감정이라곤 날 적부터 거세된 사람처럼 언제나 무표정하고 건조하기만 하던 얼굴이 생동감 있게 꿈틀거렸다.
승강기까지 빨리 안 뛰고 뭐 하느냐고.
그러나 이예주에게 벌컥 성을 내며 채근하는 것도 잠시, 점차 포위망을 좁혀 오며 다가오는 군인들의 기척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뒤로 돌아 권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예주는 그제야 제 앞을 온몸으로 가로막은 유나 때문에 볼 수 없었던 다리족 놈들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눈치채지 못했을까.
기가 막힐 정도로 무장을 한 수십 명의 군인들이 숨어 있던 기둥 뒤에서 꾸역꾸역 쏟아져 나왔다.
여자 두 명을 잡기 위해 저리도 많은 수가.
장총부터 시작해서 커다란 기관총들까지.
고작 열일곱짜리 여자애 하나를 죽이기에는 과할 만큼 그들의 손에는 크고 살벌한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그에 비하면 유나는 어떤가.
우스울 정도로 작은 권총 하나에 의지하여 다가오는 수많은 적들을 홀로 아등바등 막고 있었다.
자신이 승강기에 도착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는 것을 이예주가 모를 리 없었다.
“안 뛰고 뭐 해!”
한바탕의 총질이 끝난 후 다시 총알을 피해 기둥 뒤로 몸을 피신한 유나가 또 한 번 소리 질렀다.
그 다급한 목소리에 이예주의 얼굴이 와락 흐려졌다.
그래, 맞아. 안 뛰고 뭐 해, 병신아.
지금 같은 상황에선 앞뒤 잴 것이 없었다.
유나가 처음부터 이예주를 뒤따를 계획 같은 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따위.
알 게 뭐야. 고작 안 지 이틀 된 애였다.
그래, 고작 이틀이야. 도와준 건 고맙지만 자신에겐 당장 가야 할 일이 있다. 잘 모르는 타인보다 더 중요한 사람에게 가야 했다.
여긴 너무 위험해. 당장 도망가야 해. 그러니까 지금 당장 승강기로 가야 하는데…….
탕, 탕탕. 두두두두. 피슉, 픽.
쉼 없이 울리는 시끄러운 총소리와 어두운 B구역 1층 곳곳에서 터지는 작은 불꽃, 매캐한 화약 냄새.
그 아수라장 속에서 꿋꿋하게 놈들을 상대하던 유나가 불현듯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을 때.
이예주는 정말로 앞뒤 잴 것 없이 뛰었다.
총알이 비처럼 쏟아져 기둥 벽과 바닥에 파삭파삭 박히는 그쪽을 향해.
승강기를 등지고 유나가 있는 쪽을 향해.
―목표물이 기둥 뒤로 숨었다. 진격 후 확인 사살…… 잠깐 사격 중지! 사격 중지!
구원자를 납치하려던 반역자의 제거를 위해 총알을 아낌없이 퍼붓게 했던 철수는 접전 구역을 피해 안전한 쪽으로 이동하던 구원자가 되돌아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예주는 그 위험천만한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유나가 있는 기둥에서 다음 기둥까지 뛸 땐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는데. 다시 돌아가는 길은 훨씬 쉽고 가까웠다.
미처 사격 중지 명령을 바로 듣지 못해 날아오는 총탄들이 있었다.
그것을 피해 요리조리 정신없이 뛰던 이예주가 가까스로 총알에 몸뚱이가 뚫리지 않은 채 유나가 숨어 있는 기둥까지 돌아왔다.
그때에서야 다리족 놈들의 총알 세례가 완전히 멈췄다.
“흐헉, 흐, 허억!”
가뜩이나 체력도 저질인 주제에 거의 똥개 훈련하듯 뛴 이예주가 기진맥진해서 유나의 앞에 철퍽 주저앉았다.
히익, 히익. 목이 타들어 갈 듯 아팠다.
그저 몸 가는 대로 날뛰었더니 완전히 균형이 깨져 버린 호흡을 가다듬기가 너무 힘들었다.
“뭐 하는 짓이야.”
진땀을 뻘뻘 흘리는 이예주의 머리맡으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이 와중에도 냉철함과 이성을 유지 할 수 있는 그녀가 자신보다 몇 배는 더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황당하겠지. 기껏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줬더니, 가던 길을 되돌아 온 병신이라니. 이 얼마나 멍청한 일인가.
예상했던 그 심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듯 유나가 한 박자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벌컥 화를 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어디, 흐헉. 헉…… 어디 총 맞았어? 응?”
“…….”
“어디 맞은 거야, 응?”
돌아오는 대답에 유나는 아예 할 말을 잃은 듯 이예주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거의 공기를 들이마시다시피 거세게 숨을 쉬던 이예주는 조금 진정하고 나서야 선명한 혈흔을 보았다.
유나의 오른쪽 종아리 부근에서 시뻘건 물이 질금질금 새어 나와 군복을 어둡게 적셨다.
서서히 안정돼 가던 이예주의 숨소리가 다시금 거칠어졌다.
“피, 피! 여, 여기 피 나잖아! 맞았어? 응? 여기 맞은 거……!”
“그냥 스친 것뿐이야, 호들갑 떨지 마.”
날뛰려는 이예주를 저지하며 유나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아까보단 분노가 빠진 그 목소리가 자칫 허탈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하나뿐인 그녀의 파란 동공에 일순 지독한 피곤함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되돌아온 여자로 인해 모든 전의를 상실한 사람 같아 보였다.
이예주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하지만 놈들이 조금씩 자신을 잡기 위해, 그리고 유나를 죽이기 위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도무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말로 스친 건지, 맞은 건지 알 수 없는 유나의 상태.
다친 그녀를 대신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총을 쏠 수도, 다리족과 맞서 싸울 수도 없는 무능력한 자신.
자신에겐 아무 힘이 없었다.
또 다시 닥친 능력의 한계에 이예주는 정말이지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어서 람에게 가야 하는데, 그에게 가기는커녕 제 발로 탈출로를 걷어찬 격이 되어 버렸다.
“완전히 망해 버렸네.”
문득 앞쪽에서 제 심정을 똑같이 대변하듯 나직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예주가 혼란으로 떨리는 눈을 들자 유나가 하나뿐인 벽안으로 그녀를 똑똑히 마주 보며 말했다.
“왜 바로 승강기로 가지 않았지? 내가 계속 뛰라고 했잖아.”
“……네가 바로 뒤따라온다고 했는데 안 와서…….”
이예주가 우물쭈물 변명했다.
게다가 네가 갑자기 총에 맞은 것처럼 풀썩 쓰러졌잖아.
뒷말은 곧바로 서슬 퍼렇게 노려보는 유나의 모습에 막혀 목구멍 저편으로 사라졌다.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모습에 이예주는 숙연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 바였다.
“내가 없는 길을 뚫어서 네 입에 떠먹여 줘야 직성이 풀려? 네가 구원자도 뭣도 아니라는 거 밝혀지면 너 2층 실험실로 끌려가는 거, 일도 아니야.”
“……”
“내가 안 와서 다시 돌아왔다고? 하, 지금 네 상황에 누굴 신경 쓰고 할 처지냐? 말했잖아. 힘도 없는 주제에 아무 때나 끼어드는 건 멍청한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너야말로!”
폭언처럼 쏟아내는 유나의 말들을 묵묵히 듣고 있던 이예주가 불현듯 고개를 번쩍 쳐들고 소리쳤다.
“너야말로 왜 나 도와줘? 너 죽을 수도 있는데 왜 자꾸 도와주냐고!”
“…….”
“바로 뒤따라온다고 했으면서 왜 안 따라와? 저 새끼들 막느라 나 혼자 보낼 생각이었어? 그럼 넌 잡히고?”
눈알에 핏줄까지 부득 세운 채로 말하는 이예주의 모습에, 이번에는 유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서 이런 모습이 있다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지 유나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그러나 그와 상관없이 이예주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 나는 너 감당 못해. 나 때문에 엮여서 네가 혹시 죽기라도 하면! 그 죄책감 나 혼자 감당 못한다고!”
울부짖듯 이예주가 진심을 고백했다.
그래, 가던 길을 되돌아온 것은 그래서였다.
결국 제 이기심을 위해. 더 이상 남의 목숨 위에 올라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피하려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면서 짐만 되는 주제에 다시 되돌아온 것은, 순전히 제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나를 인질로 잡아. 네가 내 머리 총 댄 채로 움직이면 쟤들도 어쩌지 못할 거야. 그래서 엘리베이터로 같이 가자. 같이 가서……!”
“저격수가 있어. 그렇게 나가면 내 머리통부터 박살 나겠지.”
“그, 그럼…….”
유나의 단정적인 말에 이예주가 동공을 양옆으로 흔들며 생각을 쥐어짰다.
“그럼 내가 나갈게. 내가 그냥 나가서 어떻게든…….”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울먹거리며 이예주가 말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침묵하던 유나가 돌연 곧 사라질 연기처럼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너 정말 멍청하구나.”
“…….”
“널 도운 건 내 선택이야. 그에 따른 결과는 오롯이 내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설사 내가 널 돕다 죽는다고 해도.”
유나가 잠시 말을 멈춘 채 벽을 짚고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총상을 입은 다리가 아픈지 힘을 주는 그녀의 미간이 깊게 주름이 생겼다.
이예주가 벌떡 일어나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내침뿐이었다.
“이건 내가 한 선택에 대한 책임일 뿐이야. 네가 죄책감에 몸부림 칠 필요 없어. 내가 널 원망할 일도 없을 거고.”
이예주는 거절당해 텅 빈 제 손과 유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끝까지 제 도움 하나 없이 홀로 일어난 유나의 무표정한 얼굴이 그 누구보다 강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이게 내가 한 선택이야. 나는 지금껏 내가 선택한 길로 살아남아 왔다. 그러니까.”
“…….”
“너는 네 선택에 집중해. 나랑 같이 죽고 싶은 게 네 선택은 아닐 거 아냐?”
유나가 물었다.
이예주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무능력한 제 한계에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런 이예주의 모습에 유나는 좋아, 하고 답하고는 권총의 탄창을 확인했다.
“이제, 총알 여섯 개 남았어.”
“여, 여섯 개?”
다리족 놈들은 수십 명이니 총알 여섯 개론 어림없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예주가 톡톡 손톱을 씹어 먹으며 불안에 떨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유나와 같이 둘 다 살 방법을.
지금 나가서 검은 파편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거짓말이라도 칠까.
여준에게 알고 있는 것들은 모두 다 말해 주겠다고, 대신 유나를 죽이지 말라고, 그렇게 협상이라도 제안해 볼까.
어떻게 해야 이 막막한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머리를 억지로 굴리고 또 굴릴 때쯤이었다.
철컥, 탄창을 다시 집어넣은 유나가 권총을 장전했다.
“뭐, 뭐 하는 거야?”
유나가 뜬금없이 장전한 권총을 들고 두 팔을 쭉 뻗어 그들이 있는 기둥에서 일직선 쪽으로 총구를 겨눴다.
이예주가 황급히 그 팔을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과 유나가 숨어 있는 기둥과 같은 선상에 위치한 기둥 빼고는 그저 공허한 공간뿐.
혹시나 기둥 뒤편에 군인이라도 숨어 있을까 봐 샅샅이 훑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유나는 조명이 어두운 데다가 멀찍이 떨어져 있어 잘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하고 텅 빈 공간을 향하여 조준을 마쳤다.
“왜…… 왜 아무도 없는데 거길 겨누고 있어?”
“아까 너한테 얘기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