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25)화 (227/319)

여준 앞에서는 내내 부정하는 모습만 보였지만 유나는 알았다. 

비행선으로 끌려온 후 여자가 내내 버림받았다는 상실감과 불안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울적한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과거에 관한 데이터를 보는 내내 검은 파편에게서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유나는 내심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버려졌는데, 어떻게 저렇게 최소한의 원망조차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자신을 버린 주체에게 다시 되돌아갈 생각을.

이예주의 눈동자에 어느 정도 총기가 돌아오는 것 같자 유나는 다시 뒤돌아 걸었다. 

도착할 곳까지 아직 다섯 블록이나 남은 상태였다.

“잡혀온 눈족 아이들은 잡일을 할 체력 좋은 잡역꾼과 힘도 신체적 조건도 월등히 떨어져 성욕 처리에 쓰일 것들, 그리고 조금이라도 눈족의 힘을 다룰 수 있어 바로 실험실로 보내지는 실험체로 분류된다. 가끔 아주 드물게 나처럼 귀화하여 군의 일원이 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래 봤자 다 똑같아. 실험체들이 대량 폐사하는 긴급 상황이 오면 당장 재료로 투입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예비 히카톤이지.”

“…….”

“실험체로 분류된 눈족 아이들은 소독실로 끌려가 RTBD가 배합된 소독약으로 소독을 마친 후 B구역에 격리된다.”

“RTBD로 소독을 해? RTBD는 검은 파편의 힘이랑 같은 파동이라고 그랬잖아. 그걸로 왜 소독을 하는데?”

이때까지 침묵하던 이예주가 무겁게 입을 뗐다.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바득바득 주절거리던 여준과는 달리 유나의 입을 통해 듣는 다리족의 실체는 오로지 필요에만 중점을 둔 것처럼 빠르고 불친절했다. 

때문에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RTBD는 검은 파편과 동일한 에너지 파동을 가졌기 때문에 검은 안개와 반응해서 죽어 가는 눈족의 괴물화를 촉진시켜 줘. 그리고 비행선으로 오자마자 1차 검열에서 소독약을 맞고 죽거나 되살아나 히카톤으로 변하는 애들은 실험 재료로써 무가치해. 그대로 뒀다간 식량만 낭비할 테니까 분류해서 다른 히카톤들의 먹이로 쓰는 거야.”

“뭐? 머, 먹이?”

이예주는 제가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아서 말까지 더듬으며 되물었다. 

그러나 유나는 동요 하나 없이 심드렁하기만 했다.

“실험체로써 가치가 있는 것들은 2차로 RTBD가 몸에 주입돼. 다리족이 마킹할 때 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 직접 투여되는 거야. 대부분의 눈족 아이들은 여기서 의식을 잃고 무기력 상태에 빠져. 검은 안개가 RTBD에 반응해서 살아 있는 인간도, 그렇다고 죽어서 괴물이 된 것도 아닌 어중간한 단계에 이르면 비로소 실험체로써의 준비가 완벽히 끝나는 거고. 네가 어제 B구역에 처음 왔을 때 보았던 아이처럼.”

“아이?” 

“어떻게 빠져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RTBD 투여 직후 실험실로 옮겨지기 전에 방에서 나온 것 같아. 의식을 잃어 가는 상태에서 탈출을 감행한 걸로 보아 힘이 꽤 강한 아이였겠지.”

귓속을 빠르게 파고드는 유나의 말을 배경 삼아 이예주는 B구역에 처음 왔을 때 발견했던 어린아이를 떠올랐다. 

기둥 뒤에 숨어 있다가 발각된 이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아이. 

당장 ‘저거’부터 치우라고 역성을 내며 그녀의 눈치를 보던 여준은 돌발 상황 때문에 많이 당황한 듯해 보였다. 

―RTBD투여 직후. 위험 수준 제로.

철수의 무전기를 통해 흘러나오던 그 말을, 이예주는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괴물이 되어야 할 아이가 갇혀 있던 곳을 빠져 나와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었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눈치 없이 아이에게 말을 거는 자신을 허겁지겁 가로막던 여준 놈의 속 타는 심정을 생각하자니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다리족 놈들은 왜 애들만 가지고 그러는 거야?”

이예주는 제가 묻다가도 제가 놀라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본 눈족들은 수조에 갇혀 있던 죽은 눈족 장로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어린애들뿐이었다. 

앞서 걷는 유나 또한 아직 성년이 되려면 한참 먼, 앳된 소녀에 불과하지 않는가. 

자고로 옛날에는 전쟁터 한가운데에서도 노약자만큼은 건들지 말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하물며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인도 아니고 어린아이들을 데려다 그런 잔인한 실험에 이용하다니. 

여준의 철면피에 치를 떠는 이예주를 흘긋 돌아보며 유나가 삐딱하게 내뱉었다.

“검은 파편이랑 같이 다녔으면서 그것도 몰라?”

“뭘?”

“검은 파편은 인간들이라면 닥치는 대로 죽이지만, 그래도 웬만해선 어리고 약한 것들은 잘 죽이지 않는 편이야. 물론 시간족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과거 데이터에 따르면 검은 파편과 마주쳤음에도 살아남은 여자아이들이 몇몇 있었어. 그 때문에 실험체로 쓰이는 건 남아보다 여아의 비중이 월등히 높았지만 여자애들은 강도 높은 실험 때문에 금방금방 죽어 버려.”

“미친 새끼들.”

이예주가 다리족에 대한 역겨움을 여과 없이 짓씹듯 내뱉었다. 

원하는 곳에 도착했는지 걸음을 늦추며 유나가 덧붙였다.

“비행선 내의 여아는 씨가 마르기 직전이라 요즘은 족장이 자제하고 있는 편이야. 대신 아까 말했던 성욕 처리에 이용되고 있지. 밥값은 해야 하니까.”

타박. 그녀의 걸음이 완전히 멈췄다. 

유나의 몇 걸음 옆에 따라 멈춰 서서 고개를 휘휘 둘러보자 멀찍이 떨어져 있는 빛무리가 보였다.

눈족 장로가 갇혀 있는 수조와 뒤통수에 얼굴이 하나 더 달린, 이제는 히카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남자아이가 갇힌 흰 방에서부터 꽤 멀리까지 떨어진 것 같았다. 

저를 따라 걸음을 멈춘 이예주를 향해 유나가 몸을 돌렸다. 

빛에서 떨어져 시야가 어두웠지만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은 말간 그 얼굴이 유독 눈에 아프게 박혔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아무런 힘이 없어 간신히 실험체 신세는 피했지만 언제 여기로 끌려와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지.”

“…….”

“이제 여기가 어떤 곳인지 좀 감이 와?”

이예주는 유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감이 오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어쩌면 자신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신과 같은 인간을 만났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기대하고 부서지고. 1000년 후로 넘어와서 지긋지긋하게 겪어 왔던 일들이 아닌가. 

다리족의 이중성은 상상 그 이상으로 어마어마했지만, 이예주에겐 실상 그동안 겪어 왔던 미친놈들이 더 추가되는 것뿐이었다. 

그저 누가 더 경악스럽고 끔찍한지의 차이였다.

다리족이 철저히 숨기고 있던 비밀을 모두 듣게 되었음에도 예상보다 무덤덤한 구원자란 여자의 반응에 유나는 지그시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올 리가 없겠지.”

이예주를 바라보는 유나의 눈이 서슬처럼 차가워졌다. 

잠깐 사라졌던 구원자에 대한 적의가 그녀의 얼굴에 다시 서렸다.

“너는 손에 굳은살이 하나도 없어. 딱 봐도 이런 미친 집단이 있다는 사실 같은 건 듣도 보도 못했겠지. 기껏해야 검은 파편에게 빌붙어서 편하게 살아남아 왔을 테니까.”

이예주는 유나의 악의 어린 말에 딱히 부정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맞는 말이기 때문에 부정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유나 또한 답을 들을 생각 따윈 전혀 없다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앞의 막혀 있는 벽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이런 곳에서 이를 악물고 살아남았다.”

지난날을 회상하는 건지 유나는 두 주먹을 아득 움켜쥐었다. 

“처음 일족에서 동생과 버림당했을 때, 나는 동생을 잡아먹으려고 했어. 형제? 우애? 한 1주일을 꼬박 꽁꽁 언 풀뿌리만 뜯어 먹다 보니까 눈에 뵈는 게 없더라. 버림당했으면 각자 제 살길 찾아 가야지 내 뒤나 쫓아다니는 쓸모없는 새끼. 형제를 잡아먹어 봤자 나한테 손가락질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오기만 하면 콱 잡아먹으려고 녀석을 기다리고 있는데, 근데 그 자식이 꽁꽁 얼어 죽은 쥐 새끼 하나를 가지고 은신처로 돌아오는 거야.”

벽 바로 앞에 우뚝 선 유나는 손을 들어 회색 시멘트를 쓰다듬었다. 

“제가 찾았으면 저나 먹을 것이지, 이딴 건 왜 가지고 왔냐고 화를 내니까 하는 대답이 참 어처구니가 없어. 누나와 같이 먹으려고 가져왔대. 병신 새끼. 그래서 실패했어. 그때 잡아먹었어야 했는데.”

정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유나가 흘긋 이예주를 곁눈질하고는 말을 이었다.

“잡아먹는 것에 실패하고 나서는 그 새끼를 버리고 얼어 죽을 것 같은 남쪽 대륙을 떠날 생각을 했어. 쓸모없는 애새끼 달고 다녀 봤자 짐만 되니까. 놈이 잠든 틈을 타서 바로 바깥으로 나왔는데 재수 없게도 눈알 사냥꾼에게 걸려 버렸어. 아, 눈알 사냥꾼은 저보다 약하고 어린 애들의 눈알을 노리는 놈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눈을 먹으면 그나마 힘이 유지되니까.”

“…….”

“그 새끼한테 잡혀서 산 채로 이쪽 눈알이 끄잡아지고 있는 도중인데.”

그녀가 돌연 이예주 쪽을 향해 안대로 가려진 왼쪽 눈을 톡톡 치며 말했다. 

아아악…… 어디선가 누가 고통에 겨워 울부짖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고 이예주는 생각했다.

“동생이 눈족 아이들을 끌고 가던 다리족을 데리고 왔어. 다리족의 근거지에 가면 100퍼센트 죽은 목숨이라는 소문이 파다해서 간신히 피해 숨어 살던 와중에, 그 다리족을 데리고 온 거야. 멍청한 새끼가.”

“…….”

“다리족에 와서도 나와 동생은 똑같이 밑바닥에 처박혔다. 힘이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었지. 다행히도 놈은 다리족 한 명에게 잘 보여서 잡심부름을 맡게 됐지만, 나는 힘도 없고 아사 직전의 비쩍 곯은 계집애라 B구역에 갇혀야 했어. 그대로 있었으면 계속해서 B구역 놈들에게 돌려지다가 성병에 걸려서 히카톤들의 먹이로 던져졌겠지.”

흐윽. 그때까지 말 한 마디 없이 침묵하던 이예주가 처음으로 어떤 반응을 보였다. 

반응이라고 말하기에 너무나도 미미했다. 

그저 급하게 숨을 몰아쉬느라 소리가 새어 나간 것뿐이었다. 

자신에게 두 눈을 고정하고 있는 구원자에게서 자신을 안쓰럽고 불쌍하게 여기는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유나는 안심하고 다음 말을 이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쉴 새 없이 겁탈당하는 것을 알게 된 바보 같은 새끼가 내가 미래를 본다고 다리족 인간에게 엄청난 거짓말을 쳐 버렸다. 과거도 볼 줄 몰라서 버려진 내가 미래 같은 걸 볼 수 있을 리가. 그렇지만 나는 더러운 버러지 신세에서 벗어날 기회를 놓칠 수 없었어. 히카톤에게 먹혀서 괴물의 일부가 되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

“대위 중 한 놈과의 독대 끝에 나는 비행선으로 끌려온 눈족 애들 중 가장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다리족으로 귀화하게 된 거야.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어. 나는 멍청하게도 다리족으로 귀화만 하면 모든 지옥이 끝날 거라 생각했지만.”

“…….”

“하지만 다리족 놈들은 내게 매일매일 미래를 보는 것을 강요했고, 나는 언제 거짓말이 들통날지 몰라 하루하루를 마음 졸이면서 살아야 했지. 그렇게 극심하게 정신적인 압박을 받아서 그런 걸까?”

유나가 이예주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려 똑똑히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나는 네가 다리족으로 오는 환영 같은 미래를 봤어.”

“…….”

“네가 이 비행선으로 오는 미래. 내가, 하. 내가 미래를 다 보더라고. 1000년에 한두 번 태어날까 말까 한 미래를 보는 눈족만 본다는, 그 미래 말이야.”

그녀는 말을 하면서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이예주가 다리족의 근거지인 비행선으로 오는, 자신이 본 미래가 전혀 믿겨지지 않는 것 같았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한참을 픽픽 웃던 유나가 불현듯 이를 까득 물고 짓씹듯 내뱉었다.

“환영이건 헛것이건 상관없었어. 씨발, 이미 거짓말은 칠 대로 쳐 버렸는데 거기에 하나 더 얹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미래에서 구원자를 보았다고 하니까 바로 족장에게 끌려갔고, 처음으로 여준의 면상 구경을 했지.”

“…….”

“놈이 내게 뭘 걸어서 미래를 확신할 수 있냐고 물어봤어. 웃기는 새끼야. 상식적으로 내가 뭘 걸 수 있겠냐? 넌 내가 뭘 걸 수 있었을 거 같아?”

제게 묻는 유나의 모습에도 이예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대답을 들으려 한 것은 유나 또한 아니었던 듯 금방 답을 토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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