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곳에 비해 조명도 어둡고 사방이 칙칙한 기둥과 거친 시멘트 벽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일까.
이곳을 지날 때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괜스레 주위를 경계하게 되었다.
텅 빈 지하 주차장을 연상시키는 아무것도 없는 광대한 공간일 뿐인데. 너무 거대해 기가 죽어서 그런가.
왠지 모르게 찜찜한 느낌을 덜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이예주는 유나의 팔에 좀 더 바싹 몸을 붙였다.
그녀가 냉정하게 팔을 쳐 내면 어쩌나 하는 일순 걱정이 들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흘긋 곁눈질했을 뿐 잡힌 팔을 빼내지 않았다.
뚜벅뚜벅, 텅 빈 1층에서 나는 소음이라고는 유나와 이예주의 엇갈린 발자국 소리뿐이었다.
배치되어 있는 사물들이 없는 탓인지 평소라면 신경조차 쓰이지 않을 발걸음 소리가 유독 신경 쓰였다. 유독.
“……기분이 좀 그래.”
이예주는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보며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말을 내뱉고 보니 정말이지 기분이 좀 이상했다.
이곳 1층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고는 자신과 유나뿐인데, 왠지 모르게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누가 있는 것같이…….”
“누가 있긴 있지.”
유나가 이예주의 말을 끊고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저기 문 뒤에 있는 것들이 다…….”
그 순간이었다.
유나가 흠칫하고 몸에 힘을 주더니 별안간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왜, 왜 그래?”
말 잘하다가 갑자기 왜 멈추는 거야. 이예주가 팔짱 끼고 있던 팔을 풀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유나는 대답 대신 되레 그녀의 팔을 잡아채어 제 뒤로 거세게 이끌었다.
“뭐, 뭐야. 왜, 왜 그래?”
“뒤로 조금씩 움직여.”
“뒤로? 무슨 뒤로.”
“환풍기까지.”
입구는 저쪽인데 왜 다시 기어 나온 환풍기 쪽으로?
이예주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며 답답해했다.
그러나 몸으로 마구 떠미는 유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뒤로 주춤주춤 움직여야 했다.
꽤 멀리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걷지도 않아 그들은 빠져나온 흡입구 바로 밑 부근에 도달했다.
“환풍구 다 왔는데.”
“왼쪽 기둥 방향으로.”
기껏 간 길을 도로 온 것도 모자라 또 다른 명령을 내리는 유나 때문에 이예주는 불안이 불길처럼 치솟았다.
당장에라도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틈도 없이 유나가 무지막지하게 이예주를 잡아끌었다.
결국 1층의 정중앙에 위치한 환풍구보다도 더 뒤로 후퇴하여 유나가 말하는 왼쪽 기둥에 도달했을 즈음이었다.
불현듯 유나가 이예주의 어깨를 기둥 뒤로 퍽, 세게 밀어 넣었다.
그러더니 상황을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철컥, 지체 없이 권총을 장전한 그녀가 팔을 뻗어 어느 곳을 조준했다.
탕―!
그 뒤로 귀가 따가울 만큼의 굉음이 뒤따랐다.
탕! 타, 탕―!
첫 발포에 이어 연달아 세 번의 총성이 고요함을 요란스럽게 갈랐다.
윽! 어디선가 누군가의 고통 어린 비명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환청인지 실제인지는 구별할 수 없었다.
“……위됐어.”
삐이이이―
“……테니까…… 주면 넌…….”
바로 귀 옆에서 커다란 총성이 터진 탓일까.
비행기에 올라탄 것처럼 귓속이 먹먹하고 병원에서나 들릴 법한 ‘삐이이―’ 소리가 들렸다.
슬로우 모션처럼 제게 소리치는 유나의 입모양이 느리게 보였다.
어, 어. 뭐라고?
이명을 듣기 싫어 두 손으로 힘겹게 귀를 가린 채 되물었을 때.
유나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이예주의 어깨를 잡아채 거세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
거센 외침에 이예주는 눈을 뜨고 있었음에도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리는 기분이 들었다.
답지 않은 다급함이 담긴 유나의 하나뿐인 청안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 어?”
“우리 포위됐다고!”
“포……포위?”
귀를 괴롭히던 이명이 그쳤다.
이예주가 간신히 정신을 차려 상황을 파악하려 할 즈음, 기둥 바깥쪽으로부터 커다란 확성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아.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유나 일병.
철컥철컥, 철컥. 귀에 익은 남자의 목소리와 동시에 둔탁한 소음들이 고요했던 B구역 1층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이예주는 기겁을 하고 유나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무리 제가 멍청하다 해도 무장한 장정들이 움직이는 소음조차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저, 저거. 저거 철수 상병 목소리 맞지?”
이예주의 물음에 대답하듯 철수의 음험한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쩌렁쩌렁하게 퍼졌다.
―지금이라도 투항한다면 구원자님의 납치를 사주한 뒷배까지는 캐지 않겠다는 족장님의 전언이다.
“무슨, 납치를…….”
납치는 또 뭔 놈의 개소리야. 이예주가 여전히 어리바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반복한다. 총을 버리고 당장 투항하라, 유나 일병.
“……빌어먹을.”
이예주를 돌아보며 그녀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외의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런 모지리를 납치해서 어디다 써먹겠냐는 눈빛이었다.
이예주는 아직도 먹먹하고 뻑적지근한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쑤시며 잘근잘근 아랫입술을 씹었다.
망할. 그러니까, 우리 포위된 거라고? 대체 어느 사이에? 분명 1층에는 우리밖에 없는 것을 확인했는데.
“저, 저놈들이 대체 어떻게 알고…….”
“족장 놈을 너무 얕봤어. 네 객실로 날 보내고 나서도 혹시 몰라 사람을 보내 입구를 막았겠지.”
네게 너무 많은 걸 보여 줬으니 네가 검은 파편에게로 돌아가려는 것만은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 드는 거야.
덧붙이는 유나의 말이 꼭 흐리멍덩했던 머리 위로 찬물을 와르르 쏟아붓는 것 같았다.
자신이야말로 여준 놈을 너무 얕봤다.
그렇게 치밀한 놈인데, 지금껏 만났던 그 어느 시간족보다 얍삽하고 이중적인 놈인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탈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 얼마나 바보 천치 같은 일인가.
“그, 그럼 우리 어떡하지? 우리 이제 어떻게 빠져나가?”
이예주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숨을 껄떡거리며 물었다.
아까 전 유나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당장에라도 2층 연구실로 보내질 거란 말.
짐승처럼 벌거벗겨진 채 원통형 수조에 갇힌 눈족 장로. 그 여자와 같은 꼴이 될지 모른다는 소리였다.
이예주의 물음에 유나는 대꾸하지 않고 기둥 뒤에 바짝 등을 기댄 채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동태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칼이 기둥 밖으로 삐져나오기가 무섭게 ‘피융―’ 하고 총알이 기둥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바로 옆벽이 먼지를 일으키며 움푹 파였다.
조금만 더 조준이 정확했더라면.
아니, 조금만 더 고개를 내밀었더라면 빗겨 나간 총알은 그대로 유나의 여린 뺨에 박혔을 것이다.
파인 기둥 모서리를 발견한 이예주는 눈을 부릅떴다.
이런 건, 이런 건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었다.
그것도 외국영화, 잘 보지도 않는 외국 첩보 영화.
총알이 마구 오고 갔다. 맞으면 그대로 요단강을 건널 살상 무기가.
그러나 유나는 방금 죽을 뻔했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메마른 얼굴을 이예주에게로 돌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환풍구로 다시 올라가긴 글렀어. 전방 200미터 앞에 한 놈이 있는 걸로 보아 너무 가까이 접근한 상태야.”
“그, 그럼……!”
동의를 구하기 위해 입을 연 게 아니라 그저 통보하기 위함이었는지 유나는 곧 다시 고개를 휙 반대편으로 돌렸다.
이예주는 무언가 말을 하고자 입술을 달싹였지만,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는 유나의 모습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상황은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더 이상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조차 사라져 오로지 팽팽한 긴장감만이 가득 찼다.
“……승강기로 가야 돼.”
유나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예주는 눈을 댕그랗게 뜨면서 덩달아 언성을 낮추었다.
“스, 승강기?”
“객실로 되돌아가서 창문으로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어.”
“그치만…….”
환풍구로 다시 올라갈 수 없다는 유나의 말은 타당했다.
기둥 밖으로 나가기 무섭게 유나와 자신은 벌집처럼 구멍이 뚫려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예주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가슴 한구석이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치만 너무 위험해. 차라리 너는…….”
“그나마 족장 대신에 멍청한 철수 새끼가 지휘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가능한 일이야.”
다른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입을 연 이예주를 막고 유나가 엄포를 두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족장이 있었으면 우리가 승강기로 이동하는 것을 보는 순간 어떻게 빠져나갈 생각인지 바로 눈치챘을 거야. 승강기 근처에 도달하기도 전에 탈출은 실패했을 거다. 놈이 전력부터 차단할 테니까.”
“…….”
“족장보다 둔하고 멍청한 철수가 온 것만으로도 행운이야. 어차피 잡힌다 하더라도 당장에 널 죽이진 않을 테니 그렇게 벌벌 떨 필요 없어.”
잔뜩 경직된 이예주를 풀어 주려는 듯 유나가 제 딴에 가벼운 어투로 이야기했지만, 완화가 되긴커녕 이예주의 얼굴은 더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동쪽 대륙 지하 탄광굴에서 같이 뒹굴었던 제드의 얼굴이 번뜩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디서 들어 본 것처럼 기시감이 든다 싶더라니, 그때 자신이 제드에게 했던 말이었다.
어차피 용병대장에게 잡히더라도 넌 엉덩이 몇 대만 맞고 끝나겠지만, 나는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
어쩐지 그 말이 지금의 제 상황과 겹쳐 보였다.
혹여나 재수가 더럽게 없어 탈출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유나의 말처럼 능력의 유무를 확인하기 전까지 자신은 살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여준 놈이 제가 구원자임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시험하려 들고 있지만, 어쨌든 다리족은 ‘구원자’라는 존재 자체에 커다란 의의를 부여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족장은 이예주의 입을 통해 검은 파편에 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더 듣고 싶어 안달복달이 난 상태가 아닌가.
그렇지만…… 자신은 어떻게든 명줄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그럼 유나는?
그저 자신을 B구역 입구까지만 데려다주려 했던 유나는 이미 구원자를 납치했다는 오해까지 뒤집어쓴 상태가 아닌가?
“나는…… 나는 그러니까…….”
이예주는 유나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며 하릴 없이 떨리는 동공으로 무언가 할 말을 찾았다.
지하 탄광굴을 헤매고 뒹굴 때 제 말을 들었던 제드가 바로 이런 기분이었을까.
생사의 갈림길에서 이를 까득 물고 뛰었던 자신을 바라보며 이런 심정을 느꼈을까.
“나는…….”
“정신 똑바로 차려. 이번엔 정말 멍청하게 굴면 안 돼.”
유나가 불쑥 손을 뻗어 이예주의 옆머리 끝을 한 줌 꽉 잡아 당겼다.
아, 따끔한 통증에 이예주가 짧게 신음했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였는지 유나는 머리채를 쥐었던 손을 금방 털어 냈다.
“죽진 않겠지만 죽기 직전까지 다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총 맞고 싶지 않거든 재게 재게 움직이라고. 알았어?”
“어, 어. 응.”
“내가 뛰라고 신호하면 바로 뒤쪽 기둥까지 뛰어. 뒤따르면서 엄호할 거야. 총소리 신경 쓰지 말고 최대한 일직선으로 달려.”
유나가 총구로 이예주 어깨 너머를 까딱거렸다.
그 방향을 따라 뒤를 돌아보자 다음 기둥이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유나의 말처럼 총 맞기 싫으면 죽기 살기로 뛰어야 하는 거리.
그런 구간이 그 뒤로 총 세 군데.
엘리베이터까지 기둥이 무려 2개나 남아 있었다.
그 까마득한 거리에 이예주는 자신감이 급격히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유나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냈는지, 다시 기둥 벽에 바짝 붙었다.
자신도 한 행동력 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바로 실천에 옮기는 유나의 결단력은 도무지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이예주는 잡생각을 버리고 뛸 채비를 단단히 했다.
다른 생각은 그만해. 지금은 오로지 탈출, 탈출만 생각하는 거야.
결연한 눈으로 유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순간이었다.
기둥에 붙어 바깥의 동태를 살피던 그녀가 총을 붙잡은 두 손을 기둥 밖으로 쭉 뻗었다.
탕, 탕―!
두어 번의 총성과 더불어 ‘끄윽’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뛰어!”
뒤이어 유나가 외쳤다.
이예주는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미친 듯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