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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앤 매드 (227)화 (229/319)

“조금이라도 더 동생을 살리려면 난 여기 남아서 네 탈출과 내가 조금도 연관이 없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해. 네가 완전히 산 정상에서 빠져나갈 때까지 족장의 주의를 끌어 시간도 벌어야 하고.”

“무, 무슨. 네가 왜 그런 짓을 해?”

“어제 내가 가져다준 저녁밥에서 영양제라 했던 알약 캡슐 기억나?”

이예주는 찬찬히 어제 일을 떠올렸다. 자신의 가슴 앞에 거의 밀치듯이 식판을 들이대었던 유나가 기억났다. 

식판 위에는 꿀꿀이죽과 에너지 바, 건빵 몇 개, 그리고 정체불명의 알약이 있었다.

“그거 사실 영양제가 아니라 위치 추적기야.”

유나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운 소리를 지나가는 말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네가 저녁밥을 먹지 않아서 내가 대신 먹었어.” 

“뭐?!”

“쉿.”

이예주는 너무 놀란 나머지 커다란 소리로 되물었다. 

뭐? 뭐? ……뭐? 질문이라기보단 괴성을 지르는 것에 가까운 그녀의 목소리가 먼지 깔린 환풍구를 타고 텅텅 울려 퍼졌다. 

유나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댄 후에야 이예주는 흥분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대체 왜, 왜 그랬어?”

“…….”

“그냥 나한테 사실대로 말하고 없앴으면 됐잖아.”

이예주는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유나의 팔을 잡고 말했다. 

대체 왜. 왜 그런 짓을 한 거냐고. 내가 필요 없다고 했잖아. 

구원자 같은 거 아니니까, 챙겨 줄 필요 전혀 없다고. 분명 그렇게 선을 그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준 놈이 제게 위치 추적기를 달려고 했다는 것도 환장할 지경인데, 이젠 유나까지 저 때문에 곤란해질지 모른다. 

그 생각에 이예주의 눈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탈출을 위해 억지로 다져 눌러 뒀던 불안감이 다시 치솟는 것 같았다. 

그러나 벌벌 떠는 이예주와는 달리 유나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듯 담담하게 읊조렸다.

“안 그랬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억지로라도 네게 칩을 삽입하려고 했겠지. 네가 이 비행선 안에 있는 한 너랑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게 나니까 상관없을 거라 판단했다.”

“그렇다고 네가……!”

네가 희생할 필요는 없었어.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닥친 일일 뿐이고, 너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고, 이예주는 그렇게 외치려고 했다. 

유나가 엄숙한 얼굴로 그런 그녀를 막아서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럴 시간 없어.”

“…….”

“족장이 눈치채기 전에 빨리 가야 돼.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지. 게다가 너 B구역 입구 문을 열 수 있는 카드도 없잖아?”

유나가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지적했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랬다. 중앙 통로에 난 구멍으로 빠져나갈 생각에만 몰두한 나머지 B구역 출입구는 어마어마한 크기와 두께의 문으로 막혀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나지막이 욕설을 읊조리며 이예주는 왜 B구역의 문이 A구역에 비해 어마어마한 위엄을 자랑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부족 내부에서 중범죄를 일으킨 미친놈들, 괴물을 만드는 데 재료로 쓰일 눈족 아이들 혹은 이미 변해 버린 괴물들까지 모조리 격리시키기 위함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치밀하고 졸렬하기 짝이 없는 다리족의 실체에 이예주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러는 사이 유나는 그녀에게서 몸을 돌려 다시금 환풍구 속으로 기어 들어갈 채비를 했다.

“내가 너와 함께하는 건 B구역까지니까 내가 네 탈출에 완전히 가담하는 거라고 착각하지 마. 그 뒤부터는 네가 잡혀서 연구실 수조에 갇히든, 족장의 손에 죽임당하든 상관하지 않을 거니까.”

매몰차다고 느껴질 만큼 싸늘한 말들을 남겨둔 채 유나는 그대로 쏙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와 같이 싸가지 없는 말투였지만 이예주는 오히려 안도했다. 

부디 제 탈출과 유나가 엮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간절히 바랐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길만 알려 주고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조차 할 수 없는 답답한 현실에 마음 한쪽이 무거워졌다.

“얼른 안 따라오고 뭐해. 나가기 싫어?”

“어, 어. 가.”

구멍 안쪽에서 울리는 재촉에 이예주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몸을 수그렸다. 

다시 비좁고 더러운 환풍구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그녀는, 어서 이 끔찍한 곳에서 탈출해 람에게로 갈 생각만 하자고 여러 번 자신을 세뇌했다.

*       *       *

유나의 뒤를 따라 먼지 구덩이 속을 벅벅벅 기어 다닌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조금만 몸을 들어 올려도 바로 공간이 꽉 차던 통로가 점점 넓어지더니 어느 순간 확 트인 넓은 공간에 이르렀다. 

정확히는 넓은 공간이 아니라 넓은 구덩이였다.

1층에 이렇게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나? 이예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기가 어디…….”

“1층 천장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환풍기야.” 

유나가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커다란 구멍 근처로 재빠르게 이동하며 답했다. 

“조심해.”

이예주는 혹여나 유나가 구멍 속으로 뚝 떨어질까 봐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걱정은 기우였던 듯 얇은 철망이 구멍의 중간을 막고 있었다. 

철망 위로 뛰어내린 유나는 능숙하게 발을 움직여 중앙에 있는 네모난 문의 손잡이를 잡아 열었다. 

아래를 내려 보며 금방이라도 뛸 것처럼 굴던 그녀는 여전히 기어 나온 통로 근처에서 요지부동인 이예주를 돌아보았다.

“거기서 뭐 해. 빨리 와.”

멍청히 엎드려 있는 이예주가 못마땅한지 유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힐난의 눈초리에 이예주는 마지못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은 움직임이라 칭할 수 없을 만큼 미미한 움찔거림에 불과했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굼뜨게 행동하는 모습에 유나가 다시 한 번 쏘아붙였다. 

“나가기 싫어?”

“아,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저보다 훨씬 어린애도 저렇게 의연하게 행동하는 마당에 차마 무서워서 철망 위로 못 올라가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이예주는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유나의 시선을 피할 길이 없어 꿈쩍도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으흐으, 밑에 보지 마. 밑에 보지 마. 

최대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도록 노력하며 유나가 있는 철망 위로 내려선 이예주는 ‘푸하!’ 하고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 내쉬었다.

“자, 왔어! 이제 어떻게 내려가? 빨리 가자.”

밑에 못 내려 보겠으니까. 뒷말을 간신히 삼킨 채로 다급히 묻자 유나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내가 먼저 내려갈 테니까 나 내려가는 모습 잘 봤다가 똑같이 따라 해.”

“뭐?! 그, 그게 무슨! 사다리는! 사다리 같은 거 없어?”

“환풍구 통해서 몰래 탈출하는 주제에 무슨 사다리를 찾아?”

고개를 이쪽저쪽 돌리며 사다리를 찾는 이예주를 흘겨보며 유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이예주는 아래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철망 밑은 까마득했다. 

망할, 망할! 사다리도 없이 여기를 어떻게 내려가. 아까 5층에서 2층까지 손잡이만 잡고 내려온 것도 기적이구만! 

아찔한 높이의 1층 바닥을 바라보던 이예주는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도리질을 쳤다.

“나, 나, 난 못해!”

“그럼 네가 먼저 뛰어내리든가.”

“뭐라고? 그게 말이…….”

“안 갈 거면 나 먼저 내려간다.”

그게 말이야, 방구야! 하지만 이예주가 채 잡을 틈조차 주지 않고 유나는 열린 철망 사이로 몸을 훅 내렸다.

“아니, 야! 유나야! 자, 잠깐! 잠깐!”

어찌나 급했는지 이예주는 고소공포증도 잠시 잊고 유나가 몸을 내린 네모난 구멍 가장자리에 후다닥 달라붙었다. 

그리고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빨아들일 것이 없어서인지 거대한 프로펠러는 멈춰 있었다.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그 사이로 쑥 뛰어내린 유나는 아슬아슬하게 프로펠러를 잡고 매달렸다. 

이어서 아래쪽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사면으로 된 흡입구를 타고 빠르게 내려갔다.

기교를 부리듯 몸을 놀려 흡입구의 끝에 매달린 그녀는 곧 바닥에 가뿐하게 뛰어내렸다.

무슨 스파이더맨이야?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에 이예주가 눈까지 비비고 다시 유나를 쳐다보았다. 

먼지가 묻은 소매를 탁탁 털어 낸 유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봤지? 이렇게 내려와.”

“……미친.”

이예주는 멍한 얼굴로 대꾸했다. 

“빨리. 못하겠으면 대충 일자로 뛰어내려. 받아 줄 테니까.”

유나가 두 팔을 벌리고 뛰어내리라는 듯 손목을 까딱거렸다. 

팔이 얇아 받아 준다는 말이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그냥 되돌아갈까. 굳이 떨어져서 머리가 깨질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또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이예주는 유나와의 거리를 눈대중으로 재어 보며 잠시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귀신같이 알아챈 유나가 대번 압박했다.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거라면 가도 좋아. 그놈이 아직 기절해 있다면 별 탈 없이 네 방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놈?”

“아까 네가 두드려 패서 기절시킨 놈. 아직도 기절한 상태인지, 깨어났을지 나도 모르니까.”

“아흐! 진짜!”

협박과도 같은 유나의 말에 결국 이예주는 꾸물꾸물 철망 구멍 속으로 다리를 밀어 넣었다. 

흐으, 나 진짜 못하겠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그 쓰레기 같은 새끼가 깨어나 들어왔을지도 모를 환풍구를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B구역 문을 통과해서 빨리 람에게 가야 한다는 것만은 사실이니 이예주가 선택할 수 있는 것 또한 한 가지뿐이었다. 

그래, 오로지 람에게 가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이예주는 몸을 움직였다. 

끙끙거리며 구멍 안으로 몸을 내리니 바로 거대한 프로펠러 날개 위에 발바닥이 닿았다. 

유나는 날개를 잡고 이쪽저쪽 밟아 가며 날다람쥐처럼 가뿐히 내려간 것 같은데. 

자신은 프로펠러 위에 발을 딛는 것조차 몸이 덜덜 떨렸다.

여전히 철망 모서리를 두 손으로 꽉 부여잡은 이예주가 발발거리며 아래를 돌아보자 유나가 손가락으로 흡입구 벽을 가리켰다.

“거기 옆에 왼쪽, 발 딛을 만한 곳이 튀어나와 있어. 밟아.”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철판이 덧대어진 부분에 간신히 발끝을 댈 수 있을 만큼의 홈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예주는 유나가 지시한 왼발을 최대한 뻗어 간당간당하게 그곳에 발을 디뎠다. 

어정쩡한 그녀의 모습에 유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렇게?”

“잘하고 있어. 그리고 오른쪽 발 더 밑으로 내리고 왼쪽 발 다시 내려서 프로펠러 잡고 매달려.”

격려 어린 조언에 이예주는 좀 더 용기를 내어 유나가 시키는 대로 최대한 몸을 움직여 보았다. 

어서 빨리 내려가 이 지옥 같은 높이에서 탈출하고 싶었지만 몸이 마음을 쉽게 따라 주지 않았다. 

유나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은 자세를 이예주는 10분이 넘게 소모한 이후에야 간신히 비슷하게 따라 할 수 있었다. 

마침내 흡입구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도 발이 바닥에 닿지 않자 이예주는 공포에 빠졌다.

“아, 악! 나 떠, 떨어져! 나 떨어져! 무서워!”

“잡았다.”

공중에서 미친 듯이 발버둥 치던 두 다리가 유나의 손아귀에 꽉 잡혔다. 

“손 놔.”

미심쩍어하면서도 애처롭게 붙들고 있던 홈을 놓자 몸이 아래로 쑥 빠졌다. 

이예주는 깔끔하게 바닥에 안착했다.

“나, 나 내려왔어? 머리 안 깨지고 잘 내려온 거지?”

이예주가 두 손으로 제 이마와 뒤통수를 더듬더듬 만지며 물었다. 

그 모자란 행동에 유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뒤로 돌았다.

“서둘러.”

“나, 나 내려온 거 맞지? 응? 흐, 흑, 미친…… 다시는 이런 거 하기 싫어.”

제가 서 있는 바닥과 천장에 매달려 있는 흡입구를 번갈아 바라보며 울먹이는 이예주를 내버려 둔 채 유나는 입구 쪽으로 먼저 빠르게 걸었다. 

이예주는 한참이 지나서야 유나와의 거리가 꽤 멀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후다닥 그 뒤를 뒤쫓았다. 

“가, 같이 가!”

혹시라도 저를 두고 가 버릴세라 한달음에 유나에게 달려간 이예주가 대뜸 그녀의 팔을 잡아 팔짱을 꼈다. 

“혼자 막 가지 좀 마! 여긴 좀 무섭단 말이야.”

저보다 훨씬 어린애한테 달라붙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었지만 별 수 없었다. 

정말이었다. 이 비행선은 처음 끌려왔을 때부터 찝찝하고 꺼림칙한 공기가 맴돌았다. 

B구역 1층은 그중에서도 유난히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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