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무것도 없어. 간신히 운 좋게 살아남은 버러지만도 못한 눈족 계집이 대체 뭘 걸 수 있겠어. 그러자 여준이 구원자가 올 때까지 내 동생의 거처를 옮겨도 되냐고 물어봤지. 절대로 이상한 곳이 아니라고 했어. 오히려 전보다 훨씬 양질의 식사가 규칙적으로 제공될 것이며, 동생이 거처하고 있는 곳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안정적인 곳에 머물게 할 것이라고 했지.”
“…….”
“너.”
그녀가 검지를 뻗어 이예주를 찍듯이 가리켰다.
“네가 다리족으로 와서 진짜 구원자가 나타났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라고 했으니까 난 흔쾌히 허락했어.”
“…….”
“동생에게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했고. 난 사실 그 새끼가 어떻게 되든 말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어. 미래를 봤다고 해도, 드디어 군의 일원이 되어 새 이름을 받았는데도, 나는 여전히 놈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생존해야 했다. 쓸모를 입증하지 않으면 죽거나 도로 그 진창 속을 기어 다녀야 할 테니까. 다시 B구역의 밑바닥으로 되돌아가긴 죽기보다 싫었어. 그런데.”
유나는 암울한 과거사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제 이야길 늘어놓았다.
“어느 날 거짓말처럼 정말로 네가 이 산에 나타난 거야.”
“…….”
“그리고 나는, 내가 동생을 어느 곳으로 밀어 넣었는지 알게 되었지.”
유나가 이예주를 가리키던 손을 내리고 제 오른쪽 벽에 부착되어 있는 패드의 버튼을 눌렀다.
삑, 지이이이잉― 벽이 한일자로 갈라져 아래위로 스르륵 움직여 그 안에 숨겨 놓았던 내용물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지나쳐 온 흰 방 안의 남자아이가 있던 방과 동일한 유리벽과 구조의 또 다른 흰 방이 천천히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안에.
유나보다 좀 더 앳된, 그녀와 똑 닮은 얼굴의 머리가 빡빡 밀린 남자아이가 벽에 기대어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엔 어디 A구역의 객실 하나 얻어서 잘 지내는 줄 알았어. 다리족으로 귀화한 후에는 새 이름 수여식을 하고 군의 계급 체계를 익히느라 정신없이 바빠서 생각조차 할 틈이 없었거든. 별로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해서 각자 죽지 않고 잘 지내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어.”
“…….”
“언제 죽어 버려서 히카톤으로 변할지 모르는 눈족 아이들이 득실거리는 수용실보단 훨씬 나을 거라고 믿었다. 또 그렇게 해 주리라, 족장이 약속했지. 제때제때 양질의 식사를 제공하고 안전한 장소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겠노라고. B구역에 수용된 눈족 아이들은 에너지 바 하나를 먹기 위해 서로를 죽이기도 하거든.”
“…….”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양질의 식사가 제때제때 제공되는 안전한 장소라는 게 바로 이곳이었다는 걸. 족장 새끼가 날 속인 거야.”
넌 족장에게 속은 거야. 내가 족장에게 속은 듯이. 문득 방금 전의 유나와 지금의 유나가 겹쳐졌다.
“동생을 잡고 있으면 미래를 보는 내가 절대로 도망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날 속였어. 아, 약속대로 인육 섞인 밥은 정말 제때 줬더라. 말을 들어 먹게 만들어야 하니까 뿔각 소리와 함께 규칙적으로. 밥을 줄 때 RTBD도 같이 주입시키는 것 빼곤 괜찮았을 거야.”
“그, 그건. 그건 왜 또 같이……!”
RTBD를 또 주입한다는 소리에 이예주가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유나는 별일 아니란 식으로 능숙하게 답해 주었다.
“RTBD를 주입하면 괴물화의 진행이 더 빨라진다고 말했잖아. 죽여서 괴물로 만드는 건 아무 쓸모없어. 뿔각 소리가 들리면 적을 잡아먹어야 한다는 걸 살아 있을 때 인지시키면서 괴물로 만들어야 검은 파편에 대항할 무기로 쓸 수 있거든.”
“……너무, 너무 잔인하잖아.”
정말 너무 잔인하잖아. 이예주는 어느 순간부터 제 몸이 덜덜 떠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여준이 어떤 식으로 람을 깨우고, 어떤 식으로 지구를 멸망시켰는지 보여 주었던 때와 같았다.
열둘? 열셋? 초등학교는 졸업했을까? 너무 말라서 몇 살인지 잘 가늠이 안 되었다.
이예주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벽에 기대 축 늘어져 있는 유나와 똑 닮은 아이를 쳐다보았다.
밖이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고, 투명한 유리 벽 너머에 사람이 있는데도 유나의 동생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먼저 본 뒤통수에 얼굴이 달린 남자아이와 별다를 게 없었다.
생기 없는 얼굴은 거무스름했고, 아득한 허공을 바라보는 동공에는 초점이랄 게 없었다.
죽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이미 죽어 버렸거나.
“여준은 약속을 지켰어. 약속대로 편안한 잠자리, 규칙적인 식사 제공을 해 주었지. 다만,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빼곤.”
“…….”
“이렇게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반쯤 죽어 가는 상태라 나를 못 알아봤어. 제 딴엔 괴물로 변하기 싫어서 RTBD를 주입당할 때마다 저항도 하고 밥도 안 먹었다는데. 돌아온 건 죽기 직전까지의 구타와 강제 주사뿐이었겠지.”
저 아이를 바라보는 유나는 무슨 심정일까.
무슨 심정, 무슨 생각으로 동생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나를 못 알아봐.”
저를 보지 않는 동생이 있는 쪽 유리를 그녀가 두 손가락으로 성의 없이 문질렀다.
뽀드득, 빠드득. 유리가 우는 것처럼 곡성을 내었다.
“내가 앞에 있는데 나를 못 알아봐.”
“…….”
“그거 알아? 족장 놈은 틀렸어. 날 알아보지도 못하는 이깟 놈을 볼모로 잡아 두면 내가 도망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멍청한 놈.”
뽀드득, 까드득. 여전히 유리 벽 너머에 눈을 못 박은 채 유나는 이예주 쪽에는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꼭 혼잣말을 하는 사람과도 같았다.
“그렇지만 난 얘가 여기 갇혔다는 걸 안 후로 단 한 번도 탈출 생각을 안 한 적이 없어. 나도 쓸모가 없어지면 얘처럼 이 좁아터진 케이지 안에 처박히는 건 시간문제겠지. 네가 온 이후로도 계속 기회만 엿보고 있었어. 난 죽기 싫었고, 실험체 중 하나가 되어 히카톤으로 변하기는 더더욱 싫었으니까.”
“…….”
“다행히 나한테는 탈출할 구멍이 있잖아? 다리족의 일원이라 실제로 훈련에 참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갈 수 있던 적도 여러 번 있었지. 난 빌어먹을 다리족이 검은 파편에게 몰살되든 말든 도망갈 자신이 있었어. 기회가 오면 곧바로 이 거지 같은 비행선에서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나는 이제 거의 유리를 뚫고 들어갈 듯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는 방 안의 동생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꼭 비밀 이야기라도 속삭이는 사람처럼 아주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도저히 갈 수가 없어.”
“…….”
“넌 나보고 단단해서 부럽다고 했지? 네가 말한 것처럼 난 단단해서 언제든 버릴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근데 이깟 새끼가 뭐라고, 날 알아보지도 못하는 새끼가 뭐라고 병신처럼…….”
“…….”
“두고 갈 수가 없어.”
그녀의 목소리에서 언젠가 동쪽 대륙에서 맡았던 바다 향기가 진하게 배어 나왔다.
이예주는 그 냄새를 맡고 나서야 뒤통수에 벼락이 내리치듯 통렬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아.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구나.
너무 당해서 감정이 배제된 것도 아니었다. 지켜야 하는 것이 있어서 무너질 수가 없었을 뿐이다.
그냥 이 애도 무섭고 두렵고, 누구보다도 살고 싶었던, 그저 평범한 17살짜리 어린애였던 것뿐이야.
“……못 갈 수도 있지.”
아무것도 없는 아득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제 동생같이 저를 보지 않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유나는 문득 등 뒤가 따스한 온기로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일족에 의해 차가운 혹한의 땅에 버려진 이후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사람의 온기였다.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런 걸로 울려고 그래.”
제가 아까 전 여자에게 했던 말이었다. 끝내 남자를 쏘지 못해 울먹이던 여자에게 건넸던 말이 제게로 다시 돌아왔다.
뭘 그런 걸로 우냐고 말한 주제에, 그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흐, 흐으…….”
유나는 아주 어렸을 적 이후로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낼 수 없었던 울음을 터뜨리며 드디어 지옥 같은 자신의 삶에도 구원이 찾아왔노라고 생각했다.
* * *
“다시 검은 파편에게로 되돌아가려는 거지?”
피하지도, 그렇다고 달갑게 맞이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예주가 끌어안은 대로 몸을 맡기고 있던 유나가 꽤 긴 시간 동안 내려앉았던 정적을 깨트렸다.
이예주는 두 팔로 양껏 감싸 안았던 유나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뒤로 돌았다.
물기 가득했던 흐느낌은 착각이었던 것처럼, 유나의 말간 얼굴은 어느새 낙엽처럼 바싹 말라 버석거렸다.
“길을 잘못 들었어. 탈출하려고 했으면 이쪽으로 왔으면 안 돼.”
“길? 그럼 어느 쪽으로…….”
“따라와.”
유나가 이예주를 먼저 스쳐 지나갔다.
빠져나온 환풍구가 위치한 모서리 쪽이었다.
유리 벽을 까득까득 긁으며 동생을 부르던 것이 무색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유나를 바라보던 이예주는, 그녀 대신 유리 벽에 손을 얹고 빠르게 인사했다.
“……안녕.”
곧 다시 만날 거야. 서글프게도 당장은 유나의 동생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나 힘이 없었다.
몸이라도 온전히 움직일 수 있다면 어떻게든 데리고 나갈 생각을 했겠지만 유나의 어린 남동생은 유리 밖에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도저히 데리고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금방 다시 구하러 올게. 여기서 나가면 람을 설득하거나 떼라도 써서 어떻게든.
어떻게 해서든 유나의 동생만큼은 구해 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이예주는 뒤로 돌았다.
유나를 뒤쫓아 가기 위해 뗀 발걸음이 추라도 매단 듯 무거웠다.
자신도 이럴진대 먼저 뒤돈 유나의 심정은 어떨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광활한 2층 실험실을 가로질러 프로펠러와 쇠창살 덮개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구석의 환풍구 쪽에 도착했다.
유나가 먼저 몸을 엎드려 좁은 구멍으로 기어 들어갔고 그 뒤를 이예주가 따랐다.
좁고 숨 막히는 환풍구 속을 다시 기어간 지 얼마 안 돼 그들은 이예주가 처음 2층에 내려섰던 세 갈림길의 교차점에 도착하게 되었다.
먼저 빠져나가 몸을 일으킨 유나가 먼지 때문에 캑캑거리느라 오만상을 쓰고 있는 이예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운이 좋았어. 족장은 네가 한 말을 믿어서 산 중턱으로 온 관심이 쏠려 있거든. 그렇지 않았다면 넌 산 채로 눈족 장로처럼 수조에 갇혔을 거야. 여준 몰래 탈출하려는 것도 모자라 2층 실험실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까.”
“헉, 헉…… 수조? 미친.”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유나와는 달리, 기어오는 동안 그새 체력이 고갈된 이예주가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유나의 손을 마주 잡고 일어섰다.
“저쪽은 막다른 길이야. B구역 1층으로 나가려면 이쪽으로 가야 해. 중앙 통로의 부서진 벽으로 빠져나가려 했던 거지?”
유나가 그들이 막 빠져나온 통로의 반대편에 위치한 통로와 그 두 통로의 사이의 중앙에 위치한 또 다른 통로를 잇달아 가리키며 말했다.
한 손으로 무릎을 부여잡고 헐떡이던 이예주는 단박에 제 탈출로를 꿰뚫은 그녀의 통찰력에 혀를 내둘렀다.
‘무서운 계집애.’
“빨리 쫓아와. 시간이 너무 지체됐어. 조금 있으면 족장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거야.”
지체 없이 1층으로 가는 통로로 기어가려는 듯 유나가 곧바로 몸을 숙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유나의 말에 십분 공감하던 이예주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너도 나랑 같이 밖으로 나가게?”
환풍구 통로로 머리를 들이밀던 유나가 멈칫하고 이예주를 뒤돌아봤다. 너무 당연한 질문이었던가.
아차 싶어 혀를 지그시 깨물었지만 유나에게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뭐야? 잘못 짚은 건가? 같이 나가는 게 아니었어?
이예주는 서둘러 유나에게 다가가 덥석 그녀의 팔을 잡았다.
“같이 가자.”
“…….”
“나랑 같이 여기서 나가자.”
아니, 이 미친 곳에서 반드시 나가야만 해. 유나는 자신의 팔을 꽉 쥔 여자의 손을 흘끔 내려다보았다.
거절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아귀힘이 제법 강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이예주의 얼굴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유나가 여전히 말 한 마디 없자 속이 탄 이예주는 황급히 그녀를 설득했다.
“동생 때문에 그래? 나갔다가 다시 구하러 오면 되잖아. 내가 다시 구하러 같이 와 줄게. 약속할게. 지금은 일단 나가자. 여긴 너무 위험하잖아. 이후 계획은 나간 후에 세워도…….”
“내가 너와 같이 나가면 족장은 바로 내 동생부터 죽일 거야.”
“…….”
냉정하게 단정 짓는 유나의 대답에 이예주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