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 앤 매드 (224)화 (226/319)

엄마 뒤에 숨었다가 나오는 아이처럼 이예주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렸을 때 마주 본 그 얼굴은 똑같았다. 

결코 이예주를 비웃지 않았다. 처

음 만났을 때와 같이 감정 하나 묻어나지 않은 표정 그대로, 그녀는 그저 권총의 탄창을 뺐다가 다시 끼워 넣을 뿐이었다. 

무미건조한 유나의 반응에 이예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나는 네가 부러워.”

새벽녘, 미친놈들에게 심한 짓을 당할 뻔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서라고 재촉하던 유나는 얄밉고 기분 나빴다. 

어쩌면 자신은 제 의지에 따라 상황을 조절하고 끝낼 수 있는 유나가 부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보다 어리고 더욱 극악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이성을 잃지 않는, 강하고 강단 있는 그녀가. 

“너처럼 단단했으면 좋겠어.”

버림받아도 부서지지 않게. 끈적끈적하고 질척하게 달라붙는, 하지만 절대로 보이지 않는 검은 늪에 온몸이 갉아먹히지 않게.

유나는 이예주의 헛소리 같은 말에 아무런 대꾸 없이 총을 품 안에 집어넣고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뒤통수에 얼굴 달린 남자애가 있는 흰 방 쪽으로 걸어갔다. 

유나를 따라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이예주는 문득 주위가 고요해졌음을 깨달았다. 

어느새 뿔각 소리도, 자아가 없는 듯 유리 벽에 얼굴을 처박는 남자아이도 모두 멈췄다. 

얼마나 세게 처박은 건지 유리 벽 앞에 서 있는 남자애의 얼굴 전체 위로 푸르뎅뎅한 피멍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족제비 새끼처럼 아예 머리통이 깨져 피가 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대체 환풍구는 어떻게 연 거야?”

남자아이의 모습에 정신이 팔려 있던 이예주는 한 발 늦게 유나의 물음에 반응했다. 

“……어, 어?”

“대체 환풍기 덮개는 어떻게 열고 거기로 들어간 거냐고.”

“어…….”

차마 내게는 꽉 조여진 나사도 단번에 풀 수 있는 만능열쇠가 있다고 자랑할 수는 없어서 이예주는 입을 다물었다. 

“네 객실 안의 혹시라도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는 구멍들은 네가 과거 데이터를 보는 동안 모조리 새것으로 교체되었을 텐데. 환풍구 나사는 물론이고, 객실 입구 문부터 창문, 하다못해 수챗구멍까지.”

“뭐?!”

이어 들려오는 유나의 말은 이예주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왜 새 걸로 교체해? 내가 탈출할 줄 어떻게 알고?”

그녀는 유나의 말에 너무나도 당황한 나머지 제 입으로 탈출을 했다는 것을 인정해 버렸지만 눈치채지 못했다. 

경악에 가득 찬 목소리에도 유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방 안에 갇혀 있는 남자애 앞에 우뚝 선 채 잠시 침묵하던 유나는 곧이어 더 환장할 소리를 해 대었다.

“탈출을 할 거였으면 그렇게 흔적을 흘리고 다니면 안 됐어. 화장실 안에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네 객실 안 상황은 실시간으로 족장에게 전달되고 있으니까. 네가 오랫동안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아서 네 객실에 가 보라고 명령한 것도 족장이야.”

“뭐, 뭐라고?! 이런 미친……!”

관음증이야 뭐야! 왜 남의 객실을 훔쳐보고 지랄이야? 

안전이니 뭐니 하면서 티 한 점 없는 쾌청한 얼굴로 제게 B구역으로 가길 권유하던 여준의 얼굴이 생각났다. 

오싹, 뒷목을 타고 서늘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예상치를 훨씬 초월한 다리족 족장의 집요함과 치밀함에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핏기가 사라진 낯으로 입술을 달싹이며 이예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유나의 명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는 버림받은 눈족들처럼 B구역에 완전히 갇혔어.”

“그, 그게 무슨…….”

“이 비행선을 통틀어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에 B구역에 네 객실을 배치한 거라고? 개소리하고 앉아 있네.” 

처음 듣는 유나의 험악한 어투에 이예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마침내 뒤를 돌아보는 유나의 얼굴은 지독히도 무표정했다.

“잘 들어. B구역은 감옥이야. 살인, 강간, 식인, 명령 불복종같이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저 새끼 같은 미친놈들이나, 버려진 눈족 아이들을 끌고 와 가둬 두는 곳이라고. 딱히 쓸모가 없으면 모두 다 실험 재료로 쓰일 것들이야. 이것처럼.”

유나가 앞을 가로막은 유리벽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가리켰다.

유리벽 너머에 있는 남아아이는 생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았다. 

눈이 썩은 생선 눈깔 같았다. 이미 죽은 사람처럼…….

“그런데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라는 널 왜 쓰레기들을 격리시키는 목적으로 쓰는 이 B구역에 처박아 놨을까? 정말 검은 파편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아니면…….”

“…….”

“능력을 확인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바로 2층의 연구실로 보내 버리기 편리해서?”

이예주는 묻는 말에 답할 생각도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어느 쪽이든 그녀로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미래였기에. 불현듯 방금 전 자신을 덮치려 했던 족제비의 말이 떠올랐다. 

―아니면 그 귀한 구원자를 격리자 소굴인 B구역에 처박아 둘 리 없잖아?

“여기가 뭐 하는 곳 같아? 신무기 실험하는 곳? 타임머신 개발? 타임머신, 하.”

타임머신. 타임머신이라. 반복해서 말하며 유나가 차게 조소했다. 

그녀를 만난 후 처음으로 듣는 웃음소리였지만 이예주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런 유나의 모습이 몹시 낯설게만 느껴졌다. 

“신무기 실험은 어쩌면 맞을 수도 있겠네. 잡아온 눈족 아이들을 검은 파편을 공격할 말 잘 듣는 괴물로 만드는 곳이니까.”

잠시 말을 멈춘 유나는 벽에 부착되어 있는 패드 안의 버튼 하나를 눌렀다. 

삑, 버튼 음이 들리기가 무섭게 뿔각 소리가 흰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뿌우우, 뿌우우우─ 

퍽, 쿵! 쿵! 

그때까지 멀쩡하게 서 있던 유리 너머의 남자아이가 뿔각 소리가 시작되는 동시에 유나에게 달려들 듯 머리를 또 처박기 시작했다. 

이예주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주춤 물러섰다. 

뭐야, 뭐야! 또 왜 저래!

“보여? 뿔각 소리에 반응해.”

유나가 흘깃 이예주를 돌아보다 다시 삑, 패드의 버튼을 눌렀다. 

뿔각 소리가 끊겼다. 유리를 깨부술 것처럼 제 얼굴을 박아 대던 남자아이의 격렬한 몸짓도 뚝 멈췄다.

“저, 저게…… 저게 뭐야?”

“뿔각 소리가 들리면 먹이가 있음을 인지하고 달려들어.”

“먹이?! 무슨 먹이를…….”

“인간이 아니라 히카톤이야.”

왜 먹이를 먹느냐고 물어보려던 이예주는 지체 없이 들려오는 유나의 대답에 스르르 입이 벌어졌다. 

히카톤…… 히카톤이 무엇이던가. 

끼기기긱― 끼기기긱, 칠판을 긁는 것 같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인간들을 갈기갈기 찢어 먹던 거대한 사막 괴물이었다. 

검은 안개를 가지고 있는 눈족이 악행을 저지르고 죽어 버리면 히카톤이란 무시무시한 괴생명체로 변한다는 말을 람에게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남자아이가 히카톤이라고? 수백, 수천 개의 머리와 손발을 가지고 있는 그 끔찍한 괴물?

“얘뿐만 아니라 네 뒤 수조에 있는 눈족 장로도 마찬가지지. 여기 갇혀 있는 모든 눈족 애들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야. 어쩌면 아직 인간인 아이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 곧 다들 제 이름이 뭔지도 모르게 되겠지만.”

“…….”

“뿔각 소리에 반응하는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수백 명의 눈족 아이들이 죽어 나갔어. 하지만 그런데도 이건 실패작이야.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을 못하거든. 풀어 뒀다간 움직이는 것들이라곤 다 쫓아가서 씹어 먹을 테니까. 얘는 곧 폐기 처분될 거야. 그리고 더 많은 눈족 아이들이 실험 재료로 쓰인 다음 죽어 나가겠지.”

유나는 남자아이가 갇혀 있는 곳 옆의 회색 벽들을 주먹으로 툭툭 건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녀의 손등에 닿을 때마다 벽 안이 빈 것처럼 텅, 텅 공허한 소리를 내었다. 

2층 전체를 연구실로 쓰고 있는 탓에 천장의 한쪽 모서리와 그 맞은편 모서리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부는 광대했다. 

벽 한 면 전체가 이런 것들이라니. 게다가 벽에 붙어 있는 버튼 달린 패드는 가로가 전부가 아니었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 지금에야 알았다. 

마치 컨테이너 박스가 층층이 쌓여 있는 것처럼 천장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버튼이 벽에 부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갇혀 있단 말인가. 

같은 인간이잖아. 같은 시간족이고 1000년 전에 막 깨어난 람을 찢어발기면서까지 같이 살아남은 일족들이잖아. 

그런데 왜. 뭘 위해서 이렇게…….

이예주가 고개를 바짝 쳐들고 끝도 잘 보이지 않은 천장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을 즈음이었다. 

유나가 속삭였다.

“넌 족장에게 속았어.”

“…….”

“내가 족장에게 속았듯이.”

“그게 무슨…….”

고개를 내려 유나를 바라본 이예주의 눈이 점점 커졌다. 

족장에게 속았다고? 

의미를 되묻기도 전에 유나는 등을 돌려 벽을 따라 오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 잠깐. 어디로 가는 거야?”

“히카톤은 유일하게 검은 파편이 소멸시킬 수 없는 존재야. 그것도 검은 안개를 더럽힌 눈족 인간이 죽어야만 탄생하는 괴물이고. 하지만 눈족들의 거주지 내부에 있어 봤자 딱히 악행을 저지를 만한 일이 생기지 않아. 그래서 눈족 족장과 장로들은 일정 나이 이상이 지났는데도 과거나 미래를 보는 능력에 두각을 드러내지 않고, 쓸모없이 밥만 축내는 아이들을 내쫓기로 결정했다.”

“…….” 

“쫓겨난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거나 심지어 같이 쫓겨난 제 형제를 잡아먹기까지 하면서 검은 안개를 더럽히지. 어쩔 수 없어. 극심한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놈은 거의 없으니까.”

유나는 물 흐르듯 찬찬히 말해 주었지만 그녀의 보폭을 따라잡으랴, 그 말을 이해하랴, 이예주는 여간 바쁘지 않을 수 없었다. 

람이 히카톤이라는 사막 괴물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유나의 말은 그러니까, 그런 람에게 대처하기 위한 방법으로 버림받은 눈족 아이들을 강제로 끌고 와 괴물로 만든다는 소리지? 

검은 파편에게 대항할 만한 생체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유나의 말을 아주 간신히 알아들은 이예주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B구역 연구실이 온전히 히카톤 실험으로 쓰이는 곳이라면 대체 타임머신은 어디서 개발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럼 타임머신은?”

“타임머신?”

유나의 뒤를 헐레벌떡 따라붙으며 이예주가 다급히 물었다. 

그러자 유나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이 고철 덩어리 비행선도 간신히 고치고 고쳐서 사용하는 마당에 여기에 그런 최첨단 기술력이 있을 리 없잖아? 있다고 쳐도 그걸 구현할 수 있는 기술자도, 재료도 여기엔 아무것도 없어. 게다가 족장은 검은 파편에 관한 것이 아닌 이상 쓸데없는 소모는 절대로 안 하는 놈이야.”

“그, 그……! 그러면, 그러면 그 새끼는 나한테 왜 그딴 구라를 깐 건데? 하, 고작 나한테서 검은 파편에 관한 정보를 뜯어내려고?!” 

“그러니까 너도 속았다고 했잖아.”

유나의 냉정한 대꾸에 이예주는 순간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타임머신에 관한 이야기만은 철석같이 믿었다. 멍청할 만큼.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미래로 와서 처음 본 현대 문명인데.

이예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신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속에서 다시금 천불이 일렁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쯤 미친 채로 극한기의 남쪽 대륙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정기적으로 다리족들이 수거해 가. 비행선까지 끌고 온 눈족 아이들은 1차적으로 힘을 확인하고 용도를 구분한 다음 B구역에 격리시키는데…….”

다시 벽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가려던 유나는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가던 걸음을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정처 없이 서 있는 이예주가 보였다. 

유나는 걸어온 길을 빠르게 되돌아갔다.

“계속 들어.”

단호한 목소리에 이예주가 눈을 들었다.

“너 혼자서는 절대로 알아낼 수 없는 다리족의 진짜 정체니까. 검은 파편에게 돌아가더라도 의심받지 않을 만한 정보 하나쯤은 너도 알고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너와 검은 파편이 무슨 관계인지 몰라. 그렇지만 쓸모가 없으면 버려지거나 죽임당하는 건 검은 파편이라고 별다를 것 없겠지.”

여자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유나는 제 예상이 적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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